자칭타칭 일기 쓰다 된 작가이다.

성덕, 성공한 덕질이라고도 한다.

글쓰기의 시작은 부조리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맨몸으로 겨울바람을 맞듯 마주한 부조리한 어른들의 세계였다.

일기 쓰다 작가가 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일기 쓰다 치유가 되는 일이었다.

썼다. 부조리를 느낄 때마다 썼다.

목적 없이 썼다.

쓰지 않으면 달리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 썼다.

달리 할 바가 없어서 선택한 그 일이 바로 고통을 치유하는 명약이 되었다.


다시 시작한 치유 글쓰기 모임이 4회기, 벌써 반이 지나간다. 

매력적인 여성을 발견했다.

상상 불가의 폭력 속에서 자란 이가 어쩌면 저렇게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마어마한 폭력 속에서 자기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는 저 여인은!

한 회기 한 회기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는 썼다. 

자기 고통을, 이름 붙여지지 않는 고통을 썼다. 

세상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 쓰는 나를 보는 내가 들어준다는 식으로 썼을 것이다.

생존의 필살기는 '쓰기'였다.


아, 나도 그랬던 거구나!


공선옥 작가도 그랬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단다. 

그것도 서러운데 선생이 놀리는 아이들 편을 들며 차별하니 가난하고 무력한 아이는 무엇에 기대랴.

기댈 바 없는 아이는 결심했다

너희들 다 글로 써버릴 거야!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여성 중 하나인 록산 게이도 그랬다.


시간이 생기기만 하면 글을 썼다. 아주 많이 썼다. 어린 소녀들이 잔인한 소년과 남자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어둡고 폭력적인 이야기들을 썼다. 내게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천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썼다. 큰 소리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목소리는 잃었지만 언어는 남아 있었다.

                                                                                                                                                  - 헝거록산 게이

젊은 시절에 그랬었다.

한낮의 고통이 클수록 밤을 기다리는 위안이 강렬했다.

집에 가서 쓸 수 있어. 집에 가서 쓰면 돼.

그리고 집에 가 식구들이 잠든 밤에 썼다. 쓰고 또 썼었다. 


뉴스앤조이에 연재하던 <신앙 사춘기>를 책으로 엮기 위해 글을 몇 편 더 쓰고 있다.

<신앙 사춘기> 연재는 그냥 연재글이 아니었다.

10여 년의 여정을 그대로 재경험 하는 일이었다. 

오래 농익은 분노에 성찰 한 스푼이 들어가여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비로소 써지곤 했다.

분노, 억울함이 어떤 어떤 어떤 어떤 과정을 거쳐 연민이 되었을 때 글이 되었다.

어떤 어떤 어떤 어떤 과정의 지난함을 당신은 모른다.

억울함으로 금이 가고 분노로 타들어간 가슴을 당신은 모른다.

이젠 그 가슴을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다.

내가 쓰고 또 쓰고 연재까지 하면서 충분히 알아줬으니.

<신앙 사춘기> 연재로 생각보다 더 많은 마음의 짐이 사라진 것 같다. 

지난 10여 년 글쓰는 힘은 '복수'였는지 모른다. 복수는 나의 힘. 

이제 더는 복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충분히 했다 아이가! 

이제 더는 복수를 위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작정한다고 될 일은 아니구나.


마지막 글을 남기고 있다.

저격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활활 타버린 후 연민의 재가 남을 때,

그때까지 기다렸다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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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3월의 마지막 주일은 봄이다!

개나리가 피었다.

봄이구나! 가볍게 옷을 입고 나갔더니 찬바람이 품을 파고든다.

봄이지만 춥구나!

 


일주일 전인 3월 24일, 3월 셋째 주일에는 확신이 없었다.

봄인가? 아닌가?

예배를 마치고 나와 채윤이가

"봄인데, 날씨가 이런데 집으로 그냥 못 가. 엄마, 어디든 가자."

중앙공원으로 갔다. 

봄이라는 느낌 없이 집을 나왔던 건데, 봄이었고 따뜻했다!

 ​


중앙공원에 온 봄은 미미하고 작았다.

들여다 봐야 보이는 봄이었다.

노란 산수유만이 파란 하늘 배경 삼아 애쓰지 않아도 보이는 봄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야. 제비꽃. 어렸을 적엔 '앉은뱅이꽃'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그런 말을 안 써."

"엄만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게 보여?"

"노안이지만 좋아하는 건 다 보여. 엄마가 이 꽃을 작아서 좋아하는 지도 몰라."

"엄마, 그러고 보면 엄마 하는 일은 다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네. 

장애인, 그중에도 장애 아이들, 성폭력 생존자들, 여자들......."


채윤이 말에 뭉클, 위로를 받았다.

작고 약하고 낮은 사람들과 연결된 일을 한다니!

과분한 영광이다.


3월 셋째 주일, 들여다 보며 찾은 봄의 흔적과 따스함의 여운이 길다.

3월 마지막 주일, 멀리서도 보이는 개나리가 한창이더니 심지어 눈발이 날렸다.

4월 첫째 주일에는 또 새로운 얼굴의 봄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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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시죠?"

라는 인사 참 듣기 거북한데

안녕하세요?

라는 말 대신 듣는 인사가 되었다.

"바쁘다기보다는....... 미주알고주알 메추리알 타조알......."

설명하고 싶은데 다들 바빠서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

늘 조금 억울한 느낌으로

"아, 네...... 그렇죠. 뭐"

라고 얼버무릴 뿐.


바쁘냐고 묻는 말에는 여러 뜻이 있지만, 

우리 한 번 놀아야지, 

로 들리는 경우가 많다.

직장 다니는 사람이, 월화수목금 출근하는 사람이 아무 시간이나 약속 잡을 수 없는 정도.

그 정도로만 바쁘다.

그 정도가 바쁜 거라면, 내가 바쁜 게 맞다.


여유가 없다, 빡빡하다,

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강의, 음악치료, 상담,

이 없는 시간엔 읽어야 할 것, 써야 할 것들이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있다.

 

바쁘진 않지만 여유는 없는 시간에서 100시간을 뺐다.

1, 2월 내내 일주일에 이틀, 10시부터 5시까지 앉아 강의를 들었다.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이후에는 없었던 스케쥴이었고.

강의에서 듣는 사례를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강사나 같이 듣는 사람들의 태도가 견딜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30년 전 고민했던 여성주의 담론을 새로운 얘기처럼 들어야 하는 것도 고역.


성폭력 전문상담원 자격증이 꼭 필요하냐고들 묻는다.

꼭 필요하진 않다.

그래도 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첫날부터 후회했다.

내가 왜? 미쳤지! 이걸 2월 말까지? 죽었다!

결국 100시간 잘 버텨냈다. 

누가 등떠밀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기에 버틸 수 있었다.


목회자·성폭력·생존자·글쓰기·자조모임이 곧 다시 시작이다.

100시간의 인내는 이 모임을 위한 씨 뿌림이다.

100시간 공들인 나만의 목욕재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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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말, 특히 격려의 말에 관심이 많은 터라. 아니, 관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다. 말을 들어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러하듯 나를 보는 그들도 그러하겠기에 내 말의 돌아봄에 생의 에너지 절반은 쓰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게 말은 또한 글이다. 말이 부드럽고 달달하다 하여 속까지 그러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의 없고 날카로운 말이 성숙한 인격와 날카로운 지성의 지표인 것도 아니지만. 


정색하고 농담하고, 진담은 가볍게 해버리는 습관이 있다. 이 분열적인 말로 여러 사람 헛갈리게 한다는 것을 인식해가는 중이다. 농담하다 정색하고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나는 별의별 선을 다 넘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어떤 선을 넘어오면 정색하고 굳어버리는 못된 습관도 있다. 속으로면 정색하고 겉은 말랑하게 응대하곤 이불 뒤집어 쓰고 뒹구는 경우도 있다. 말, 참으로 어렵다.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중 하나라 하고 유일하게 완독한 <어스시 전집>을 쓴 어슐러 르 륀이 작년에 88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유작 에세이집을 읽고 있다. 80이 넘어 블로그에 쓴 글들이란다. 나이 80이 되어서도 블로그 할 수 있을까. 이렇듯 날카롭고 따스하여 관조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얄팍한 긍정의 말로 두려움을 가장하지 않고, 문학적 미사려구로 자아팽창을 포장하지 않으며, 무례한 말로 진실을 가장하지 않는. 안팎이 투명한, 정련된 언어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그 책의 일부이다. 입에 붙은 상투적 격려와 긍정적인 말을 돌아보게 한다. 긍정적인 것만 보고 싶어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누군가를 돕거나 성장시킬 수 없다. 말하는 이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피상적인 말잔치일 뿐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게 하는 진실한 말, 그러나 사랑에 기반 한 따뜻한 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의 수련’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년의 실체를 전적으로 나쁘게만 보고 노화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노인들을 대하고 싶은 나머지 노인들의 현실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선의를 가득 담아서 내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 선생님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
솔직히 말해 팔십사 년을 사는 일이 그저 생각에 달렸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저희 할머니는 혼자 살면서 아흔아홉 연세에도 아직 차 운전을 하신답니다!”
할머니 만세다. 유전자를 잘 타고난 분이다. 아주 귀감이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는 본보기로는 틀렸다.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의 상태다.
“오, 선생님은 불구가 아닙니다! 스스로 불구라고 생각하는 만큼 불구가 되는 법이지요! 제 사촌은 척추가 부러졌었는데 금방 이겨내고 지금은 마라톤 경기에 나가려고 훈련을 받아요!”

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두려움은 현명하기 어렵고 결코 친절할 수 없다. 대체 누굴 위한 격려인가? 진심으로 노인들을 위해서 하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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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사춘기.

서른 여덟 쯤 시작한 그 알 수 없는, 낯선 시간을 한 마디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온전히 내가 창작한 용어는 아니지만 뉴스앤조이 연재글로 많은 공감을 얻었으니

정서적, 경험적 저작권은 내게 있는 것으로 하자.


신앙 사춘기 시간 동안 나름대로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다.

설교, 예배, 기도. 이런 것들이 죄 의미 없게 느껴져 신앙 사춘기였지만

돌아보면 기특하게도 다른 언어를 찾아 말씀과 기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었다.

언어를 놓아 버리는 기도, 향심기도를 했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보았던 개역개정이 아니라 메시지 성경을 읽었다.

메시지 성경으로 읽는 예수님, 바울의 편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내게로 직접 오는 계시와도 같았다.

당시 교회 수요예배에선 로마서 강해를 했었는데 같은 본문 정반대의 메시지였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는 색색의 밑줄, 눈물 자국으로 아주 볼만 하다.


메시지 성경을 끊고 개역개정으로 돌아왔다.

교회 성경 일독 독려에 힘입어 새 마음을 가져본다.

개역개정으로 읽는 성경. 다시 개역개정인데, 맨 처음 읽는 개역개정 같다.

좋다.

아침 저녁 독서 전에 먼저 마음이 끌리는 책이 성경이다.


큰 글자 성경을 주문했다.

받아보니 생각보다 더 크고, 더 두껍다. 

우리 엄마의 성경책 같다, 라고 생각되는 순간

내 인생 마지막 성경책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읽고 또 읽으며 낡아지는 이 책과 함께 몸도 더욱 낡아질 텐데. 우리 엄마처럼.

눈에 맞는 돋보기가 없어 더는 글을 읽을 수 없을 때 마지막까지 붙드는 책이 이 책이 되었으면.

이젠 읽지도 못하며 폼으로 들고 다니는 엄마의 낡고 낡은 성경과 오버랩 된다.


기나긴 사춘기 끝(일까?)에 다시 붙든 개역개정 성경이 

'아장아장 성경'이니 '우리 아기 첫 성경' 같은 생애 첫 성경 같기도 하고,

인생 마지막 성경책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묘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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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차


"엄마 요즘도 커피 열심히 하시니?"

"어, 차로 갈아타신 것 같은데요. 차를 많이 드세요."

라고 채윤이가 어느 바리스타 님을 만나 얘기 나누었다는데.

사실이다.

낮 하루 지내며 몸과 마음에 쌓인 미세먼지를 저녁마다 차로 씻어내고 있다.

남편은 설교 준비로, 아이들은 주일학교 캠프로(아, 하나는 학생, 하나는 선생님으로 갔다!)

가족을 모두 교회에 바친 토요일엔 심지어 혼차다.


# 혼공


"그만큼 배웠으면 많이 배웠지, 여자가 뭘 더 배운다고!"

엄마의 목소리가 마음의 귀에 늘 쟁쟁함에도, 쟁쟁하기 때문에 참으로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더는 배우러 다닐 일이 없겠지 싶었는데,

가장 시간이 없는 때, 100시간 짜리로 뭔가 또 배우러 다닌다.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인데, 가 앉아 있지면 조금 한심하다.

연구소 열어놓고 아직 개소식 계속식도 해야 하고,

써야 할, 쓰고 싶은 글도 쌓여 있고,

만나자 하시는 분도 많은데 일주일 이틀을 오롯이 바쳐야 한다니.

대학 1학년 때 고민했던 페미니즘 담론을 듣고 있을 때는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군가' 싶다.

하도 한심해서 가방 싸들고 나오기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제일 한심하고,

혼공의 나날이 외롭기만 하다.


# 혼감(동)


세 번에 한 번은 좋은 강사가 온다.

열 번에 한 번은 어마어마한게 좋은 강사가 온다.

어제 강의는 근래 몇 년 사이 들었던 설교와 강의 통틀어 최고의 배움이었다.

내가 미쳤지, 이걸 왜 한다고, 이러고 앉아 시간을 버리고!

했던 속말들이 쏙 들어갔다.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것으로 100시간 낭비가 아깝지 않군!

책으로 만났던 '비온뒤무지개재단'의 한채윤 선생의 강의였다.

집에 와 그의 글을 다시 읽었는데, 전에 봤던 그 글이 아니다. 

삶을 듣고 얼굴을 마주하고 다시 글을 읽으니 한 글자 한 글자 살아 움직이는 글이었다.


# 혼독


강의 들으며 언급되는 사람에 꽂히면 바로 알라딘에 검색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덕분에 매일매일 택배지만.

덕분에 매일 저녁이 설렌다.

오늘처럼 오롯이 혼자인 밤이라면 더욱.

소설로 만났던 캐릴 길리건을 성폭 강의 교재에서 만나고,

바로 검색했더니 표지부터 끌리는 신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초록이 얼마나 예쁘고 마음에 드는지.


이 밤아 끝나지 마라.

혼독의 밤아, 끝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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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쉰의 마지막 전날에 돋보기를 했다.

드디어 돋보기를 끼게 되었다.

이제야 어른이 된 느낌이다.


돋보기를 맞추는데 안경사께서는 '노안이 벌써 왔을 텐데 꽤 오래 버티셨네요'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게 안 보이는 건 보지 말라는 뜻이지요.' 라고 했다.

몸이 보내는 신호가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구나, 가까이 있는 것은 그만 보라는 뜻으로 노안이 왔구나.

멀리 보라는 뜻이구나.

고개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생의 종점을 보고,

생의 종점 너머 또 다른 세계를 응시하라는 뜻이구나. 

인정!


하지만 가슴이 턱 막히기도 한다.

마음 먹고 돋보기 하러 간 이유는 책을 보기 위함인데,

책 없는 삶, 책 읽을 수 없는 노년은 상상할 수 없는데.


아무튼 깨끗하게 커진 글자들로 독서의 기쁨이 두 배가 되는 날이다.

2018년 마지막 날은 종일 집에 박혀 책을 보다 차를 마시다,

눈이 피로하면 잠시 누워 졸며 보냈다.


2019년 가방 안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지갑, 휴대폰, 차키와 함께 돋보기도!

쉰 하나.

돋보기를 끼고, 백발을 허용해도 좋을 나이가 되어간다.

책을 가까이 두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멀리 보라는 뜻으로 온 노안, 원시임을 잊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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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이 돌아가셨고, 장례식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혼란 그 자체이다.

짧았던 우리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내 안에서는 더 크고,

훨씬 더 긴 세월, 서로 알 수 없는 시간 속의 서로는 잘 모른다.


무슨 직함을 가지고 있는지, 아이는 어느 대학을 다니고 있는지,

고3 아이의 엄마는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속닥속닥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면 

괴리가 함께 흘러들어와 자리 잡고 앉는다. 

내 마음 속 고운 추억으로 간직된 착하고 좋은 사촌들.

어쩐지 지금은 낯설기만 한 것은

그들이 나에게 먼 것인지,

내가 그들로부터 이탈해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슬픔에 겨워 우시던 외숙모가 곁에 있던 어느 분에게 나를 소개하며 말씀하셨다.

"얘가 정목사님 딸이에요. 얘가 아주 유명해서, 얘가 웃음치료데, 아주 유명해서 테레비에도 나오고,

미국도 갔다 오고, 책도 쓰고 아주 유명해요."


'웃음치료사'의 힘이 막강하다.

심각했던 나를 웃게 했다. 치료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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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의 시바타 할머니,

<앙 : 단팥 인생 이야기> 토쿠에 할머니

키키 키린이 영화에서처럼 정말로 돌아가셨다.


<어느 가족>에서 가장 마음 시린 장면이 가족들의 해변 점프샷이었고

그걸 지켜보는 시바타의 시선이었다.

시바타가 마음으로 말했다. 

"다들 고마웠어"

영화 속 시바타 생의 마지막 대사였다.


제레미 테일러 선생님이 올해 1월 3일에 돌아가셨다.

융 심리학을 바탕으로, 융 심리학을 넘어 

꿈의 영성적 의미을 한층 실제적으로 밝혀내고, '온전함'의 깔대기로 꿈 언어를 해석하고,

안전하고 강력한 치유 그룹인 '집단 꿈 투사(projection)' 안내하신 분이다.


그분의 제자 고혜경 선생이 밝혔다고 하는 얘긴데.

평소 강의 시간에 자주 말했단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기도는 'Thank you!' 하나로 충분하다고.

작년 12월 31일 늦은 밤, 스승인 제레미 테일러 선생님께 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평소답지 않은 짧은 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Thank you!   

J.


J는 물론 제레미 테일러이고, 메일 발신 3일 후 돌아가셨다.


실제 암환자로 암투병을 연기하고,

온몸에 암이 퍼진 채로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다 떠난 키키 키린의 마지막 인사도


Thank you!


생의 마지막 순간 "고마웠어" 인사할 수 있는 삶.

억울해, 아쉬워, 원통해, 미안해.........가 아니라

고맙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오늘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적어도 이 말을 차곡차곡 쌓는 삶은 아닐 것이다.

 

이것들이 고마운 줄을 몰라. 내가 해준 게 얼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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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있는 공간만 찾아 다니며 견딘 여름이 갔다.

버스라도 타려고 맨몸으로 걸으려면 극기훈련 하는 심정이었지.

바로 저 길이 그 극기훈련 코스였다.

맨몸으로 걸어도 겁나지 않는 길,

정도가 아니라 높고 푸른 하늘과 딱 좋은 바람이라니.


맑은 날 하루하루가 아까운 시절이다.

학교 다녀온 현승이가 노트북 앞에 앉는 나를 보면 혀를 끌끌 찬다.

엄마, 오늘 한 번도 밖에 안 나갔어?

밖에 날씨 엄청 좋아.




(남자 였음) 수염 덥수룩 했을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았다

벌떡 일어나 아까운 가을을 붙들러 나간다.

책도 안 들고 휴대폰 케이스에 든 카드 하나 덜렁 들고 나간다.

한 달 전만 해도 지옥 훈련장이었던 길을 발길 닫는대로 걷고,

걷다 반찬 가게 앞에서 물김치 한 봉지 하고,

몇 걸음 걷다 옥수수 찌는 냄새가 좋아 한 봉지 산다. 


검은 봉지 손에 들고 덜렁덜렁 걷는데 까치 녀석 옆에서 알짱거린다. 

지금 여기를 살며 자유로운 친구들은 역시 새, 

새는 우리들의 선생님이지.




공원 앞 어린이집 앞에 서서 목을 빼고 한참 기웃거린다.

예쁜 아기 지효네 교실이 저긴데.

날씨 좋은데 아가들 산책 안 나오나?

머리 큰 형님 반 친구들만 공원 저쪽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미세먼지 없는 공간이 아이들 소리를 빨리 흡수해 버린다.


공원 계단 콘크리트 틈의 초록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꾸미지 않은 자신으로 족한 친구는 역시 들풀이지.

우리의 참된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나리꽃을 보라!




공원 벤치에 앉아 옥수수 두 개를 뚝딱 다 먹었다.

 저 아래 브런치 카페 디쉬가 부럽지 않구만.

음뇽뇽뇽, 맛있다.




집 앞 골목에 서서 하늘 올려다 보다 꽃을 든 빌라를 본다.

그 위에 이불 빨래 머리에 쓰고. 

아무리 셔터를 눌러도 각이 나오질 않아

얼른 집에 올라와 주방 창문에 매달려 허리 꺾고 찍어 얻은 사진.

빨래 널고 걷는 행복, 돗자리 깔고 김밥 먹고, 커피 마시고, 누웠던 

합정동 집 옥상이 떠오른다.

마음이 쎄하다.




사 온 물김치를 통에 옮겨 담는데 

눈대중으로 가늠이 되질 않는다.

이 통? 저 통? 잠시 고민하다 뽑은 통에 담았는데

일부러 맞춘 것처럼 딱 들어간다. 


딱 알맞은 오늘, 지금 이 순간이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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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나도 예수님 따라갈 테야


ktx 광주송정역에서 광주역 가는 무궁화호 안이다.

어릴 적에 서울 갈 때 타던 장항선 열차를 탄 것 같다. 

흔들흔들 앉아 옛 기억 더듬다 소환되어 나온 노래. 

서너 살 때부터 불렀던 내 18번이고 인생 첫 노래다. 

장항선 열차 안 의자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 엄마 아버지가, 

또 다른 좌석의 어른들이 연양갱을 사주셨다. 


건너편 빈 좌석에 네 살 짜리 내가 어른거린다. 

먹어도 먹어도 맛있던 연양갱도,엄마도 아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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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 낮은 책꽂이 위의 초록이들.

폭염 속 동사(凍死) 위기를 넘긴 기특한 화초들이다.

밤낮 쉬지 않고 돌아가는 에어컨 바로 옆에 줄을 서 있던 친구들.

스치로폼 독자리로 냉기 차단벽을 만들고 애를 썼더니 살아 남을 놈들은 살아 남았다.

장하고 기특하다, 내 새끼들.

아침마다 들여다보고 매만져주었다.


가끔 슬쩍 건드렸는데 툭 떨어지는 잎이 있다.

멀쩡하게 파릇한데도 가지에 붙들고 있던 힘이 다 빠졌단 뜻이다.

아, 이 녀석 아프다는 뜻이다.

누렇거나 메마른 기색 없는데도 툭 떨어지는 잎이 있다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가장 아끼는 두 녀석이 그렇다.


좁디 좁아서 가만히 서 있어도 짜증이 밀려오는 주방이지만

주방 탁자 명당 자리로 옮겨 에어컨과 분리시켜 놓았다.

적당한 볕이 있고, 더 자주 눈을 맞출 수가 있다.

어,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냥 지나쳤는데 얘가 뚝 떨어지네.

이제 식구들도 알아차린다.


언뜻 보기에 아직 멀쩡하지만

결국 하나 둘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나름대로 붙어 있으려 애를 써봤을 텐데, 저도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이겠지.


건강한 화초들을 손으로 쓱 훑어본다.

끄떡 없고 쨍쨍하다.

아픈 화초도 그리 해보고 싶지만, 그리 했는데 다들 끄떡 없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싶지만

손을 갖다 대지 못한다.

우수수 죄 떨어져 버릴까하여.


속이 상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붙들 수 없다.

제가 붙들고 있지 못하는데 내가 어찌 도와줄 것이 없다.

무력함을 느끼고,

안도감을 느낀다.


애써도 안 되는 것인데, 

내가 하면 될 줄로 알고 나를 볶고 남을 볶았던 때가 있었다.

고장난 의지에 뒤틀린 자기확신을 곁들여 내가 다 하고, 다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건장하던 녀석이 툭 떨어지는 것 하나도 돕지 못하면서 말이다. 

애초 내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생각하니 안도감이, 심지어 자유로움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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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련회 시즌이 끝났다. 지난 주 금요일부터 어제 토요일까지 달리고 달렸다. 지난 주 금요일엔 우리 교회 수련회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지리 감각이 통 없는 통에 무리하게 달리며 시즌을 시작했다. 강의 요청이 왔는데 우리 수련회가 겹쳐 거절 했다. 듣고보니 수련회 장소 바로 옆인 것 같아 다시 수락을 했다. 강화도와 영흥도. 서해안이라고 다 바로 옆이 아닌데. 새벽 6시 일어나 강화도에서 강의하고 2시간 운전하여 영흥도 수련회장에 갔다. 힐링캠프라는 이름의 널널한 수련회라 중간중간 방에 처박혀 연재 원고를 썼다. 둘째 날 밤에는 정말 오랜만에 음악치료사 페르소나를 발휘, 노래하고 춤추고 노래 만드는 프로그램을 인도했다. (아직도) 낯설고 많이 부끄럽지만 미친 척하고 분위기 띄우는 거 잘한다. 다음 날 눈을 뜨니 한쪽 눈 혈관이 터져 핏빛이 되었다. 아, 일주일 내내 있을 각종 수련회 강의는 좀비 눈알을 하고 다녀야겠구나. 막막하게 맞은 일주일이었는데 원고도 강의도 미션 클리어 하고 새 아침을 맞았다. 어제 오후부터 자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한 열두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새로운 몸을 입은 아침이다.


+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다니 돈을 얼마나 많이 벌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청년부 강의 많이 다녀서 돈 벌었다는 사람 못 봤으니 앞으로도 걱정 안 하셔도 된다. 열심히 달린 후에는 푹 자고, 알아서 챙겨 먹기도 하니 몸도 괜찮다. 볼이 폭 패이고 말라 있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자꾸 각인 시켜주지 않으셔도 된다. 이미 충분히 부끄러운 말라 주름진 얼굴이다. 장기하가 부른다. 별일 없이 산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
사실을 말하자면 강의 마치고 운전하고 돌아오는 길, 피곤이 턱까지 내려와 졸음운전 걱정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뭔가 강의 내용이 미흡했던 것 같아 침대에 이르기도 전에 이불킥을 하곤 하지만 말이다. 이른 아침 SRT 타러 가는 길, 식구들 잠든 현관문을 닫고 나설 때 이유 없이 왈칵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원고 써 내놓고 악플까지도 아닌, 부정적인 단어 한 두 마디에 심장이 뛰기도 하지만 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장보러 마트에 들르면서 누군가 된장찌개 끓여 놓고 날 기다주면 좋겠다 싶어, 문득 엄마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다음 원고 생각으로 꽉 찬 머리 속에 이 말 저 말 뒤섞여 돌아버릴 지경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
지난 주 가장 멀리 다녀 온 강의가 광주, 수련회 장소는 정확히 전라도 화순이었다. 광주송정역에 내려서 맞으러 나온 청년의 차를 타고 화순으로 가는 중 '주남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임철우의 소설 <봄날>이나 광주민주화항쟁 관련 자료에서 본, 너무나 익숙하지만 낯선 주남마을이다. 그리고 보이는 이정표는 보성, 화순, 벌교. 그러니까 민주화항쟁 당시 게엄군이 주둔하며 길을 막았다는 바로 그 길인 것이다. 연애 강의 하러 가는 길인데 내 마음은 온통 80년 광주에 가 있었다. 묻고 대답하는 강의 중 청년들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온 '충정로' 라는 말에도 멈칫했다. 일주일, 강의 다니는 외적인 삶보다 더 많은 일들이 내 마음에선 일어난다. 수련회서 만나는 청년부 목회자들 한 분 한 분이 내겐 의미이다. 황폐해진 청년부를 맡은 1년차 목사님, 아주 잘 만들어 놓은 청년부를 떠날 수도 있겠다는 목사님, 으쌰으쌰 살아 꿈틀거리는 공동체에서 신뢰받고 행복한 목사님, 작은 청년부를 맡아 온몸으로 뛰는 목사님. 강의 일주일이 아니라 만남 일주일이다.


+
일주일의 마지막 강의. 토요일에 덕산으로 운전하며 가는 중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의 찬송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채윤이를 키우면서 자장가로 그렇게 불러주셨던 찬송이 생각나 혼자 불러봤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주시니 내게 부족한 전혀 없어라' 찬송 가사가 엄마처럼 따스해서 또 왈칵 눈물. 엄마의 찬송 소리를 많이 녹음해 두어야지 싶었다. 강의 마치고 홀가분하게 돌아오는 길,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찬송 불러봐. 못 부른다. 잠시 침묵 후 '예수 소유 하야서 나는 부자 되고 예수 한 분 잃어서 나는 그지 되네' 신청곡 아닌 다른 곳을 혼자 부른다. '엄마, 그거 말고 주는 나르을 기르시는 목짜아요 이거 불러봐' 내가 선창을 해도 못 부른다. '나 다 잊어버렸어. 끊어'란다. 전화 끊고 울며 운전했다.


+
별일 없는 일주일 보내고, 새로운 날들을 맞는다. 일상이 흘러간다. 별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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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을 봤다 하고, 

아는 것을 안다 하며 

관계를 맺으면 괜한 에너지 소모가 덜할 것 같은데.


이 놈의 SNS 세상은 

보고도 안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은 기본이고.

몰래 보고, 못 본 척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게임판 같기도 하고.

뭘 그렇게 사람이 베베 꼬여 있느냐, 쿨하게 보고 넘기고 하면 되지,

라고 말하지 마시지 말고 하고 싶으면 하시라.

나는 태생이 쿨하지 못한데다 마음 바닥이 좁은 편이다.


나의 페북 사용법은 '그것은 알기 싫다'이다.

일일이 축하 하거나, 찬사를 보내거나, 아픔에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개인사를 알고만 있기가 싫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 없이,

그와 얼굴을 대면하고 물을 수 없는 바를 은밀히 캐기 위해 

훔쳐보고는 불행한 SNS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

(면서도, 페북에서 유명한 싸움 구경은 꼭꼭 찾아본다. 큐큐)


친구 요청이 와 수락하고 친구가 된 후에는

진심 존중의 마음을 담아 팔로우를 취소를 누른다.

누군지 모르는 분의 일상을 눈팅 눈팅 눈팅, 하다

혼자 좋고 싫음의 투사 드라마나 쓰며 논평하는 게 예의가 아닌 듯 하여.


블로그의 보이지 않는 독자를 사랑한다.

일등 칸에는 본 것을 봤다 하고 아는 것을 안다 하는 분을 모신다.

댓글을 남기거나 적극적인 표현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프에서 나누는 한 마디 대화, 눈짓으로도 알 수 있다.


지난 주에 갔던 청년부 수련회의 포스터이다.

처음 뵙는 목사님, 청년부였다.

본 것을 봤다 하고, 아는 것을 안다 하는 디테일이 살아 있다.

숨통이 트인다.


이틀 만나고 온 담당 목사님과 청년부는 살아 있는 만남으로 마음에 심겨진다.

강사를 치켜 세우는 포스터에 으쓱해져서 이러는 건 아니다.

나야 이제 어쩔 수 없이 책으로 블로그로 내 패를 다 보여준, 

상대가 어디까지 봤는지 모른 체 홀랑홀랑 벗어 제끼는 게 주특기인,

그걸 밑천으로 글쓰는 사람이다.

숨어 훔쳐 보는 사람이 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저 여기까지 봤어요' 하며 다가오는 만남은 얼마나 고마운가.


강사로 산다는 건, 딱 한 번 보고 말 사람을 끊임없이 만나는 일인데.

딱 한 번 만남을 진정한 만남으로 간직하게 되는 일이 있다.

아는 만큼, 본 만큼 이해하고 표현하는 투명함이 주는 선물일 터.

헛헛함과 슬픈 헤아림만 남기는 에너지 소진의 만남은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고 싶으나,

살아간다는 것은 이것을 견디는 것일지도. 

100 번의 가면 쓴 만남에 단 한 번의 생기 있는 만남,

홍수 속의 목마름에 생수 한 병 같은 만남이 있으니 살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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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에 찬사를 받을 때 좋아지는 기분에 연연하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으로 살아갈 힘을 얻지만,

나를 자라게 하는 늘 그 반대 지점에 있다.


남편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문득 나간 말이다.


나는 결백하다고 주장할 뜻을 가지면 아프고 화나지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돌아보려 하면 아프지만 자유로워져


남편에게 한 말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할 말이었던가.

되새기고 있다.


아프던 겨드랑이 밑이 간지러워져 날개가 돋아나

아프지만 자유로워지는 시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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