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여긴 어디.

깨어서 삶을 살고 있다면 이 두 질문에 명료한 답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순간이 허다하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담긴 공간은 어디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데 급급한 것이 인생이다. 중요하고 막중한 일일수록 깨어서 감당해야 하건만,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중요한 일을 존재를 망각한 채로 해치우려 한다. 막중한 일이라며 기도는 하지만, 기도하며 그분의 현존을 구하지만, 정작 내가 현존하지 못하니 그분이 곁에 바짝 붙어 계셔도 알아차려질 리가 있나.

 

이번 코스타가 그랬다. 전체 집회 설교, 그것도 최초 여성 스피커라는 것에 과몰입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집회 설교 이후 겪어내야 할 여파도 있었다. '나는 누구/여긴 어디'를 인식하지 못하고 달렸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또 다르게 말하면 의미를 묻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설교 다음 날에 깨달았다. 청년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만남을 요청해오는 그룹(조)와 함께 식사를 하고, 세미나를 진행하는 사이 길고 짧은 상담을 했다. 눈을 맞추고 청년들의 얘기를 듣자니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인지 깨달아졌다. 코스타지! 처음 참석했던 2013년(벌써 10년 전이었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부터 코스타는 '사람'이었다. 가기 전까지는 강의 준비로 조바심치지만 결국 가서는 강의는 거들뿐, 목마른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늘 쉴 새 없이 청년들을 만났고, 어느 만남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고, 그것이 의미였다. 얼굴도 상담 내용들도 기억나지 않지만 의미 기억은 그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날 오후, 몇 사람과 눈을 바라보고 얘기를 나누니 비로소 영혼이 살아나는 느낌, 현존의 감각이 살아났다. 내가 이 사람 만나려고 왔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다. 

 

"강사님, 마치고 바로 한국 가세요?" 하는 질문에 어디어디 여행한다 답을 하는데, "어머, 저 거기 살아요." 하는 청년들이 있다. 보통 반가움은 거기까진데, "오시면 연락 주세요." 하는 경우가 있다. 그 말에 다 연락할 수도 없고 호감을 표하는 인사로 알아듣지만 어쩐지 "그럽시다!" 하게 되기도 하고. 시카고에서 한 사람, 뉴욕에서 한 사람 만났다. 여행도 결국 '사람'이니까. 두 사람 다 앉아서 얘기 나눈 곳이 카페가 아니라 공원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가. 인생에서 몇 번이나 갈지 모를, 머나먼 시카고 뉴욕 한복판에서 불과 며칠 전까지 알지도 못했던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이내 포장지 안쪽의 마음을 꺼내 보여준다. 이것이 신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위의 독사진은 뉴욕에서 만난 자매가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찍어준 것이다. 도심 빌딩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원의 멋진 밤이다. 진로를 고민하던 다른 자매는 그새 딱 일하고 싶은 곳에 취업을 했다는 톡을 보내왔다. 설교하러, 강의하러 코스타에 간 것이 아니고 사람을 만나러 갔다. 나는 누구, 거긴 어디였는가 하면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사람을 만나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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