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 줌으로 하는 내적 여정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소파에서 기절하듯 낮잠을 잤다. 기절 낮잠은 참 오랜만이다. 이유 있는 기절 낮잠인 것이, 한 이십몇 년 만에 시험공부를 했는데, 그야말로 시험공부였다. 외우는 공부 말이다. 문제는 나와 있지만, 문제마다 답을 정리하는 것이 리포트 하나를 써야 하는 수준이고, 그걸 쓰자면 한 과목의 한 학기 공부를 정리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간 의미 있게 들었던 과목을 내 것으로 정리하는 시간이 되고, 그걸 외우기 위해 안 쓰던 머리를 써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라고 지나고 나면 말할 수 있는 거지! 답을 정리하고 외우느라고 죽을 뻔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
 
기절 낮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시험공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아... 논문 쓰고 싶다. 외우는 고통에 비하면 논문 쓰기가 훨 낫네" 했었으니까. 정말 달콤한 책상 앞 시간이구나... 하는데, 채윤이가 등장하여 카페 가자고 난리를 친다. 점심 먹기 전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장은 봐야 한다." 이런 얘길 했던 것 같은데, 분명히 가기로 했다고 떼를 쓰고 (진짜로) 거실 바닥을 구른다. 쟤가 미쳤나 싶어, 미친 애는 이길 수 없지 싶어 카페에 가기로 했다. 주섬주섬 책을 챙겼더니 "제발, 제에발... 그냥 보통 엄마처럼 카페에 가자"고 다시 발을 구른다. 책 가져가지 말라고. 쟤가 미쳤나 싶었지만, 기꺼이 져주기로 하고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나섰다.
 
채윤이가 꼭 가고 싶었던 카페는 늘 지나다녔지만 카페인 줄도 몰랐고, 카페라 해도 "어반 런드렛", 세탁소 겸 카페라니 끌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끌려 나온 몸, 끌려가자 싶어 들어간 카페는, 오!!! 분위기 좋고, 뷰 좋고, 음료 마음에 들고! 1층은 카페, 2층은 세탁소라는 이상한 조합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창가에서 보이는 내가 늘 걷는 탄천 길의 큰 나무였다. 오미자 신맛 좋아하고, 자몽의 쓴맛 정말 좋아하는데, 얘네 둘을 콜라보한 '오미자몽'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한가로이 앉아서 즐기고 노닥거리는데 잃었던 어떤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잃은 줄도 몰랐던 어떤 좋은 것 말이다. 커다란 덩치에 갑자기 다섯 살 채윤이가 되어 거실을 구르던 채윤이 덕에 예기치 못한 기쁨을 만났다. 게다가 이 얘기 저 얘기, 수다수다 하다 채윤이가 툭 던진 한 마디가 마음 깊은 곳으로 풍덩 들어왔다. 듣고 보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는데,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그 말이었다. 듣고 보니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복닥거리며 찾아다니던 것이 있었는데 채윤이 입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이럴 땐 정말 "아이는 하나님의 메신저다."라는 말이 수사가 아니다. 다 큰 채윤이가, 힘을 써서 나를 끌고 나가서 내 지갑을 털고 제 욕구를 채우는 줄 알았는데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끌려나갔더니, 내가 얼마나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달리는 것 자체에 취해서 어떤 감각을 마비시키고 살았는지 깨달아졌다. 문자 그대로 달린다는 뜻은 아니다. 내 방식으로만 일하고, 내 방식으로만 쉰다는 뜻이다. 카페에서 보이는 나무 아래는 내가 늘 걷는 길이다. 나름대로 쉼이며 멈춤이라 여기며 혼자 산책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내 방식대로 쉬는 고착이라는 것을 알겠다. 내 스케줄과 내 방식을 포기해야 비로소 늘 보던 나무 저편 아래에 카페가 있고, 상상치 못한 조합의 '오미자몽'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 딸, 잘 키운 딸, 열 친구 부럽지 않은 잘 키운 딸을 영접하게 된다.
 
마침 다음 날 주일 예배 설교의 본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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