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밥이 맛있다더니, 메뉴가 다양하고 식당도 여러 개라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더니. 그래서 나는 "원래 모든 음식이 많이 하면 맛있어."라고 응대했다. 몇 개월 지나더니 기숙사 밥이 맛이 없다고. 대량으로 하는 음식이라 맛이 없다고 못 먹겠다고 한다. 삼겹살에 명이나물과 밥 한 공기를 줬는데 "와, 이 맛이지! 이거지, 엄마!" 한다. "너 엄마 음식이 그립고 그렇기도 해? 엄마가 한 음식 뭐가 생각나?" 했더니 "당연히 생각나고 엄마가 해주는 모든 음식이 다 생각나지. 엄마 음식은 나만을 위한 음식이잖아. 나한테 딱 맞춘 그런 음식이잖아. 명이나물 어디서 샀어? 비싸? 내가 전부터 삼겹살하고 같이 먹고 싶다고 했었지?"라면서 처묵처묵. 
 
맞아, 너만을 위한 단 한 번의 삼겹살.
이런 삼겹살 또 없는 거 알지?
엄마 마음이야.
응원해.
니 편이야.
무조건 니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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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화분 선반은 내게는 설교단이다. 언제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불지 모르는 바람 같은 성령의 목소리 또는 마음이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성인의 말로 하면 "창조(자연)의 책"이다. 작년 여름 무엇인가를 심었던 긴 네모 화분이 겨우내 바깥 선반에서 노숙을 했다.  가끔 새를 유인하는 먹이 담는 먹이통이 되어주기도 했고. 그러다 날아든 직박구리로 반가운 날도 있었지.

 

1층 산딸나무를 내려다보려고 베란다 창에 매달렸다 화분 가득 수북한 괭이밥을 발견했다. 큰 감흥 없이 지나쳤는데... 며칠 후 별처럼 피어난 두 송이 괭이밥꽃이 피어있는 것 아닌가! 예쁘고 뭉클하여 잠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JP을 불러 감동을 나누고, 사진을 찍고, 한참을 들였다보고, 딴 일 하다 또 들여다 또 들여다 보고... 그러자 마음에서 올라오는 한 말씀이 있었으니...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마 6:28)

 

들꽃이 들꽃 되어 그저 피어 있는 아름다움. 누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그저 자기로 피어있는 자유를 생각하게 된다.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핀 괭이밥꽃은 제 할 일을 온전히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제 할 일을 할 뿐인데, 저를 지으신 하나님의 질서에 복종할 뿐인데, 오늘 내게 큰 선물이 되고 있다. "되어야 할 내가 되는 것"이 자신을 위해,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을 위해, 인류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가장 훌륭하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 말을 위해 굳이 Carl Jung을 끌어오지 않겠다.

 

괭이밥꽃이 저렇듯 자기로 피어나 인류에 이바지하듯, "너도 너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허튼 힘을 쓰지 말라"라고, 베란다 화분 선반 위에 설교 한 편이 내려와 있었다.    

 

 

 

 

 

 

 

 

어느 새

모든 새는 어떤 새다. 산책길마다 깜빡이 없이 난입하여 내 정신을 높은 곳으로 끌고 갔다 사라지는 새가 있는데. 오늘 그 새는 며칠 전 그 새가 아니고, 며칠 전 나를 만나줬던 그 새는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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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날아든 어느 새

오전 줌 강의를 마치고 혼자 유유자적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대추 맛집, 대추 맛집, 여기가 대추 맛집." 영혼으로 들었다. 눈에 보이는 아이패드를 들고 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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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례

대추 말리던 바구니가 텅 빈 지 오래다. 한 바구니 가득했던 대추를 새 친구들이 죄 먹어 치웠다. 씨 하나 남기지 않았다. 빈 바구니는 어쩐지 치우고 싶지가 않아 그대로 두었다. 곡물을 좀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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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기만 한 컵이 아니라 의미 담긴 컵을 참 좋아하는데... 그건 아마도 컵을 영적 스승으로 삼은 조이스 럽의 "내 인생의 잔" 때문일 것이다.  취향저격의 컵 선물로 격려를 받아서 '취향저격려'이다. 컵을 좋아하고, 의미 있는 컵을 좋아하는 취향을 정확히 저격당한 것도 사실이고, 후쿠오카의 스벅에 갔는데 저 컵을 봤다면 덥석 사 왔을 디자인이라서 취향저격이다.
 
폴리백에 담긴 멸치가 취향저격이다. 맨입에 먹는 멸치 좋아하고, 뼈를 발라 국물 우려낸 축축한 멸치 진짜 좋아해서 버리지 못하고 혼자 먹는 취향을 갖고 있다. 그냥 고추장 찍어 먹으라는 이 멸치는 고추장 꺼낼 새도 없이 그냥 먹게 된다. 폴리백에 담긴 것이 흡사 <멜로가 체질> 야감독(손석구 분)이 해외로 떠나는 은정이에게 던져주는 빙어 같이 생겨서 더 좋다. 이걸 주신 분들도 쿨하기가 야감독 못지않은 분들이라. 
 
20대 말에 JP 썸타던 시절 이야기이다. 30대를 그냥 맞을 수 없다는 뜻으로 친구 M과 H가 '지리산 원정대'를 꾸렸다. 지리산 종주 여행에 JP도 함께 했고. 나는 엄두도 못 낼 일정이었고, 썸녀였던 나만 남았다. 주일 예배 마치고 잘 갔다 오라는 내 인사에 "어, 누나도 같이 가시잖아요." 해서 무슨 소리냐 했더니 '누나는 제가 마음에 담아 갈 건데요'라는 파렴치한 수작을 부렸었다.
 
오글거리는 말이긴 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 짧은 가족여행 다녀오시면서 초콜릿 하나를 주셨어도 "웬걸요!" 했을 일이다. 아니 뭘 주시는 자체가 가당치 않은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컵을 고르고 사고 할 때 나를 기억하고 내 취향을 고려했다는 것이 참 고맙다. 멸치를 폴리백에 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누굴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멸치를 나눠 담을 는 짧은 순간, 담는 사람의 마음에 '누군가'가 담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순간의 '담김' 그게 참 격려가 된다. 내가 뭐라고... 나를 담아주시나요. 그리고 조그만 기도 안에 머물러도 알아차리게 된다. 내가 근본적으로 어디에 담겨 있는지. 이 취향저격 격려는 그분이 보내신 것이라는 걸. 내 어깨가 좀 처져 보이고, 내가 나를 싫어하려는 조짐이 보이니까 그분이 손을 쓰신 것이다. 어떤 이들의 선한 마음을 이용해서. 그분은 정확하게 취향을 저격하시는 분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훨씬 많아서 늘 털리는 인생이라며 자기연민에 빠지는 적도 많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머물러 꼽아보면 그 반대다. 말되 안되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다. 받는 모든 것에 진심의 감사를 하는 것이 내 일상 또 하나의 기도이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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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크리에이션 성경 퀴즈대회

지난 주일 예배 마치고 성경퀴즈대회 했다. 진행을 맡음! 작년 추수감사절에 퀴즈대회를 한 번 했는데, 오랜만에 주일학교 선생님 시절 2부 순서 진행하던 느낌 살렸더니 재밌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또 재밌었다. 생각보다 열심히 공부하시고, 두툼한 예상문제지가 막 돌고, "우리 남편 진짜 열심히 했다. 수에 강하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숫자 다 외웠다. 아들이 한 문제는 맞히고 오라고 했는데..." 은근 귀여운 청탁도 들어왔다. 카톡으로 답하기, 같은 신메뉴도 도입해 보았다. 한 문제 맞히고 틀리는 데 순간의 목숨을 걸어주시는 60대 집사님들의 몰입, 참 즐겁다. 그야말로 교회가 '친교'의 장이었다. 

 

* 인생학교 에니어그램

퀴즈대회 마치고, 뷔페로 점심 먹고는  젊은 부부, 중년 부부 여러 커플과 함께 에니어그램 강의를 했다. 각각 육아와 부부 세미나를 진행했던 두 그룹이 함께 했다. 한 교회에 있지만 서로 말 한 마디 해보지 않은 분들도 있다. 이런 계기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 부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참 좋다. 두 그룹을 묶어서 진행하기로 한 사심이기도 하다. 마주 앉아 내적 자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친교'다. 

 

* 기도 깊은 수다_연구소 동반자 모임
밤에는 줌으로 연구소 동반자 모임을 했다. 지도자 과정 1, 2, 3기 선생님들의 모임이다. '청원기도와 관상기도, 기도에서 욕구의 문제' 라는 주제로 강의를 나눴다. 강의 반, 나눔 반인데. 현재 나의 기도 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들려주는 동반자 선생님들의 나눔 속에서 깊은 친밀감(intimcy)을 느꼈다. 현재 나의 '청원 기도'를 나누는 동안 내가 지금 갈망하는 것을 그대로 열어 보이고, 썩 자랑스럽지는 않은 기도 생활을 노출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만남이 참 좋았다. 나는 성경퀴즈대회 진행을 하기 싫었던 마음, 떠들썩하게 진행하고 오는 공허감이나 수치심 같은 것을 고백하고 부끄러웠지만 참 좋았다.

 

* 친교의 그러데이션

빡센 주일 하루, 빡센 친교의 그러데이션을 경험한 것 같다. 밤으로 갈수록 깊어졌지만, 어느 것이 더 좋다 말할 수는 없다.  각각 좋은 친교였다.  강의 네 시간, 퀴즈대회 진행 한 시간으로 밤에는 기침과 함께 목이 좀 아팠지만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이었고, 한 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정도였다. 세 번의 친교 모두 나다운 시간이었다. 나다움을 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레크리에이션에 가까운 성경퀴즈 진행자일 때와 내면의 이야기를 나누고 영성을 강의할 때, 보이는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나를 숨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가벼운 것이다. 마침 그다음 월요일에 연구소 '읽는 기도'의 주제는 '친교'였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자기 자신, 적어도 한 사람에게서 숨는 것을 멈출 때, 그때 그것은 숨겨지지 않는다. 우리 참 자아의 출현은 사실 비밀의 큰 폭로이다. 그 위험한 자기 노출이 내가 말하는 친교(intimacy)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이 내부 또는 내면을 뜻하는 라틴어 '인티무스'(intimus)에서 왔다고 한다. '인 티모르'(in timor) 또는 "두려움 속으로"(into fear)에서 그보다 오랜 의미가 발견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요점은 분명하다. 

친교는 자기 속을 드러낼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겁나는 일이다. 자기가 노출한 것을 상대방이 받아 주고 존중할지 아니면 반대쪽으로 달아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거절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건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자기를 노출시켰다가 거절당한 데서 오는 고통이 너무나 커서 그 일을 다시 시도하는 데 한평생이 걸리는 수도 있다.

- Immortal Diamond: The Search for Our True Self, 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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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 기혼 비혼자가 함께 있는 장년부에 강의가 있었다. 강의 주제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을 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에 빨간 압정 꽂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방식의 강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결혼여부가 일상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상상컨대, 육아 버텨내기의 일상을 사는 사람과 혼자서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려는 비혼의 일상 고민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신앙 일상의 본질을 얘기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강의 후 나눔 질문 중 하나로 "나의 리즈시절"을 떠올려보자는 나눠보자고 했다.

질문하려면 나도 답을 해야 하니까. 내 리즈시절을 떠올렸다.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뭐니뭐니 해도 내 어린이 성가대 지휘하던 정신실 선생님일 때지!" 싶어 잠시 기분 좋은 회한에 젖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하고 갔는데... 갔는데... 교회 도착해서 강의 장소로 들어가는데 어린애들 찬양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막... 그, 박새나 그런 작은 새들이 맑은 소리로 귀에 딱딱 꽂히게 지저귀는 그런 소리로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게 언제 적 주의 발자취야! 한 공간을 여러 기관이 시간대 별로, 빡빡하게 나눠 쓰는 그런 교회도 오랜만이다. 아이들 연습 끝나길 기다리며 기도하고 앉았다가 참지 못하고 카메라를 들었다. 순간의 예기치 않은 기쁨이었다.

마침 스승의 날이라고, 어른이 된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고 보니 이날 수강자였던 30, 40 장년들 나이가 되어 있겠구나! 나의 리즈시절, 너희들의 리즈시절... 나도 너희들도 늘 새로 갱신되는 리즈시절을 살기를 기도한다. 바쁘지만 의미 없고, 바쁘지만 심심한 빡센 시간을 지나면서도 잠시 잠깐 기쁨과 생명을 발견하는, 리즈시절을 새롭게 경험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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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줌 강의 전에 짧은 밤 산책을 나갔는데, 어디서 아카시아 향기가 여리여리 하게 코끝이 스쳤다. 어디지? 어딨는데? 아카시아 어딨는데? 좋은 순간은 좀 붙잡아 두고 싶은데, 날듯 말듯한 향을 카메라에 담을 순 없어서 옆에 있는 아무거나 찍었다. 그러니까 저 나무 그림자에서는 아카시아 향이 나는 것이다. 다음 날인가, 탄천을 걷다 밤의 그 향기를 보내던 범인의 범죄현장을 목격했다. 아닐 수도 있고... 다른 아카시아일 수도 있고. 어쨌든 좋은 향기, 봄날의 아름다움이라서... 아름다운 건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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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담아듣고, 그대로 지키십시오."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젊은 시절에 유치부 설교로 봉사한 적이 있다. 그때 경험으로 알아낸 것이 있다.  "귀담아 듣는 아이가 있구나!" 지능도 아니고, 성격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듣는 아이가 따로 있었다. 그랬던 아이 얼굴이며 이름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어쩌면 그렇게 진지하게 듣는가.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들은 대로 해보려는 하는데, 그 아이들이 꼭 그랬다. 
 
청년 시절부터 평생 '소그룹'이란 것을 하며 살았나보다. 주어지는 소그룹이 없을 때는 조용히 만들어내곤 했다. 그때그때 내 일상의 갈망과 닿는 작은 모임을 어떻게든 만들었다. ("내 인생의 소그룹"으로 따로 글을 하나 써야지 싶네.) 교회가 가정교회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젊은 부부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모여서 밥 먹고, 얘기하고, 기도하던 시절은 여러 모로 찐이었다. 그때 결혼 후 잠시 머물다 네팔로 떠난 태훈 윤선을 보내며 남편과 나눴던 말이 생각난다. "아깝다, 정말 같이 하고 싶다. 젊은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들을 줄 알지? 우리 모임에 함께 있으면 참 좋겠다. 아깝다, 아쉽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소그룹을 하는 연구소를 차렸다. 내적 여정, 꿈 모임, 글쓰기 모임... 모두 영성생활을 배우고 나누는 소그룹이다. 이쯤되면 "내 인생의 소그룹"으로 글 한 편이 아니라 책을 한 권 써야 하는 것인가. 연구소의 모든 영성 그룹은 '서로 잘 듣는 그룹'이다. 결국 잘 듣는 수련을 통해 치유되고 성장하는 것 아닌가 싶다.  들어주는 척, 말고. 진심으로 듣는 것은 '존재'의 문제라서 존재 안에 여백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듣는 훈련은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훈련이다. 눈동자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그랬구나...." 정도의 공감 그 이상이고. 좋은 말 대잔치는 더더욱 아니다. 
 
올초부터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 참여하고 있다. 아침마다 들으려고 한다. 난생 처음 보는 성경말씀으로 여기며, 내게 하는 말씀으로 들으려고 한다. '말씀묵상 밴드 참여의 변'은 또 한 편의 글로 쓸 계획이고. (나는 말이 많고, 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다.) 들은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포스트잇에 적어서 휴대폰 뒷면에 붙이고 다닌다. 이것은 렉시오 디비나를 사랑하시는 학교 교수 신부님께 전수받은 방법이다.
 
유치부 아이들에게 설교하던 때를 자주 떠올린다. 그때 그 아이들의 표정과 눈동자를 떠올리며 지금 여기서 새롭게 배운다. 하나님 앞에 선 내가 그 아이들 같은 태도여야 하겠구나, 매일 아침 마음의 창을 닦는다. 잘 들어주는 사람, 존재로 들어주는 치유자가 되고 싶은데. 잘 듣기 위해 내 마음에 투명한 여백을 만드는 일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구나... 이미 알았던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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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슬쩍 보고도 '꽃마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언뜻 보면 꽃보다는 풀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성한 초록에 점 같은 꽃이 파묻혀 있으니 말이다. 이미 아는 꽃마리의 모양을 떠올리며 찾자면 결코 찾아지지 않는다.
 

가만히 잘 들여다 보면 이렇게 예쁜 모양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꽃이다. 모양을 잡아 사진을 찍으려면 바람에 불곤 해서 거의 실패다. 사진을 포기하고 그저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는 것이 상책이다. '꽃마리'라는 별칭을 쓰는 내적 여정 벗 때문에 친근해진 이 꽃과는 제대로 아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정말 쓱 봐도 알 수 있다. 너라는 꽃마리.
 

꽃마리만 그런 거이 아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주마간산 식으로 보면 모든 들꽃이 다 그렇다. 그저 노란꽃. 애기똥풀인가? 민들레는 아니고... 이리 지나치지 않고 멈추고 쭈그리고 앉아서 들여다보면 이분도 또 존재감 뿜뿜.

씀바귀꽃이다. 학교에서 저녁 먹으로 식당 가는 길에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돌아보고, 돌아보다 고개 숙여보니 통성명하고 싶어 하는 이분이었다. 언젠가 이름을 익혔는데 씀바귀인지, 고들빼기인지 다시 헛갈려서 꽃검색을 돌려보았다. 정확히 노랑선씀바귀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선생의 시는 진리인데.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예쁜 건 둘째 치고 제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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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부부 세미나, '오후의 빛 학교'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다. 마지막은 12일 피정이었는데, 일주일을 그 여운에 잠겨 지낸 것 같다. 집사님 한 분이 이 짧은 순간을 이렇게 멋지게 영상으로 남겨 놓았다. 자꾸 입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가 맴돈다. 그러다 소리 내서 불렀더니 채윤이가 "그거 뭐야? 또 찬송가 같이 불러어~"어 한다. 뭘 불러도 찬송가 같다는 말은 기분 나쁘지만, 어쩐이 이 영상 속 짧은 노래는 찬송가 그 이상인 것도 같고.

 

 

확신 없이 시작한 세미나이다.  여기저기 다니며 했던 중년, 부부, 영성 강의를 성글게 정리했다. 카를 융, 안셀름 그륀, 리처드 로어... 쉽지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평이한 말로 녹여낼 수 있을까, 어쨌든 목표는 "강의 조금, 나눔 많이!"였다. 썩 흡족하진 않지만,  6시간 강의하는 에니어그램을 50분에 끊기도 했으니, 나름 선방했다남편이 예배 시간에 정리하며 보고하기를 많이 웃고 많이 운 시간이라고 했는데 4주 세미나, 1박 2일 피정을 여덟 글자로 요약하면 그렇게 되겠다. 많이 울고, 많이 웃고.

 

목사는 양복을 벗고 설교 마이크 대신 기타를 들었고, 나는 강의 대신 커피를 내리고 또 내렸다. 기타를 든 목사, 커피를 내리는 강사. 그 자리가 내게는 교회였다. 아, 우리가 공동체지. 이분들과 내가 한 교회 한 몸이지! 많이 웃고 많이 울었던 그 자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교회를 느꼈다.

 

 

제도적 교회가 필요하고, 이제껏 해오던 신앙행위들 역시 소중하다. 그런데 탈종교 시대, 더는 제도와 종교적 언어로 채워지지 않는 갈망들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리처드 로어 신부의 말처럼 체험하는 앎, 세포로 경험하는 앎과 교회가 필요하다. 사변과 관념 너머 그리스도의 '몸'을 느끼는 교회가 필요하다. 내겐. 우리에겐. 

 

 

모닥불 피워놓고 흥얼흥얼, 떼창이 된 생감자로 만든 포테이토칩으로 다같이 까르르 웃던 10, 세포로 경험하는 찰나의 교회였다. 시간을 가늠할 수 깊은 눈물의 순간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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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빛 학교  (1) 2023.04.23

 

소중하게 간직한 '전작 작가'들이 있는데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은 최근에 맺은 인연이다. 그래서 전작을 가지고 있지만, 다 읽지는 못했고. 이분이 한국에 오신다니, 현장 강의에 가고 싶지만 시간은 없고. 유일한 서울 강의는 휴일 어린이날이었다. '어린이 없는 집'이니 JP만 혼자 놀도록 잘 떼어놓으면 되겠네. 여차저차 현승이 올라오고, 채윤이는 "오랜만에 넷이 차 타고 어딘가 가고 싶다"하고. 그 분위기에 또 빨리 마음을 접었다. "그래, 놀자! 넷이 같이 놀자. 엄마가 듣고 싶은 강의가 있었는데 포기할게. 모처럼 넷이 놀자."  
  

 

5월5일 비 예보가 뜨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영화 얘기가 슬슬 나오고, 나는 생각할수록 토마시 할리크 실물영접이 아쉽고... 그래서 제안하고 확정된 것이 "어린이날, 합정동 프리덤!"이다. 강의 장소가 합정동이었다. 우리의 추억 합정동 메세나폴리스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셋은 영화를 보고 나는 강의를 듣고. 저녁 약속, 연주 일정이 있는 아이들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빗길을 달려 합정까지 가면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자동차 안 수다가 좋았다. 참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혼자 걷는 합정동 길도 참 좋았고. 오래만에 빈브라더스 커피까지 테이크 아웃했다.
 

강연회는 안 좋았다. 70이 넘은 강사님을 혹사시킨 것 같았다. 여러 기관 합동 초청이니 '혹사시키다'의 주체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이 너무했다. 주일 도착, 월-화 피정, 수, 목, 금 강연이 전주, 광주, 왜관, 서울이라니. 강사를 배려하지 못하는데 수강자에 대한 배려까지 기대할 것은 아니었지만. 환대나 배려 같은 단어가 마음 어디서 오락가락 했다. 모처럼 몸으로 영접하는 좋은 선생님 만나는 자리가 많이 아쉬웠다. 이미 책이 나와 있고, 유튜브로도 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세상인데. 이미 교재에 나온 강의안, 신부님은 그걸 그대로 읽고,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로 번역된 걸 그대로 읽는 강의였는데.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는 시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배려, 강사에 대한 배려, 빗속을 뚫고 모여든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일종의 '감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정성 없이 깔쌈한 것도 문제지만… 환대와 배려는 대상을 향한 열린 감각의 문제이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소통하는 강의가 될까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더욱 갑갑하고 마음이 조금 민망해져서 중간에 나왔다.
 


한때 일상의 산책길이었던 절두산 성지와 한때 내 교회(어색하다...)였던 양화진 묘원을 잠깐 걸었다. 절두산 성지에는 비가 많이 오는데도 순례온 교인들로 울긋불긋(어쩐지 다들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는 느낌) 북적이고, 기도초를 밝히고 또는 성모상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울타리 너머 양화진 묘원은 정말 고요하고 깔끔했다.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된 느낌'의 묘원을 걷는 맛은 또 달랐다. 풀 한 포기까지 세련되게 기획된, 감각으로 치면 별 다섯 개의 정원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나는 환대를 경험했나? 환대와 배려, 배려의 감각 같은 것들을 곱씹으며 운동화와 바짓단이 젖도록 걸어서 메세나폴리스에서 영화 보고 나온 가족을 만났다.  


이래저래 양화진은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그 이야기 중,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를 모두어
양화진 책방을 열었다.

 
양화진 책방 유리에 적힌 말이다. 저 사진을 찍고, 저 글귀를 만난 때가 10년 전이다. 양화진은 이래저래 이야기가 많은 곳인데, 거기서 보낸 5년으로 내게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남긴 곳이 되었구나. 저 사진을 찍고 저 글귀에 감동할 때만 해도 상상치 못할 이야기들이다. 교회에 대한 희망과 절망, 그래고 또 새로운 희망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라는 말 역시 다소 낭만적으로 설레며 읽었는데...  '화평한 조우'라는 말에는 '전쟁같은 갈라짐과 간극'이 전제되어 있음을 뒤늦게 조용히 체험하고 있다. 어쩌면 이래저래 많은 그 모든 이야기를 내 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었을 뿐이지. 무엇인가를 모르고 싶은, 모르기로 작정한 천진한 환상 덕에 오늘도 버티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강연회는 실망스럽고,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께는 실망보다는 강사 예우를 잘하지 못한 주최 측(한국사람)의 마음으로 죄송한 마음까지만 가기로 한다. 배려심은 크고 감각은 없는 한국에 오셔서 고생 많으셨겠다. 공산 정권 치하의 고통, 이후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탄압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살아야 했던 더 큰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팬심보다는 감사의 마음. 비 오는 휴일에 가족을 버리고 거기까지 찾아간 진심은 그것이었다.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 몸과 영혼이 더불어 건강한 노년을 보내시길 기도한다. 입구에서는 “책 구매하시고 저자 사인 받으세요!” 하더니… 줄을 섰는데 “신부님 피곤하시니 여기까지만 사인 하시겠습니다.” 하는 바람에 사인 하나 못 받았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곳에서 우리는 '제도 종교의 쇠퇴, 종교 기관의 신뢰 상실, 종교적 언어의 명료성 상실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매우 다른 두 종교적 현상을 구분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영성 또는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그것입니다.
(중략)
영성에 대한 관심이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삶이라는 진정한 문화 대신에, 싸구려 밀교(密敎, esotericism)를 받아들입니다. 앞으로는 영적인 삶의 문화와 시민 사회 생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이 둘의 관계 모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토마시 할리크, 강연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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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5

 

언젠가 최 선생님과 치매에 관해 얘길 나눈 적이 있다. 지금처럼 편한 사이도 아니었고, 여러모로 민망했던 기억이다. 내가 선생님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죄송한 마음, 당황한 마음으로 아무말 대잔치로 사과드리던 끝에 툭 나온 말로 선생님께서 정색을 하셨었다. 화내시는 모습을 처음 뵈었었다. 돌아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선생님을 몰랐다. 몰라도 한참 몰랐고, 무엇보다 노인과 편하게 대화할 태도가 되어있지 않았다. 존경심도 있었지만, ‘노화를 주제로 노인과 대화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만 했었다. 건망증, 치매 이런 얘기를 하던 끝이었는데, 어설픈 배려를 하려다 노인에 대한 선입견이 들통나 혼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한 솔직한 대화로 당시 부쩍 심해진 건망증으로 높아졌던 내 불안감은 해소되었고 선생님과는 한결 가까워졌다. 댁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께서 갑자기 그날을 기억하느냐 하셨다. 당연히 기억한다고 했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니, 현관문을 열어주시던 때부터 표정은 이미 난감 그 이상이었다. 왜 갑자기 그날이 소환된 것일까? 무슨 일이 있으신 게 분명한데, 여쭙기도 어려운 무거움이어서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 만에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여셨다.

 

내 친구가 치매에 걸렸다면?

 

사람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야... 그래, 입이 문제겠는고, 마음이 가벼운 것이지. 내가 그때 치매에 대해 어쩌구저쩌구 아는 척을 하며 입방아를 찧어 댔지.

     아, 아니요... 선생님. 가볍다니요... 전혀...

뭐라고 했는지 정 선생 기억하우?

     제 건망증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책도 빌려주셨었죠. 다 생각나진 않지만, 긍정적인 얘길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날 이후로 저 건망증에 대한 걱정 별로 안 하게 되었는데요.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하아, 참나. 내 친구가 치매예요. 치매 진단을 받았어. 그것도 많이 진행된 상태라오.

     아...

문제는 내가 벌써 감지한 게 있는데, 무심했어요. 가벼운 건망증이려니 하고 지나친 일이 여러 차례라고. 아마 내가 그때 정 선생한테 했던 말들이 화근이었을 거야. 지나친 자기 확신이었지. (끌끌 혀를 차신다.)

     화근이라니요? 어떤 말씀이 화근이었다는 건지...

코로나 직전이었을 거예요. 친구가 약속을 까맣게 잊고 모임에 나오지 않는 일이 있었거든. 가볍게 생각했어요. 단기기억 저하는 어쩔 수 없는 노인네들의 뇌의 문제다, 하면서. 한 번이 아니었던 것 같아. 그러다 다른 친구와 다툼을 하기도 했지. 자기만 빼고 약속을 잡았다는 둥 우기는 바람에.

     그러면 그때 이미 증상이...

그렇지. 그러고는 바로 코로나 터져서 모임이고 뭐고 문 닫았고, 연락도 서로 거의 못했어. 코로나 기간에 진행이 빠르게 된 것 같아요. 딸한테서 전화가 왔네. 요양병원으로 갔다고... 휴우... ... 내가 자만에 빠져서 내 친구도 못 지켰어.

     선생님, 무슨 말씀이요! 선생님께서 무슨 수로 친구분을 지키세요?

그래, 맞다. 내가 무슨 수로 지켜? 그래도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말이야.

 

치매가 치료되는 병이 아니라는 것, 조금 빨리 발견했다고 해서 더 나은 치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닐 것이다. 그 아쉬움과 자책감은 짐작이 가기에 뭐라 드릴 말씀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모님의 치매는 차라리 받아들이기가 나을지 모르겠다. 내 친구가 치매에 걸렸다면?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어. 지나친 것에 항상 무엇인가 숨겨져 있지. 안 보고 싶었던 거야. 65세 이상 치매 확률이 5%, 뭐다 하면서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아니 내 친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처럼 말이야.

     선생니~, 그때 말씀해 주신 감사 요법이 제게도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데요.

감사 요법?

     네, 치매가 걸리더라도 예쁜 치매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인간의 뇌가 나쁜 경험, 아팠던 경험을 더 오래 기억한다고요. 억울한 것, 섭섭한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환상을 잘라내는 것이 감사라고요. 그건 지나친 낙관이 아니에요. 선생님의 그 낙관, 지나치지 않았어요.

그래, 그래. 맞아. 허허, 울겠네, 이 사람! 내가 상심이 돼서 그래. 알았어, 알았어.

     아니, 그게... 제가 왜 갑자기 울컥하는 거죠? 죄송해요. 제가 선생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데... , 진짜 이 부적절한 감정...

아니야, 아니야, 고마워요!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지. 뭐가 부적절해? 오늘 정 선생이 잘 왔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 뻔했는데, 감사 요법이 아니라 정 선생이 딱 끊어줬네. 뭘 좀 먹읍시다. 사람 오자마자 붙들고 자책에 한탄을 하고 앉아서 물 한 잔도 안 내주고 있었네.

 

이게 최 선생님이다. 화가 날 때 그것을 숨기지 않으시고 솔직하게 표현하시고, 금세 풀고 웃으시는 분. 감정이 물 흐르듯 한달까? 유연한 마음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뵈면 뵐수록 이 점이 정말 매력적이다. 마음이 뇌에 있다면 선생님의 뇌는 이렇듯 말랑할 텐데, 선생님 같은 분이 치매에 걸리실까?

 

이렇게 큰 딸기 봤수? 킹스베리라나 뭐라나? 무슨 딸기가 이렇게나 크냐 말이야.

     와아, 저 보기는 봤는데요, 처음 먹어봐요.

두어 개 먹으니 배가 부르더라고. 상담 종결한 청년 내담자가 가져왔어요. 처음 왔을 때 비하면 내면도 외적 환경도 많이 좋아져서 내가 보람이 있어. 오랜 구직생활 끝에 취업을 했거든. 첫 월급 받았다고 통 크게 썼다는 거야. 그리고 가면서 하는 말이 힘들 때 또 상담하러 올 거니까 꼭 살아있으래. 하하.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

그러니까 말이야. 아주 맹랑하다구.

     선생님, 선생님은 치매는 절대 안 걸리실 것 같아요.

?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 같은 분은요...

이 사람도 맹랑하네. 하하. ? 치매 걸리는 사람이 따로 있나?

     매사 긍정적이시잖아요. 유연하시고요.

장담할 수 없어. 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고 하는 게 그런 말이야. 나는 사실 치매 걸려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거든. 치매 안 걸리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여생은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지만, 걸린 후의 삶은 내 통제 밖에 있는 것 아니유? 걸리면 걸려야지 어떡하겠나.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것도 있었어. 정 선생이 약속을 잊었던 날 말이야.

     네, 그날로 제가 선생님께 완전히 빠져들었는데요. ‘단짠단짠다 해주셨잖아요. 처음으로 제게 화도 내시고, 건망증에 대한 제 염려를 합리적으로 딱 설명해주셔서 안심도 시켜주시고... 그 유연함과 긍정성이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야. 건망증도, 치매 초기 증상인 경도인지장애도 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거든. 오는 치매 어쩔 수 없다. 지나친 민감함과 거부가 더 문제라고 말이야.

     네,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그 교만 때문에 내가 불을 보듯 훤한 내 친구의 치매 증상을 캐치하지 못한 거야. 전문가라고 하는 내가 말이야. 친구를 도울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라우.

     선생님, 치매에도 골든 타임이 있나요?

... , 완치가 없으니까 치료의 골든 타임은 말할 수 없겠지. 진행을 늦추는 약이 있을 뿐이니까. 그래, 얘기가 다시 원점으로 왔구만. 자책은 그만 하겠수다. 아무튼 친구가 약속을 잊고, 자기만 몰랐다고 우기면서 다른 친구들과 대거리하는 게 듣기 싫어서 귀를 닫고 있었거든. 그것이 치매 증상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조금 다르게 대했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친구와는 소통이 끊어진 거잖우. 차라리 민감하게 의심이라도 했으면 오가는 마음이 있었을 것 아니유. 이제 요양병원으로 갔으니... 이승에서는 끝났지.

     아... 그런 마음이시군요.

 

치매는 무능하기만 한 질환이 아니다.

 

정 선생 혹시 <더 파더>라는 영화 봤어요? 안소니 홉킨스가 나오는.

     영화는 알아요. 보지는 못했고요. 주변에서들 많이 추천하던데, 저는 어쩐지 선뜻 보게 되질 않더라고요. 안소니 홉킨스가 치매 환자 연기를 그렇게 잘했다고요?

그래, 나도 참 보기가 힘들었어. 이제 와 얘기지만 보고 나서 며칠 우울해서 괜히 봤다 싶기도 했어. 그래도 한 번 봐요. 심리 치료하는 사람이니 꼭 봐야 할 영화야.

     그렇군요. 영화가 왜 힘드셨는지 여쭤보면 맹랑한 거죠?

이런! 오늘은 또 맹랑하기로 작정을 하셨구만! 스포일링 해도 되겠소?

     아, 저 스포일링 된 상태로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 반전, 소름, 이런 거 잘 못 즐겨요. 다 얘기해 주셔도 돼요.

특이한 것이 치매 환자 자신의 시점으로 그린 영화예요. 그렇게 보지 않으면 스릴러 같기도 하고 스토리 전개가 무척 혼란스럽다고. 치매를 앓는 이의 눈에 보이는 공간과 일상의 일들이 어떻게 혼란스러운지가 생생하게 그려진다우. 지식적으로는 모르던 바가 아니었지만, 다소 충격이었어.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치매, 그러면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 먼저 떠오르지 환자 당사자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정신이 와해 된 상태이실 테니 이해 불가라는 생각도 들고요.

바로 그 점이야. 내가 지금 친구가 했던 말들이 하나하나 살아오면서, 단지 늙은이의 고집이나 어깃장이 아니었는데 싶은 거라우. 모르지도 않았던 내가 말이외다. ... 휴우...

     결국, 고집과 어깃장인 건 맞잖아요. 그래서 주변이 힘든 거고요.

, 그렇지않아요. 그렇지 않다고 봐요. 무작정 억지를 부리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단순한 치매 증상이라고 할 수는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이러려고 그랬는지, 칼 융(Carl Jung)이 말하는 동시성인지, 내가 얼마 전에 좋은 책을 하나 만났어요. 뇌과학자가 쓴 치매에 관한 책인데, 흥미롭게도 학술서적이나 논문이 아니야. 뇌과학자 자신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거예요. 과학자이며 딸로 2년 반 동안 치매 걸린 어머니의 변화를 일기 쓰듯 기록하고 깨달은 내용을 쓴 거예요.

     오, 특별한 치매 서적이겠네요. 과학자이며 딸로서 쓴 책이라니.

그러니까 말이유. 그간 읽었던 어떤 논문보다 알츠하이머 치매에 대해 명쾌했고, 나는 감동적이기도 했어요. 치매로 전혀 다른 인격이 된 어머니에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리지 않은 그 어머니다움을 찾으려는 노력과 결국 찾아내는 눈이 감동이 되더라고.

     그 책으로 선생님 친구분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하신 거군요.

, ! 그 얘기 하다 말았지. 치매 환자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건데. 치매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하기만 한 질환이 아니라는 거야. 치매로 인해서 여러 어려움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치매 환자들 스스로 곤란을 극복하고자 다양한 전략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제삼자가 봤을 때는 이상행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름 자신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거지.

     아, 영화 <더 파더>의 관점처럼 치매 환자 자신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지. 특히 초기에는 자신도 혼란스럽고, 실수하거나 이상하다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 뭔가를 하려고 애쓴다는 거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하는 것도 단지 인지능력 저하 때문만은 아니라, 나름의 자구책인 거예요.

아아...

내 친구가 약속을 잊고는 우기고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나름의 노력이었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선생님. 친정어머니가 치매이신 친구가 있어요. 요양병원에 계신지 오랜데요. 처음엔 그 사실도 몰랐어요. 어쩌다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친구가 너무도 의연한 거예요. 워낙 밝은 성격이기도 하지만요. 심지어 그렇게 말해요. 어머니가 다른 병 아닌 치매라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고요. 딸조차 못 알아보신대요. 당신 자신도 모르시고, 아무것도 모르시니 차라리 행복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자기의식이 없으실 테니 고통도 없으시겠구나 싶고요. 그 부분에 대해선 두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렇군요.

진행이 많이 되었을 때야 또 모르겠지요. 적어도 그 뇌과학자는 그래요. 증상이 심해져서 이전 어머니의 모습이 다 지워졌음에도 자기 어머니다움의 본질은 남아 있더라고요. 특별한 모녀 관계니 가능한 발견이긴 하겠지. 뇌과학자이며 어머니와의 관계도 좋았던 딸을 둔 치매 환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수.

 

특유의 지적이면서도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며 생기를 찾으시더니 그새 다시 침울한 얼굴이 되셨다. 그렇지! 최 선생님이시니까 이런 주제를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지 어느 노인이 치매를 가벼이 마주할 수 있을까. 게다가 가까운 친구분의 일이 되었으니... 다시 민망해진 마음이다. 뚝 끊어진 대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느새 뉘엿뉘엿 저녁 해가 넘어가고 있다. 역시 선생님이 먼저 힘을 내셨다.

 

끝까지 남는 건 감정 기억

 

어헛, 오늘 정 선생이 귀인이다. 치료사는 치료사야.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다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 뭐야. 상담비 내야겠다. 저녁 뭐 사줄까?

     네? ! 상담비요? 그러면 저녁으로 상담비 퉁 치시면 안 되고요. 상담비는 따로 청구 들어갑니다. 헤헤.

그리 하구려. 백지수표 줄게. 허허.

     네, 백지수표 접수합니다. 하하하.

고맙네. 친구 딸이 전화해서는 한참을 우는데 내 심장이 다 흔들리더라고. 천지분간 못하는 것 같은 제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 놓고는 마음이 추슬러지질 않는대. 왜 아니겠어?

     저희 엄만 저를 늦게 낳으셨어요. 지금 아흔이 넘으셨거든요. 연세가 무색하게 정정하시고 특히 정신이 좋으셔서 치매 걱정은 해보지 않았는데요. 상상만 해도 막막하고 가슴이 쪼여오네요. 내가 아는 엄마가 사라지고 다른 엄마가 되었을 때,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다른 엄마가 된다... 아까 말한 책에서 말야. 저자가 찬찬히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 인지기능이 만든 그 사람다움과 근본적인 감정이 만든 그 사람다움이 따로 있다는 거야. 쉽게 말하면 뇌 기능의 문제로 기억의 손실과 정보 입력의 혼란으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감정적으론 자기 엄마 그대로이더라는 거야.

     아, 감정이요? 엄마의 감정이요...

그래,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뇌에서 가장 먼저 세포사가 진행되는 곳이 기억 중추라고 하는 해마. 기억 장애가 제일 먼저 일어나지. 그런데 끝까지 남는 것은 감정 기억이야. 내 친구도 말이야, 인지적으론 문제가 생겼지만, 느낌은 손상되지 않았던 거야. 평소보다 더 우기고 고집을 부렸던 건 자존심을 지키려는 발로였을 거야. 그랬을 것 같아.

     선생님, 왜 노인치료에서는 느낌을 존중하라고 하잖아요. 노인 음악치료에서도 환자의 느낌에 대한 믿음으로 치료 디자인을 하라고 하거든요.

맞아, 치매 환자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면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으려는 불필요한 입씨름은 하지 않아야 해. 사실 모든 노인질환자, 아니 모든 노인을 대하는 태도일 거야.

     아, 불필요한 입씨름... 그러네요. 이성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설득하려는 것이 의미가 없죠. 왜 박완서 선생의 소설에 노인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 기억이 나요. 뱃속에서 뭐가 잡힌다, 분명히 뭐가 잡힌다는 어머니가 있어요. 의학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데 억지를 부린다며 자식들에게 타박 들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이 아프게 남아 있거든요.

그렇구만! 어디 노인네들 뿐이겠소? 결국 사람이 관계 안에서 원하는 건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남녀노소 모두 같애. 그 흔한 공감이라는 말을 왜 다들 좋아하겠소? 상담까지 오는 이들이 찾는 건 공감이야. 결국 감정이라고! 평생 사람 속내 들어주는 일을 하고 살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감정이야. 감정의 소통! 그러니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진짜 감정을 아는 사람이고. 치매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사람이 있겠어? 치매 예방을 위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정보가 많지만,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내 친구만 해도 교장으로 은퇴하기까지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신앙심도 깊었다고. 내게는 정말 남의 일이 아니야. 당장 내일부터 내게 치매 증상이 와도 이상한 일이 아닐 거예요.

     아오, 선생니임...

아니, 끝까지 들으라고. 그러니까 치매에 걸릴까 두려운 사람이 할 일은 투명한 감정으로 사는 거야. 정직한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하나님께도 그렇게 나아가야 해.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그거예요. 그리고 치매 걸린 노인을 도우려는 사람이라면, 보이는 행동이 어떠하든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면 느낌을 믿어주고 귀 기울여주어야 하고!

     아, . 알겠습니다! 저도 정리가 아주 딱 잘 되었어요. 지금 제 감정은 배고픔으로 인하여 살짝 짜증으로 가고 있사옵니다. 더 해주실 말씀은 식당으로 가서 하시면 안될까요?

그럽시다. 하하.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선생님처럼 말랑한 마음, 투명한 감정의 소유자가 어디 있겠냐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치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다고 입바른 소리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마음으로 기도했다. 주님, 우리 선생님 적어도 치매로부터는 지켜주세요. 더 오래 이런 맛있는 대화 나누며 배우고 싶어요.

 

<시니어 매일성경> 5,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운동하고 오는 길에 '몸'에 대해 생각했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인생 어느 때보다 건강한 몸인 것 같은데(오십견으로 삐뚜름하게 올라가던 팔이 거의 곧게 펴졌다), 건강하다고 늙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몸이지만 하루하루 노화되고 있다. 멈추지 않는 노화로 더는 어쩔 수 없는 몸이 되더라도 건강한 몸일 수는 있지 않을까? 노인이 되더라도 말랑한 마음으로 건강한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생각에 빠져 걷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이 텅 빈 것 같은 백팩을 메고, 지팡이와 한 몸으로 선 채로 뭐라 말씀을 하셨다. 마스크를 끼셨고, 어느 지방인가의 사투리 억양이라 도통 리스닝이 되지 않았다. 뭘 도와드려야 하나, 네? 네? 여러 번 여쭈었는데... "장이 아이네. 장이 아이네. 허허" 허무한 웃음으로 마무리하신 말씀은 아파트 장 서는 날인 줄 생각하셨는데, 아니라는 말씀이다. "아, 벽산 장이요? 오늘 금요일이니까요. 월요일에 장이요."  

 

빠른 걸음으로 내 갈 길 걷다 살짝 뒤돌아 보았다. 맞은편 단지 장 서는 아파트 쪽을 바라보시다 천천히 몸을 돌려 걸으시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길을 가다 아이를 보면 영락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맞추게 되는데 노인들을 그렇게 바라보는 일은 거의 없다. 이 할머니의 천진한 혼잣말이 사랑스러워 발걸음을 멈추었다. 혼잣말 같은 혼잣말 아닌, 지나가는 사람 끌어들이는 허망감 가득한 혼잣말과 표정이 사랑스러워! 나무 뒤에 숨어 도촬을 하고 말았다. 사진은 나무와 꽃에 안겨 "숨은 할머니 찾기"가 되었다. 

 

사진을 들여다 보는데... 보나벤투라 성인의 말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고. "창조된 모든 것에는 신성한 지문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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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맞추고 마음을 통해보려 해도

하도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

친구들과 무더기로 모여 있을 때는

저 자신으로 보이지 않는

자세를 낮추고 숨을 고르고 

가만히 들여다 봐야 보이는

사진 한 장 찍어보려면 

작은 바람에도 흔들려 초점 맞춰지지 않는

가던 길 멈추고 숨을 죽이고

오래 같이 머물러야 보이는

들꽃 친구들

 

눈을 맞췄다.

 

꽃마리

그리고 살갈퀴

 

그 무엇도 아닌 자기로 가만히 피어나 있는 소명에 충실한 들꽃 친구들, 또는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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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한 달 "오후의 빛 학교"라는 이름으로 중년 세미나를 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중년 부부 인생 학교"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내게는 "중년의 영성 학교"이다. 교회 집사님들 여섯 커플과 가볍게 즐겁게 (나는 혼자) 깊게 가고 있다. 이름은 <시니어 매일 성경>에 연재하는 "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에서 따왔다. 그 연재 글은 물론 여기저기서 하고 있는 강의를 갈아 넣어 4주간의 강의와 나눔, 1박 2일 피정으로 진행한다. 포스터은 우리 연구소의 하늘 샘이자, 우리 교회 사랑스런 청년 다슬의 작품이다. 발로 만들어도 고퀄, 발로 만들어도 마음을 담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자이다. 아, 글쎄 포스터의 뒷모습 중년부부는 누가 봐도 딱 아는 그들이고! 

 

작년 2022년은 연구소 내적 여정, 꿈작업에 남성 수강자들이 대거 참여한 특별한 해였다. 더불어 내적 여정을 함께 하는 몇 커플이 함께 성장하는 모습에 큰 감동과 보람을 맛보았다. 오랜 세월 해결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않았던 부부 관계의 어려움이 '각자 자기를 돌보며' 서서히 다른 지점으로 가더니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그 지점은 치유와 회복이었다. 내가 요란 떨 일은 아니라 조용히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지만, 남편에겐 호들갑을 떨었다. "나 연구소 접어도 돼. 이것으로 충분히 보람 있고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해."

 

언젠가 중년 부부 세미나를 하게 되면 연구소의 그 벗님들과 하게 될 줄 알았다. 꿈꾸던 모임이었다. 생의 정오를 넘어 오후로 향하는 부부가, 마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몸은 늙어가지만 영혼은 더 깊어지는 여정을 함께 가자고 마음의 손잡는 그런 모임. 손을 잡아도 설레는 것 하나 없지만, 스러지며 깊어질 나날을 그리는 고요한 만남. 교회 집사님들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영성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영성생활을 논하는 곳이 교회여야지, 교회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니, 하시겠지만. 적어도 현재 내게 제도교회는 종교생활에 더 많이 기울어 있고, 영성생활은 연구소를 통해 연구하고 '체험으로서의 교회'로 살고 있는 편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오후의 빛 학교"가 벌써 마지막 시간이다. "오후의 빛 학교"가 있었던 4월 한 달, 교회 가는 길이 참 좋았다. 강의 부담, 모임 이끄는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부담보다 '좋음'이 훨씬 더 컸다. 아, 이렇게 가볍게도 마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지. 심지어 지난 주일에는 에니어그램 유형 설명을 50분에 끊었다. 6시간에 해야 할 강의를 말이다. 2시간으로도 부족하다고 강의 요청을 거절하고 있는데 말이다. 성령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신다는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읽은 말이 큰 힘을 주었다. 저렇게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그 사이에서 무언가 화학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한다. 내 강의가 아니라, 각자 내어놓는 '물고기 둘 떡 다섯 개'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로.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들 말이다.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집사님들이 만들어낸 '좋음'이다.

 

 '사이'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돕는 최선의 방법은 강사로서 무엇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은 것 아닐까 싶다. 3주 세미나 진행하면서 나와 우리 부부의 시간을 돌아보며 얻는 유익이 더 컸다. 하긴 젊은 부부들과 함께 했던 '육아 세미나'에서도 그랬다. 어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성인이 된 채윤 현승이와 나를 생각하게 되었었다. 강의 조금 내놓고, 젊은 부부들이 내놓는 소소하고 진솔한 고민을 들으며 다시 깨닫고 배우게 된 것이다. 역시나 성령은 사이에서 일하신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진행하는데(재미있는 세미나 진행을 위한 필살기이다. 목사 앉혀 놓고 디스 하면 무조건 좋아하신다!) 시작 찬양 부르는 모습을 한 집사님이 도촬 하여 보내주셨다. 오랜만의 기타 JP, 싱어 SS 투샷이다. 사진도 참 마음에 든다. 점점 스러져가는 인생 오후의 빛이 나는 참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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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선교단체 전국간사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있었다. 강사로 내부자 아닌 외부자를, 무엇보다 신학도 하지 않은 여성을 부르는 것도 의외라 여겨지기에 늘 그렇듯 부담이 컸다. 그래도 흔쾌히 수락하고 기쁘게 그 시간을 기다린 것은 몇몇 얼굴이었다. 내적 여정의 벗이라는 말로도 조금 부족한데, 어쨌든 내게 가장 소중한 얼굴은 '내적 여정, 내적으로 연결된' 이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앉았던 내게 일어날 기회도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패밀리 레스토랑 직원처럼 자세를 낮추고 다가와 인사를 건넨 간사님과는 그 어정쩡한 자세로 안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저렇게 아는 얼굴이 많다. 나를 단체에 자주 부르신 시니어 간사님은 "여기서 삼분의 일은 소장님이 만나셨던 얼굴일 것"이라고 하셨다. 신입 간사 훈련으로, 아니면 간사 재교육으로 내적 여정을 여러 그룹 진행했으니 그럴 만하다.

 

광고시간에 기수별 소개 시간이었는데, 죽 나와 서는 여섯 명이 지난 해 짧지 않은 '내적 여정'을 함께 했던 신입간사단이었다. 앞에 나와 섰는데 내가 왜 울컥하고,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뿌듯한 거지? 삼분의 일을 알아도 내 마음에서 가까운 것이지,  찾아와 인사 나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몇 번 강의 들었다고, 나이 많은 강사에게 찾아가 인사하고 그러진 못한다. 그래도 나는 지난 수요일 이후로 마음이 꽉 채워진 느낌이다. 내적 여정으로 만난 분들은 많은 경우 나를 에니어그램을 가르친 '강사'로 기억하겠지만, 내 마음엔 그들이 '수강자' 이상으로 남아 있다. 나눠준 어떤 이야기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가끔은 "잘 살고 있을까?" 떠오르면 짧은 기도를 드리게 되기도 한다.

 

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작고 작은 이 세상, 우리 사는 이 세상 아주 작고 작은 곳"이란 노래가 마음 어디서 자꾸 울린다. 내 마음이 작고 세상이 작다. 작은 마음에 들어오는 이들은 진실한 것을 나눴거나 나눌 것 같은 사람인 것 같다. 적절하게 차려입고, 적절한 말을 주고받으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마음에 남는 만남은 포장지 걷어내고 함께 시간이다.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라고 할까?  '질'의 시간, 진실의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그가 나를 기억하건 말건, 내 마음에 소중하게 담겨 있다. 생각해 보니 가사가 이렇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공포,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알았네, 작고 작은 이 세상"  오, 이거였구나! 내적 여정은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를 꾸미지 않고 나누는 자리이다. 

 

브레넌 매닝은 "참된 삶이란 말이나 개념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당장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진실하게 경험하는 것만이 진정한 삶이고 세상이라면, 세상은 작고 작은 것이 맞다. 나이 들수록 더욱 작고 작은 세상을 살아가야지, 마음먹게 된다. 그래서 자꾸 이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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