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가 학위논문으로 허난설헌의 시 연구를 택한 것은 허난설헌의 시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허난설헌에 감동하기 위해 많은 지식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그 시대배경이나 집안환경에 대해서도 보통사람 수준의 상식이 전부였다. 물론 그녀의 한문실력으로 난설헌의 한시와 직관적으로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가 매혹당한 것은 시 자체의 뛰어남보다는 한 뛰어난 여자를 못 알아보고 기어코 요절토록 한 시대적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논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출처가 분명한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녀로 하여금 대학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충동질한 지도교수는 그녀의 상상력을 가장 경계했다. 영주가 제일 자주 들은 듣기 싫은 충고는 논문을 쓰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거였다. 박완서 <환각의 나비> 중

 
기고글 쓰다 참고하려고 오래된 소설을 꺼내 읽다, 저 부분을 발견하고 혼자 웃겨 뒤집어졌다. 누구라도 옆에 있어야 붙들고 읽어줄 텐데. "이거 들어 봐. 지금 내 얘기야. 대애박, 내가 지금 논문 붙들고 있다 연재 원고 쓰면서 모드 전환 문제로 끙끙거리고 있었거든. 상상력 금지, 상상력 금지, 출처 밝힐 수 있는 정보만! 논문 쓸 때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뇐단 말이지.... 바로 이거라고!" 누굴 붙들고 얘기한들, 속에서부터 빵 터져서 뒤집어진 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쓰던 원고에는 1도 관련 없는 구절에 꽂혀서 낄낄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 허튼 시간만 보내.... 앤 건 맞지만, 적잖이 위안이 되었다. 가끔은 혼자 웃기만 해도 위안이 되니까. 게다가 실은 이번 원고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주제였는데, 어쩐지 글은 술술 쉽게 쓰였다. 이유는 분명하다. 마음의 길을 따라 쓰면 되니까! 
 
영성을 배우겠다고 대학원 입학을 결정했던 때, 논문은 생각 밖에었다. 영성사, 중세 신비주의, 영성신학... 과목만 보고 일단 들어가자! 결정했으니까. 내게 최적화 된, 과목과 교수님들이었다. 논문학기이다. 비논문 학위도 있어서 학점만 채우면 졸업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또 지금 논문 쓰러 온 학생처럼 열심을 내고 있다. 그래서 논문이 잘 써진다거다, 좋은 논문을 쓸 거란 전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논문을 위해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자니 너무나 재미있고, 공부만으로도 기도가 달라져서 에라 논문은 때려치우고 이대로 혼자 공부하며 기도하며 살면 되겠네! 싶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공들여 논문을 써도 누가 알아줄 리 없지만, 모든 것이 달린 것처럼 쓸 생각이다.
 
세월과 함께 만들어온 "정신실식의 상상력 플러스 글쓰기"와 "논문 글쓰기" 사이, 두 글쓰기 사이에서 적잖이 괴롭다. 두 세계에 끼어 괴로운 일은 하나 둘이 아니다. 끼어서 살아온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기도를 배우고 영성을 배우느라 많이 괴로운 시간은 논문과 함께 끝내야겠다. 대학원 들어가기 전, 두 세계를 은밀히 오가며 배우고 읽는 것이 은근 짜릿했었는데 말이다. 학기가 거듭될수록 쪼개진 두 교회 사이에 앉아서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은, 이쪽도 어이없고 저쪽도 어이없는 시간을 사는 게 여간한 일이 아니다. 영성과 영성사, 신비신학과 신비주의 역사를 배울수록 "교회는 하나다!"를 외칠 수밖에 없는데, "한 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역설적이게도 수업에 앉아 있자면 하나의 교회가 얼마나 골이 깊게 갈라져 있는지가 몸으로 느껴진다. 교회가 하나인 것을 확인하는 수업일수록 오늘 이 순간 분열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져 몸이 긴장하고 만다. 몸의 긴장을 마지막 학기나 되어서 알아차리고 있다. 이 긴장조차도 누려야지, 하며 다스리고 있다. 
 
논문, 포기하지 않고 쓸 거예요(쓰고 싶어요). 조용히 기도의 응원을 보내주소서, 벗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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