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화분 위에 감 하나를 내놓았다. 분명 연시라고 샀는데, 다른 애들 다 익어서 후루룩 먹어버린지 한참인데, 도통 물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감이다. 연시가 아니라 단감인가? 연시인가 단감인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새들 먹이로 베란다에 내놓자는 신박한 제안을 JP이 했다. 이걸 기억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해놓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아이들을 유혹할 수 있을까, 잘게 발라 널어둘까, 견과류와 함께 내놓을까, 일단 나도 생각 중이었다. (정말 '생각'을 좋아한다. 생각을 많이 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란 사람.)

 

토요일 오후, 황금빛 시간 골든타임을 꼭 붙들어 산책을 나갔다. 역시나 기우는 빛이 만드는 향연이란, 쌓이고 뒹구는 낙엽 위의 황금빛을 뭐라 형언할 수가 없다. 동네 아파트 큰 나무 밑을 지나, 산길 같은 공원을 지나, 민영환 선생 묘지를 지나, 남의 동네 아파트를 가로질러 탄천에 닿았다. 삐리 삐리 삐리... 지나가는 아줌마를 휘파람으로 유혹하는 새 한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있다. (그래서 산책할 때는 이어폰을 끼지 말아야 한다. 유혹을 당하고 싶으면 말이다.)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는데, 배 부분이 노란 것이 곤줄박이로 추정되는 녀석이다.

 

아무리 줌으로 당겨도 노란 색은 커녕 모양도 잡히지 않지만, 여하튼 배가 노란 작은 새다. 4선 악보 맨 윗 줄에 까맣게 뭐 묻은 것 같은 그것이 곤줄박이로 추정되는 애다. 한참을 그렇게 아줌마 목을 빼놓더니 휘리릭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라졌는데, 그 녀석 찾으러 탄천길 버리고 고물상이 있는 옆길로 살금살금 뛰어가 봤다. 아니나 다를까, 네가 다시 너를 보여줄 리 없지! 넌 늘 이런 식이야! 멀쩡히 제 길 가고 있는 아줌마 마음을 빼앗아 불을 지피고 사라지곤 하지. 

 

어쩐지 이번엔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유혹에 나선다. 감을 자르네 마네, 고민 집어 치우고 통째로 내놓아 보았다. 걸려라, 걸려라, 한 번은 걸려라. 곤줄박이든, 박새든, 어떤 녀석이든 걸려라.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멀리서 새소리가 들린다. 누구든 낚일 것이다.  

 

 

 

어느 새

모든 새는 어떤 새다. 산책길마다 깜빡이 없이 난입하여 내 정신을 높은 곳으로 끌고 갔다 사라지는 새가 있는데. 오늘 그 새는 며칠 전 그 새가 아니고, 며칠 전 나를 만나줬던 그 새는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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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날아든 어느 새

오전 줌 강의를 마치고 혼자 유유자적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대추 맛집, 대추 맛집, 여기가 대추 맛집." 영혼으로 들었다. 눈에 보이는 아이패드를 들고 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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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례

대추 말리던 바구니가 텅 빈 지 오래다. 한 바구니 가득했던 대추를 새 친구들이 죄 먹어 치웠다. 씨 하나 남기지 않았다. 빈 바구니는 어쩐지 치우고 싶지가 않아 그대로 두었다. 곡물을 좀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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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않은 기쁨

해 지기 직전의 빛을 받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시간 딱딱 맞추는 일이 쉽지 않다. 일이 있을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집에 있는데도 그렇다. 박차고 일어나 나가면 되는 것을 이것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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