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가 어버이날 꽃을 사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알지? 내가 선물에 진심인 거. (알지! 우리 현승이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가족에게든 친구에게든 진심이지. 오직 그 사람에게 의미가 될 선물이라면 가격을 따지지 않지. 지나칠 정도로 따지지 않지!) 그래서 꽃을 사는 게 싫고 아까워서가 아니야. 나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애. 어버이날이라고 다들 꽃을 하나씩 사는 게, 그게 똑같이 꽃을 받는 게 의미가 있어? 만약 엄마한테 의미가 있다면 괜찮고, 그거면 충분히 의미가 되는 거고! 그래서 묻는 거야. 엄마가 어버이날 꽃 받는 게 의미가 있어? 엄마도 남들 한다고 다 하는 거 안 좋아하잖아.
어, 의미가 있어. 당장 이제 오늘부터 친구들 카톡 프사가 어버이날 꽃으로 막 바뀌거든. 이게 그렇더라고. 그게 나만 못 받으면 좀 쓸쓸해. 그러니까 그냥 해 줘. 엄마한테 의미가 있어! 화려하고 큰 꽃다발 아니어도 돼.
틀, 형식의 중요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까 하다 말았다. 리추얼과 상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되지, 꼭 주일에 예배에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정성은 없고 형식만 남은 종교 행위가 문제이지,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담는 형식, 제도, 리추얼을 필요로 하는 몸을 가진 인간이라는 얘기도... 막 하고 싶었는데 참았다.
의미를 모르겠으면서도 이렇게 적절하게 마음에 드는 꽃다발을 준비했다. 분홍 카네이숀과 노란 장미에 냉이꽃이라니! "아무 꽃" 같은 들꽃이 제일 좋은데... 냉이꽃, 이 아름다운 아무 꽃이 들어 있으니!
며칠 산책에 실패했다. 비가 그쳤나 싶어 나가면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비 맞으며 걸을까, 들어가 우산을 챙겨 나올까 갈등하다 생각보다 차거운 비에 집으로 들어오기를 두세 번. 완전히 그친 것을 확인하고 밤산책에 나섰다. 길은 젖었으나 적당한 기온, 적당한 바람에 며칠의 결핍감이 싹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탄천 길 좋다. 아, 좋다.
향기로 존재감 뿜뿜하는 아카시아가 코와 눈과 마음을 잡아끌었다. "하나님, 아카시아 향기가..."로 시작했다는 어머니의 대표기도가 다시 생각난다. 아카시아 향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감성과 영성이 우리 어머니에게 있다는 것, 아는 사람이 있을까? 어머니 영혼의 아름다움을 나만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어머니는 아카시아꽃이다.
탄천에 찔레꽃이 있었다고? 길 오른편에 흰꽃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찔레꽃이다. 몇 년을 산책하며 처음 보는 것 같다. 찔레꽃은 우리 엄만데... 어릴 적 목사관 화단에 커다란 분홍 찔레꽃. 그 꽃을 꺾어 강단을 장식했던 엄마의 똥손이 기억난다. 어린 눈에도 참 볼품없이 꽂았던 것 같은데... 손이 똥손이라고 마음까지 그랬던 건 아닐 텐데. 꽃을 사랑하고, 꽃으로 강단을 장식하던 엄마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 아는 엄마, 나만 기억하는 엄마이다. 분홍 찔레꽃의 기억에 더해 하얀 찔레꽃은 엄마 돌아가시고 울며 울며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노래이기도 하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아프게 내게 오시네
밤다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사실 내가 어렸을 적에 좋아하고, 동요대회 나가서 부르기도 했던 같은 멜로디의 '가을밤'이고.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우리 엄마는 찔레꽃이다.
그렇게 걷노라니 "아, 내일이 어버이날이구나!" 엄마는 안 계시고, 아픈 어머니의 어버이날을 제대로 챙길 수가 없는 형편이네. 그리운 찔레꽃 엄마, 그리운 아카시아꽃 어머니... 가슴이 둔탁하게 아프고 흐르지 않는 눈물이 몸 어딘가를 맴돈다. 고개를 떨구고... 그렇게 걷노라니 바닥에 한가득 비에 젖은 토끼풀이 싱그럽다. 땅바닥에 딱 붙어 비 젖은 모습이, 젖었으나 이제 비 그쳤으니 다시 뽀송해질 토끼풀이 꼭 나 같다. 찔레꽃 엄마를, 아카시아꽃 어머니를 그리워 목을 빼고 쳐다보는 나같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에필로그는 "인생 후반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진짜 여행이고 여행지는 네팔이다. 독자들은 어쩌면 지나칠 이야기이겠으나, 가장 무게가 실린 내용은 이것이다. 네팔에서 지낼 1년 동안 머리 염색을 끊겠다는 결심이다. 30대부터 흰머리인지 새치가 나서 일찍이 뿌리염색을 시작했다. 그전까지 말총머리로 굵고 검고 빛나는 머리칼이었는데... 한두 달에 한 번 하는 염색을 건강한 모발이 견디지를 못했다. 언젠가 염색을 끊으려 했는데 현승이가 성인 될 때까지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했는데, 성인이 되었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꾸역꾸역 하고 있다.
이래저래 시기를 놓쳤더니 뿌리 쪽이 또 하얗다. 동네 두피관리 샵 같은 게 생겼는데 "뿌리염색 25,000원"이라고 쓰여 있다. 가격도 좋고, 집 앞이니 산책 나가는 길에 예약을 하려고 들어가 보았다. 예약은 무슨 예약, 바로 지금 할 수 있다고 한다. 할 때가 한참 지났으니 이게 웬 횡재냐, 덥석 앉았다. 열심히 할 일을 하는 주인장에게는 미안한데 한 시간 반 정도 앉아 염색하는 동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신상 캐기와 영업, 영업과 신상 캐기를 오가는 대화에 온갖 기를 다 빨리고 나왔다.
왜 이렇게 되도록 염색을 안 한 건지, 그러다 바빴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신상을 물어가며 조여 들어오는 대화. (직업을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게 어렵다. 심리치료사, 연구소 소장, 작가, 강사... 뭐라 소개해도 깔끔하게 끝나는 법이 없다.) 손톱 관리를 좀 해드릴까, 두피 케어는 이래서 좋다, 심지어 동충하초 술을 한 잔 마셔보겠느냐, 동충하초 술과 함께 두피 관리를 받으면 머리숱이 이렇게 많아진다, 동충하초가 몸에 이렇게 좋다, 비싼데 병원비 내는 것보다 낫다... 칼같이 자르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듣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친절함으로 에너지를 다 탈렸다.
배가 고프고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고... 뭔가 먹어야 하는데 집에 당장 먹을 것이 없다. 애들 뭘 먹일지는 생각도 안 나는데 다행히 현승이는 냉동실 고기 꺼내어 굽고 있고, 채윤이는 밥 생각이 없단다. 냉장고에 있는 건 야채... 샐러드만 먹을 수는 없는데... 탄수화물이 필요한데! 몸이 빠르게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파스타 면을 삶아서 파스타 샐러드를 만들었다. 정말 나를 위해서, 나만 위해서 만들었다. 생각 없다던 채윤이가 달라붙어 먹기에 포크질에 신경질을 담았더니 조금 먹다 나가떨어졌다.
좋아서 하는 요리,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요리하는 행복도 찾아야겠다. 평생 요리해 놓고 "맛있어? 맛있어? 맛이 어때?" 반응과 피드백, 인정과 칭찬에 울고 웃는다. 좋아서 해놓고 내 방식의 반응을 강요한다. 이거 신혼 때 벌써 깨달았던 건데... 나는 남편을 위해 하는 요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요리는 당신이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라고 천진한 T가 천진난폭하게 현타를 날렸었는데 말이다. 아, 사랑은 주는 사람이 정의하는 게 아니야. 받는 사람이 사랑으로 받아야 사랑이야! 이때 이후로, 이 큰 깨달음으로 강의에서 우려먹고 있지 않은가.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배려를 선제적으로 투하하고 피해의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F짓은 (다시) 좀 자제하자.
하나충신교회 사경회를 얼마 앞두고 목사님께 기도제목을 묻는 메시지가 왔다. 기도제목을 말하는 것이 조금 어렵다. 한두 줄 말로 정리하는 게 쉽지 않다. 뭐랄까, 하나님과 조금 사무적 관계가 되는 느낌이랄까.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사이인데, 에헴... 친하지 않은 척 공개적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다. 하지만 기도제목을 물어주는 질문은 대개는 좋다. 특히 이번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말씀 준비를 위해 몇 번 통화하면서 언어 너머의 기도제목 알아차릴 분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경회를 준비하는 은밀한 하나님과의 속삭임을 있는 그대로 들려달라는 요청이었다. 기도제목을 정리하며 내 마음을 더 잘 알아차렸고, 목사님과 교우들이 기도로 준비하고 계시다는 확신에 힘이 나고 감사했다.
<기도제목> - 제가 전할 수 있는 만큼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준비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인간적인 욕심이 되어 저를 도구로 쓰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방해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메시지를 기쁨과 자유로움으로 준비하고 싶습니다. - 4월에 일정이 많아서 몸이 좀 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남은 며칠 동안 몸의 건강을 위해서도 더 기도하며 돌보겠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 아직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교우들이 마음과 저의 마음이 주파수가 잘 맞춰서 피차에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 함께 기도로 준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고 있는 모든 강의가 마음과 영성에 관한 것이기에 당당할 수가 없다. 마음과 영성은 '지어져 가는,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확신 있는 답을 내놓을 수 없고, 주로 내가 겪어온 이야기를, 겪어내며 기도하고 공부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걸어가자고, 우리 모두 순례자이고 영적인 여정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디 가나 비슷한 얘기를 하고 또 하게 된다. 강의가 내게 유익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말하면서 확신이 든다. 말하면서 다시 결심하게 된다. 그래, 맞아! 이렇게 가는 거야. 앞선 영성의 선배들이 그러하셨어. 솔직히 내 강의에 내가 은혜받는다.
내 강의에 스스로 은혜받는 것까지는 해봤다. 그리고 마이크 내려놓고 내려와서는 부끄러움에 회개 기도도 많이 드렸다. 이번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 신앙 사춘기와 영적 발달 얘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 하는 분(들)이 있다. 아이의 신앙에서 어른으로 가기 위해서 부모를 넘어서야 하듯이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지도자의 그림자를 마주해야 하고, 나의 여정은 거기서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많은 분들이 여전히 그 상처에서 나오는 피고름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자꾸 말하고 쓰면서 나는 사실 내 영적 여정 최대의 빌런인 그분을 용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용서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만남을 주선하셨다.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회개했다. 남편이 목사로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내 원망과 분노의 죄를 남편이 받는 것 아닌가 싶어서. 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분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훨씬 실망스러운 그분의 노년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렸다. 진심으로 그분의 평화를 빌게 되었다. 그분의 행보로 인해 새롭게 피눈물 흘리는 양 같은 교인들이 있기에 더욱 아픈 요즘이기도 하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너머 가여움에 겨운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금, 토 저녁 집회 후 기도회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말씀을 전하고 내려와 목사님이 인도하는 기도를 따랐다. 그냥 기도하게 되었다.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감정적 선동을 하지도 않는 기도회 인도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올라왔다. 내가 했던 말을 요약하셨을 뿐인데,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고 기도하게 되었다. 첫날은 신앙 사춘기 주제였는데 내 인생의 빌런, 그 목사님을 축복하게 되었다. 둘째 날은 '여성의 하나님' 이야기를 나눴고 하나님의 모성성에 기대어 이땅의 여성들, 낮에 만나 식사했던 집사님들, 연구소의 벗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거의 2년 전, 말씀을 전하고 내려와 이어진 기도회의 충격으로 며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있다. 몇 개월 준비한 말씀이었는데, 혹여 해석 상 오류가 있을까 하여 남편에게 신학적 검증을 받고 또 받고 했었다. 청중 가운데 내로라 하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여럿 있었기에 더욱 부담이 되었었다. 이어진 기도회는 내가 전한 본문에 대한 인도자의 해석으로 진행되었다. 실은 가볍게 흔히 겪는 일이다. 여성이며 비목회자로 겪어낼 몫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날은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몸에 생긴 발진은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호된 시련의 시간이었다. 이후 내가 내 편이 되어주는 행동을 했고, 시간이 지났고, 그야말로 치유가 되었다. 그날 기도회 인도를 했던 분의 이름을 어디서 봐도 이제 심장이 쿵 떨어지거나 박동이 빨라지진 않는다.
이번 집회에서 두 번의 기도회는 정확히 그 일에 대한 치유였다. 나를 초대하고 기도회를 인도하신 목사님은 당신의 방식대로 하던 바를 하셨겠으나, 그것이 나를 치유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시는 분이니 누군가의 존재로 누군가를 치유하신다. 좋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면, 늘 하는 방식이 치유적이어야 한다. '치유하는 현존'이 되어야 한다. 사경회의 주제가 "봄처럼 피어오르게 하소서"였는데, 처음에는 나와 좀 안 맞다는 생각을 했다. 내 메시지는 좀 무겁고 추운데... 삼일 시간 동안 적어도 내게는 새로운 생명이 불러일으켜졌다. 목사님께서 손글씨로 편지를 주셨는데, 사흘 치유와 소생의 정점이다. "안심이 됐답니다"라는 한 문장이 내 영혼을 얼마나 안심시키고 위로를 주는지...
꽃새우전을 부쳐봤다. 마침 잘 손질된 꽃새우를 선사받았고, 마침 꽃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계절이고, 마침 찬란한 슬픔의 아카시아향이 온 감각을 자극하는 시절이라 꽃, 새우, 傳을 만들어 보았다.
우리 어머니는 배우기만 하셨으면 시인이거나 학자가 되셨을 텐데. 언젠가 아카시아 향이 진동하던 어느 때 교회에서 대표기를 하셨었다. "하나님, 아카시야 향기가..."로 기도를 시작하셨다고. 교회가 아카시아 나무 그득한 동산을 등지고 있었다. 그냥 기도가 그렇게 나왔다고. 기도에 은혜 받았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고...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하냐고 사람들이 다들 나 대학 나온 줄 안다고 자랑이 끝이 없으셨었다. 시인 같은 면모에 지적으로 탁월하신 분이다.
비가 오고, 그칠 기미 없이 종일 흐리고, 아카시아 향이 좋은 계절이고, 온통 어머니 생각이 떠나질 않고... 괜히 꽃새우전을 부쳐봤다.
느긋하게 걸으며 들꽃 관찰하고, 그 녀석들 이름 검색하고, 자꾸 불러주며 외우는 것 좋아한다. 티키타카 농담 따먹기로 하염없이 시간 보내는 것도 좋아하고. 옷 구경 하는 거, 언제 어디서나 넋을 앗아가는 즐거운 일이고. 강의와 글쓰기 관련 책을 읽으며 꽂힌 한 주제에 파고드는 재미는 세상 비할 데 없고. 강의나 글쓰기와 아무 상관 없는 책을 아무 걱정 없이 읽는 날이 있는데 '이게 사는 거지' 싶게 행복하고. 정말 잘 볶고 정성스럽게 내린 핸드드립 커피 한 모금에 뇌가 열리고 혀가 춤추는 느낌, 진짜 좋아하지. 혼자 있는 거실에 볼륨 높이 올리고 듣는 바흐 음악은... 거의 천국에 닿는 기쁨이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천천히 차근차근 해치우는 것도 좋아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일 많은데... 요리 참 좋아하는 것 같다. 먹을 사람 취향 분석하고 저격하여 메뉴를 정하고 만들고 함께 먹는 것, 참 좋은 일이다. '연어 파피요트'를 했고, 함께 맛있게 먹었고. "삶은 요리 안 죽었네"하는 평을 들었다. 요리하는 것 좋아하는데, '삶은 요리 정신실 선생'으로 불리는 것은 진짜 생의 의미, 존재의 이유를 확인받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일이다.
지난 3월 다녀온 뉴질랜드 여행을 위한 단톡방 이름이 "고고씽 뉴질랜드!"이다. 말하자면 어제는 뉴질랜드 남섬 원정대 해단식이었고. 5월 "고고씽 유럽!" 출정식이기도 하다. 서쉐석 목짠님 부부와 맛있게 식사하고 식사보다 더 맛있는 대화를 나눴다. 메뉴는 연어 파피요트, 고사리 명란 파스타, 샐러드였다. 삶은 요리 정신실 선생이 오랜만에 앞치마 좀 둘러봤다.
이 글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신앙 안에서 잘 늙어가고 싶은 중년 여성과 그가 따르고 싶은 한 노인의 가상 대화입니다. 중년 여성인 ‘정 선생’은 심리치료사인데 모태신앙으로 신앙의 열정이 남다르며,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롤모델로 삼은 80대 은퇴 교수 ‘최 선생님’은 60대에 예수님을 만난 자칭 ‘초보 신자’입니다. 신앙의 연수는 짧지만, 평생 마음을 연구하는 상담학 교수로 살았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습니다. 허구이기에 실제 대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글을 쓰게 된 현실적 고민이 있고, 그리하여 찾고 싶은 진실이 있었습니다.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허무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물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은 많은 ‘정 선생’이 겪고 있는 신앙적 실존적 문제입니다. 최 선생님의 조언을 따라, 인생의 후반을 잘살아보려는 노력은 그야말로 중년 구도자의 진실에 대한 갈망입니다.
<시니어 매일성경>에 연재하는 중에 ‘최 선생님’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독자의 연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직접 만나는 것이 어렵다면 그분이 쓰신 책이 있는지 알려달라고도 하셨습니다. (이렇듯 철썩같이 논픽션으로 읽어주시니다니요!) 모델이 있기는 합니다. 저의 고민을 마음 다해 들어주시고, 사려 깊은 조언을 주시는 선생님이시죠. 무엇보다 성찰적인 분이십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가 아니셨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신앙생활 해 오신 노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과 믿음의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분 앞에서 복음을 아는 제가 부끄러웠고, 그러기에 더욱 복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잘 늙어가고 싶은데, 닮고 싶은 노인을 찾기는 힘들고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반면교사만 눈에 띄는 안타까운 현실이 조금 슬펐습니다.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것만 같은 ‘최 선생님’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나왔지 싶습니다.
질문하는 ‘정 선생’은 인생의 오후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찾는 구도자입니다. 중년 이후의 삶을 어디로 초대하시는지 이정표가 될 만한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중년 영성에 대한 ‘최 선생님’의 답은 이 말씀에 대한 인문학적 변주입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인생사용설명서이지만, 노령화를 비롯한 현대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에 명쾌한 모범답안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깊은 고민과 지혜로운 적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최 선생님’의 입을 빌려 심리학, 철학 등 다양한 책을 인용하였습니다. 인용된 책까지 찾아 읽어주시는 독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후 4시 반 경에 찍는 사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낮 동안 빛을 받은 만물이 오후 해질녘쯤 안에서부터 내는 빛으로 뚜렷한 선과 색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요? 노을이 물드는 저녁, ‘최 선생님’과 ‘정 선생’ 두 여인 곁에 앉아 대화에 귀 기울여주신 <시니어 매일성경>의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도록 제안하고 격려해주셔서 제 안에 있던 ‘정 선생’과 ‘최 선생님’을 꺼내어 주신 서재석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면을 허락해주시고 단행본으로 만들어주신 성서유니온 출판부에도 감사드립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성외리 한산제일교회, 목사관. 내 고향집... 번짓수... 도 알았는데 생각이 안 나네. 군산은 한산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여서 가장 먼 곳이었다.군산은 배를 타야 가는 곳이었다. 장항으로 가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넜다. 그릇을 새로 산다고 엄마 아버지가 군산에 가야 했었고, 늘 입이 헐곤 했던 아버지가 입에 바르는 약을 사러 군산에 갔다. 그 먼 군산에 나는 피아노를 배우러 다닌 적도 있다. 초등학교 중학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배를 타고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한산에서 자란 내게 군산은 가깝고도 멀고, 꽤 중요한 곳이었는데... 그저 복성루 짬뽕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중요한 조각이었는데.
운전하고 내려오느라 힘드셨겠다는 목사님의 인사에 괜찮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툭 나온 말이다. '제가 자가 운전으로 내려올 수 있는 남방 한계선이 군산이에요. 적절한 운전 시간이었어요.' 2시간 30분 정도 걸리니 정말 그렇다. 첫날 집회를 앞두고 식사하면서 목사님께서 "군산이 전라도이지만 충청도 인접이라서요. 충청도 정서와 매우..."라는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알아들었다. 아! 우리 엄마 사투리는 참말로 충청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는 그 무엇이었지! 순간 많은 기억과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충청남도 아래쪽 끝의 한산, 전라북도 위쪽 끝의 군산. 군산은 한산에서 도 경계를 넘어가야 닿는 곳이었구나!
실은 작년 여름 교회 전교인 수련회를 거의 한산이라 할 수 있는 '서천'에서 했었다. 수련회에서 맡은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서 꽃을 사러 군산에 갔었다. 차로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정말 가까운 곳이었다. 배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충청도와 전라도를 갈랐던 금강에 다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군산은 그냥 복성루 짬뽕의 군산이었지 내 어릴 적 군산이 아니었다. 첫날 강단에 올라 교우들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어떤 지점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어떤 표정들에서 익숙한 무엇을 느꼈다. 아, 여기 한산과 멀지 않은 곳이야! 그 순간 엄마와 아버지와 내 어린 시절과 한산의 교회와 목사관이 마음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군산에서 사경회 강사로 며칠을 보내면서 어릴 적 한산에서의 부흥회 생각이 났다. 부흥강사는 늘 우리집에 머물곤 했는데, 끼니때마다 잔치도 그런 잔치가 없었다. 부흥회는 엄마와 집사님 권사님에게는 요리실력 부흥회였다. 끼니마다 산해진미였다. 우리 집은 바로 호텔이 되었다. 말썽꾸러기 동생은 부흥회 때마다 외갓집이나 이모집으로 유배되어 갔고. 참으로 극진했었다. 부흥강사, 목사를 향한 극진함이 그리 위험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돌아보면, 목사였던 아버지를 향한 극진함이 목사가 늦게 얻은 딸인 내게로 흘러왔고, 생애 초기에 나는 큰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목사의 딸인 것이 부끄러움도 결핍감도 아니었다. 신앙 사춘기로 온갖 반항의 가슴앓이를 했지만 결국, 더욱, 오히려 더욱 교회의 딸인 나를 확인하는 자리로 돌아온 것은 어릴 적 받은 극진한 사랑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경회 강사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극진함은 세심함이었다. 호수 뷰의 호텔 숙소며, 부러 하루 오전 시간을 텅 비워 잡아주신 일정은 세심한 극진함이었다. 생각지 못한 선물이었다. 느긋하게 호숫가 산책을 하고(주일 아침에도 6시 전에 일어나 느긋하진 않아도 여유는 있는 이른 아침 산책을 했다) 볕 좋은 창가에서 강의 숙지와 독서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은파호수공원 산책길은 다양하기도 했다. 호수 바로 옆으로 걷노라면, 어느새 오솔길, 오솔길을 걷노라면 늪지대를 지나는 듯한 길. 걸으면 무조건 행복해지는 내게 최적의 쉼이었다. 숙소 공간도, 텅 비워진 시간도 목사님의 세심한 배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딜 가든 목회자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으로 내상을 입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분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전하게 된다. 한때 존경의 대상이었으나 어느 순간, 아니 서서히 빌런이 되어간 그 목사들은 원래 그런 존재였을까. 잘 위장하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더는 정체를 숨기지 못하게 된 것일까.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그런 존재가 된 것일까. 그냥 '고산병'이라고, 높은 산에 올라가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그 병과 같다고 진단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권력이 생기고 자리가 높아지면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라고. 나는 그것을 '황금투사'라고 이름 붙이곤 하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 이야기를 해야 했다.
목회자에 대한 극진한 대접이 고산병을 낳고, 황금투사의 드라마가 된다. 위험하다.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시절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 지도자, 특히나 영적 지도자를 향한 극진함은 배우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나를 추앙해요!"라고 말하는 염미정의 말에 알콜중독자 구씨는 치유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염미정을 추앙하는 일은 염미정이 아니라 구씨 자신을 위하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추앙하는 순간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앤 율라노프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더 큰 권위에 연결되어 존중하며 성장하고픈 욕구가 있다. 그 욕구는 나를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 향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닿는 가교가 된다. 기꺼이 두려움 없이 존경하고 극진하게 대할 대상이 없어 슬픈 시절이다. 그런 대상 따위 필요 없다는 상처 입은 자의식이 더욱 슬픈 것인지 모르겠다.
한산과 군산의 사랑을 생각하고, 어느 산 정상 근처에서 혼미한 정신으로 헤매고 있는 고산병 환자를 생각한다.
<뉴스앤조이>와 여기 일하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늘 마음이 쓰입니다. 반 기독교 단체로 규정되어 겪는 사법적 다툼 등 물리적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몇 년 전에는 뉴조 사무실 앞에서 음향기기 동원해 시위를 이어가던 집단이 있었는데, 그 악의적 소음을 어떻게 견디며 일하나 싶었었죠.) 소수자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취재하며 겪는 정서적 부담은 어떻게 해소하고 있는지.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입니다.추천하는 이 책은 <뉴스앤조이>가 교회를 사랑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정을 담아 추천사를 썼는데, 많이 읽히며 좋겠습니다.
추천사
정신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 <신앙 사춘기> 저자
교회를 떠나 교회가 되다
이 책에 기록된 다섯 교회 스물아홉 명의 울분에 찬, 슬픔에 겨운 고백은 교회 분쟁이라는 이름의 교회 사랑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떠나 교회가 되다>라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어딘가로부터 떠나왔다면 어디에 도착했다거나, 최소한 가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을. 어디를 떠나왔는데 그것이 되었다는 게 좀 이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알아듣습니다. 떠나온 교회가 외적 장소이며 동시에 마음의 처소이기에 그렇습니다. 함께 예배하고, 구역모임을 하고, 손을 맞잡고 기도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담겨 있는 마음의 처소입니다. 사람들이 담긴 마음의 보고(寶庫)입니다. 그 모든 일로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던 마음의 성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곳을 버리고 다른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사랑을 떠나 사랑이 되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말에 담긴 진심을 가늠할 방법은 없지만, 이 책 떠나온 이야기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단이니 뭐니 하는 말로 이분들을 막고 쫓아내는 이들도 ‘교회 사랑’의 발로라고 하니 도대체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영성 깊은 정신과 의사 스캇 펙(Morgan Scott Peck)은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영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해 나가는 의지’라고 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설레고, 맹목적으로 끌리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마음, 뭔가를 소유해야만 채워지는 욕망이 아닌 ‘의지’가 바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나와 타인의 성장을 위해 나를 확대하는 의지라고 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말이 좋아 확대지, 나를 찢는 일입니다. 그러니 김영봉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픕니다.
여기 이 교회 사태에 연루된 이들 중 처음부터 투사였던 이는 없습니다. 목회자의 범죄가 드러난 이후 교회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힘든 상황이 전개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의 비리를 알게 되어 받은 첫 충격은 뒤에 오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목사의 처신, 이를 덮으려는 무지막지한 집단적 저항, 그야말로 교회 사랑의 발로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전쟁이 되고 맙니다. 본의 아니게 이 싸움에 휘말린 이들은 전쟁터를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교회의 분열은 막아야겠기에, 피해자들을 외면할 수 없기에 결국 멈출 수 없는 전쟁이 됩니다. 진실에 눈을 뜬 이들은 오명을 무릅쓰고, 의지를 다하여 자기를 찢으며 길이 없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책은 눈멀었던 옛사랑을 떠나온 이야기입니다. 정직한 절망을 통과하며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끌어안고 큰 사랑을 향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떠나 말씀이 되다
목사 한 사람의 범죄 또는 성찰 없는 잘못에서 이 아픈 이야기들이 시작한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놀라움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을 부추기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이 목사의 ‘말’이라는 사실 역시 모르던 바도 아닌데, 새로운 충격입니다. 길게는 수십 년 짧게는 수 년 동안 목사님의 ‘말씀’을 먹고 살았던 성도들입니다. 이제 목사의 그 ‘말씀’은 분쟁에 기름을 붓고 성도들을 사지로 몹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떠나온 곳은 교회이며 동시에 목사의 ‘말’입니다. 이 왜곡된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영성적으로 홀로서기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복(福)과 저주를 무기 삼아 성도를 옭아매는 목사에게 휘둘렸던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이것이 분쟁에서 얻은 유익이라 한다면 대가가 크기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 목회자의 범죄가 드러나기 전부터 ‘설교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거나 더는 설교를 들을 수 없어서 예배당을 뛰쳐나가고 싶었다는 인터뷰이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말을 감지하는 귀가 진실을 보는 눈보다 먼저 열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떠나온 말’들은 왜곡된 신학과 가르침들이지만, 한때의 사랑과 열정을 표상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 언어를 버리는 일은 그 시절의 나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여 어렵고 아픈 일입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들이기에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죄다 갖다 버리는 것이 능사도 아닙니다. 버릴 말을 버리고 취할 말을 취하는 것은 떠나온 교회 시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화해하는 치유 작업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과거의 사건은 그것을 회상할 때마다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습니다. 과거의 사건은 ‘다른 환경, 다른 자리’에서 발화되는 그때마다 새롭게 쓰입니다. 혼자 회상만 하거나,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방식으로만 이야기된다면 좋은 개정판이 되기 어렵습니다. 어느 자리에서, 누구의 질문에 응하느냐에 따라 경험은 다르게 진술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이 책에 담긴 인터뷰가 하나의 치유 작업으로 보입니다. 《교회를 떠나 교회가 된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회복적 정의’라는 렌즈로 바라보는 기자의 질문이 참 고맙습니다.
기사를 떠나 서사가 되다
교회 문제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기사화되는 것에 위로받는 것을 봅니다. 육하원칙에 따라 사실관계를 밝히고, 때로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의 역할이 본질상 정의를 세우는 일이기에 그렇겠지요. 거기서 한 발 나아가 분쟁을 겪은 교인들의 ‘마음’에 주목한 인터뷰 기사라니. 마음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가 기사의 형식을 빌어 여기 우리 들려집니다. 인터뷰에 응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께는 또 하나의 개정판 작업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치유의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힘든 이야기를 하염없이 듣고 글로 정리하는 노고가 어땠을까,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저자 구권효 기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약자의 고통을 담아낸 정의로운 기사, 회복의 염원을 담아 쓴 정의로운 글이 평화의 기도로 다가옵니다. 분쟁 과정과 소송결과가 아닌, 그것을 겪어낸 개인의 서사가 누군가에게 질문이나 답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실망한 교회를 떠날까 말까 망설이는 분에게, 갑자기 알게 된 목회자의 범죄를 알려야 하나 덮어야 하나 고민하는 분에게, 어떤 식으로든 교회에 관한 고민을 안고 계신 분들께 말이지요. 목회자 한 사람의 거짓말, 횡령, 성폭력, 표절같은 범죄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리는데 이보다 좋은 책이 없습니다.
25주년 결혼기념일이다. 남편 제주살이 하는 동안 잠시 들러 찍은 사진 배경이 제주도 신혼여행 사진과 겹친다. 오른쪽 사진의 제목은 "늙은 우리"이다. 마음에 든다. 늙은 우리와 젊었던 우리가 다 마음에 든다. 오늘 묵상 본문 말씀이 시편 1편이다. 25주년 잘 살았고, 잘 견뎠고, 잘 늙었고, 앞으로 이렇게 늙어가라고 주시는 그분의 선물같다. 남편과 함께 나누는 아침 묵상에 이런 글을 적었다.
그대,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수밖에! 죄악 소굴에 들락거리길 하나, 망할 길에 얼씬거리길 하나, 배웠다고 입만 살았기 하나. 오직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밤낮 성경말씀을 곱씹는 그대! 에덴에 다시 심긴 나무, 달마다 신선한 과실 맺고 잎사귀 하나 지는 일 없이, 늘 꽃 만발한 나무라네. (시1:1-3 메시지성경)
결혼 25주년 기념일입니다. 25년의 기쁨과 슬픔이 마음을 다시 훑고 지나갑니다. 장신대 도서관에서 책을 싸들고 나오며 "신학교 가지 않겠다, 목회자 되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시작된 결혼인데, 지난 25년의 부부생활, 가정생활은 목사가 된 남편의 여정으로 굴곡진 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빠가 목사가 되지 않았으면 겪지 않았을 수많은 일들을 겪어내며 우리 가정은 고유한 무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상처는 존재의 무늬입니다.
주님, 결혼 25주년 기념일 아침에 함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부부로 성장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성경을 사랑하고, 목사의 책임감으로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이어서 저의 오늘이 있습니다. 남편이 목사였기에, 피눈물 흘리며 지켜야 할 제도적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제가 오랜 시간 영성의 길을 돌아돌아 여기 다시 말씀을 묵상하는 자로 있습니다. 주님, "말씀에서 솟아나는 기도"의 맛을 알게 된 지난 25년의 시간이 감사합니다.
남편의 길을, 저의 길을 이끄셔서 인생 남은 날 더욱 저희들 자신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옵소서. 생의 전환점을 맞은 남편이 이 5월의 시간을 지나며 자기다운 목회, 자기다운 삶을 사는 소명의 길을 잘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아침마다 말씀으로 말씀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안녕, Jung 쌤이야. 너는 네 MBTI 유형이 어때? 마음에 들어? 혹시 되고 싶은 유형이 있어? Jung 쌤은 되고 싶은 유형이 있었어. 내 유형 ESFP가 대략 마음에 드는데, 마지막 P만 J였음 좋겠더라고. 그래서 ESFJ를 선망했어. 시작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를 하고, 처음 세운 계획을 바꾸지 않고 하나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J들이 그래 보였거든. “내 이 재능과 성격에 J이기만 했으면 인생 성공인데!” 싶었던. 재미 추구, 긍정적인 것에만 꽂히는 ESFP의 환상 같은 자아팽창이었어. 암튼 부러운 유형이 있지 않아? 부러운 유형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우월한 것으로 보이는 유형도 있어. 그런가 하면 나쁜 유형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거 없다는 말은 지난 번에 했지? 다시 말하지만 MBTI 유형에는 좋고 나쁜 성격이 따로 없다는 거!
우리가 MBTI에 이렇게나 꽂히는 이유가 뭘까? 주변에 MBTI 과몰입 친구 하나는 꼭 있잖아. “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내 생긴 그대로 이해받고 싶은 마음 때문일 거야. 한마디로 하면 “나는 누구지?” 하는 질문에 답을 찾고 싶은 거겠지. “나는 누구인가?” 참 어려운 질문이야.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고. 이걸 묻기 시작했다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고 봐도 좋아. MBTI는 이 어려운 질문에 어느 정도의 답을 주거든. 나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면이 있지.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의 모양을 알려준달까? 그렇다고 MBTI 유형으로 내가 다 설명되는 것도 아니야. 나는 누구이고, 인간이란 무엇이지?
얘기가 너무 멀리 왔나? 그런데 필요해. 질문하는 것이 필요해. 성경이 인간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주는 게 하나 있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졌다는 거야(창 1:26-27).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 모양을 보여주는 MBTI 성격유형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있을까? 어떨 것 같아?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나를 속속들이 아는 분이시니까 나의 외향성 또는 내향성은 그분의 선물이야. 내 성격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실 이런 얘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썩 와닿지는 않지?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품에서 외향성과 내향적인 면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물론 영이신 하나님을 인간적 성격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우리 안에 그분의 흔적이 있으니까!
외향형은 밖을 향해 에너지를 쓰면서 동시에 충전하고, 함께 교류하면서 더욱 힘을 얻어.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외향 에너지가 보이는 것 같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주어가 “우리, 우리, 우리”야. 벌써 세 분이 함께 계시며, 창조의 계획을 함께 세우시네. 그리고 바로 행동에 옮기셔. 사랑과 창조적 에너지를 외부로 퍼부어 우주를 만들고 지속시키고 계셔. 그 창조물이 우리 눈앞에 이렇게 있잖아! 봄이 되면 움트는 새싹, 시원하게 내리는 여름 소낙비, 맑고 예쁜 가을 하늘, 솜처럼 내리는 눈. 자연은 물론 내 몸 자체가 창조물이니까 말이야. 이렇게 만들어놓으시고는 “아, 참 좋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좋아!(창 1:4)” 막막 표현하시네. 영락없는 외향형의 모습이야. 너의 외향적 능력은 하나님 닮음의 표시야.
반면 엿새 동안 창조의 날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어. 활동만 하신 게 아니라, 물러나 쉬기도 하셨구나. 자기 안으로 물러나는 내향형의 향기가 느껴지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일하면 피곤하고 스트레스 쌓이는 한계를 가지셨다는 뜻은 아니야. 하나님은 홀로 충분하신 분이야.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한 분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으로 족하시지. 시끌벅적한 만남, 박수갈채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 혼자 있어도 충분히 좋고 행복한 거야. 그게 내향형의 에너지야. “숨어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하곤 하지. 티 내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계시는 분,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말이야. 외향형들이 내향형에게 “표현을 안 하니 도통 그 속을 모르겠다”고 하는데. 가만히 존재로 함께해 주는 친구가 주는 위로 알지?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 어쩌면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더 깊고 클 수도 있어. 너의 내향형 능력 역시 하나님 닮음이야.
말 나온 김에 두 번째 지표인 감각형(Sensing) 하나님, 직관형(iNtuition) 하나님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계속 창조 이야기를 해보자고. 이 놀라운 세상이 누구의 상상력에서 시작된 거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는 분, 흑암과 혼돈 속에서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아무것 없는 데서 기발한 상상력을 내는 직관형의 선물은 이런 하나님을 닮았네. 창조세계는 또 얼마나 디테일해? 작은 벌레 한 마리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그 생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잖아.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봄으로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알아내는 감각형의 디테일도 어디에 닿는지 알겠지? 이렇게 보면 MBTI라는 안경으로 내 안에, 그리고 친구 안의 하나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러면 이제 진도를 빼보자고. S-N 설명으로 가봐야지, 라고 정신을 차리니 벌써 끝날 시간이네. 다음 시간에 감각형 직관형 얘길 할게. 두 번째 지표는 학습이나, 전공 선택에 꽤 영향을 미치는 거니까, 다음 시간도 기대해줘. 안녕!
현승이 생일상 메뉴로 바비큐 폭립이 주문 들어왔다. 제주 한 달 살이 마친 아빠까지 오랜만에 네 식구 식사라 통 크게 접수했다. 생각해 보니, 논문 붙들고 있던 작년 3월부터 집안일을 많이 놓았던 것 같다.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요리를 해 본 때가 아득하다. 핏물 빼고, 삶고, 소스 만들어 재우고, 초벌로 굽고, 다시 굽고... 공들여 만들어서 맛있게 먹었다.
집을 비우면서 소고기뭇국을 끓여 놓고 갔는데... 따로 국물과 양념 고기 비율이 안 맞았는지 고기만 잔뜩 남아 있다. 소고기 청경채 볶음으로 리뉴얼 했더니, 중국요리 같다며 고객님들께서 좋은 반응 보여주셨다.
동치미 냉면 한 젓가락 씩으로 마무리다. 이렇게 현승이 생일 파티 겸, 아빠의 귀환 환영 파티는 마무리되었는데... 이렇게 현승 생일, 엄빠 결혼기념일(무려 25주년), 어버이날, 아빠 생일이 줄줄이 이어지는 20여 일의 가족 잔치 시즌이 시작되었다. 엄빠 결혼기념일과 어버이날은 앞으로 평생 하나로 퉁치자고 했다. 대신 어버이날 꽃은 달라고 했다. "결국 다 챙기라는 거네..."라는 말에 삐지는 마음이 되는 걸 보니... 나 늙는 건가?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는 남편이 드디어 일몰을 제대로 봤다고 했다. 바다 뒤로 넘어가는 해를 제대로 본 날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던 터이다. 바다보다 구름이 먼저 삼켜버린 해를 보면서 아쉬웠지만, "나름 멋있다"는 식으로 위안을 하고 있었다. 한라산 등반으로 이틀을 보낸 좋은 친구들과 공항에서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이었단다. 뚜벅이로 지내다 마지막 짐을 빼서 나가야 하는 일정에 맞춰 렌트를 하고, 해안도로를 달리다 선물을 받았다면서 사진을 보내왔다. 선물이라고 했다. 종훈, 동조 두 형제가 내려왔던 이틀 전에는 일몰을 기대했으나 마주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돌고래 출몰. 돌고래를 보았다고 한다. 셋 중에 자기만 봤다고... 맞다, 선물이다.
일몰을 보고 쓴 남편의 글을 보고 잠이 들었다. 나는 군산에서 사경회 강사로 삼 일을 지내는 중이었다. 둘째 날 집회를 마치고, 잠들기 직전 남편이 올린 일몰 영접 글을 읽었다. 그 감동이 내게로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그렇게 잠이 들고 새벽 5시쯤인가 잠에서 깨었다. 하늘을 보며 잠들고 싶어서 커튼을 열어둔 채로 잠에 들었다. 해 뜨는 방향이 어딘지, 내가 있는 곳은 동서남북 어딘지, 그런 감각이 없다. 새벽하늘이 붉게 물든 것을 보고, "어, 저기서 해가 뜨나? 예쁘네..." 하고 사진 한 장 찍어두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다 깨버린 상태라 침대에 누워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어라? 저거 혹시 일출이야? 싶은데... 어머나 세상에, 올라오는 것이다! 해가!!! 무방비 상태로 일출을 영접했다. 선물이다. 어마어마한 선물이다.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 협재에서 진 해가 오늘 군산 은파호수공원 쪽으로 올라왔어!"
칼 라너의 말처럼 일상이 신비이다. 일상이 신비로 가득찼다. 자연이 신비이지만, 자연을 신비되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먼저 선물이다. 남편에게 종훈, 동조 두 사람이 선물이 되었다. 내게는 지극한, 세심한 환대의 군산하나충신교회 고승표 목사님이다. 숙소 하나를 정하는데도 선물로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신비가 널렸다. 사랑이 널렸다. 꿈모임에서 아주 작은 들꽃 꽃마리를 비유 삼아 "꽃마리를 구별하는 눈만 있으면 볼 수 있다. 꽃마리가 지천에 널렸다. 하나님의 선함도 그렇다. 하나님의 선함과 신비가 지천에 널렸다."는 얘기를 했었다. 지천에 널린 그분의 사랑을 몰라보고 눈이 어두워져 있을 때, 가끔 이렇게 하늘과 바다와 호수를 동원해 서프라이즈 해주시니 그 하나님 참 섬세하고 좋으신 분!
4기 동반자 과정 시작하고 한 달. 기도가 무르익어 간다. 한 달의 목표는 마음을 여는 것이었는데.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내 마음 중심에 계신 그분께 마음을 열어야 하는(열었으면 하는) 시간이었는데.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기도를 마쳤다는 '강제 없는 보고'가 무심하게 단톡에 올라오면 순간 내 마음이 가득 채워진다. 감사합니다, 기도하는 당신 감사합니다... 어제 아우팅으로 먹고, 웃고, 걸으며 기도하면서 푸르른 하루를 보냈다. 모임을 마칠 때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리추얼을 하는데, 리추얼은 상징 행위이다. 상징에는 체험과 진실이 담겨야 한다. 체험과 진실 없는 리추얼만큼 공허한 것이 있을까. 예배는 가장 고귀한 리추얼 중 하나이다. 성도 간의 하나 됨, 하늘 아버지와의 하나 됨의 체험 없는 예배의 공허함은 넋 놓고 유튜브 영상에 빠졌다 나온 공허감과 비할 수 없다. 어제는 그저 먹고 수다 떨고 잠깐 걸으며 기도하는 대단할 것 없는 하루였지만,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의 실체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살아있는 교회였다. 푸르른 교회였다. 어제 하루의 캠핑장 교회로 인해 감사하고 감사하다. 연구소 카페 동반자방에 나눈 (모임 후 마음에 심겨진 것을 나누는) "씨앗 심기"글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백 번, 수천 번 되뇌어도 마음을 열지 않으면 확인이 불가능한 진리입니다. 사랑을 위한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다는군요.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아니 그렇게 우리 마음을 지으신 예수님께서는)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십니다. 강제로 문을 열지 않으십니다. 강제하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나를 좋아해 달라고, 나를 사랑해 달라고 피를 토하며 매달려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은 안에서 열려야 합니다.
마주한 두 사람이 각각 안에서 열고 나오면, 그때 사랑이 시작됩니다. 연구소가 강의도 할 수 있고, 숙제도 낼 수 있고, 기도하도록 격려할 수도 있는데... 마음을 여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몫입니다. 모두 자기 마음의 문을 열고 나와야 연결이 됩니다. 마음의 왼손 바닥을 위로 하고, 마음의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오게 하여 포기야... 마음을 포개야 비로소 연결됩니다.
연초록 나뭇잎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 친구들이 우리를 내려다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처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받아들여 연결되는 존재가 되시오, 그게 참 행복이오. 맛있게 먹고, 많이 웃고, 몸이 기뻐하는 연결의 하루를 누렸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주살이 하는 남편이 제 손으로 요리를 해서 먹는다. 어마어마한 요리를 한다. 세상에나 양파를 기름이 구워 먹는단다. 기름 두르고 소금 간 해서 굽는 양파 요리라니 말이다. 이건 김종필 남편이 백종원 된 사건이다. 이제 곧 파스타도 하겠다!
양파 수확철인가 보다. '이삭 줍기'라고, 밭에 남은 못난이 양파를 얻어서는 어떻게 먹나 검색하다 이 어마어마한 일을 하게 되었단다. 구워서 먹어보니 이렇게나 맛있을 수가 없다고. 양파가 달다고,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한다. 펜션 매니저님 통해서 양파를 보내왔다. 남편 식으로 그냥 올리브유에 구웠다. 과장이 아니었다. 같이 먹던 현승이가, 와! 달아! 양파가 달아! 했다. 흰 즙이 나오는 싱싱한 양파를 처음 먹어본다. 어느 놈 하나 똑같이 생긴 놈이 없이 개성 넘친 비주얼이라 더 멋지고, 더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