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다! 쉰다! 불태우자! 

일 스트레스가 끝나는 

여느 직장인들의 불타는 금요일 밤과는 좀 다르다.

 

딱히 직장인이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직장인이 아닌 것도 아닌 목사의 불금은 좀 다르다.

주말이네, 금요 기도회네, 주일 설교... 어떡하지? 

 

금요 기도회 마친 목사 아빠와 반주자 딸이 전화로 "야식 폭식"을 선언하고 귀가했다.

각자 가장 애정하는 소울 푸드로 불금 스트레스에 대응하기로.

딸은 맥도날드 햄버거를, 아빠는 떡볶이를.

 

이 밤에 뭘 먹는 건, 좀 아니지만, 주말의 시작이니까.

기꺼이 해줬다. 떡볶이.

마늘 듬뿍 넣어서,

마늘 맛으로 매운,

불나는 마늘 떡볶이(마눌 떡볶이?)를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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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죽음을 생각한다. 벌써 손에 넣고 사순시기를 기다렸다. 사순절 묵상집 『기억하라, Memento Mori,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과 함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다. 죽음을 생각한다. 돌아보면 평생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나의 영적인 여정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했다. 죽음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믿지 않기 위해 신앙에 매달렸고 착한 삶에 매달렸다. 죽음이 두려우니 삶이 두려웠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죽음은 대림시기이다. 교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이다. 내 마음의 교회력은 죽음으로 시작하였다. 그렇게 40여 년을 살았다. 죽음을 피하기 위하기 위한 삶이었다. 곧 엄마 3주기이다. 엄마는 사순시기에 돌아가셨다. 그야말로 죽음과 수난의 시기이다. 내 인생이 여기까지 왔다.

 

대림시기는 소망의 시간이건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내 인생은 절망의 시간이 되었다. 대림시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절망으로 시작한 여정이기에 기다림과 그리움의 인생이 되었다. 아버지 죽음은 역설적으로 나를 기다리는 사람, 소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 40여 년 기다림의 시간 동안 죽음이 조금씩 덜 두려워졌고, 엄마의 죽음으로 큰 선물을 받았다. 언제든 도망갈 태세를 취하고 죽음을 바라보았다면,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오롯이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봄이 오건 말건, 꽃이 피건 말건 충분히 울고 주저앉아 있으니 공포도 슬픔도 흘러가고 없는 것이 되었다. 슬픔을 슬퍼하는 일, 슬픔을 쓰는 일』이 되었다. 내 인생, 슬픔의 시작도  '쓰는 일'의 시작도 아버지 죽음이다. 엄마가 큰 선물을 주고 떠났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피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기억하라! 

 

이 선물은 이미 2000년 전에 나의 예수님께 받은 선물이다. 해마다 그것을 재차 확인하는 시절이 사순기간이다. 죽음이 두려울수록 믿음이 뒤틀렸었다. 고백컨대, 십자가의 달린 예수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었던 때가 2008년 사순기간이었다. 그전까지 십자가 예수님께 눈을 맞추지 못했다. 어서 빨리 부활절이 오기를... 부활의 예수님만 영혼을 다해 갈구했다. 아버지 죽음으로 겨울산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현승이를 품고 맞던 겨울이 생각난다. 일하던 치료실의 창가 책상에 앉으면 키 큰 미루나무들이 보였다. 뱃속 아기에게 "기쁨아, 괜찮아. 겨울이 갈 거야. 저 나무에 푸르른 잎이 돋으면 우리 만나. 겨울이 갈 거야." 이렇게 말을 걸었었다. 뭐가 괜찮다는 건가? 겨울이 뭘 어쨌다고? 겨울 그 자체로 죽음이고 폭력 같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맞은 겨울이 그랬고, 그 이후의 모든 겨울이 그랬으니까. 뱃속 아기에게 그 말을 건네며 처음 인식했던 것 같다. 겨울 풍경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겨울이란 계절을 없는 것으로 치고 살려하는지.

 

이제 그렇지 않다. 나목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낀다. 겨울 산에 걸린 노을이 그 어떤 풍경보다 좋다. 그걸 보러 부러 산책을 나간다. 아버지와 엄마의 죽음 또는 사랑의 선물이다. 이제야 받아 누리지만 그리 늦지도 않은 타이밍이다. 대림절 아버지의 죽음, 사순절 엄마의 죽음. 그러고 보니 채윤이는 대림 직전에 태어났고 현승인 부활절 직후에 태어났다. 그 죽음의 시간의 시작과 끝에 나는 두 생명을 낳았네!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없는 빛나는 생명인데. 이 두 생명으로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고통을 함께 맛보며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는데. 놀라운 발견이다. 이런 걸 두고 더는 '우연'이라 말하지 않는다. '신비'라고 말한다. 내 인생의 신비, 죽음의 신비, 생명의 신비. 

 

만물이 소생하는 봄 아침은 죽음을 생각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기억하라, Memento Mori,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중년 인생의 사순절 묵상집으로 딱이다.

 

 

2013년에 리얼 이랬었었었었다고.... ↓↓↓

 

 

Sabbath diary8_쓸쓸한 산

그 : 여보, 저기 봐. 멋지지? 수묵화 같은 모노톤의 산이 좋다. 나는 약간 쓸쓸함이 있는 느낌이 좋아. 나 : 나는 쓸쓸한 산 안 좋아해. 특히 막 시작되는 쓸쓸함은 더더욱...... (몇 년의 내적작업으

larina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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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4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한참 낄낄거렸다. 어릴 적 교회 친구들 모임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의 나비효과였다. 친구 J가 아들이 만든 정체불명의 초콜릿인지, 빼빼로인지를 올린 것이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마시멜로를 녹이고 초콜릿 으깨고 난리를 치더라나. 맛있는 걸 그냥 먹지 왜 그걸 녹여 먹느라 고생을 하느냐, 녹여 먹으면 더 맛이냐, 하고 말았다고. 냉동실에 고이 넣어둔 걸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알고 보니 밸런타인데이에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이었다는데, 그 모양새를 보자 다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 이걸로 고백하면 바로 이별 통고받는 거 아냐? 맞겠는데! 아냐, 정성이라고 감동할 수도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유치원생 찱흘놀이 작품 같기도 하고, 뭉크의 절규도 떠오르기도 했다. 시니컬한 중2 남자애가 여친 주려고 만들었다니 귀엽기도 하고 더 웃긴 거였다. 시작은 이거였는데, 얘기가 우리 어린 시절로 흘러가 어설픈 고백 일화들이 터져 나왔다. 눈물 찍어내며 웃었다. 옛 친구들이 이래서 좋다. 지나간 날의 소소한 경험이 나이 먹을수록 소중하게 느껴진다. 긴 설명 없이 한두 마디만으로 기분 좋은 동조 현상이 일어나는, 어릴 적 많은 경험을 공유한 친구들이다. 오랜만에 한바탕 웃고 났는데 치유를 받은 느낌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J가 좀 달라 보인다. 살아난 것 같다. 특유의 자신감과 유머 감각이 살아났다. 우리 대장이 돌아왔다. 두어 달 전에는 정말 허깨비만 앉아 있는 것 같았고, 저러다 뭔 일내겠다 싶었는데. 사춘기 아들과의 갈등으로 죽으락 살락 하더니 말이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전화를 했다. 최 선생님과의 상담이 좋긴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단다. 아들과의 관계도 눈에 띄는 갈등만 없을 뿐이라고. 내가 보기엔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렇게 느껴졌다. 아들이 만든 사탕을 사진 찍어 공유한 것도 그렇고. 아이를 바라보는 J의 눈이 달라진 것 아니냐고 몰아갔다.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게, 냉동실 열고 어이없기도 하고 조금 귀엽기도 해서 웃음이 터졌는데. , 생각해보니 그런 면도 있다. 주방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 있으면 전 같으면 한마디 했을 텐데 말이야. 그냥 지나치긴 했네. 쓸데없는 짓 하는 거 보고 그냥 넘어가지 못하거든. 에잇, 포기야 포기. 말해도 소용없으니까 그냥 포기하는 거지. 애는 여전히 그 모양인데, 포기하고 나니 차라리 좀 살만해.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자포자기 같거든. 상담에서 애 얘기는 거의 안 하게 되더라고. 묻지도 않으시고. 딱히 진단도 안 해주시고, 정답도 안 가르쳐주시고 그러더라. 상담이 원래 그런 거야? 그냥 주절거리다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상담에 맞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도 숨통이 좀 트여. 고맙다! 상담사님이 아니라도 최 선생님같은 좋은 어르신 뵙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것 같애. 친구 덕분이다. 그런데 니가 나랑 대화하던 게 상담 기법인가 봐. 질문하고 한참 듣고 계속 말하게 하는 게 너랑 똑같으시던데.” 통화를 마치고 났는데 최 선생님 모습이 바로 영상지원 돼서 웃음이 났다. 이러자니 갑자기 이 사랑스러운 노인이 보고 싶어졌다.

 

제 발로 상담실에 찾아간 사람

 

어떻게 이렇게 또 바람처럼 행차를 하셨나? 신학기 돼서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바쁘죠. 바쁜데요. 질투가 나서요. 선생님 뺏길까 봐요.

? 누가 날 뺏어간대? 짐 덩어리 노인네를 뺏어가 줄 고마운 사람이 누구야? 그 귀인이 누구셔?

     에이구, 선생님. 제 친구 J. 얘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잖아요. 선생님도 저번에 사람 참 괜찮다고 칭찬하시고. 좀 불안해서요. 관리하러 왔습니다. 헤헤.

아아, 친구 만났구나! 그래, 어떻습디까? 잘 지내나?

     하하, 선생님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저는 친구를 몇 달 만에 한 번 보는데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시는 선생님께 그걸 물으러 왔고만요.

, 나는 상담이고. 일상이 어떤가 하는 거외다. 그리고 내 내담자 얘기를 당신한테 왜 해?

     그러네요. 실은 친구가 좋아 보여서요. 선생님께서 또 무슨 약을 어떻게 치셨나, 한 수 배우러 왔죠. 한결 가벼워 보이던데요. 전 같지는 않지만 살아난 느낌이에요. 감사해요.

그래, 준비되어 왔더라고. 자기 문제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고, 변화에 대한 갈망도 크고요. 알잖아. 억지로 온 내담자와 제 발로, 자발적으로 온 내담자 차이를. 암튼 정 선생 눈에 그리 보였다니 그건 정말 반갑네.

     본인은 잘 모르더라고요. 제가 얘길 하니까 그런가 하는데요.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이 악물고 엄청난 의지를 발동하는 것하고는 다른 거요.

정 선생이 사전 작업 많이 해서 보냈어. 친구가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그랬던데. 그래서 자기를 보는 용기가 있더라고. 아이가 아니라 자기 문제라는 것도 알고.

     네? 자기 문제라는 걸 안다고요? 아닌데. 엄청 애 탓만 하는데. 헤헤. 얘가 선생님 앞에서 다른 소리를 하나 보네요.

아이구, 그럼. 당연히 애 탓 먼저 하는 거지. 그래도 마음 밭이 잘 기경된 사람이라 상담하기 수월해.

     실은 그 친구가 상담을 받겠다고 해서 좀 놀랐어요. 보통 남자거든요. 인간은 원래 불안한 거다. 그게 상담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런 비슷한 얘길 해서 제가 빈정 상한 적도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심리치료 하는 친구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잖아요. 애 때문에 바닥까지 내려가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 거죠. 상담은 심각한 마음의 병이 있거나 취약한 사람들이나 찾는 거라는 의식이 강했어요. 부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중년의 초대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거기까진 기대도 안 하고요. 당장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 그런데 살아나고 있다니까요. 하하.

다행이구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빈 자리라는 책이 뭐유? 그 책 얘기를 자꾸 하대.

     그 책 얘기를요? , 제가 선물한 책이고요. 도널드 밀러라는 작가의 책인데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빈 자리는 아버지의 빈 자리예요. 아버지 없이 자란 남자가 부성애의 결핍을 마주하며 하나님을 찾아가는 얘기랄까요. 오래된 책이라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하! 아버지의 부재라.

     네, 처음 큰 아이하고 힘들어지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아요. 아이와 충돌하고 화가 조절이 안 되어 마구 운동을 했다나 봐요. 그리고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이유 없는 울음이 터졌대요.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고요. 그 울음 끝에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는 거예요. 너무 어릴 적이어서 어떤 분이었는지도 잘 모르는데, 당황스러웠다고 했어요. 저는 딱 알겠더라고요. 제가 아는 마음 같았어요.

그렇구나. 정 선생도 아버님을 일찍 여의었다고 했지?

     네. 저는 중학교 때였는데, 그 친구는 그때 이미 아버지가 안 계셨었어요. 어머니하고 둘이 살고 있었죠. J는 저에게 아버지 없는 아이의 대명사였어요. 저의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J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사춘기 때였고, 그때는 친하지도 않았는데요. 아버지 안 계셔서 가엾다고만 생각했던 J랑 제가 같은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의외예요. 선생님. 그 책 선물했을 때 심드렁했었거든요. 잘 읽히지 않는다고 했었던 것 같아요.

안 읽히던 책이 어느 날 읽히기도 하지. 경험이 사람 눈을 바꾸잖아. 아버지 부재를 감정적으로 만난 것이 아들들과의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되었나 보네.

, 그럴 수 있군요.

 

결핍에서 시작한 사랑

 

그럼! 자녀를 키우는 방식이란 게 다 자기 부모와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잖소. 자녀와의 관계뿐이오? 세상과의 관계 맺음의 원초적 경험이 제 부모와의 관계지. 배운 대로 사랑하는 거니까. 문제는 그 사랑이 대부분 결핍의 사랑이라는 게 문제고.

     결핍의 사랑이요?

그래. 결핍의 사랑! 제 부모에게 못 받은 걸 주는 것이 좋은 부모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물론 무의식적이지.

     그러네요. 우리 엄마 같은 엄마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이들 키우면서 엄마가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걸 깨닫고 소름 끼친 적 있어요. 그렇게 듣기 싫었던 말을 제가 하고 있더라고요. 말이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태도까지요. 좌절이었죠!

허허허. 정 선생만 그런 거 아니라 모든 부모가 다 그런 거니까 위로받으라고.

     모든 부모라. 그렇죠. 그쵸? 선생님.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인간 사랑의 시작은 그런 것 아닐까. 내가 못 받은 그것을 주는 게 사랑이라고 여긴단 말이야. 배곯고 자란 사람은 안 굶기는 게 사랑이고, 못 배운 한에 매인 사람은 교육에 목숨 걸고...

     아, 그렇다면 부모 사랑은 온전한 사랑일 수 없군요. 애초부터.

그렇지. 원죄의 대물림은 결핍된 사랑의 대물림이 아닐까 싶기도 해. 내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을 거야! 하는 사람도, 좋은 부모 만나서 우리 부모님 같은 부모가 되어야지!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 나는.

     하아. 절망적이네요!

, 절망적이야. 인간의 조건이지. 그 조건 안에서 사랑하고, 성장해가는 것이 부모의 길이지 뭐. 선생님 친구 J 씨 말이야.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선생님이 느낀 변화가 있다면 그게 무얼까 생각해보는 거거든.

     네, 뭘까요? 분명 친구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 보였거든요.

아버지의 빈 자리에 이름을 붙였어. 결핍의 자리. 상담에서 나눈 얘기지만, 본인 스스로 정 선생을 신뢰하는 친구이자 상담자라 여긴다고 말했고, 정 선생한테 자기 얘길 물어봐도 된다고 했으니 편하게 말합니다.

     아, 그런 말을 했어요? , 아버지의 빈 자리. 말씀해 주세요.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생각했대. 열심히 일해서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해줬고, 무엇보다 친구 관계든 학교에서든 문제가 생기면 아빠만 믿어! 하고는 다 해결해줬대. 자기 같은 해결사 아빠는 없을 거라고.

     맞아요, 선생님. 정말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지금이야 커서 그렇지, 아이들과 얼마나 잘 놀아주는 아빤데요.

그래, 그렇게 해주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아이가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서 화가 나는데, 그 화가 끝도 없다는 거지. 그게 아이를 때리는 것으로 행동화되지 않았겠어?

     아.

아버지의 부재. 내가 받아보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주고 느끼는 일종의 질투야.

     네에? 질투라고요? 부모가 아이를 질투한다고요?

그래, 질투. 나는 부모에게 받아보지 못한 걸 줬어. 그러면 너는 내게 감사하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거 아냐? 이런 메커니즘이지.

     그렇죠. 그건 동의가 되죠. 그런데 질투까지는.

당황스럽지? 사랑이라는 것 말이야. 우리가 아이에게 하는 게 다 사랑으로 하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정작 아이는 그걸 사랑으로 받질 않는다는 거지. 제 맘 몰라주는 엄마 아빠의 잔소리로, 부당한 간섭과 통제로만 가닿는 거야. 그러면 도대체 뭐가 문제야?

     배송사고로군요! 보낸 건 사랑인데, 도착한 건 간섭과 통제라니. (손 부채질 펄럭펄럭) , 더워. 갑자기 열이 나고 가슴이 아프네요.

하하, 배송사고! 주는 사랑, 받는 사랑의 차이를 숙고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알기로 사랑의 속성은 흘러넘치는 거야. , 왜 성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잖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철철 흐른다? 흘러넘친다? 그런 말씀이 있지?

     네. 철철 흘러넘친다, 그런 말씀이 있죠. 히히.

사람이 본시 넉넉해서 나눠주면 본전 생각이 안 나. 헌데 가진 게 별로 없는데, 나도 배가 고픈데, 없는 데서 박박 긁어서 주면 본전 생각이 나거든. 언제 되돌려 받나. 어떻게 더 많이 붙여서 받나.

     그쵸. 그렇긴 하죠.

사랑이 그래. 결핍에서 시작한 사랑이니 본전 생각이 나지 않겠소? 그걸 질투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받아보지도 못한 것 줬을 때, 주고도 부러운 마음이랄까.

 

아버지의 빈 자리, 하나님의 빈 자리

 

    아, 선생님! 문득 떠오른 기억인데요. 아이들 어릴 적 가족 여행에서였어요. 숲에 있는 모험놀이터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아빠랑 신나게 놀았고요. 두 아이가 양쪽에서 아빠 손을 잡고 신나게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어요. 저는 뒤따라 혼자 걸었고요. 그런데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슬픈 거예요. 한참 후에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어요. ‘너네는 좋겠다, 아빠가 있어서.

아하!

     저 역시 치명적 결핍이라면 결핍일 것 같아요. 아이를 낳고 늘 아이 앞에서 저나 남편이 죽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있어요. 큰 아이가 제가 아버지를 잃은 딱 그 나이가 되었을 때 , 여기까지 살았다!’ 안도하는 마음이 들더라니까요. 그리고 그다음 해부터는 한 해 한 해 포인트를 쌓는 느낌인 거예요.

세상에나. 그렇게까지. 그렇구나! 에구, 우리 정 선생.

     어후. 이게 왜 눈물이 나죠. 울 타이밍이 아닌데.

눈물이 나면 울 타이밍이지. 괜찮아요. 괜찮아.

     네, 선생님. 아이들을 아빠 없는 아이는 키우지 않는 게 소중한 목표였어요. 단지 아빠 없음이 아니라, 아버지 부재로 제가 감당해야 했던 많은 짐을 제 아이들에게는 지우지 않겠다고 저도 모르게 다짐했어요. 맞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엄마 아빠가 다 있는 저희 아이들이 부러웠어요. 엄마 아빠가 다 살아있고, 알아서 다 해주는데 뭐가 부족하냐, 싶으면 정말 화가 났어요. , 다 해주면서 질투하고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것 맞네요. (어쩌자고 터진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가만히 내 등만 쓸어주시는 최 선생님)

     받지 못한 걸 주느라 고생했네. 장하다. 정 선생.

아버지나 엄마 없는 아이들은 비빌 언덕 없는 느낌으로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더 붙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 어렸을 적에 그런 생각도 잠깐 했다니까요. 아버지 있는 애들은 하나님이 왜 필요하지? 웃기죠? 실은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가 되어 주시지도 않았어요. 저 스스로 아버지 자리를 메워야 했으니까요. (다시 눈물 바람)

     음. 아버지의 빈 자리, 하나님의 빈 자리.

?

     이제야 알아듣겠어. 책 제목 말이야. 친구 J 씨도 비슷한 말을 했거든. 그 책 얘기를 하면서 말이야. 하나님조차도 자기를 도울 수 없다고 느꼈던 것 같대.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아이와 갈등으로 정말 오갈 데 없이 막막해졌는데,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죽음까지 생각하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는 거야. 본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의 빈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빈 자리를 채우며 사느라 온 힘을 다 썼다고. 그때 희한하게 아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는 거야. 정말 아이를 위해서 해준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자기 두려움이었다고.

     자기만족이요? 아이에게 해주는 것들이 내 맘 편하자고 하는 일이라는 거죠?

그런 비슷한 거겠지. 사실 상담 안에서 대단한 게 있었던 것은 아니거든. 내가 모르는 일이 이 사람 안에서 일어나고 있구나, 싶었어. 이게 말로만 듣던 하나님 상()의 치유인가 봐.

     하나님 상의 치유.

영성 치유에서는 그렇게 말하더라고. 하나님 상의 치유가 가장 강력한 치유라고. 이거로구나! 친구의 마음이 그렇게 가벼워진 것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이에게 너그러워진 것은.

     아, 그래요?

글쎄, 나는 신앙이 짧아서 잘은 모르겠어. 영성 치유의 이론이 이렇게 조금 알아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말은 취소해야겠다. 부끄럽네.

     무슨 말씀을 취소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라고. 하나님 뜻, 하나님 은혜. 이런 걸로 방어하면 앞뒤 꽉 막혀서 상담이 안 된다고.

     아! 기억나요, 선생님.

그래, 강력한 방어기제인 것도 맞다. 하지만 왜곡된 하나님 상이 치유되는 건 심리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용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 J , 남다른 내담자였거든. 마음 밭이 좋구나, 정말 치유되고자 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스스로 아버지의 빈 자리에서 하나님의 빈 자리를 만나고 있었어. 그 빈 자리에서 진짜 하나님을 만났나 봐. 아버지 부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니야. 어느 누가 온전한 사랑을 받았겠소? 결핍으로 시작하는 사랑인데! 아버지의 빈 자리, 어머니의 빈자리. 영혼으로 느끼는 부재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카를 융이 했던 말이 생각나네. 중년기 이후 찾아온 내담자들의 문제는 결국 모두 영적인 문제였다고.

     아, 영적인 문제요! 하나님의 빈 자리.

 

그리고는 최 선생님도 입을 다무셨다. 넘어가는 해가 만든 부드러운 붉은 빛이 거실 깊숙이 들어왔고. 나 역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터진 눈물이 부끄럽... 아니, 부끄럽지는 않다. 이 눈물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 것만 같다. 아버지의 빈 자리, 어쩌면 하나님의 빈 자리로 데려갈지 모르겠다. 친구에게 일어난 알 수 없는 변화처럼 내가 만든 하나님 상 너머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말이다. 어디로 이끌든 괜찮을 것 같다. 아이가 만든 초콜릿에 허허 웃던 새털처럼 가벼워 보이던 J의 얼굴이 떠오른다. 삶의 문제는 여전한데 마음은, 어쩌면 영혼은 자유로워 보였으니.

 

* 시니어 <매일성경> 2023년 3,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김광석)
なんでもないや : 아무것도 아니야(영화 "너의 이름은" OST 중)
You’ve got a friend in me(영화 "toy story" OST 중)

 

"김현승, 나와 김현승"이라는 주제어로 꼽은 세 곡이다. 대학생이 되어 입학식을 하고 오티에 들어가는 현승이를 기숙사에 넣고 올라왔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아빠, 누나, 엄마가 "현승이, 하면 떠오르는 곡"을 하나씩 말하고 들었다. 긴장으로 얼어붙은 현승이를, 눈치만 슬슬 보다 어정쩡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동병상련의 아빠 누나 엄마는 음악으로 마음을 달랬다.

넷이서 내려가는 길에도 조수석에 앉아 신청곡 틀어주는 DJ를 했는데. 이 노래 저 노래, 틀어놓고 따라부르다 마음에 남은 마지막 노래는 김민기의 "친구"이다. 평소 생각한 일도 없는데 갑자기 꿈에 나타난 옛날 지인처럼 김민기의 "친구"가 마음에 파고들었다. 친구, 친구, 친구... 그냥 이 말이다. 친구. 올라오는 길에 "김현승과 나"의 노래로 떠올린 노래도 결국 친구이다. You’ve got a friend in me! 이건 정말 현승이와 나의 노래이다. 오오오오~오래 전에 어깨를 걸고 우정을 다짐하며 이 노래를 불렀었다. 아들과 엄마 일촌의 혈연을 너머 친구가 되기로 했었다. 그 사연이 여기 있다.

 

 

무촌에 가까운 일촌끼리의 우정

현승 : 엄마, 왜 엄마랑 아빠는 둘이 같이 자? 어른이라서 무섭지도 않은데 왜 꼭 둘이 같이 자는 거야? 엄마 : 왜애? 그게 왜? 현승 : (신경질적이거나 슬픔 가득 담은 목소리로) 나랑 엄마랑 같이

larinari.tistory.com


그리고 정말 우리는 친구가 된 것 같다. 처음으로(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고) 집을 떠나보내는 현승이로 텅 비어 가는 마음에 '친구'라는 단어가 맴도는 것은, 그렇다. 정말 현승이와는 영혼의 친구이다.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현승이와만 나눌 수 있고 이해하고 이해받고, 공감하고 공감받는 이야기들이 있다. 현승인 내게 그런 친구이다. 집에 올라와 셋이 떡볶이로 늦은 저녁을 하며 채윤이가 말했다. "엄마, 나 그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엄마가 현승이를 두고 소울 메이트라고 하는 말. 나랑 엄마랑 통하는 거 말고, 엄마랑 현승이랑 통하는 무엇이 있는 거 알겠어." 채윤이도 내 친구이다. 세상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채윤이만 교감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김종필?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사실 서로서로 친구이다.

 

누구보다 채윤이와 현승이는 찐친이다. 그렇게 많은 놀이, 놀이를 통한 즐거움을 나눈 친구가 있을까? 놀이의 형태는 다르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 둘만의 놀이들이 있다. 내려가기 전날까지 주방 바닥에 퍼져 앉아 즉흥 노래 만들어 주고받기를 하는데, 그 놀이가 얼마나 고급지고 재미지는지. 어떻게 껴들어 볼래도 자질이 부족하여 둘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 둘은 정말 찐친이다. 한 번 싸우면 극한의 감정까지 간다. 다시는 쟤랑 말 안 한다. 끝이다! 세상 누구에게도(엄마 아빠에게도) 하지 못할 극한의 부정적 감정을 다 쏟아낸다. 그럴 때는 정말 '극혐'이란 말이 딱이다. "엄마, 쟤 우리는 가족이니까 이해 하는 거지만, 쟤 밖에 나가서 저러면 사회생활 못 해...." "엄마, 나는 진짜 누나가 걱정돼서 그래. 친구들 사이에서 저러면 정말 안 돼...." 저런 남자 최악이야, 저런 여자 최악이야... 그렇게 며칠 지내다 어느새 보면 둘이 또 베라, 맥날 가서 시시덕거리며 처묵처묵하고, 기타 들고 마주 앉아 떠들떠들 하고 있다.

아빠만 현승이랑 안 친하네! 했더니 "우리는 철학 친구야!' 항변한다. 우리는 철학과 신학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게 친한 거야. 우리도 친해! 현승이가 아빠한테 철학에 대한 질문을 얼마나 잘 하는데!!! 그런 얘기하면 끝도 없이 해. 우리는 그렇게 친해.

그러고 보니 현승이는 엄마, 누나, 아빠에게 맞춤형 친구이다. 우리 현승이는 정말 한 사람에게 온전히 맞춰주는 좋은 친구이다. 집 밖의 친구들에게도 그렇다. 유레카!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현승이가 집 밖에서 가족을 만나면 그렇게 차가운 것은, 졸업식과 입학식에서 그렇게나 경직되어 가족들을 섭섭하게 했던 것은 이것이었구나! 1:1 맞춤형 관계에 최적화된 현승이가 어쩔 줄 몰라 얼어붙음이었구나! 엄마 따로, 누나 따로, 아빠 따로 만나서는 영혼의 친구가 되고, 끝없는 놀이 친구가 되고, 철학 친구가 되어 그렇게나 깊은 상호작용인 가능한데 가족 넷이 모여도 뭔가 불편하여 긁적거리는 것이 있었지.

현승이랑 헤어지고 차가 출발하자 채윤이가 물었다. "엄마, 지금 슬퍼? 빡쳐?" "어, 빡퍼!" 고등학교 졸업식부터 시작하여 기숙사 입소시키며 헤어질 때까지 남겨진 세 식구의 마음은 슬픔과 빡침으로 드글거렸다. 며칠 그런 마음이었는데, "현승이와 나"라는 주제로 노래도 듣고, 셋이 하염없는 수다를 떨다 보니 새롭게 깊이 우리 친구 현승이가 이해가 되네. 낯선 새로운 시작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것도 현승에게 가장 의미 있는 '관계', 그것도 1:1의 깊은 관계가 없음에서 오는 막막함이겠구나 싶다. '친구 현승'은 그래서 친구도 잘 사귀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은근한 인싸가 된다. 아, 이제야 며칠 슬픔과 서운함과 빡침의 혼돈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듯하다.

포항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마음 추스르지 못하고 남편과 밖에 나와 밤의 해변을 걷다 울고 말았다. 복잡한 마음에 아무말 대잔치를 하면서 울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나 커튼을 열었는데... 와아, 예상치 못한 동해 일출의 장관을 만났다. 동영상을 찍으려고 촬영 버튼을 누르자마자 새 두 마리 난입! 새는 언제나 그분의 메신저니까. 사랑의 메시지를 듣는다. "사랑한다, 내 딸아. 안심해라, 내 딸아. 채윤이 현승이 두 마리 영혼은 내가 지킨다."

주님, 우리 채윤이 현승이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 이유를 가지고,
자기답게
주님의 창공을 훨훨 날아오르게 해주세요.
저의 결핍이 이 아이들을 가두는 그물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제 인생의 소울 메이트 채윤, 현승이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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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8일, 연구소 카페에서 아침마다 나누는 '읽는 기도' 묵상이었다.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을 읽고 아래와 같은 글을 붙였다. 다음 날 주일 예배의 설교 제목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 전날 넋두리 같은 글에 대한 답처럼 주어진 설교였다. 남편의 설교를 대문에 걸어두는 게 설교자 당사자 만큼이나 민망하지만, 이 민망한 짓을 하고 싶다. 힘을 내보려는, 허무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나는 죽어서 지옥 가지 않을 것이다, 정도를 부활 신앙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묵상처럼 "부활이란 위대한 변형이며, 전혀 새로운 창조이고, 무엇보다 큰 '사랑'의 변형"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은총과 영광, 그 변형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 아침입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가 없어서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은, 연구소는, 삶은, 신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지 않은 날들이 창밖의 하늘처럼 뿌옇기만 합니다. 과거와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근거라 믿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숫자입니다. 통장의 잔고, 나이, 데드라인, 남은 시간, 인생의 등수, 내 모든 점수...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겠다는, 보지 않겠다는 무력감과 허무입니다.

부활 신앙은 진정한 의미의 낙관주의이고, 하나님 사랑이 해내실 일을 미리 사는 일인데 말입니다. 그 막막한 페스트 펜대믹 시대에, 죽어가는 몸을 하고서도 "All shall be well!"이라 하신 노르위치의 줄리안이 그 증인이겠지요.

"당신은 아직 부활 신앙에 미치지 못했군요! 지금 이 순간, 진정한 낙관주의를 다시 발견하세요."
오늘 묵상글은 경고로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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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케 선영이에게서 생일 선물이 왔다. 쿠팡으로 아침 일찍 총알배송으로 온 택배라, 먹을 것인가 했는데 화장품이다. 왜 이리 비싼 걸 보냈냐, 얼마 전 현승이한테도 무리를 한 것 같은데, 쪼들리는 살림에 왜 이리 돈을 많이 써? 카톡에 떠들어 대고 가만 보니 노인네, 어디서 많이 본 노인네 말이네. (우씨, 우리 엄마 잖아...) 

 

동생한테 들으니  '언니한테 받기만 해서 좀 드리고 싶다. 내 돈 주고 못 사는 화장품이다.'라고 했단다. 나는 니네 돈이 더 아까운데... 계속 말하다가는 (짜증 유발하던) 우리 엄마 될 것 같아서 고맙다, 잘 쓰겠다 하고 입을 닫았다. 내가 동생네 뭘 해준 게 있다면 늘 미안해서였는데. 엄마 모시고 사는 선영에게 미안해서, 가끔은 뇌물이었다. '엄마 모시는 거 힘들지? 우리 엄마 힘든 사람이야.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말고, 잘 봐줘...' 

 

엄마가 딱 이 즈음에 낙상을 하고 병원에 격리되었던 터라, 엄마가 떠난 이후 내 생일은 전 같은 생일이 아니다. 3년 거리를 두고 다시 바라보면, 엄마 인생 마지막이 참으로 부럽도록 편안했고 아름다웠다. 이러고저러고 해도 동생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였는데. 그러느라 동생 부부가 질 수밖에 없는 일상의 짐이 있었다. 미안했던 엄마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고맙다, 복 받어라"였는데. 동생네가 복을 많이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선물로는 몇 번 사 본, 내돈내산은 못해 본, 선영이도 지돈지산은 못 해봤을 비싼 화장품을 복잡한 고마움으로 받는다. 이 화장품 이름이 참 마음에 들더라. 雪花秀. 雪花. 눈꽃. 눈꽃을 받았다. 雪花秀 말고 雪花受. 눈 속에 피는 꽃을 받았다. 말 나온 김에 루이즈 글릭의 [눈풀꽃] 한 번 꺼내 읽고 간다.

 

 

눈풀꽃(snowdrops), 루이즈 글릭​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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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이 되었다.
어마무시한 교장이다.
무려 '인생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우리 교회 밖에서 일하고 강의하는데 '사모'라 불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듯, 우리 교회에서 강사나 작가로 불리거나 행세할 일이 없다. 그렇더라도 지나치게 분리된 페르소나로 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어서 약간은 붕 뜬 느낌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책 출간을 교회 광고를 통해 알린 것도 최근의 길이다. 『신앙 사춘기』를 읽으신 한 집사님께서 교우들과 책모임을 도모하시고, 마지막 시간 '작가와의 대화'로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참 감사했다. 교회 안팎에서 정확하게 분리된 페르소나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경험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러운 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편하고 좋은 일인가.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여러 강의를 이어 붙여서 '인생의 빛' 학교를 교회에서 해보기로 했다. 내남이 알다시피 글 쓰고 강의하는 주제가 내 인생의 '생애 주기'를 따르는 것이었다. 글을 위한 글을 쓰고, 강의를 위한 강의를 만든 게 아니었다. 살며 마주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쓰고 성찰하고 기도하다 보니 어느새 책이 되고 강의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다. 순서가 그렇다. 그 조각들을 이어 붙여 교회에서 해보라는 남편의 제안을 덥석 수락한 것은 아니지만, 듣자마자 설레긴 했다. 덥석, 수락하지 못한 마음에는 두려움도 염려도 있지만 하기로 했다.

남편과 함께 하는 일이 재미있는 건, MBTI로 NT와 SP가 만나 스파크가 일으키는 짜릿함이다. 직관적 창의성과 논리에 실제적인 것과 재미를 덧붙이며 티키타카 하는 대화가 재미있고. 그러다 '작명'이 되면 뭔가 하나가 눈앞에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고. '인생의 빛 학교'라는 말을 만들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른 되면 행복해질까, 애인 생기면 행복해질까, 취업만 뽀개면 행복해질까, 얼른 아이 키워서 편하게 외식할 때가 되면 삶이 좀 여유로워질까, 애 대학만 합격하면, 취업만 시키면.... 이러면서 결코 다다르지 못하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인생 아닌가. 언제나 막막한 인생길을 성령의 빛에 비추어 살아가자는 뜻의 '인생의 빛'이다. 지금 여기 일상이 천국이 아니면 죽어 눈 뜬 곳이 어떻게 갑자기 천국이 되겠는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고,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이 지옥이다."라는 시에나의 카타리나의 말을 오늘에 잇대어 살아보자는 뜻이다.

소소하게 해보려고 한다. 퀴블로 로스 여사는 우리가 태어난 이유, 인생을 사는 이유 중 하나가 '배움'이라고 한다. 카를 융은 '성장'하여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도 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엡 4:13, 공동번역)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하심까지 성장해가는 것이란다. 죽는 날까지 배우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성장해가야 한다. 인생 학교의 졸업식은 죽음이고, 그 순간까지 잘 성장하여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졸업장, 개근상, 우수상, 최우수상이 아닐까 싶네. '인생의 빛 학교' 소소하게 하면서 교장이며 동시에 '출석번호 1번인 학생'이 되어보려고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든 임보라 목사님을 보내드려야 할 텐데.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어서 쓴다. 지난 토요일 늦은 밤, 뉴스에서 목사님의 부고를 접한 이후 삶의 어느 부분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하루 이틀은 우울과 절망으로 가까이 있는 가족을 힘들게 했고. 애써 눌러보는 마음인데, 보고 싶지 않으면서 보게 되는 온라인상의 뉴스와 애도 글과, 왈가왈부하는 소리들에 마음이 추슬러지질 않는다.  "임보라 목사님!"하고 편지 글도 시작해 봤으나 한 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2인칭으로 쓰기에 너무나도 몸의 연결점이 없다.

 

'언제고 만나겠다' 는 마음이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언제 어느 행사에서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내 주변머리로는 스쳐지나 듯하는 인사가 전부일 것이다. 이제 와...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만남이라도 몸으로 만나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한 것이 아쉽고 아쉽다. 추슬러지지 않는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다. 무고한 분이 최전방에서 혐오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다. 무고하다는 건 뭘까. 더욱 무고한 혐오의 화살을 대신 맞았다고 해야 할까, 같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성수소자와 시대의 약자들 편에 서서 함께 비를 맞은 것이 죄목이 되어 이단으로 지목되었을 때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뉴스로 보면서 숨이 턱 막히는 그 감정 때문에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화면을 껐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이렇듯 무너지는데, 목사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목사님으로 인해서 위로받았던 분들이 어떨까 생각하면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악에 맞서다 악과 닮아가기가 얼마나 쉬운가? 여러 선하고 아름다운 명분 너머 임보라 목사님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는 맑은 얼굴이었다. 기사 내용은 험악한데 거기 실린 당사자의 얼굴은 늘 맑고 선량하니 그 인상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여운이 있었다.  어떤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 것은 대체로 보는 이의 것임을 안다. 투사(projection)다. 내 눈에는 천사인데 누구의 눈에는 사탄이고 이단인 것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과 안타까움이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 미안하고 부끄럽다.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지만, 그 맑은 얼굴로 짐작되는 존재의 비결을 영상에서 찾았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합니다." 임보라 목사님, 혐오에 혐오로 맞서지 않았구나! 이 노래가 자꾸 입가에 맴돈다.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을 피워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목사님, 당신이 존재로 피워야 할 사랑의 꽃을 다 피우신 것일까. 그립고 아름다운 아버지의 집에서, 차별도 혐오도 없고 정통도 이단도 따로 없는 아버지의 품에서 편히 쉬시길.

 

혐오보다 강한 사랑의 길, 따르겠습니다.

남겨진 자로서 사랑의 몫을 살겠습니다. 

 

흠모하고 있는 13세기 여성 공동체 베긴의 여성들이 떠오른다. 이 급진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동체가 기존의 신학과 잣대로 규명되지 않자, 사제들과 남성 신학자들은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 당한 지도자도 있다. 그들의 탄압에 반응한 어느 무명 베긴의 시이다. 곱씹어 읽어본다. 
  
당신은 말을 하고, 우리는 행동한다.
당신은 분석하고, 우리는 응시한다.
당신은 검열하고, 우리는 선택한다.
당신은 씹고, 우리는 삼킨다.
당신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춘다.
당신은 꽃을 피우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맛을 보고, 우리는 향기를 맡는다.

 

 

여성 교인은 62.5%, '여성 담임 목회자'는 8.5%

[교회와 여성들] 여성 담임 목회자로서의 임보라 목사

www.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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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올해는 쉬어가는 한 해가 될 것 같지만, 성심성의 껏 발동 걸어봅니다!)

 


| 2023년 내적 여정 동반자 ‘상처 입은 치유자’ 과정에 초대합니다.

|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을 통하여 더 깊은 자기 이해와 영적 훈련을 원하는 분, 공동체의 영적 성장을 돕는 동반자로 훈련되기 원하는 분을 위한 과정입니다.

| ‘상처입은치유자’는 자기 치유와 성장의 여정을 이웃을 위해 선물로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 2023년 4월6일(목) ~ 11월 30일(목) 오후 12시 ~ 3시 30분
   11월 29일(수) ~ 11월30일(목) 1박 2일 마침 피정
✔ 인원 : 7명 (인원 미달 시 폐강될 수 있습니다.)
✔ 대상 : 내적 여정 1단계부터 영성과정까지 수강하신 분
         (지도자과정 종강 이전까지 전 과정 재수강 필수)
✔ 문의, 접수 : 전화로만 받습니다. (010-7242-8624)

| 훈련 내용(과정 중 필요에 따라 변동 있을 수 있습니다.)

- 나의 기쁨 세상의 필요 : 소명의 재확인
- 내어맡김 : 기독교 영성적 관점에서의 에니어그램
- Centering Prayer : 행복추구 시스템으로서의 에니어그램
- 성찰 일기 : 일상영성으로서의 에니어그램
- 상처 입은 치유자 되어가기 : 나의 상처 만나기
- 인간의 얼굴을 가진 유형 : 1, 2, 3, 4, 5, 6, 7, 8, 9유형
- 유형의 소묘 : 그림으로 만나는 에니어그램
- 나를 찾아가는, 나의 이야기 : 날개와 화살
- 성격 장애와 성격유형 사이 : 카렌 호나이 갈등 대응방식
- 같은 유형 다른 빛깔 : 유형의 부속유형
- 다른 유형 같은 빛깔 : 유형의 삼원소
- 주님과 함께 쓰는 인생 이야기 : 영적 자서전 쓰기
- 치유와 회복의 영성 공동체 : 내가 살아야 할 공동체
- 마침 피정
- 독서 나눔과 특강

| 매주 읽기, 쓰기, 기도 과제가 있습니다. (영적 독서, 성찰일기 쓰기, Centering Prayer) 교육일정과 소정의 과정을 통과한 분께는 강사 자격증과 함께 강의에 필요한 ppt 등의 자료를 제공합니다. 과정이 마친 후에는 강의와 개인 영성생활을 위한 지원 공동체로 함께 합니다.

 

 

오늘 모닝커피는 갑자기 쿠바다.
쿠바 원두는 아니지만,
쿠바에 가본 건 아니지만,
가본 사람의 마음이 담긴 잔에 담겼으니
쿠바 커피다.
그들의 몸과 영혼이 주님 안에서 행복하길.

쿠바가 담긴 잔에 커피를 마시니,
한 모금 한 모금에 기도를 담게 된다.

오늘 모닝은 갑자기 커피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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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신부, 두 강사, 두 목짜  (4) 2022.11.29

아주 시끌벅적한 모임이 있다. 코로나 시작 전에 만났다니까 3년 만인데, 토요일 브런치(이 얼마나 느긋하여 편안한 만남인가!)로 모였다. 달력에 이 약속을 "명일친구"라고 적어 놓은 걸 채윤이가 발견하고 빵 터졌다. “하하하하… 명일… 명일… 명일 친구!” 명일'이 아니라 '친구'에서 터진 거지. 스무 살 차이 친구들. 전에 명일동 살 때 우리 집 거실, 어느 카페, 동네 놀이터 그네... 같은 데서도 시끌벅적 만나곤 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티키타카와 터지는 폭소로 만나는 시간 동안 오디오가 비는 구간이 없다. MBTI 얘기가 나왔는데, 정신 차리고 제대로 보니 나만 외향이고 나머지 셋이 내향이다. 초등 4, 5학년 때 어린이 성가대 지휘 선생님으로 만났고, 얘네들이 지금의 채윤이 나이이던 시절 청년부 목회자의 아내로 다시 만났으니 길게는 30년이다. 알아온 세월이 30년인데, 외향과 내향의 이름을 붙여보니 낯설다. 정말? 너가 내향이라고? "저 여기서만 이래요." "야, 나도 너 네하고 있을 때만 이래.ㅋㅋㅋ"

Carl Jung이 말하는 내향과 외향 개념이 말이 많고 적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물론 외향과 내향이 드러나는 양상 중 하나가 '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냈다. 편안한 곳에 있으면 누구나 말이 많아진다. 누구나 거침없이 자기 얘기를 한다. 심지어 내향형도 그렇다. 얘네들하곤 단톡방도 시끄럽다. 감정도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깔깔 웃었다가 갑자기 울었다가... 전에 한참 단톡이 활발할 때(아, 톡이 아니라 '마이피플'이었구나...ㅎㅎ) 방 이름이 "울고웃고"였다. 중간에 외향 하나가 더 투입되었다. 반주자였던 H는 나랑 딱 10년 차이의 외향-외향, 죽이 너무나도 잘 맞는 지휘자 반주자였는데. 액면가는 외향 다섯이서 토요일 아침 브런치 카페 구석에 앉아 말과 웃음으로 꽉 채우고 나왔다. 결론은.

맛있게 먹으면 무조건 0 칼로리!
편한 사람하고 있으면 무조건 외향형!

그래도 난 찐 외향형인 게, 말하고 웃고 에너지를 '소비함으로 채운' 게 되었다. 가득 주유한 몸과 마음으로 정자역에서 집까지 탄천을 따라 걸어왔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집에 다 왔는데 머리 위가 시끄러워서 고개를 들어보니 까치 다섯 마리가 나무에 앉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너네 친구들이 편하냐? 지금 다들 외향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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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 보니 결혼하고 연말마다 이 시간을 가졌다. 첫 두 해의 기록은 아마도 당시 교회에서 '1청'이라 불렸던 신혼부부 공동체 카페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가 제안을 하고, 가정별 10대 뉴스를 카페 게시판에 올렸다. 블로그를 더듬어 보니 2002년 기록부터 남아 있다. 현승이가 생기던 해이고, 채윤이가 또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인격을 드러낸 해이다. 그해 10대 뉴스 안에 들어 있었다. 아마 채윤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하루 여행을 다녀온 모양이고, 거기서 둘이 1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게 20년이 되었다. 
 
남편의 목회 형태가 바뀌면서 성탄절부터 연말, 신년 첫 주까지 가만히 머무를 시간이 없어졌다. 특별새벽기도가 끝나는 1월 첫 주일, 그러니까 교회력으로는 주현절 저녁이 우리의 Big Family Day이다. 근사한 외식, 맛있는 케이크 같은 것으로 유혹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모이는 성인 넷의 리추얼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둘에서 셋으로, 셋에서 넷이 되어 지지고 볶는 시간을 기록한 것이  Big Family Day의 역사인데... 2023년은 넷에서 셋이 된다. 현승이가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게 되었다. 셋에서 둘이 될 날도 머지않았고.
 
현승이가 성인이 되었고, 누구보다 행복한 고3으로서 나름대로 치열한 대입의 시간을 보냈다. 채윤이가 더 큰 꿈을 꾸면서 여러 면에서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남편은 현재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편안한 중년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늦게 시작한 공부로 조용히 부대끼며 담을 넘은 자의 고충과 기쁨을 함께 맛보고 있다. 각자 존재의 빛깔이 더 뚜렷해지며 가족의 연대는 느슨해져 간다. 비어 가는 느낌과 아쉬움이 마음 한 켠에 찬바람으로 분다. 누구보다 채윤이가 가족의 내적 외적 변화를 아쉬워라 한다. 오래전 이런 띵언을 남겼던 채윤이다. "아쉬운 것은 아쉬워야지 어떻게 하겠어?" 그래, 아쉬운 것을 아쉬워하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여야지. 무엇보다 지금의 모든 것을 감사하고 누려야지. 둘이든 셋이든 넷이든, 심지어 혼자이든. 지금을 누려야지.
 
호모 아키비스트, 기록하는 인간, 기록하는 가족이 된 것은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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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보고 걷는다. 그런 줄 몰랐는데 채윤이가 흉내 내줘서 알았다. 좋은 하늘, 좋은 바람을 누리러 나가서는 고개를 처박고 걷는다. 깨어 있으려 하지만 다시 '생각들'에 잠기면 땅을 보게 된다. 간밤에 꾼 꿈 생각을 하며 걸었다. 나는 또 뭘 그리 포장하고 꾸미고 있는 걸까? 꿈이 건넨 질문에 고심하노라니 땅만 보인다. 고개를 들자! 하고 목에 힘을 딱 주고 바라보니 정자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다. 어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매는 원숭이 마음을 멈추자. 고개 들고 찬 공기를, 발밑의 얼음 조각을, 아이들 소리를, 자동차 소리를 보고 듣고 느끼자. 그러자 아주 가까이에 곤줄박이 한 마리가 땅에 강림하여 삑삑거리고 있다. 아주 아주 가까이서. 이 녀석이 사라지자 머리 위에서 또 삐이삐이... (아마도) 박새 한 마리가 가까이서 혼자 놀이를 하고 있다. 아주 가까이서. 모두 같은 말을 한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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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이는 중동 배낭여행 중이다. 제 몸 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공항 노숙을 불사하고 떠났다. 안전한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스스로 노선을 정하고, 그때그때 저렴한 숙소를 찾는 여행이다. 안식년 '꽃친'을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하면서 짧고 굵은 갈등 속에 선택한 소명고등학교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모든 것이 좋았고, 고등학교 생활에 어려움(현승이 자신의 어려움, 엄마로서 나의 어려움)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어려움과 갈등조차 좋았고 감사하다. 이번 여행 준비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감사가 두 배, 세 배로 커진다. 감사의 핵심은 사람, 선생님들이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만날 사람, 손!)

 

저렴한 항공권 덕에 부다페스트에서 긴 경유를 하고, 그 덕에 유명하다는 부다페스트 야경도 보았단다. 이집트로 넘어가 피라미드를 보고, 다합에서 스킨스쿠버를 하고, 무엇보다 밤에 시내산을 올라 시내산 일출을 보았다는데. 남편과 둘이 입을 헤 벌리고 영상과 사진을 보는데 "부럽다,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요르단으로 건너가 와디 럽(붉은 사막)으로 들어갔다는데, 와! "매드 맥스"에서 그 언니들이 달렸던 길이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남편은 이스라엘,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다녀온 경험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모른다. 그땅, 육화 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걸으셨던 갈릴리 호수 변을, 사도바울이 디뎠던 땅을 걸었다는 경험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듣기 싫을 정도로 그 경험을 말하고 또 말하고, 설교에 인용하고, 말씀 묵상에 인용한다. 직접 가본다는 것을 그런 것이다. 사실 나는 여행을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를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좋아하지 않거나,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갈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제치는 "여우의 신포도"인지도 모르겠다만.) 시내산 등반을 하고 일출을 바라보는 아이들 영상을 보면서 정말 가보고 싶다. 모세가 섰던 자리라니,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그 산이라니!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모 대상 강의를 하면서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잘해주고 질투한다."는 표현을 하면 대부분은 처음엔 갸우뚱 한다. 좋은 (특히 신앙이 좋은?) 부모일수록 갸우뚱의 각도가 크다. 어떻게 아이를 미워할 수 있지? 그래, 가끔 미울 수가 있다지만 질투를 한다고? 그렇다. 질투다. 나는 아이들을 질투한다. 내가 다 해주고도 질투한다. 내가 못 받아본 것을 주고, 나는 갈 수 없는 곳에 보내놓았기에 질투한다. "엄마빠가 그 정도 해줬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더 잘해야지, 어디서 그런 막 돼먹은 태도야!" 못 누려본 것을 누리게 했으니 부모를 추앙하라! 이런 마음이 얼마나 자주 올라오는지 말이다. 질투와 시기심의 은근한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말이다. 

 

좋은 경험을 했으니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엄마빠 여행 보내줘, 이런 기대나 강요, 농담을 빙자한 허튼 말 따위도 하지 말아야지. 그저 너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라고 해야지.

하지만 나는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현승이가 부럽다. 현승이 인생이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백 번 말해야지.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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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송년 글쓰기의 '좋았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순간적으론 그리 강렬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힘으로 올해를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2021년에는 30여 명의 수강자들과 함께 했었다. 줌을 켜고 그냥 쓰면 된다 여겨 인원이 중요할까 싶었는데. 역시나 작은 그룹이어야겠구나, 싶었다. 예수님의 12 제자가 괜히 12가 아닌 걸 실감한다. 한 분 한 분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눈을 맞추려면 12가 적당하다. 2021년에는 연구원과 나까지 포함 12명으로 제한해 버렸다. 대신 이틀에 걸쳐 두 번 진행했다. 대기하며 아쉬워하는 분들을 모두 받아드릴까, 유혹도 있었으나 참길 잘했다.


괜히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 주간 나는 기도 피정을 다녀왔고, 다녀온 당일 밤에 바로였으니 그 여운도 있지 않았을까. 유난히 극적 경험이 없는 기도였지만, 돌아보면 그래서 더 낮아진 마음이 되었었다. 한 주간이 아니다. 그 한 달 전부터 연구소 카페에 <별이 빛난다>라는 대림 묵상집으로 아침마다 묵상 글을 나누었다. 그 여운일지도 모른다. 전에 없던 대림 시기를 보냈다. 그 한 달이 아니다. 한 학기 대학원 공부하며 마음의 부침이 심했었다. 이렇게 흔들리고 저렇게 흔들리고... 경계를 넘어간 자의 아픔을 지질하게 경험했다. 그 여운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글로 마음 다스리는 선물을 누린 내 전 생애의 여운일지 모른다. 글쓰기 시작으로 거슬로 올라가면 중학교 1학년 아버지 돌아가신 때였으니, 아버지 상실의 여운인지 모른다. 아버지 추도식이 12월이어서 내게 12월은 모든 상실과 상실로 인한 갈망과 갈망을 따라 만나는 하나님의 계절이다. 화면을 통해 가만히 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따스해지고 눈물이 자꾸 났다. 자신 안에 머물러, 주제에 따라 쓰는 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고마웠다. 일 년 돌아보며 고마운 분들, "별이 되어준 당신"에게 나도 글을 쓰고 메시지도 보내고 했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글로 함께 보낸 이 분들, 작년 송년 글쓰기에서 보고 일 년 만에 만난 분도 있지만, 이 분들이 내게는 "별이 되어준 당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호모 스크리벤스(라고 한다.), 글 쓰는 인간으로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 송년 글쓰기가 남긴 여운은 감사, 그것이다.

이 여운을 더듬다 생각나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의 서문을 꺼내 읽어본다.

‘너는 항상 행복해보여. 그런 너가 참 부러워’

이 말이 어쩐지 잊히질 않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 받은 쪽지에 적혀 있었지요. 당시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버지를 잃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사춘기 여자아이였거든요. 친구들 앞에서 찧고 까불며 지었던 웃음은 슬프고 누추한 나를 감추는 위장술이었을 텐데. 친구는 제대로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실은 밤마다 아버지가 그리워 울었습니다. 아버지라는 비빌 언덕이 없어지자 하루아침에 돌변한 세상은 낮도 밤처럼 어두웠고요. 친구가 본 제 모습이 진실이었으면 싶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가 계시고, 가난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항상 행복한’ 나였다면요.

‘항상 행복해 보이는 나’와 이른 나이에 생의 무게를 알아버린 ‘실제의 나’ 사이 불화를 중재한 것은 밤마다 쓰는 일기였습니다. 삶의 짐을 글로 옮기고 나면 묘하게도 무게감이 달라집니다. 이 희한한 경험은 저로 하여금 일상쓰기를 멈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경험에 세월이 더해지니 순환 고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루의 번뇌는 글이 되고, 써놓은 글은 하루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선형 선순환의 고리는 어느 한 지점을 향하는 것 같더군요. 어머나, 그 지점은 영원에 잇댄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로 빛이 들어올 틈 없는 일상의 숲에서 만나는 빈터였습니다. 거기로 갑자기 들이치는 천상의 빛이었습니다. 내 일상보다 더 큰 실재를 향해 눈이 열리고 사유의 지평이 열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설거지감이 쌓인 싱크대 앞에서도 순간이동으로 다다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아내이며 엄마로 사는 것, 딸이며 며느리이며 동시에 이 시대 부끄러운 이름 목회자의 아내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나날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 짐 모두 사라지고 ‘항상 행복한’ 날이 있으려나요. 다행히도 저의 선생님, 상담자, 구세주 그분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저를 부르셨어요. 쉬운 멍에, 가벼운 짐을 함께 메고 같이 지고 가자고요. 수고하고 무거운 제 일상의 짐, 그분께 나아갈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랄 게 아니더군요. 자, 이제 저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보따리 일상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무거운 짐이 쉽고 가벼워지는 신공을 보실 수도 있어요. 비밀인데요. 제게는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기예가 있답니다. 일단 저의 성소() 싱크대 앞으로 오세요. 거기서 뵈어요!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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