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 노을이 물드는 시간13

 

친구의 축 처진 어깨, 자신감 잃은 말투가 눈에서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 일처럼 마음이 무겁다. 늦둥이로 얻어 애지중지 키우는 아들과의 갈등으로 생사를 오가고 있다. 생사가 실제 생사겠는가. 마음이 죽어간다는 뜻이다. 시들어가는 친구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커다란 덩치에 가정, 친구들, 교회 공동체…. 어디서든 해결사 역할을 하는 남자 사람 친구이다. 한 교회에 다니며 중고등부 때부터 알아왔다. 그 시절 친구 모임이 느슨하게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 시간들이 많아져서인지 더 자주 얼굴을 보고 있다. 친구 J는 우리 중 제일 늦게 결혼했다. 아들 둘을 내리 낳았는데 지금 현재 그 무섭다는 중2, 중3이고. 사춘기를 맞은 첫째, 그 뒤를 이어 다른 방식으로 질풍노도에 발동을 걸고 있는 두 아들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임에서 쉽지 않단 얘길 가끔 했지만, 어느 집에나 있는 일이려니 했다. 우리 아이들도 지나온 시간이니까. 도움을 구할 것이 있다 하여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무기력과 우울감을 호소해 왔다.. 성격이 불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정의를 사랑하는 친구이기에 그 뜨거움은 용기와 당당함으로 보였다. 적에도 내겐 아름다운 강함을 선물로 가진 친구였다. 그런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한다. 때로 극단적인 생각이 든단다. 기도도 어떤 노력도 다 의미 없는 것 같다고. 불면증으로 잠을 못 잔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은 초췌해졌고 전 같은 열정이나 밝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 큰 덩치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구부정하게 앉은 것이 내가 아는 강한 용사가 아니었다. 뭐든 맞서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 여기며 살아왔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결하려고 나서면 자꾸 폭력을 쓰게 된다고. 그러고 나면 후회가 밀려오고, 아이와는 더 멀어지고, 인생 잘못 살아온 것 같단다. 실패한 인생이라며 자괴감에 빠져 내놓던 말이 귀에 쟁쟁하여 마음이 아프다. 다행히 상담이라도 받아볼까 싶다고 하여 최 선생님께 연결을 시켰다.

자식 문제엔 다들 무력한 해결사

정말 좋아하는 친구인가 봐. 친구야 내가 안 봤으니 모르겠다만, 정 선생이 죽어가는 얼굴인데. 당신 친구 아니어도 마음 써서 상담할 텐데, 염려하지 말아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을 하는 거야.
     감사해요, 선생님.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함께 지낸 친구 모임이 있어요. 서로 모르는 게 없고요. 이 친구는 유난히 더 마음이 가는 친구예요.
남자라며? , 젊을 때 좋아했었어?
     에이그 선생님. 남자 사람 친구라니까요.
남자 사람 친구는 또 뭐야. 그냥 친구라 이거지? 암튼 각별하구나. 그렇게 마음을 쓰는 것이.
     말하자면 저희 모임의 대장이거든요. 청년부 때 교회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불의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항의하고 그랬어요. 이 친구가 앞장섰고 몸을 사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표로 불려 가 야단도 맞고, 교회를 파괴하는 녀석들이라고 정죄도 당하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그런저런 일로 늘 고마운 친구예요. 정말 용감하고 강한 친구거든요.
아하, 그래서 친구의 약한 모습이 크게 보이는구먼.
     네, 그런가 봐요. 해결사죠, 해결사. 그런데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 앞에서 무력하다는 거예요. 무력함 너머 생의 의미까지 잃은 것 같아서 걱정이 많이 되네요. 저러다 정말 뭔 일 저지르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게요. 제가 과도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 정 선생이 많이 슬퍼 보여.
     왜 그럴까요. 실은 저희 아이들도 사춘기 지났으니까요. 그 심정 저도 모르는 바 아니죠. 자칭 타칭 엄마 중독자라 했던 아이의 눈빛에서 저에 대한 냉소, 아니 어쩌면 혐오 같은 것이 느껴졌을 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었어요. 무너졌죠. 이렇게 우리 사이는 끝난 건가? 그 사랑스러웠던 아이가….
, 그 운동화 좋아하는 철학자 아드님 말인가?
     네, 선생님 정말 기억력 끝내주세요. 그 녀석도 그렇고. 사실 첫째 사춘기 때는 처음이라 더 당황스러웠죠.
사춘기를 심하게 했어?
     아니요. 사실 여느 집에 비하면 그리 요란하지는 않았어요. 친구네 아들들 얘길 들어보면 저희 아이들 사춘기는 사춘기도 아니죠.
그래, 밖으로 드러나는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부모로부터 분리되고 떠나는 게 사춘기니까. 부모로서 상실감이야 비슷하겠지.
     맞아요. 상실감요! 애가 말을 안 듣거나, 맥락 없는 화를 내고 하는 것들은 각오도 되어 있었고요. 어떻게 견디겠더라고요. 그런데 저나 제 아빠를 향한 냉소나 불신의 눈빛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때 감정이 상실감이에요. 그 귀여웠던 아이 어디로 갔지? 이런 거죠. 친구 얘길 들어보면 그 눈빛이 온갖 행동으로 다 나오는 거고요. 때려도 보고, 용돈도 끊어보고, 달래도 보고 해도 개선이 안 된다는 거예요.
사춘기가 어떻게 개선이 돼. 통과의례인데. 어떻게든 터널 끝까지 가서 빠져나오길 기다려야지.
     아, 그렇죠….
그러엄. 정 선생 아이들 다 컸잖아. 안 그럽디까?
     그렇죠. 둘째도 이제 눈에서 독기가 빠져가는 것 같아요.
독기라?
     네, 딱 사춘기 눈빛이 있거든요. 눈에 독이 들어가고, 얼굴은 막 못생겨지고, 머리에서 냄새나고…. 하이튼 딱 그 표징이 있어요. 하하. 눈에서 독기가 사라지면 사춘기가 끝나는 거예요. 맞아요. 그런데 고통 중에 있는 친구에게 사춘기 결국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런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렇지. 아이는 아이대로 두고 부모의 인생길을 가야지 뭐. 그래. 상담은 친구가 자원한 거요? 정 선생이 권한 거요?
     뭐라도 해야겠다고요. 저한테 상담받을 수 있냐는데, 저랑은 편하게 수다 떨고요. 상담을 받고 싶으면 선생님을 소개하겠다고는 했어요. 생각해본다 하더니 연락을 해왔더라고요. 상담까지 받아야 하는 제 처지가 처량하다면서요.
하하. 상담까지 받아야 하는 게 처량하구나. 그렇게들 생각하지. 대단히 문제가 많아서, 수선이 필요한 인간이라서 상담으로 고쳐야 한다고. 아직도 사람들이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를 그렇게들 보지?
     그러니까요. 선생님과 자주 얘기했듯, 그나마 자발적으로 상담받으러 오는 분들은 희망이 있는 건데요. 제 친구도 지금 괴로워하는 걸 보면 안타깝긴 하지만 결국 나아질 거라 믿고요. 게다가 선생님께서 만나주실 거잖아요.

아들 사춘기가 들고 온 초대장

그래, 나라고 별 뾰족한 수는 없지만, 중년에 자기를 돌아볼 기회를 가진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이야. 상담이든 무엇이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친구는 영적 초대장을 받은 것만은 확실해요. 아들 사춘기가 들고 온 초대장이지.
     영적 초대장이요? 사춘기가 가져온 초대장이라….
그래요. , 왜 카를 융이 그랬잖아요. 자신이 만난 중년 이후의 내담자는 모두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왔다고. 표면적으로 가져온 문제는 다 달랐지만 결국 상담하다 보면 영적인 문제였다고.
     아, 그렇죠. 카를 융이 중년을 중요하게 말했죠. 선생님도 늘 중년, 생의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에 대해 말씀하시는 그 맥락이군요. 제 친구도 그럴 수 있겠네요. 단지 아들과의 갈등이 문제가 아니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인생을 이끌어가시는 것이 참으로 신기해요. 생애 발달에서 아이 사춘기와 부모의 중년기 또는 갱년기가 거의 겹치거든. 교차한단 말야. 그 교차점에 어떤 신비가 있는 것 같아.
     오, 어떤 신비일까요? 알 것도 같고요.
내 보기에 인간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두 번의 시기가 있어. 언제예요?
     일단은 사춘기겠죠. 아이가 자고 일어나면 키가 커서 나와요.
그렇지. 신체발달이 어마어마하지? 2차 성징과 함께 말야. 그 빠른 신체발달에 성적 에너지가 분출하는데 정신적 성장이 따라가질 못하고. 스스로 그 분열을 어쩌지 못해서 하는 행동들이 사춘기의 질풍노도 행태일 거야.
     아, 그렇겠네요. 몸은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렸는데, 정신은 어린애니…. 맞아요. 딱 그런 것 같아요. 하는 짓이 말할 수 없이 유치한데, 제 딴에는 어른인 척한단 말이죠. 아주 그냥 꼴 비기 싫죠.
척 보다는, 어느 정도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겠지. 어설프게. 하하.
     그러면 또 한 시기는요? 정해진 답인가요? 중년기?
그래. 영적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때. 내 식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해보자면……. 영적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데 여기서도 내 정신이 그걸 따라가질 못해.
     흠…. 정신적 발달이 영적 발달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려운데요, 선생님.
어렵지. 그 왜 어떤 공허감, 허무감 같은 것 있잖아요. 선생님 친구가 했다는 말. 내가 뭐 하고 살았나 싶다. 인생 잘못 살아온 것 같다. 실패했다. 살 이유를 못 찾겠다. 같은 말들. 저만치 가는 영적 수준을 정신적인 것이 따르지 못하는 괴리 같은 것 아닐까.
     으으…. 더 어려워요. 그러니까 허무감 같은 게 영적 발달에서 오는 감정이라고요?
의미를 찾는 거지. 인생의 진짜 의미. 그러니 사춘기가 고맙지 뭐야. 중년기 영적 초대장을 받아 든 제 부모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딱 알려주니까.
     엇, 뭐라고 알려주는데요?
하하. 그걸 보여줘야겠다. 내가 강의하다 즉흥적으로 칠판에 그렸던 건데 말이야. 그 옆에 메모지 좀 줘 봐. 내가 그래프를 그려봤다우. 자 봐봐. 이건 부모와 자녀 사이 존재 힘의 그래프야. 아래쪽이 아이 위쪽이 부모라 생각해 봐요. 처음 만났을 때 어때? 갓 태어난 아이는 완전히 무력하고 의존적 존재지? 아이의 힘은 바닥이다. 그렇지? 부모의 전적인 보살핌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어. 부모의 힘은 최대치가 되겠지. 24시간 붙어서 돌봐야 하잖아. 그런데 아이가 뒤집고, 기고, 걷기도 하며 기동력이 생기고. 존재의 힘이 커져. 그러면 점점 부모의 돌보는 힘이 이렇게 줄어드는 거지.

 


     오호! 그러네요. 와아아, 맞아요. 선생님. 처음에 끄덕끄덕 목도 못 가누는 걸 안는데 잘못 만지면 어떻게 될까 봐 어쩔 줄 모르던 순간이 생각나네요. 얼마 안 가서 목을 빳빳하게 세우는데 신기했어요. 그렇군요. 아, 그랬던 적이 있었죠. 식당에서 밥 먹다가도 ‘엄마, 쉬’ 하면 데리고 화장실 가야 하고…. 그런데 혼자 화장실 가는 것도 엄마에겐 얼마나 자유예요.
그러니까. 육아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거야. 갑자기 가장 무력한 상태로 내 앞에 나타난 한 존재를 24시간 책임져야 하잖아. 다행인 것은 시작이 최고점이고 갈수록 그 힘이 줄어든다는 거지. 떠나보내는 과정이라는 거야. 젖을 떼고 기저귀를 떼고 해 봐.. 점점 부모 손이 자유로워지지. 그렇게 둘 사이에서 힘의 그래프는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 아니겠어?
     아하, 참 이것 어렵고도 신박하군요. 그러면 사춘기 아이가 중년 이후를 어떻게 살으라고 딱 가르쳐 준다는 거죠?
정답 나왔잖아. 힘 빼라고. 이기지 말라고. 이길 수 없다고. 그래프를 보라고.

도(道) 중의 도는 내비도!

     아아…. 어, 어려워요. 그러면 제 친구는 아들들에게 무조건 져야 하는 건가요? 중년의 초대장을 받아 든다는 건 그런 뜻인가요? 훈육하지 말라고요?
글쎄. 나는 훈육의 골든타임이 있는 것 같아요. 인간 된 도리를 가르치고, 기본적인 생활 습관을 가르치는 것, 더 나아가서 신앙의 훈련까지도 사춘기 이전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사춘기는 아이들이 자신을 한 성인, 한 존재로 받아들여 달라는 몸부림을 하는 거거든. 부모 가르침이 들리겠수? 옳은 말씀 하는 부모 말에 반발심만 들걸. 내가 상담했던 아이는 그러더라고. 부모가 잔소리 시작하면 속으로 너나 잘하세요.”.” 하며 딴생각한다고..
     그랬던 것도 같네요. 어쩐지 사춘기 때 애들 얼굴 떠올리니 그랬을 것 같아요. 맞아요. 가르치려 할수록 엇나갔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막 나가는 아이를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친구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냥 두면 애 인생 망칠 것 같다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부모가 힘을 쓸수록 아이는 더 저항하는 것 같아요. 하하, 그래서 엄마들끼리 그런 말을 하죠.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도 닦는 심정으로 살아야 하는데요. 도중의 도는 내비도! 래요.
허허허, 내비도. 그거 좋네. 거기서 득도하는 게,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 선생님 친구도 J 씨도 만나서 얘기 들어봐야 하겠지만. 아이를 어떻게 해보려는 힘을 빼고 물러나는 게 자기가 살길일 수도 있어요. 여하튼 내가 만나 보리다.
     선생님, 참 쓸쓸해요. 뭔가 이렇게 인생에서 많은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는 게 참 그래요. 언젠가 제가 선생님과 약속 잊었던 일도 있었잖아요. 지금도 건망증은 더 심해지고 있거든요. 안심하라고 하셨지만, 처음처럼 그렇게 걱정이 되진 않아도 뭔가 좀 쓸쓸해요. 이렇게 존재가 스러져가는 건가…. 이 그래프에서처럼 최대치의 힘을 점점 빼고 하강하며 소멸해가는 것인가요?
이런 그래프도 있어. 봐봐. 요제프 골드브룬너라는 이가 이런 그래프를 그렸대. 뭔지 알겠소?

 


     글쎄요. 감이 잘 안 잡히는데요. 아까 그 존재의 힘의 교차와는 다른 것 같고요…. 뭐예요?
, 여기 실선이 뭐랄까 활동성이나 몸의 기능 같은 것들? 인생의 외적 부분이 진행하는 과정이라고 합시다. 점선의 화살표는 정신적 발달이라는 거야. 외적 곡선은 어느 순간 하강하는 반면, 그러니까 정점에 이른 다음부터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소. 바로 그 지점에서 정신적 발달을 가리키는 화살이 새로운 자유를 향해서 나간다는 거야. 정신적 발달, 영적인 발달은 오히려 이때부터 더 먼 곳으로 날아가지. 멋지지 않아? 쓸쓸함도 진실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러네요. 뭔가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와,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이런 뜻일까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갑자기 이 말씀이 훅 알아들어지네요..
아이구, 성경을 줄줄 외는구나.
     아니요. 외우는 구절 거의 없는데요. 뭔가 참 꽂히는 말씀이라 마음에 맴도는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거든요. 선생님, 정말 갱년기 허무감이 희망으로 다가와요. 선생님이 저 그래프의 살아있는 버전이시잖아요.
무슨 소리야. 살아있는 버전은 또 뭐야.
     저는 느껴져요. 저의 인생 롤모델이시잖아요. 제 눈에 보여요. 선생님의 정신발달 화살표가요. 얼마나 높이 멀리 나아가고 계시는지 보인다고요. 저기, 저어~기 타원형같이 생긴 구름 있잖아요. 그 정도까지 가 계세요. 히히히.
, , 노인네 골리기 시작한다.
     모든 일에 반항하는 아이는 사춘기, 엄마 아빠는 오춘기인가 봐요. 뭐 의미 있는 게 없고 삶의 낙이 없고 쓸쓸하기만 한 엄마는 오춘기... 육춘기도 있으려나요?
, 그런 책이 있어. 신앙 사춘기라고. 제목을 제대로 지었더라고. 신앙생활에서 아이에서 어른 신앙으로 넘어가면서 오는 질풍노도를 딱 잘 그렸던데. 마침 그 저자도 나이가 딱 중년기더라고. 어쩌면 아이가 생물학적 사춘기를 겪는 동안 부모는 영적 사춘기를 함께 통과해야 하는지도 몰라. 하나님께서 생애 발달을 그렇게 묘하게 엮어 놓으셨나 봐.
     친구 문제 상담하다 제가 깨달음을 얻네요. 아이들 사춘기 때 느꼈던 휑하게 텅 빈 것 같은 그 느낌이 다시 살아와요. 인생에서 아름다운 시간은 다 끝났구나. 되돌릴 수도 없구나. 허망하구나 싶었던 것 같은데. 제 친구가 저와 결은 다르지만, 그 시기인 것 같네요. 강한 친구가 약해 보이니 더 안쓰러웠던 것 같아요. 이 시기가 정말 그 친구에게 영적 전환점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물론 제게도요. 상담 잘 부탁드려요. 정말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리다. 얘기 나누다 보니 나도 성경 한 구절이 떠오르네. 언젠가 내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정 선생이 좋은 노인에 관해 물었을 때 했던 말 같아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힘을 빼고, 주도권을 이양하며 남이 나를 띠 띠우기를 허용하는 것, 생애 후반의 영성이야.
     네, 선생님. 조금 알아들어져요. 그런 의미로 아이의 사춘기는 요란하고도 세미한 그분의 초대의 목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요. 친구의 마음 여정을 보면서 저도 잘 배울게요. 더 많이 가르쳐 주세요.

* 시니어 <매일성경> 2023년 1, 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
2019년, 팬데믹 직전이었다. 연구소 시작하고 1년을 지내고 송년의 밤을 열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시작한 연구소, 생각보다 더 좋았던 1년을 정리하는 말로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 이걸 내걸었었다. 카를 융과 함께 분석 심리학 작업을 했던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의 책 제목(궁금하면 클릭!)이다. 의미를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융 심리학을 '경험의 심리학'이라고 한다. 머리로 아무리 이해해 봐야 체험하지 못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심리학이란 뜻이다. 게다가 '여성적 경험'을 담은 융 심리학 책이니 과연 몇 명의 독자가 제대로 읽어냈을까. 이 직관적인 책을 나 역시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 깊이 새겨진 이 한 문장의 강렬한 여운만은 진실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안다.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살고 지향한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을.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의 교회
대학원 3학기를 통틀어 이 한 문장을 얻었다. 이 문장을 듣기 위해 잉여에 겨운 석사과정을 했다 해도... 오케이, 인정이다! 잉여라 해도 아깝지 않다.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는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진보적 여성 신학자의 말이 아니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 목사의 말도 아니다. 보수적이라면 보수적일 교수 신부님의 말이다. 사이버 캠퍼스에 올라온 강의안의 저 문장을 보고 쿵, 하고 마음이 흔들렸다. '동등하고'라는 말에 먼저 울컥했지만, '체험으로서의 교회'라는 말은 내 마음에 아니 내 삶이 이미 충만한 것이어서 익숙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비로소 '언표'된 것이다. <영성신학> 과목이었다. 영성이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전제, 생명과 체험, 한 학기 내내 이 두 단어의 역동을 생각했다.

이 말 한마디 듣고자 여기까지 왔다. 언제 첫 발을 떼었을까? 서른여덟 즈음 신앙 사춘기가 시작되던 때일까, 중1 여름 수련회 때 "예수님 위해서 살고 싶어요. 선교사 될래요."라고 기도했던 때일까, 중1 겨울 아버지 손을 놓치고 천국에 있는 아버지를 그리느라 시작한 내적 여정일까, "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나도 예수님 따라갈 테야" 첫 노래를 부르던 때일까, 안방 벽에 붙어 있던 기도하는 사무엘 그림을 보고 누워있던 떡아기 때일까? 나의 교회 사랑(과 미움 또는 집착)은 언제부터였을까?

어쩌자고 나는 이 말을 이제 와서 듣게 된 것일까? 아니, 내 안에 충만했던 말을 굳이 왜 밖에서 들어 확인해야 하는 것인가? 이 말 한마디 듣자고 나는 이렇듯 먼 길을 돌아온 것인가. 내 몸이 담겼던 교회를 떠나 높고 높은 벽을 넘어, 여기서 들어야 했던 것일까. '선언'은 얼마나 중요한가. '선포하노라!' '죄를 사하노라!' 선포에 담긴 힘이란!

기독교반성폭력센터 후원의 밤에서 토크 콘서트 장면 / 사진 : 뉴스앤조이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은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이 강의안이 사캠에 올라온 때는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나의 구원사"를 나누는 목요일이었다. 쉬는 시간에 사캠을 열어 확인했던 것이고, 쿵!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도자 과정 첫 시간의 소개와 나눔 시간에 나는 '교회'를 생각했었다. 이들에게 교회는 뭘까? 공동체는 뭘까? 이렇듯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뭐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교회에의 절망은 깊어져야 하는 걸까? 목사님, 사모님, 간사님, 선교사님, 전직 목사의 아내... 이들이 담겼거나 떠나온 교회에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헌데 지도자 과정을 마치며 구원사를 나누고,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을 통해 일구고 싶은 공동체를 그리다 보니 이들은 이미 교회를 살고 있었다! 이들이 있는 곳이 교회였다. 다만 스스로 믿어주지 못할 뿐.

저 강의안이 올라오고, 다음 주 강의를 기대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고 결국 종강 날의 주제가 되고 말았다. 종강 수업이 있던 날은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종강 날이기도 했다. 줌으로 했던 모임이었는데 "얼굴 보고 싶어요, 안아주고 싶어요" 하는 마음들이 모아져 마지막 모임을 대면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눈이 많이 왔다. 과연 다들 올까? 싶었다. 대부분 지방에 계셨으니... ktx 타고, 고속버스타고 속속 모여들었다. 풀참 대면 모임이 되었다! 손에 손에 들고 온 것들을 풀어놓으니 먹을 것은 또 얼마나 풍성한지. 색색이 따뜻한 선물까지... 여성적인 것들을 모으면 이렇다. 늘 이렇다. 이러고 보면, '여성적인 것 구원'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 구원'이다. 이날의 주제는 '하나님의 어머니 되심'이었다. 짧은 강의 후에 "하나님 어머니께"라는 글을 쓰도록 했는데, 내내 창 밖으론 하염없이 눈이 쏟아졌다. 글을 쓰고 낭독하는 사이 눈물도 쏟아졌다. 너나 할 것 없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넓은 창을 마주한 내 자리에선 하염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이 꿈속처럼 느껴졌다. 아, 우리들의 하염없는... 그 무엇...

글쓰기 모임 마치고 눈길을 뚫고 학교에 갔다. 강의는 한 학기 내내 그랬던 것처럼 내게는 뜨겁고 다른 학생들은 어땠는지는 모르겠고. 내게는 강의 시간이 너무 짧고 다른 학생들은 빨리 집에 가야하고. "제도로서의 교회(남성성)와 체험으로서의 교회(여성성)은 동등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이 문장에 대한 설명을 어찌해주실지, 나는 기대에 찼고. 교수님은 어쩌자고 당신이 써서 올린 이 문장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안 하시고. 그렇게 그냥 강의가 끝났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언표함, 선언으로 족했다.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으로서의 교회는 교수님보다 내게 더 가까운 앎일지 모른다. 하나님 사랑에의 참여로서 영성을 공부하시며 그것을 살아내며 알아듣고 선언해주신 것으로 족하고 감사할 뿐. 낮에 눈 펑펑, 눈물 펑펑, 하나님 어머니 펑펑... 그 체험이면 족하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일주일 후 <기독교반성폭력센터> 후원의 밤 모임에 참석했다. 마이크가 주어져 떠어들댈 기회가 생겼다. 이날 주제가 "안부_ 안전한 교회를 부탁해"였다. 누구든 안전한 사람, 안전한 장소에선 자신을 드러낸다. 자기 생각을 감정을 드러낸다.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는 보호본능으로 갑옷을 입고 포장지를 두른다. 교회는 안전한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인가, 드러내고 싶은 곳인가. 포장지 두르라 권하는 곳은 아닌가. 누구에게 교회의 안전을 부탁할 수 있을까. 내가 안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안전한 사람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방법 밖에 없다. 우리가 안전지대가 되자는 얘기를 했다. 체험으로서의 교회, 여성성의 교회 얘기도 했다. 교회를 체험한, 체험으로서의 교회인 여성들이 각자 누군가의 안전이 되어 주어야 할 것 같다. 누구보다 내가.


이틀 후에는 연구소에서 또 다른 소소한 모임을 가졌다. 지도자 과정 마치고 대학원에 간 선생님들의 수다 모임이다. 한 학기 공부한 것도 나누고, 어려움도 나누는 종강파티! 여기 또 하나의 체험적 교회가 섰다. 안전한 여자들이 모이면 거기는 체험적 교회가 된다. 좋은 것은 오래 간직하고, 재현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좋은 것은 재현되지 않는다. 영적 경험은 카피되지 않는다. 체험적 교회는 한 번 서고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것들을 복사해서 재현하고 제도화하려는 제도적 교회가 매력이 없는 이유이다. 선생님 한 분이 사 오신 케이크 위에 "Love the moment"이라 적혀 있었다. 그렇다. 정녕 그렇다. 순간 체험하고 사랑하고 향유하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 여성들이 그걸 잘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순간의 기쁨과 경이로 만족하고,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해 진실했던 지난 1년에 후회 없다. 진실하게 몰입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돌아서서 종종 부끄럽기도 했지만, 뜨악하는 반응에 괜히 했다 싶었던 적이 없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 순간, 향유의 순간, 여성적인 것들의 구원이 있는 사랑의 순간이 나의 교회이다. 우리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고.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을 구원함  (2) 2023.01.09
2023 내적 여정 일정  (0) 2023.01.03
후원 편지에 진심  (0) 2022.12.23
별과 글 : 송년 글쓰기  (0) 2022.12.06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0) 2022.11.30

4박 5일 기도 피정에 다녀왔다. 낯선 고향 같은 곳이다. 어쩔 수 없는 종교의 담이 있으니 가도 가도 낯설 수밖에 없고, 밖에서 찾던 하나님을 내 안에서 찐하게 만난 곳이니(말이 되나? 내 안에서 만나려고 그 밖으로 갔다...) 영적 고향 같은 곳이다. 침묵 피정인데, 침묵 속에서 전쟁을 치르곤 했기에 이번에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갔는데. 숙제도 안고 갔는데... 웬걸! 한 시간 기도 시간은 10분처럼 지나가고, 밥은 맛있고, 9시부터 잠은 잘 오고, 화장실도 잘 가고. 방안에 든 겨울 햇살이 아름답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사랑스럽고, 마주 앉은 식탁의 자매님이 와사삭와사삭 콜라비 씹는 소리가 재밌어서 자꾸 웃음이 나오고… 어쩌자고 예정에 없던 신소희 수녀님이 피정 동반을 해주시고.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4박 5일을 보냈는데, 전쟁 없이 숙제가 조금씩 풀리고, 마음의 그물이 치워지고, 분열된 어떤 것들이 통합되는 예상치 못한 피정이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폰을 받아서 열어보니 나를 뜨겁게 기다리고 그리워 하는 사람들은 역시나 연구소 식구들. 100개 되는 톡이 쌓여 있는 연구소 톡방에 신고를 했다.

출소!
아니... 이제 수감인가?

출소라면 출소고 수감이라면 수감이다. "어솨요. 속세로 아니 소장님의 성소로" 이런 톡이 있었다. 나의 성소다. 그래 나의 성소 싱크대 앞(클릭하지 마요! 클릭하지 마요! ㅎㅎ)에 서자! 일상이라는 감옥에 사식을 넣는 마음으로 김치수제비 해본다. 얼마 전 채윤이랑 둘이 만들어 먹으며 종필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마시께따. 나 김치칼국수 좋아하는데..." 했던 말을 킵해뒀었다. 애들은 고모가 스테이크를 사준대서 룰루랄라 나갔고. 2022년 마지막 날 아점으로 끓여서 둘이 맛있게 먹었다. 늙은 호박 갈아서 야심 차게 전을 해봤는데, 죽사발이 되어서 대신 돈가스를 데워서 곁들였다.

마싯썻써!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즈 닭갈비 먹고 힘!  (0) 2023.01.06
2023년 중 가장 행복한 날  (2) 2023.01.03
먹고 마시고 수고하고 감사하고 누리고  (1) 2022.12.10
동네 친구 덕에 보쌈 축구  (0) 2022.11.24
job-chae  (0) 2022.11.12

# 재미가 없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다.
#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다.

교회 젊은 부부들과 함께 하는 육아 세미나를 마쳤다. 『타고나는 부모는 없다』 오래된 책이고 고리타분한 책이다. 그럼에도 함께 읽을 충분한 가치가 있어서 선택했다. 육아의 기술이란 없고, 기독교 상담을 한다는 아빠의 실패담만 넘친다. 알 듯 모를 듯한 육아 원칙은 요즘 엄마 아빠들에게는 쉽게 다가가지도 않는 것 같다. 여백이 많은 책이다. 그래서 선택했다. 마지막 챕터는 '놀이'에 대한 내용이다. 내가 책을 썼다면 "아이들은 그 어느 때도 아닌, 부모가 놀아줄 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라고 썼을 텐데. 역시나... '놀이에 대한 신학적 이해' 같은 소제목의 글로 '재미'를 쏙 빼고 글을 쓰셨다.

그러면서 결론은 위의 두 문장이다. 그러니까 단지 아이와 놀아주는 얘기가 아니다. 육아를 아이와 함께 하는 긴 놀이로 보는 것이다. 조금 확장하면 인생 자체를 놀이로 보자는 말이었는데. 성과에 목숨 걸지 말고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자는 뜻으로 나는 읽었다. 소명으로서의 놀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고 부여하신 소명은 "놀다 와라, 잘 놀다 와라"이다. 그러니 재미가 있어야 하고, 실패도 있어야 한다. 정말 나는 찰떡같이 알아들어진다.

모임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다. "저는, 저와 현승이는 지금 대학입시 놀이 중이에요!" 말하고 나니 더욱 믿어졌다. 맞아, 결과 하나가 아니라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는 거야. 과정 하나하나를 즐기기 때문에 재미가 있고. 실패가 있어서 심장이 쫄리고 잠시 하늘이 내려앉기도 하지만, 과정이니까...

과연 실패도 있고, 재미도 있는 대입의 과정이었다. 잠시 희망의 속삭임이 마음을 간지르기도, 실패감의 먹구름이 덮치기도 하였다. 현승이 어깨가 툭 떨어지고, 말이 없어지자 가족 모두 생기를 잃었다. 슬픔과 막막함에 휩싸이기도 했다. 우리 현승이,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보석 같은 선생님들을 만난 덕에 하루 이틀 고통의 터널을 지나 다시 희망을 붙들기로 했다. 고통 회피를 위한 긍정적 해석이 아니라 '큰 그림을 보자'는 뜻을 품게 되었다.

입맛을 돋궈서 밥이라도 많이 먹이려고 저녁으로 좋아하는 삼겹살과 파김치를 준비했다. '큰 그림'을 안고 학교에서 돌아온 현승이 얼굴이 편안하고 밝았다. 전날 저녁에는 꽉 막혔던 대화의 길도 활짝 열렸다. 둘이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구운 삼겹살과 파김치를 두고 기나긴 이야기를 나눴다. 대입을 통과하고 뽀개는 재미, 실패를 마주하고 일어서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말을 잘한 거다. 우리는 대학입시 놀이 중이다.

현승이가 이번 가을에 혼자 먹은 파김치가 5kg이다. 3kg 씩 두 번 주문해서 거의 혼자 다 먹었다. 뜨거운 밥에 먹고, 짜파게티에 먹고, 삼겹살에 구워 먹고... 심지어 수능시험 보는 날 도시락 반찬 뭘 싸줄까 했더니 파김치를 주문할 정도. 파김치 5kg 먹어 치우면서 행복한 대입 준비였다. 여러 번 말했지만 행복 등급으로 치면 1등급, 대한민국 고3 상위 5%였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대학 입시 놀이 잘 끝났다. 재미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다.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니다.

'기쁨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You’ve got a friend in me  (2) 2023.02.22
붉은 사막 위의 HS, 부럽다  (5) 2023.01.28
철학자의 길  (0) 2022.11.04
수험생이 된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  (0) 2022.10.24
고3의 놀토  (0) 2022.08.27


연구소 소장이고 때로 ‘작가’로 불리기도 하는데. 작가로서 가장 어려운 글이 후원 편지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쓰는 후원 편지가 그렇게나 어렵네요.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담고 싶은 말이 많아서라는 것을요.

후원 편지에 진심입니다. 함께 보내드리는 작은 선물에는 매번 발품, 손품, 생각 품을 쏟아붓고요. 이번엔 손수건에 연구소 심볼을 달아 보내드리려고 연구원 선생님들이 한땀 한땀 손바느질을 했답니다(양말에도 붙이려다 참았습니다!^^).

연구원 선생님들은 실은 1호 후원자입니다. 무료 상담 봉사는 아니지만, 교통비 정도 되는 활동비를 받으며 언제라도 연구소를 위해 주머니 터는 것으로 치면 최고의 후원자들이지요. 기쁨입니다! 치유와 성장의 여성 공동체를 일구고 누리는 것이 가장 큰 보상이라서요.

보내주시는 후원금은 꼭 필요한 분들 위해 은밀하게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의 연결인 ‘나음터’가 계속 여기 있었으면 싶은 분들, 후원으로 연결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 후원자님 중에 우편으로 편지 받지 못하신 분은 연구소로 연락 부탁드려요.

해외에 계시면서도 꾸준히 후원해주신 벗님께 그간 모아 두었던 몇 년의 선물을 한꺼번에 보내드리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후원자, 내담자, 모든 과정 참가자… 누구보다 저희 자신, 그리고 깨어진 이 세상, 무엇보다 누구보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과 늘 진심으로 연결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후원 계좌 : 농협 301-0240-4119-71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늘 감사한 후원자님.

지난 한 해, 마음으로는 수십 통을 썼던 편지를 이제야 한 통 제대로 써서 부칩니다. 감사합니다.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신 후원금이 연결이 필요한 분들에게 닿는 끈이 되었고, 저희에겐 큰 지지와 힘이 되었습니다.

연구소에서 하는 일로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누구를 어떻게 돕고 있는지 자세한 보고를 드리지 못하는데도 한결같이 입금되는 후원금을 보면서 ‘믿음, 믿어주심’을 생각합니다. 믿어주심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상담과 내적 여정, 그리고 여러 집단 여정을 통해 풍성한 치유와 아프고 기쁜 성장의 순간이 이어지고 이어지는데 이 감동을 자세히 알려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나음터의 상담과 여정은 어느 지난날, 투명하게 마주하고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상처’와의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상처’의 문을 열고 들어가 거기 부재하셨던 하나님을 만날 때 심리상담은 영성 상담의 영역이 되곤 합니다. 박정은 수녀는 ‘상처가 존재의 무늬’라고 했는데, 과연 그러함을 신비롭게 체험합니다.

연구소 사역의 열매는 모두 개인의 상처와 닿아 있고 상처가 무늬가 되는 신비로운 체험이 흔하지만, 실적과 성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후원자님께도 전해드리지 못하고, 저희 자신도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을 이 편지를 쓰며 확인하게 됩니다. 영혼 깊은 곳의 기쁨과 보람은 있지만, 내놓고 박수받고 찬사받을 일이 없으니 인간적인 마음으로 지치고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그럴 때 위로가 되는 것이 통장에 찍히는 후원자님의 성함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역시 마음을 보여주는 건 돈이로구나! ^^ 감사합니다. 믿어주심과 연결을 믿고 진실하게, 돈을 마음으로 바꾸어 내담자와 영적 벗들을 잘 섬기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 드렸듯, 지난여름부터 후원금 관리 기관(한빛누리)의 서비스를 중단했습니다. 서비스를 받기 위해 들어가는 물질적, 인적 에너지가 실제 후원금 대비 크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연구소 계좌로 바로 후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부금 영수증’ 발급을 해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속 후원을 위해 계좌이체 신청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마음은 있으나 미처 하지 못하신 분께는 한 번의 수고를 부탁드립니다.

나음터는 자카리아스 하이에스 신부님의 묵상집인 ⟪별이 빛난다⟫를 읽는 기도로 드리며 대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 구절을 나누고 싶습니다.

❝별이 빛납니다. 당신은 이 길에 많은 것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길 위에서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떠나보내십시오! 당신에겐 사랑의 황금과 갈망의 유향과 고통의 몰약이 있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이것들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별을 따라 걷는 후원자님의 길이 사랑에 닿고, 하나님 아버지 마음에 닿기를 기도드립니다.

2022년 대림절에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드림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 내적 여정 일정  (0) 2023.01.03
여성적인 것의 구원  (1) 2022.12.31
별과 글 : 송년 글쓰기  (0) 2022.12.06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0) 2022.11.30
잃어버린 꿈, 교회  (0) 2022.11.21

 

폭탄을 맞았다.

 

손글씨로

 

정성 폭탄

 

정 폭탄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바 모닝커피  (1) 2023.02.08
편하면 모두 외향형  (2) 2023.02.04
두 신부, 두 강사, 두 목짜  (4) 2022.11.29
인기 거품  (0) 2022.10.05
뉴욕 천사  (2) 2022.08.03

오후 4시까지 줌 글쓰기를 하고 5시에 상을 차려 마주 앉았다. 그 한 시간 안에는 집 앞 마트에 달려갔다 온 시간도 포함이다. 5시간 정도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리도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 가벼워졌다. 트리에 불이 반짝이고 대림초가 켜지고 캐럴이 흐르고 이 얘기 저 얘기 막힘없는 이야기, 또 이야기.

 

장비 빨에 힘입어 그야말로 '뚝딱' 준비한 상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몇 달에 한 번씩 만나 식사하는 사이이지만, 어쩐지 이번엔 좀 잘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언젠가 윤선이가 내게 심어놓은 말이 있다. “나는 은혜는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입은 모든 은혜를 잊지 않아야겠지만, 어떤 은혜들은 더욱 의식적으로 잊지 않고 자꾸 표현하며 살려고 한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의 식사에는 골든 타임이 있으니까. 빈틈없는 12월 일정 중 휴강으로 생긴 틈에 빠르게 만남을 성사시켰다. 아니면 해를 넘기게 생겼으니. 

같은 식사지만 이번에는 그런 의미로  "대접" 마인드를 많이 갈아넣은 식사였는데, 결국 또 우리가 좋고 말았다. JP(제이피 아니고 종필로 읽어야 함)이 정의한 '좋음'의 이유는 이것이다. "보기 드물게 질문하고 들어주시는 분들!"이라서. 맞다. 나도 남편도 강의와 설교로 마이크 꽤나 잡고 흔들지만, 더 많은 시간을 '듣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이분들을 만나면 우리 이야기를 하염없이 하게 된다. 그렇구나. 질문을 해주시는구나! 묻고 걱정해주고 이끌어주는 선배가 있어서 참 좋다. 결국 그래서 우리가 좋았다.

 

며칠 조금 야릇한 황폐함으로 지냈다. "내 열정이 부끄럽다, 부끄러운 나의 열정...이었다." 좋은 걸 좋아하고, 가끔 계산을 잊고 좋은 것과 좋은 사람에 투신하고, 좋은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마는 내 열정이 부끄러웠다. (아, 싫은 걸 싫어하고, 싫은 건 멀리하곤 하는데... 이제 그것엔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 새로운 발견!) "내 열정"이 부끄럽다고 말하면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아니니까. '열정'이라고 퉁친 말 뒤에 숨은 지질한 감정들은 모르니까. 

 

내가 좋은 것이구나! 열정을 쏟아내는 대상이 아니라 결국 내가 좋은 것이다. 발에 모터 달고 1시간 만에 준비한 열정의 식탁으로 내가 좋았던 것이다.  지난 주일 설교 본문은 전도서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헛되고 헛되고 헛된 세상을 살면서 먹고, 즐기고, 수고하는 것을 누리라! 오늘이라는 선물을 누리라!였다. 순간을 누리는 열정은 나를 따를 자가 없지. 부끄럽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실은 부끄럽다기보다는 슬펐던 것 같은데, 슬픔도 어제의 것으로 흘려보내기로 한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중 가장 행복한 날  (2) 2023.01.03
사식, 김치수제비  (1) 2022.12.31
동네 친구 덕에 보쌈 축구  (0) 2022.11.24
job-chae  (0) 2022.11.12
편백나무 없는 편백나무 찜  (2) 2022.11.09

아침에 일어나니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16강 진출!! 김종필 메롱~" 식탁에 아이패드 놓고 그 역사적이고 짜릿한 포르투갈 전을 혼자 관람한 채윤이 작품이다. 16강 진출의 기쁨과 '축구 친구 김종필'에 대한 배신감이 고스란히 담긴 몇 마디이다. 현승이는 친구들과 보러 가고, 엄마는 원래 축구에 관심이 없는데... "아빠는 안 봐. 내가 보면 져."라고 말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버린 아빠, 결국 이 재밌는 순간을 주먹으로 입 틀어막고 보게 한 아빠에 대한 배신감과 복수심이다. 축구에 너~어무 진심인 아빠는 '보면 질까 봐'가 아니다. 설교를 향해 몸과 마음을 만드는 금요일의 리듬이 깨질까 피한 것이다. 몸은 물론이거니와 축구 승패로 마음이 요동칠까 하여 미리 피한 것이다. 축구할 때 보면 김종필이 아니라 그냥 아저씨다. "야아, 그걸 왜 그쪽으로 보내. 에휴... 저런 멍청한... 안 돼, 안 돼. 우리나라는 안 돼..." 평소 김종필에게 볼 수 없는 아저씨 본능이 그대로 나온다. "그렇게 잘하면 니가 가서 해!"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일종의 아바타 같은 거란다. 자신의 승부욕을 투사받아 대신 싸워주는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하란다. 아, 그렇다면 이해되지.


축구보다 설교에 진심이다. 그의 일주일 시계는 설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설교하는 직업이 아니면 삶이 훨씬 더 여유로울 것이다. 뉴질랜드 코스타에서 맡은 설교는 콘퍼런스 마지막 날 오전이었다. 지난여름 미주 코스타에 참석했던 채윤이가 "아빠, 어떡해. 그 시간은 애들이 거의 다 자. 마지막 날 새벽까지 놀고 얘기하고, 설교 듣는 애들이 없을 걸." 했다. 게다가 새벽에 월드컵 우루과이 전까지 있었으니 청중은 거의 사망이라고 봐야... "마음을 비우고 해. 한 사람은 깨어 있을 거야. 그 친구만 보고 설교해. 나도 전에 어느 청년부 수련회 마지막 날 오전 강의에서 회장만 깨어있는 강의 한 적 있어. 그냥 당신 자신을 위해 진심의 설교를 해." 본인도 충분히 각오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정반대. 설교자로서 근래에 경험해보지 못한 충만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청중과 함께 뜨거워지는 그 맛, 영혼이 살아나는 그 느낌을 나도 좀 안다. 역전골을 넣는 순간, 16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너와 나 구별 없이 모두 얼싸안고 뛰는 느낌에 비할 수 있을까?

축구에 진심이고, 축구보다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설교에 진심인 JP(‘제이피’ 아니고 ‘종필’로 읽어야 함) 은 달라스 윌라드에 진심이다. 목회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께 배우고, 영성은 달라스 윌라드께 배우는 모범학생이다. 연구소에 오는 목회자들을 위해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 읽기 모임을 이끌어주었다.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정성을 들여준 것인지 잘 안다. 그에게 시간은 내게 정말 마음에 드는 정장 원피스처럼 소중한 것인데, 매주 꼬박꼬박 시간을 내어주었다. 시간뿐 아니라 진심을 담아주었다. 보상도 없이 내어준 모든 것에 감사하다. 모임 후기를 남겨두고 싶다. 설교에 진심인 JP에 주신 위로와 격려가 코스타의 경험이라면, 목회에 진심이고 싶은 JP에게 주신 기회와 성취감이 이번 책모임이 아닐까 싶다. 2022년 가을, 늦가을의 소중한 경험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고, 메마른 일상의 설교에 지칠 때 꺼내볼 수 있었으면. 자신의 진심을 믿어줄 수 있었으면.

 

 

 

 

❝혼자서는 버거웠을 ‘마음의 혁신’이라는 산을 넘을 수 있도록 월요일 저녁마다 마음으로 함께해준 벗님들께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달라스 윌라드를 닮으신 가이드님의 친절한 안내덕분에 여기까지 올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역자로서 잔꾀와 산만함을 버리고 제자로 살고, 제자 삼는 일에 집중하고 싶은 열망이 커졌습니다. 가장 단순하고 하찮은 일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며 사는 인생 후반이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요 몇년은 제게 무척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 때에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꿈모임, 꿈 북스터디, 그리고 "마음의 혁신"을 귀한 분들을 통해 만났고, 다시 저를 살려내는 여정이 이어지고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뽀이님,소장님, 그리고 친구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저의 내적 여정은 조금씩 계속됩니다. 기대하기는 여려분과 함께 다시 볼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혼자 읽었더라면 평면적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인데, 함께 스터디를 함으로써 입체적으로 보는데 도움이 되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캐릭터가 다르면서 고뇌하는 목회를 하시는 세 분의 젊은 목사님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울림을 주었구요. 특히 이 책이 주는 느낌과 이미지가 비슷한 뽀이님의 균형잡힌 설명과 목회 현장의 이야기들은 마음의 혁신을 이루어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감사했습니다.❞
 
❝영성이라는 모호함을 정리해주고 알게해주는, 그래서 삶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책모임이었습니다.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함께 고민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특별히는 이해를 위해, 소화를 위해 노력해주신 뽀이님 감사합니다! 비록 앞으로도 시스템 속에 살아가겠지만,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고 시스템이 아닌 영혼에 주목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해봅니다!❞
 
❝어려울 때마다 달라스 원정대를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신 간달프 뽀이님께 감사드리고, 일주일의 고단함 속에서 오아시스같은 모임으로 함께 해주시는 소중한 분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달라스의 여정이 끝나지 않길 바라며, 다음엔 함께 하나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마음의 혁신 스터디’는 저에게 ‘고급 한정식 코스요리’였습니다. 한정식 중에 더러는 처음 먹어보는 맛도 있지만, 대부분 먹어본 음식입니다. 마음의 혁신의 내용도 그러했습니다. 한 때, 심취했던 ‘개혁주의 성화론’과 내용상 겹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묘했습니다. 한계를 맛보고 떠나왔던 그 음식을 하나님이 다시 먹으라고 하는 느낌!
 
그런데, 맛이 고급이었습니다. 이전에 먹어봤던 음식이지만, 대가의 손길을 거친 음식은 역시 맛이 달랐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맛 또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스요리였습니다.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분되는 인간의 자아의 다양한 차원들을 코스요리처럼 찬 챕터씩 서빙해주었습니다.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요리였다는 점에서 이번 식사는 특별했습니다.
 
늘 새롭고 특별한 음식을 맛보고 싶어하는 저에게... 하나님은 이제 다시 건강한 ‘한정식’을 먹자고 하십니다.
그 동안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하며... 놓아버렸던 ‘위로부터의 영성’을 다시 붙들게 하십니다. 저의 내면 안에는 이 둘의 충돌이 여전한 것이 사실입니다. 제 안에서는 아직 달라스 윌라드와 안셀름 그륀이 약간 싸우고 있습니다. 둘의 잘 연결되고 통합되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저에게는 진행중입니다.
 
그래도, 뭔가 한 고비를 넘어간 느낌입니다. ‘위로부터의 영성’을 놓아버릴 자유를 허용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 이것을 잡고 싶어졌습니다. 버리지 않고, 포함하여 뛰어넘고 싶어졌습니다. 스터디를 통해, 이 갈망을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게 얻은 이 씨앗...잘 키워가겠습니다. 귀한 스터디를 열어주시고, 가이드해주시고, 함께 동행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오래전에 알았던 책이었으나 읽고 싶어도 어렵고 어려워 고이 모셔놨던 책을 이렇게 멋진 인도자의 도움을 받고 친구님들께 배워 완독을 했다는 기쁨이 큽니다!이제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거 같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얻은 갈망을 붙잡고 또 한걸음 전진하겠습니다!❞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보다 남자들  (1) 2023.06.06
감동란  (0) 2023.04.05
Sabbath diary44: 아주 오래된 연인들  (2) 2022.11.26
Sabbath diary 43: 약함과 악함  (2) 2022.11.08
단 한 번의 추석  (0) 2022.09.11

(마감되었지만 포스터가 예뻐서 여기저기 걸어두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나음터는 ⟪별이 빛난다⟫(자카리아스 하이에스, 가톨릭출판사)를 읽는 기도로 드리며 대림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발은 베들레헴으로,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별, 빛나는 별을 따라서요.

묵상하다 보니 별을 따라 걸어온 2022년입니다. 별이 보이지 않을 때는 언젠가 보았던 별, 그 빛에 마음 뛰던 기억을 떠올리며, 결국 다다를 주님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2022년 마지막 시간, 별을 따라 걸어온 길을 글로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함께, 그러나 홀로, 글로, 송구영신] 하는 자리에 초대합니다.

* 온라인(zoom)에서 만나 각자 글을 쓰고 나눕니다.
* 30일, 31일 같은 내용입니다. 둘 중 하루를 신청하시면 되겠습니다.

+ 1차 : 2022년 12월 30일(금) 오후 8시~10
신청 링크 : https://bit.ly/2TAwI0C
+ 2차 : 2022년 12월 31일(토) 오후 8시~10
신청 링크 : https://bit.ly/3iCEdAw

+ 인원 : 각 9명(선착순) + 장소 : 온라인(zoom)
+ 수강료 : 2만 원 + 안내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6209-0635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적인 것의 구원  (1) 2022.12.31
후원 편지에 진심  (0) 2022.12.23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0) 2022.11.30
잃어버린 꿈, 교회  (0) 2022.11.21
쓰고 말하는 우리  (0) 2022.10.27


근 한 달 만에 찾아와 잡수고 가셨다. 이로써 알게 된 것. 새들도 떫은 감은 먹지 않는다. 익혀서 먹는다. 직박구리가 찾아와 먹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혼자 와서 먹고, 또 내가 없는 사이에는 친구 데려와 먹고. 그걸 채윤이가 목격했고. 고맙다. 결국 찾아와 먹어 주어서. 내 마음 알아주어서... 간절히 유혹할 때는 이렇듯 넘어와 주면 좋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부지런한 새들
가끔은 편지 대신
이슬 묻은 깃털 한 개
나의 창가에 두고 가는 새들
단순함, 투명함, 간결함으로
나의 삶을 떠받쳐준
고마운 새들
새는 늘 떠날 준비를 하고
나는 늘 남아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이해인-


유혹

베란다 화분 위에 감 하나를 내놓았다. 분명 연시라고 샀는데, 다른 애들 다 익어서 후루룩 먹어버린지 한참인데, 도통 물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감이다. 연시가 아니라 단감인가? 연시인가 단

larinari.tistory.com

'그리고 또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맞춤  (0) 2023.04.24
고개를 들어  (0) 2023.01.28
유혹  (0) 2022.11.06
집으로 가는 길  (0) 2022.10.19
마녀의 부엌  (3) 2022.10.03


짧게 명쾌하게 자기소개하는 게 어려운 인생이다. 작가, 소장, 강사, 대학원생...으로서 하는 일이 상충한다. (사실 가장 가까운 일상은 엄마, 아내, 그리고 약간 사모라 불리는 목회자 아내이다.) 그만큼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산다는 뜻이다. 페르소나에 맞는 일정표와 달력을 여러 개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으로서 '지도자 과정'을 동반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인가 보다. 이 달력이 제일 중요하니 말이다. 내일은(아니 정확히 오늘과 내일 일박이일) 지도자 과정 종강 피정이다. 일 년이 지도자과정 스케줄에 맞춰 돌아가고, 일 년의 기쁨과 슬픔, 즉 존재의 의미가 여기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종강 피정 일박이일은 달력에 별표 열 개를 치는 날이다.

화요일은 유난히 분열적이다. 작가, 대학원생...으로 사는 일에 급급하다 밤 11시 다 되어 귀가하니 바로 내일이 되었다. 별표 열 개짜리 일정이 있는 내일이 되었다. 김치와 피클부터 핸드드립 세트까지. 정신없이 짐을 싸고 보니 나란히 함께 하기 어려운 두 개의 정서, 위안(consolation)과 황폐(desolation)가 이중창을 부른다. 마음이 한없이 내려앉는다. 몸도 함께... 알 것도 모를 것도 같다. 낮에 '교회 성폭력 생존자 치유 글쓰기 모임'을 하며 교회고 뭐고, 인간이고 뭐고 모든 것에 절망했다. 마치고 학교 가서 수업을 듣는데,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 개신교와 가톨릭은 얼마나 먼가... (어느 순간 그리 가깝게, 전혀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때도 있건만...)

짧은 시간 안에 소개하기 어려운 복잡한(그 많은) 페르소나가 하나도 먹히지 않는 공간에 앉아 있자니, 신앙 사춘기 때부터 그렇게나 위로와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이냐시오 영신수련도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자꾸 눈물이 났다. 위안(consolation)과 황폐(desolation)의 이중창이 제대로 진실의 노래였다. 아, 이건 이냐시오 성인 작사 작곡의 노래인데. 영신수련은 지금 내게 먼 것인가, 가까운 것인가... 쓰고 보니, 쓰다 보니 좌표가 찍어진다. 나의 좌표, 나의 현재는 여기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계인의 갈팡질팡이다. (루저, 외톨이, 센 척 하는 겁쟁이...는 아니지만)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하는 외톨이 같다. 연구소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나의 구원사'를 쓰고 낭독했던 지도자 과정 모임 이야기이다. 그 시간을 떠올리니 마음이 뜨거워진다. 아, 다른 건 모르겠고 내 사랑의 좌표는 여기이다.영성이란 언제나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_우치다 타츠루


과거의 기억을 다시 새롭게 써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답습이 아니라 개정판 작업입니다. 최근 심리학 이론 중에 ‘현재주의’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발을 딛고 과거를 봅니다. 어디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마음으로 과거를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지도자과정 마지막을 달리는 시간에 나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어느 여정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입니다. 자랑과 성취가 아닌 부끄러움을 나누며 무르익어온 만남입니다. 이런 현재에 서서 다시 써보는 과거는 또 새롭습니다. 새로운 개정판입니다. 이 ‘현재’는 사랑입니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나에게 있어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영성이란 언제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_리처드 로어❞



'정신실의 내적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원 편지에 진심  (0) 2022.12.23
별과 글 : 송년 글쓰기  (0) 2022.12.06
잃어버린 꿈, 교회  (0) 2022.11.21
쓰고 말하는 우리  (0) 2022.10.27
좋은 일에 좋은 우연  (0) 2022.10.05

가을 초입 어느 날. 팔당대교 아래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고 있었다. 세 여인이 나란히 걷는데, 좌 엄마, 우 딸이다. 그러니까 내 위치는 모녀 사이이고, 나는 엄마와도 친구이고 딸과도 친구이다. 뭔가 몹시 자랑스러운 관계이다. 저 앞에는 두 남자가 걷고 있다. 한 사람은 JP, 또 한 분은 엄마 님의 남편이며 따님의 아버님. 풍경 사진을 찍던 엄마 님께서 앞의 두 남자 뒷모습을 앵글에 잡더니 말씀하셨다.

저기, 두 신부 같지 않아?(60대)
두 신부요?
그 영화 있잖아. 그거...
두 교황?
어, 그래. 두 교황.
푸하하하하... 두 신부...
느낌이 비슷하네요. 두 분 옷 색깔도 좀 그렇고. JP는 모르겠는데, 목짠님은 정말 그 라칭거 같아요. 그 배우 누구죠? 그 배우랑 느낌이 비슷한데....(50대)
아, 그 배우... 거 있잖아... 뭐지 이름이?(60대)
뭐였더라요? 생각이 안 나지?(30대)
알... 뭐 아냐? 알칸소....도 아니고, 알퐁스 도데도 아니고...(50대)
아, 거시기 있잖아.(60대)
안소니 홉킨스요!(30대, 검색해서 찾아냄)
맞아. 맞아. 앤서니 홉킨스!

이 에피소드 포스팅 하고 싶었었는데 바쁜 가을 지내느라 잊고 말았었다. 지난주 뉴질랜드에서 보내오는 사진을 보다 다시 떠올랐다. 두 신부 아니고 두 교황 아니고...

두 강사님으로 뉴질랜드 코스타에 함께 가셨다. 컨퍼런스 전에 한 교회의 극진한 환대를 받는 행복한 사진이 막막 날아왔는데, 앤서니 홉킨스 강사님 인맥 덕이었다. 어쩌면 그날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입었던 옷과 같은 옷들을 입고 두 신부, 두 교황, 두 강사... 영화를 계속 찍고 계셨다.

채윤이는 두 사진을 보고 "오, 두 명의 아굴라! 그런데 엄마, 아굴라가 무슨 뜻이야? 옛날에 그렇게 불렀던 것 기억나는데..." (이 아이의 기억력을 사랑하고, 청순한 뇌를 사랑한다.) 20년 전 일이다. 가정교회 목짠님으로 만나서 참 행복한 교회를 경험했었는데... 거기서 분가라는 것을 하고, 또 분가라는 것을 하며 우리가 목짜가 되었을 때이다. 한 작명하시는, 서쉐석목짠님이라고도 (채윤에게) 불리셨던, 앤서니 홉킨스 목짜님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목장'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다. 줄여서 AP목장이라고 불렀고, 목장 시절도 내 인생 어떤 '교회'를 누렸던 때이다.

세월을 두고 만남을 이어가고, 나이를 너머 친구가 되어가는 것이 좋다. 신형철의 책 제목 『인생의 역사』처럼.
인생의 역사, 만남의 역사.

'꽃보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하면 모두 외향형  (2) 2023.02.04
情, 精誠  (0) 2022.12.11
인기 거품  (0) 2022.10.05
뉴욕 천사  (2) 2022.08.03
한혜숙 권사님, 모든 생명  (0) 2022.07.25

남편이 뉴질랜드 코스타 참석하느라 집을 비웠다. 현승이 수능 날에 출국하여 마지막 논술시험 마치는 날에 들어오는 일정으로. 일정도 어쩌면... "중요한 때 아빠가 액운을 싹 몰아가지고 바다 건너갔다가 끝나고 오는 거라고 쳐. 어쩌면 아빠 자신이 액운... ㅎㅎ"


월요일 아침 현승이와 둘이 밥을 먹다가 말했다.
월요일인데, 월요일엔 아빠랑 같이 보내는 안식일이거든. 걷고, 밥 먹고, 카페 가서 책 보고.... 그렇게 쉬는 날인데. 아빠가 없으니까 어쩐지 월요일이...
허전해?
아니. 휴가받은 느낌이야. 쫌 좋아. 월요일에 아빠랑 쉬는 거 진짜 좋아하거든. 그런데 오늘 여유 시간이 생긴 것 같고 막 뭔가 홀가분하고 그러네.
아,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구나. 엄마 아빠....
(015B 노래 '아주 오래된 연인들' 맞다. 현승이 태어나기도 전 노래지만, 이걸 말하는 거 맞다. 얘는 어렸을 적 장래희망이 '옛날 가수'인 애라서 그렇다.)
일종의... 그런가 봐.

낮에 '아주 오래된 연인들' 가사를 찾아보았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거야~이야

 

아닌데... 아직 두근거리는데. 설렘도 있는데... (빡침과 싫증이 없다고는 안 했음)

저녁에 현승이에게 다시 말했다.
현승아, 엄마빠 '아주 오래된 연인들' 그거 아니야. 가사 다시 찾아봤는데. 아니야. 엄만 아직 아빠한테 설레. 아침에 말한 느낌은 좀 다른 거야.
아, 그런 거구나! 나도 시험 때 아빠가 없으니까 뭔가 편한 게 있어. 아빠가 죽은 것도 아니고... 시험 끝날 때 올 거고. 아빠는 노력해서 한 마디 하는데, 내가 예민해 있을 테니까 또 짜증 낼 수도 있잖아. 그러면 또 아빠가 엄청 신경 쓰일 거고, 그런 아빠를 아니까 나는 더 신경 쓰이고... 그래서 뭔가 마음 편한 게 있어.
그치? 그치? 그 비슷한 걸 말하는 거야.

MBTI로 NT 아빠-NF 아들, 에니어그램으로 5번 아빠-4번 아들 사이 긴장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데, 가끔씩 도통 이해 못 하는 그런 지점이 있다. 그걸 말하는 거다. 아무튼, 그가 오늘 돌아온다! 현승이 논술 입시도 오늘이면 끝이다!

 

와이카토 대학 캠퍼스에 선 JP.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동란  (0) 2023.04.05
축구에 진심, 설교에 진심  (3) 2022.12.08
Sabbath diary 43: 약함과 악함  (2) 2022.11.08
단 한 번의 추석  (0) 2022.09.11
Sabbath diary 42 : 영화 취향, 신학 취향  (0) 2022.09.05

 

연구소 지도자과정 마치고 저녁에는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다. 수업 들어가기 직전 전화가 왔다. 동네 친구다. (실은 교회 집사님... 인데 나를 '사모'아닌 '나'로 대해주시기에 '친구'하기로. 동네 친구이며 교회 친구) 통화는 못하고 여차저차 용건은 겉절이를 전달하겠다는 거다. 얼씨구나! 수업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들러 받아가겠다 메시지 보냈는데. 어느새 우리 집에 배달까지 해놓은 상태다. 동네 친구 덕에 의미 있는 야식 타임이었다.

아침에 채윤이가 "요즘 김장하는 때 같은데... 이럴 때 겉절이에 보쌈 해먹는 거 아니야?" 했다. "글치, 겉절이에 보쌈이지!" 그 말에 막막 식욕도 돋고, 어떤 식욕이 돋으면 자극받는 그리움... (왜 식욕은 자꾸 우리 엄마로 향하는 거야?!)에 조금 간절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겉절이 배달이라니! 늦은 하굣길 마트에 들러 보쌈용 고기 한 덩어리를 사서 막 달려와서 압력밥솥에 막막 고기를 앉혔다. 축구가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췄다.

축구 좋아하는 채윤이. 사람들 많이 모여서 얼싸덜싸 하면 에너지가 솟구치는 채윤이가 좀 안 됐다. 월드컵 첫 경기 하는 날, 그것도 카타르(지난 여름 미국 오가는 경유지로 질리도록 엉덩이 비비면 앉아 있던 카타르...)에서 말이다. 거실에 모여 앉아 야식 차려놓고 으쌰으쌰 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엄마는 축구의 'ㅊ'도 몰라. 동생 놈은 방에서 혼자 본다고 해. 그나마 같이 봐줄 아빠도 없어. 게다가 내일 11월 25일은 채윤이 생일.

생일상 차려줄 여력은 없고. 생일상 대신 전야제로 보쌈을 차려줬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식, 김치수제비  (1) 2022.12.31
먹고 마시고 수고하고 감사하고 누리고  (1) 2022.12.10
job-chae  (0) 2022.11.12
편백나무 없는 편백나무 찜  (2) 2022.11.09
구운 가지와 토마토 스파게티  (0) 2022.11.04

육아 세미나 중인 교회 젊은 부부들과 J 집사님 댁에 초대를 받았다.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놀고, 긴 시간 훈제로 구운 삼겹살은 입에서 살살 녹고, 탁 트인 시야로 마음까지 트인 사람들은 여유롭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주일 오후 시간을 보냈다. 헤어지기 전에 기념촬영을 했는데, 집에 오니 단톡방에 몇 년 전 그 장소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와, 이렇게 작았었다고? 씬스틸러는 아기들이다. 보자마자 신이 나서 사진 오려 붙이고 화살표 그려서 단톡에 올리며 낄낄거리는데... 채윤이가 그랬다.

엄마, 제발... 체통을 지켜. 이러는 거 주접...
아! 그래? 어쩌지? 이미 올렸는데.... 괜찮아. 재밌으면 땡이야!


희망을 잃은지 오래다. 교회에 대해 낙관적 기대는 없고, 남편이 목회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교회를 떠났을 것 같다. 한창 교회가 싫을 나이, 신앙 사춘기 한가운데의 허세는 아니다. '허튼' 희망을 잃었다고 하자. '신앙 사춘기'의 독기가 완전히 빠지진 않았지만, 나름 치열하게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자매들과 치유 글쓰기를 하는 중이고, 목회자로 인해 신앙은 물론 삶까지 망가진 분들을 흔하게 만나고, 반면 얼치기 신앙 사춘기 교인들로 인해 정신과 영혼이 말라비틀어져가는 목회자들을 본다. 자주 생각한다. 교회엔 희망이 없어...

주일 오후에 <육아 세미나>로 만나는 시간에 교회를 느낀다. 육아노동 가사노동으로 인한 갈등, 어린이집 선택부터 사교육의 문제까지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의 긴장, 내 부모로 인한 상처가 아이에게 투사되어 또 다른 상처를 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니 그냥 아이들 등원시키고 출근하는 고된 아침을 '죽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사는 이야기, 종일 아이 재울 생각만 하다 막상 잠든 아이를 보면 밀려오는 죄책감 같은 것....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교회를 느낀다. 엉뚱하게도 내게 교회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 사람들 곁에 내가, 내 곁에 이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느낀다.

나는 교회의 딸이다. 이건 추상적 표현이 아니다. 태어나보니, 교회의 딸이었다. 어릴 적에 누군가를 따라 동네 우체국에 간 적이 있었다. 우체국에는 전화국도 함께 있어서 교환수 언니 한 명이 전화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으로 동네 전화를 다 연결했다. 나를 보자마자 "79번!(우리집 전화번호) 교회집 딸이네!'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날 보고 "목사님 딸"이라고 하니까. 교회집 딸이라... 그러면 절집 딸도 있겠고... 여하튼 태어나보니 목사 딸이었고, 목사 딸로 불렸던 나를 부르는 다른 말은 '교회집 딸'이었다. 이렇게 정말 나는 교회의 딸이다. 자랑과 자부심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때로 많이 부끄럽다. 좋은 교회 좀 소개해 달라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교회가 없다. (아는 좋은 교회가 없어요...)

모임을 모두 마치고 엄마빠와 아기를 태운 차가 하나 씩 골목을 내려간다. 안녕, 안녀~엉! 감사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안녀~엉! 한 대씩 떠나보내는 중 남편이 "꼭 명절에 큰 형님 집에 온 동생들 보내는 분위기예요."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집사님 가족과 우리 부부, 또 다른 형제님 한 분이 골목 양편에서 서서 인사를 하는데 따뜻한 것이 꼭 가족모임 이후 같았다. 카시트에 폭 싸인 아기들 때문인지, 고기로 꽉 채운 위장이라서인지, 영혼이 따뜻한 무엇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교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영성을 배우고 있으니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제도로서의 교회에는 무엇도 희망하지 않는다. 체험으로서의 교회를 배워가고 있다. 정해진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존재하는 교회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친밀감과 연민과 기쁨이 생겨나는 곳(또는 때)이다. 연구소 모임에서는 자주 체험으로서의 교회가 선다. 거부할 수 없는 친밀감이, 사랑이 사람들을 묶는다. 기쁨보다 슬픔, 간증 나눔보다 실패의 고백인 경우가 훨씬 더 많지만 체험으로 예배는 그래서 더 성공이다. 체험으로서의 교회는 이제 내 일상에 흔하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다 깨달았다.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젊은 부부란 없었다. 몇 년 전 <신혼부부 세미나>를 진행할 정도가 되었고, 이번에 모여 사진을 찍고 보니 '이렇게 많았어?' 싶은 것이다. 조용히 이렇게 무엇이 자라고 있었구나. 게다가 최근 등록한 두 두 커플이 함께 초대되어 왔는데. 이들은 JP와 나의 젊을 날을 함께 했던, 교회에의 열정이 순수했던 그 어느 날에 함께 했던 이들이다. 사랑하고 실망하고 배신당했던 교회생활의 역사를 함께 했던 이들이 저 사진에 다 있다. 저 사진 속에 교회가 있다.

J집사님 부부가 참 귀하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면 다시 초대해서 되갚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 키우며 살아내기에 바빠 내놓을 것이 없는 여유 없는 사람을, 한참 어린 사람을 초대해준 집사님이 교회를 열어주었다. 성령님께서 이날 이 순간 잠시 내 마음에 교회를 열어주셨다. 메마른 땅에서 잘 견뎠다고 토닥토닥해주시며, 교회는 여기 있으니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자꾸 발견해가라고 하셨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