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쯤 두 망아지 떼놓고 우아하게 외식할 수 있을까? 육아의 터널이 영원할 것 같았던 어느 날,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배 부부들이 말했던 것처럼 '언제 쯤'은 금방 왔다. (금방 올 줄 알았지만, 진짜 금방 올 줄은 몰랐다.) 각각 음악캠프, 농촌캠프 일정이 있는 아이들, 이번 주에는 교회 성경학교에 갔다. (잠깐, 표정관리 좀 하고) 어머,얘들아. 엄마 아빠 둘이만 보내게 생겼네. 어떡하지? 본의 아니게(본의에 부합하게) 룰루랄라 단둘이 보내는 여름 피정.  

JP가 원하는 쉼은 오직 '걷는 것, 정신실과 느리게 것는 것'이었다. 지인의 '카더라' 소개로 대관령의 국민의 숲에 가기로 했다. 지인은 가보지 않고 소개했고, 나는 검색하여 사진 한 장 딱 보고 결정했다 하하. 이것은 각본없는 런닝맨 또는 대관령판 정글의 법칙이었다. 아직 조성되지 않은 길이었고, 지도는 허술했고 이정표는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명일동 일자산보다 나을 것 없는 길이었다. 대관령 휴게소에 주차를 하고 첫 스텝부터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지난 6월 걸었던 제주도 사려니숲을 그렸던 머릿속에 사사삭 사사삭 검정 크레파스로 덧칠하는 소리.


 


남편은 이번 여행의 제목이 <가리워진 길>이라고 했다.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듯 말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일단 출발은 했고, 어떻게든 다시 차로 가야하는데 그대로 간다면 길도 없는 숲속에서 날이 저물 것만 같았다. 되돌아가자니 어떻게 온 여행인데, 그 멋대가리 없는 길을 아무 기대없이 다시 걷고 끝난다는 것은 더 싫은 일이었다. 여러 번 기로에 섰다. 몸이 지친 것이 아니라 꿈이 사라져 마음이 지쳐버린 나는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걸었다. 기로에 서면 판단을 멈추고 JP를 바라봤다. 엉성한 지도와 아이폰을 번갈아보던 남편이 '일루 가자' 하면 무기력한 채로 부창부수.

 


가리워진 길 대책없이 대관령 800 펜션마을에 도착했다. 걸으면서 본 가장 멋진 경치였다. 정말 잘 가꿔진 잔디밭에서 아이와 아빠가 놀고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비큐를 하려는지 장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주 높은 곳에, 정말 좋은 곳에 있다는 실감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경치와 여기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처지에 있는 나를 금방 실감했다. 곧 저녁이 될 것이고, 우리는 이 밤 잘 곳도 정해놓지 않은 상태다. 아니 그것도 배부른 고민, 바로 지금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 상태. 최대의 위기였다. 방법은 차도로 나가서 아스팔트를 걷는 것 뿐이었다. 그래도 뭔 길이 있을 거야. 어, 길인가? 가보면 막다른 길. 그 순간, 남편이 환청을 들었다. 숲을 가리키며 '저기서 아이들 소리가 들려. 여보, 다 온 것 같애. 산으로 가보자' 하며 몇 걸음을 내딛자 숨겨져 있던 이정표가 다시 나왔다.


 


문제는 풀이 무성한,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 오르막 산길이라는 것. 날이 흐려서 숲은 어두웠고 발밑에 무성한 풀 사이로 뱀이 웅크리고 있을 것같아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앞서 가는 남편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려면 거의 뛰어야 했다. 아니, 뛸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길을 못 찾고 날이 어두워지면 정말 무서워서 미쳐버릴 터. 100 미터 21초인 내가 100 미터 단거리를 뛰듯 내달려 산을 올랐다.  이게 뭐야? 느긋하게 걷기 어디갔어? 가만 서있어도 힐링이 되는 키 큰 나무 사이를 손잡고 걸으며 노래하고 도란도란 얘기하기로 했잖아. 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한 발을 무사히 내딛는 것이 다행이었다. 앞에 가던 남편이, '힘들지?' 100 미터 주자 나는 '아니, 무서운 게 힘든 걸 이기고 있어'  

 


결국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었던 김종필 씨 덕분이다. (우리의 곽노현 교육감 아저씨 목소리로 썼는데.... 그렇게들 읽혀지시길. 헤헤) 길다운 길을 만나고 철조망 사이로 양떼목장도 보고, 바운스 바운스하던 심장도 제 박자를 찾으니 카메라 앞에서 웃음이 웃어졌다. 길을 걷는 동안 찍은 몇 장 되지도 않는 사진을 보니 의도한 바도 아닌데 웃음기란 찾을 수가 없었다. 단거리 달리기로 등산했던 구간에서는 아마 호러영화 속 귀신을 본 아이들 표정이었을 것이다. 사진을 비교해 보면서 한참 웃었다.  



하나님 보기시에 좋았더라,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안됐다 싶으셨는지 아무 준비없던 이후 일정들이 잘 흘러갔다. 성수기라서 숙소 몇 군데 '방 없는데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비싼 곳에 갈 수도 없었는데 물회국수 한 그릇 먹고나서 적절한 숙소를 얻어 편히 쉬었다. 대책없이 브런치를 찾아다니다 바닷가 5층에 자리잡은 할리스에서 샌드위치와 경치를 함께 누리는 호사를 누렸다. 강릉, 하면 커핀데 보헤미안이니 테라로사니 하다가 '나 맛있는 커피 찾아다니는 것, 커피를 위해 커피를 마시는 것 별로 재미없어졌어.' 해놓고도 테라로사 공장에 가서 잘 마시고 잘 놀았다.

 

 


'걸으면 해결된다'에 꽂힌 JP님의 금쪽 같은 피정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오대산 전나무숲으로 가자! 굿 쵸이스! '정신실과 느리게 숲길 걷기'는 여기서 다 이루었다. 서늘한 날씨에다 어제의 경험으로 마음의 힘이 다 빠져있어서 할랑할랑 걷기 딱 좋았다. '걷기 딱 좋은 날씨다'를 연발하면서 천년의 숲을 걸었다. 천년의 숲에 서면 호빗족 나나, 내 키 가지고 놀리는 김종필이나 거기서 거기이다. 이 대목에서 결혼 전부터 김종필씨의 노래라 생각하며 불렀던 시인과 촌장의 <나무>를 한 곡 뽑지 않을 수 없다. '저 언덕을 너머 푸른 강가에 젊은 나무 한 그루 있어. 메마른 날이 오래여도 뿌리가 깊어 아무런 걱정 없는 나무...... 밤이면 작고 지친 새들이 가지 사이 사이 잠들고 푸른 잎사귀로 잊혀진 엄마처럼 따뜻하게 곱게 안아주는 나무.....'

 

 

 

 

오싹했던 어제를 떠올리며 '정신실, 무섭다 무섭다 하면서도 안 간다고는 안 하대'라고 했다. '그럼, 난 김종필의 선택을 믿으니까. 김종필은 옳아!' '뭔 소리야?' '당신이 주도하고 주장하지 않아서 그렇지 당신의 선택을 따르면 늘 옳아. 어제 길을 걸으면서도 그랬고 당신하고 살면서도 그랬어. 당신이 멈춰서서 심사숙고한 다음에 한 선택은 언제나 맞았어.' 그렇다. 계획과는 180도로 달라서 당황했던 숲길 걷기였지만 JP의 방향감각과 분석은 탁월했다.(탁월하다) 결혼이라는 각본없는 길을 걸으면서도 그랬다. 신혼초에는 남편을 통제하려 했고, 내가 옳으니 내 말을 따라 빨리 움직이라고 닦달도 많이 했다. 그런데 경험과 경험이 입증하는 것은 달랐다. 크게 숲을 보는 눈을 가진 남편의 판단을 믿으며 내 주장을 조용히 접어도 일이 되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나무 한 그루씩 보는 눈이 발달한 내가 디테일을 채워나갈 때 가리워진 길은 드러났고 길 위에 사랑도 행복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러면서 서로 성장하게 되었다.

 


새삼 남편이 훌륭하게 느껴져서 계속 우쭈쭈해줬더니, 아뿔사! 남편의 사기가 너무 충천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끝없는 군대 얘기를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사실 재밌고 감동적이었어. 여보. 케케)  집에 돌아와 씻고 편안하게 소파에 앉았을 때 남편이 말했다. '이번 여행의 제목은 가리워진 길이야' 내가 받았다. '이번 여행의 제목은 JP는 옳다야' 가끔 김현식의 '가리워진 길'을 떠올리며 '그대여 힘이 돼 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부분에서 남편의 소명찾기를 돕는 나의 소명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늦게 목회를 선택하고 목사가 된지 3년이 되었나? 여전히 오늘도 남편은 소명을 찾아 고민하고, 나는 나대로 나의 소명을 찾아 고민하다. 그리고 그 고민이 교차하면서 때로 막막하고 무력해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가리워진 길은 어디론가 이어져 있었다. 피할 방법이 없어서 억지로  걸어야 했던 그늘 없는 길에서도 어쨌든 걸으면 해결되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나무처럼 자란다.  이렇듯 함께 걸어가는 길은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하신 결혼의 신비를 캐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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