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얘기를 해보자면 저는 젊은 시절 이만하면 괜찮은 여자라는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무익하나마 부득불 자랑하노니) 고백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연애를 잘했던 건 아닙니다. 솔로 시절이 길었고 드문 연애조차도 성공적이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랑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난감한 질문의 표상, ‘엄마 좋아, 아빠 좋아?’가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질문입니다. 단연코 아빠 좋아!’입니다. 그 이유도 얼마든지 댈 수 있습니다. 엄마보다 아버지가 훨씬 좋았습니다. 헌데 사랑이고 자랑이고 자부심이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어린아이는 가장 좋은 기억장치를 가졌다. 그러나 가장 나쁜 해석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 일생일대의 사건을 최악으로 해석해서 내면화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떠날 거야. 아버지 대신 엄마가 남은 것처럼 나는 차선을 가지게 될 거야.’ 현실은 이 잘못된 지도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활달하고 자신감 있는 여자일지언정 속에선 내 구질구질한 모습 들킬까 노심초사였습니다. 사랑과 연애가 건강해질 리 없습니다. 그러다 연애에 실패하면, ‘거봐, 멀리서 볼 때나 예뻐 보이지. 나를 깊이 알게 되면 질려버리고 말걸.’ 다시금 그 낡은 지도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결코 내 사람 될 것 같지 않았던 지금의 남편과 교제하게 됐을 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나날을 보내다 헤어졌습니다. 혹시나가 역시나였고, 다시금 사랑에 대한 깊은 불신의 늪으로의 추락이었습니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 통하듯 모든 사랑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에 대한 절망임을 그때 느껴보았습니다. ‘그렇군요. 하나님. 저는 정말 이런 존재군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그랬죠. 제게 좋은 걸 주셨다가는 보란 듯이 뺏어 가셨어요. 제게 도대체 왜 이러시죠? 심술 맞고 야박한 하나님.’ 그러나 학대하는 엄마 치맛자락을 놓지 못하는 아이처럼 겉으론 여전히 신실한 주님의 딸이었습니다. 마음 안팎의 분열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중 찬양인도를 준비하다 발견한 가사입니다. 'Come to the water. Stand by my side. I knew you are thirsty. You won't be denied. I felt every tear drop when in darkness you cried' 사랑에의 설렘이 컸던 만큼 거절에 대한 두려움 역시 압도적인 무게였죠. 역시나 남은 건 거절감. 그렇게 텅 비어버린 마음에 저 가사가 콱 박혔습니다. ‘너는 거절당하고 말 거야. 거야야아아아.....’ 오래도록 울려대던 내 마음속 나쁜 목소리가 멈추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래된 지도를 과감하게 찢어버릴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우연인 듯 우연이 아닌 듯 우연 같은 사연 끝에 헤어졌던 그와 다시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 지도 효과는 정말 끝난 것 같았습니다. 결혼 후 1년쯤 되었을 때입니다. 부부싸움 끝에 서로 속에 있던 말을 쏟아내던 중, 내 나름대로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약점을 남편이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천장이 여러 바퀴를 돌다 제자리에 갔습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다 들켜버렸어. 내 진짜 모습을 본 이상 나를 떠나겠구나.’ 두려움에 떨며 따져 물었습니다. 왜 알고 있으면서 한 번도 지적하지 않았느냐고, 모르는 척 날 속였느냐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연약한 점, 스스로 잘 알고 있잖아. 그로 인해 당신 자신이 힘들어하고 있고 무엇보다 당신이 노력하고 있잖아.’ 처음의 충격보다 더 큰 충격 같은 감동이었습니다. 수년 전 찬양의 가사를 통해 들었던 너는 거절당하지 않을 거야를 사람 목소리로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처럼 나를 사랑해줬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가장 쓰라린 지점, 나에 대한 왜곡된 상으로 오래 아파하던 지점을 정확하게 터치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그곳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웅크리고 주눅 든 지점에 말입니다. 적어도 제게 있어 결혼은 원가정을 통해 잃었던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기회였습니다. 이 경험은 자연스레 자존감 회복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을 배우자기도 제목에 추가하는 것일까요? 그러면 우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나를 누가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겠어?’ 사랑은 그것을 만드신 분을 닮아 몹시도 신비롭습니다. 누군가 진실하게 시작하면 그 다음은 신비입니다. 누구라도 먼저 시작해야 하고 할 수 있습니다. 본전 생각나지 않을 만큼만 사랑하겠다는 방어태세를 풀고 손익 계산기를 내려놓는 것. 바로 지금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낮은 자존감에 걸려 넘어지고 또 넘어질 것인가, 아니면 디딤돌 삼아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갈림길입니다. 누가 먼저 시작하시겠습니까.

 

<QTzine>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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