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말, 특히 격려의 말에 관심이 많은 터라. 아니, 관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다. 말을 들어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러하듯 나를 보는 그들도 그러하겠기에 내 말의 돌아봄에 생의 에너지 절반은 쓰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게 말은 또한 글이다. 말이 부드럽고 달달하다 하여 속까지 그러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의 없고 날카로운 말이 성숙한 인격와 날카로운 지성의 지표인 것도 아니지만. 


정색하고 농담하고, 진담은 가볍게 해버리는 습관이 있다. 이 분열적인 말로 여러 사람 헛갈리게 한다는 것을 인식해가는 중이다. 농담하다 정색하고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나는 별의별 선을 다 넘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어떤 선을 넘어오면 정색하고 굳어버리는 못된 습관도 있다. 속으로면 정색하고 겉은 말랑하게 응대하곤 이불 뒤집어 쓰고 뒹구는 경우도 있다. 말, 참으로 어렵다.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중 하나라 하고 유일하게 완독한 <어스시 전집>을 쓴 어슐러 르 륀이 작년에 88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유작 에세이집을 읽고 있다. 80이 넘어 블로그에 쓴 글들이란다. 나이 80이 되어서도 블로그 할 수 있을까. 이렇듯 날카롭고 따스하여 관조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얄팍한 긍정의 말로 두려움을 가장하지 않고, 문학적 미사려구로 자아팽창을 포장하지 않으며, 무례한 말로 진실을 가장하지 않는. 안팎이 투명한, 정련된 언어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그 책의 일부이다. 입에 붙은 상투적 격려와 긍정적인 말을 돌아보게 한다. 긍정적인 것만 보고 싶어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누군가를 돕거나 성장시킬 수 없다. 말하는 이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피상적인 말잔치일 뿐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게 하는 진실한 말, 그러나 사랑에 기반 한 따뜻한 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의 수련’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년의 실체를 전적으로 나쁘게만 보고 노화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노인들을 대하고 싶은 나머지 노인들의 현실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선의를 가득 담아서 내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 선생님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
솔직히 말해 팔십사 년을 사는 일이 그저 생각에 달렸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저희 할머니는 혼자 살면서 아흔아홉 연세에도 아직 차 운전을 하신답니다!”
할머니 만세다. 유전자를 잘 타고난 분이다. 아주 귀감이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는 본보기로는 틀렸다.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의 상태다.
“오, 선생님은 불구가 아닙니다! 스스로 불구라고 생각하는 만큼 불구가 되는 법이지요! 제 사촌은 척추가 부러졌었는데 금방 이겨내고 지금은 마라톤 경기에 나가려고 훈련을 받아요!”

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두려움은 현명하기 어렵고 결코 친절할 수 없다. 대체 누굴 위한 격려인가? 진심으로 노인들을 위해서 하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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