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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쿵푸스> 읽고 필 받아서 <호모 로퀜스, 언어의 달인>을 다 읽어버렸다.
또 다른 제목은 <읽고, 쓰고, 말하기>.

최근에 사랑하는 친구 하나가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가 싸이 클럽에 글을 쓰면서 나를 정리하고 그러면서 좌충우돌 하고 결국에 일종의 자유를 얻은 것처럼 그 친구에게도 자유의 선물을 받을 걸 생각하니 기뻤다. 친구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내면에 정리한 후 글쓰기를 시작했으니까 나만큼 좌충우돌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글쓰기, 책읽기, 말하기.
언어와 관련된 이 세가지는 채윤이의 국어 교과서 제목이기도 하다.
(채윤이가 그 교과서로 배우고 읽기, 쓰기, 말하기를 제대로 배우리라는 긍정적인 기대는 많이 접었지만서도)

어쨌든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 내 머릿속에는 정리되지 않을 채 왔단 갔다 잡힐 듯 말 듯 한 얘기를 저렇게도 쉽게 잘 정리해서 풀어놓으니 말이다. 왜 이리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많을까?
그래. 그 똑똑한 사람들 덕에 우리같은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넓히기도 하고 마음을 넓히기도 하니 참 고마운 일이다.

세 번에 걸쳐서 독후감을 쓰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얘기.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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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너무 혼란스럽고 아파서 음식이 입에 넘어가지 않았던 아프간 피랍 사태를 겪으면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언어의 강이 네티즌과 샘물교회,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네티즌과 우리 기독교인 사이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

박은조 목사님이나 피랍자의 가족들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네티즌들을 광분하게 하고 휘발유를 붓고 했으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해하겠다는, 듣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튕겨져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분명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가 있었다.
어느 어머니가 '피랍은 신나는 일' 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일의 전후 좌우는 물론 대체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 조차 모르지만 이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의 일하심을 믿을 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믿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면서 '신나는 일' 이라고 했음직 하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네티즌들은 다 뒤집어졌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럴 것이다. 신앙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저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냐 말이다. '선교'를 계속하네 마네 하는 말에 대한 오해도 그 언저리 어디에 있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놀랐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우리가 구원해야할 대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경직되어 있다는 것.  '죄인'이라고 '구원할 영혼' 이라고 마음 속으로 규정해버리고는 행동만 고상하게 하려하고 있다는...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라고 찬양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죄 있는 자'의 자리에 자신의 얼굴이 어른거려야 할텐데 익명의 많은 세.상.사.람.들.이 어른거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우리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단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전도에 열심이지만 분명 그 열정이 하나의 쉽사리 건너지지 않는 언어의 강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하다. 강 건너에서 손짓한다. '이리로 건너 와. 그 땅은 죽음의 땅이야. 이 거룩한 땅, 이 고상한 땅으로 오라니깐. 아~놔!'

이런 생각이 들면서 더 무서운 건 우리 부부가 하나의 강을 더 건너려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언어의 단절이 심하다면 우리는 이제 전임사역자의 땅으로 건너가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땅은 이제 평신도들이 사는 땅에서 한 단계 더 홀리해진 땅이 아닌가?
요즘 내 마음이 이렇게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는 지 모르겠다.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언어를 버리고 천국의 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여기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신분이 그렇게 우리를 단절시켜 버리면 어떡하겠나? 그런 목회자가 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왜냐면 그런 면에서 존경할 만한 선배 목회자를 잘 찾아보지 못했다. 평신도든, 불신자든, 자기 아래 있는 부교역자든 모든 사람에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즉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목회자를 말이다. 그건 예수님이나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그렇게 노력하는 분들을 잘 보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  돈 걱정, 아이들 걱정, 관계 걱정...그 모든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 자기의 하나님이 된다고 믿는다. 그럴려면 복음은 그 일상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게 전해져야 하는데....이미 일상을 잃은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일상을 이기게 하는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내가 설교하고 내가 목회할 것도 아닌데 고민이 너무 심각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지난 겨울방학 남편이 첫설교 할 즈음에 내게 그런 부탁을 했었다.'여보! 내가 설교할 때 쓰는 용어들이 일상의 언어여야지 돼. 일상의 언어와 분리되면 안 돼. 그런데 설교를 자꾸 하다보면 그런 오류에 빠지기 쉬워. 그러니 당신이 잘 감시해줘야해'
나는 설교자, 목회자가 되는 남편의 감시자가 되어야겠다. 남편의 언어들이 또 하나의 강을 건너가지는 않는지? 남편의 설교와 사역에 성도들의 일상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영원에 잇대고자 하는 다리놓음이 허술하지는 않는지...

그런데 내 언어는 누가 감시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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