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뉴스앤조이>에 연재했던 ‘신앙 사춘기’가 단행본으로 나오......면 좋겠습니다. 

책이 나오려면 함께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글을 좀 더 썼고 매만졌습니다. 

텀블벅 펀딩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텀블벅은 쉽게 말하면 선구매를 통해 출간 비용을 먼저 마련하는 것이고요. 

자세한 사연은 맨 아래 링크 따라가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 사춘기 : 신앙의 숲에서 길 잃은 그리스도인들에



흔히 책과 함께 리워드 굿즈가 따라 붙는데요. 

경험상 고심하여 제작해도 굿즈는 그저 받을 때 신선함 뿐인 것 같아 저 자신을 굿즈 삼기로 했습니다. 

신앙 사춘기를 통과하는 분들과 소그룹으로, 글쓰기 강의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요.

‘정신실과 함께 하는 디톡스톡은 다섯 분 모셔서 교회, 신앙, 일상의 이야기 나누는 집단상담입니다. ‘신앙 사춘기’라 이름을 붙일 때 명료함이 주는 위안이 있습니다. 그리 이름 붙이고 다리 덜덜 떨며 껌 짝짝 씹으며 교회를 미워하는 그 두려운 얘기 나눠 보려고요.

글쓰기 대중 강연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직 쓰고 읽는 것으로(사실 기도도 치열하게 했습니다) 신앙 사춘기의 어두운 숲을 통과해 왔는데요. ‘자기를 지키는 글쓰기, 하나님을 만나는 글쓰기’ 여정을 나눌 것입니다. 표지에서 보시는 것처럼, 한 사람의 존재에서 나오는 빛으로 어두운 숲을 가로지릅니다. 그 빛을 존재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발화하고, 쓰는 것이지요.

솔직히 원고 싸들고 다이아반지 끼워줄 것 같은 부자 출판사를 찾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 덴 물론 없습니다) 뉴스앤조이 대표님과 기자 님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마음과 현실을 알기에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고,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거짓 뉴스와 그 유포자들의 대책 없는 폭력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뉴스앤조이>를 응원하시는 분들, 제 책이 아니라 뉴조를 위해 펀딩에 함께 해주세요. 단지 돈이 아니라 함께 하는 마음, 연대가 필요하니까요.


아래 링크에 가시면 다양한 밀어주기가 가능합니다. 

책 한 권, 또는 노트 포함 책 한 권 사주기.

책과 집단상담, 책과 글쓰기 강연 사주기.

책을 5권, 10권 통 크게 사주기.

사지 않고 그저 1000원 정도 밀어주기도 있네요.

좀 밀어주시겠어요?

[신앙 사춘기] 출간 밀어주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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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뜨면 베란다 창에 붙어서 봄의 깊이를 재본다.

앞산의 나무에서 봄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앞산을 향하여 목 빼고 기다리는 봄의 흔적이란 연두빛이다.

진하지 연하지도 않은, 명도와 채도가 내 눈맛에 딱 맞는 연두가 있다.

생각보다 더디고 더디고 더디다.

 

4월8일 아침.

하늘과 맞닿은 쪽만 보느라 아래 편에 무심했다.

화알짝! 진달래의 연분홍이, 활짝 피어 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어머, 어머, 어머! 맞아, 연두만 봄색이 아니지.

이번 생일에 뭐 사줄게, 뭐 사 줄게, 하는 말에 손꼽아 생일만 기다리고 있는데

서프라이즈 선물을 미리 받은 느낌이다.

선물은 서프라이즈지!

 

4월14일 아침.

이 빡센 한 주가 지나가기는 할까? 갔다.

주일 아침, 비가 쏟아질 듯 무거운 하늘.

연분홍 서프라이즈 위안 삼아 더디 오는 연두를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입안이 헐고 눈에서 열기가 가시지 않아 떠지지 않는 흐릿한 눈으로 앞산을 본다.

어머, 그새 얼굴을 바꾸고 섰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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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과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세미나로 함께 했습니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토요일, 오후부터 저녁까지 함께 했습니다. 청년이면 그냥 마음이 가는데 교회 문제를 겪고 있는 청년들이라니 지방이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한 청년이 질문을 해왔습니다. 다가와 말을 떼는 표정만 봐도 질문의 무게가 가늠 됩니다. 조금 울 것 같은 긴장감이 바로 느껴졌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강의 내용에 수긍이 되기도 한답니다. 무의식이나 인간의 심연에 대해 일정 정도 동의 하는데, 자신이 가진 기독교적 인간관과 충돌할 때 힘들다는 것입니다. 내용인즉, 무의식과의 대면입니다. 끝없는 자기분석의 요구입니다. (제 에니어그램 강의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성찰'을 강조하고 하지요. 치열한 자기성찰을 강조합니다. 각 유형의 자아상 너머 무의식적 집착과 회피를 마주하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지 딱 알아들었습니다. 과연 정신분석에서 요구하는 끝없는 자기분석이 답이냐, 하는 말이었지요. 끝없는 자기분석, 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내게 달린 것처럼 노력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보되 동시에 늘 그분께 내어맡겨야 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스캇 펙의 책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격이 형성된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내적 여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에니어그램 심화과정은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하지만 어떤 상처와 결핍으로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 속에서 왜 어떤 사람은 저렇듯 빛나는 아름다움을 일궈냈는가, 이지요. 저는 내적여정 안내를 하면 할수록 그 지점에 마음이 머뭅니다. 치열한 자기분석 필요해요. 열심히 하세요. 하지만 심리학의 끝과 우리의 결론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네, 저는 진정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저의 교회에 박득훈 목사님께서 설교자로 오셨습니다. 니체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싸움 중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심연을 마주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나 얻을 수 있는 태도이지요. 니체의 말처럼 심연만 들여다보다가는 내 그림자에 내가 먹혀 버릴 지도 모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하늘을 우러러 봐야 승리한다!”였습니다. 심연을 한 번 들여다봤다면 하늘을 두 번, 세 번, 열 번 올려다봐야 자기혐오 또는 자아팽창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적여정은 그런 것입니다. 자기분석을 위한 세미나가 아니라 치열한 성찰과 자기분석의 노력을 하다 순간순간 그 모든 걸 내려놓고 하늘 아버지와 연결되는 힘을 기르는 여정입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의 내적여정 세미나는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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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양치질을 하려다 덩그러니 꽂힌 그의 칫솔과 눈이 맞았다.

헤 벌어진 모양이 그의 늘어진 런닝셔츠 같았다.

울컥 뜨거움이 밀려 올라왔다.


칫솔 떨어진 거 체크하고 사다 놓을 줄은 알아도 쉽게 바꿔 쓸 줄은 모르는 사람.

사다놓기 무섭게 새 것 좋아하는 두 여인이 바꾸고 또 바꾸는 사이

여전히 헤 벌어진 채로 꽂혀 있는 그의 칫솔.


새 칫솔을 하나 뜯어 꽂아 놓았다.

새 칫솔도 어쩐지 헤 벌어진 낡은 칫솔처럼 보이니 이건 무슨 조화냐.

허세를 모르는 주인을 벌써 닮은 것이냐.


그가 내게 주는 사랑은 날마다 새로운데, 

그의 칫솔은 새 것을 꺼내 놓아도 낡아 측은하니 양치질 하는 손이 느려지고 느려진다.

그의 오늘이, 그의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길 기도하다 내 이가 다 닳겠네.

아직 쓰지 않은 그의 새 칫솔을 오래 들여다 보며, 오래 양치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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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마 아빠가 모처럼 긴 식탁 수다를 이어가고 있었다. 

주제는 '기도'였다.

안 듣는 척 옆에 앉았던 현승이가 깜빡이도 안 켜고 끼어들었다.


그런데 뭐 주세요, 뭐 주세요,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잘못 된 거 아냐?


아, 뭔가 신앙적 성숙미 뿜뿜 풍기는 이 느낌.

왜애? 그게 왜 잘못된 기돈데?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거 아냐?

막 뭐 주세오, 대놓고 말하지 않고 뭔가 쫌 돌려 말해야 잘 들어주잖아.

뭐, 나는 괜찮은데 당신 뜻대로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천잰데!

모태 바리새인의 아들답구나!


#2


현승이 베이스기타에 입문하였다. 방에서 딩딩디딩딩 하다 툭 튀어 나왔다.


엄마, 엄마는 찬송가 말고 CCM 같은 거에서 좋아하는 곡 있어?

좋아하는 곡이 워낙 많아서. 음, 지금 생각나는 건 '오 신실하신 주'

뭐야, 자기 이름 들어갔다고 좋아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그 찬양 가사가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이렇거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 얼굴에 냉소의 빛이 어른어른.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듣기 싫어 선수를 친다.)

물론! 하나님이 자주 실망시키시지. 현실은 찬양 가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실망했다고 한 것도 결국 나중에 보면 그닥 실망할 것도 아니었더라고. 다른 뜻으로 더 좋게 된 것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 있더라고. 음냐음냐, 횡설수설, 횡횡설설수설수설, 그렇다는 거야.

(공감 1도 안 되는 표정)

그런데 신실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성실하다는 거야?

성실한데, 변함 없이 성실하다는 거야. 


그리고 설거지 하며 오토리버스 플레이어가 돌아간다.

하나님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다는 것은 진실, 매일매일 그분께 실망하는 것도 사실.

믿어져서 부르는 건지, 안 믿어져서 더 부르는 건지.

믿음의 찬양인지, 불신앙의 찬양인지 자꾸 불렀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자칭타칭 일기 쓰다 된 작가이다.

성덕, 성공한 덕질이라고도 한다.

글쓰기의 시작은 부조리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맨몸으로 겨울바람을 맞듯 마주한 부조리한 어른들의 세계였다.

일기 쓰다 작가가 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일기 쓰다 치유가 되는 일이었다.

썼다. 부조리를 느낄 때마다 썼다.

목적 없이 썼다.

쓰지 않으면 달리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 썼다.

달리 할 바가 없어서 선택한 그 일이 바로 고통을 치유하는 명약이 되었다.


다시 시작한 치유 글쓰기 모임이 4회기, 벌써 반이 지나간다. 

매력적인 여성을 발견했다.

상상 불가의 폭력 속에서 자란 이가 어쩌면 저렇게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마어마한 폭력 속에서 자기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는 저 여인은!

한 회기 한 회기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는 썼다. 

자기 고통을, 이름 붙여지지 않는 고통을 썼다. 

세상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 쓰는 나를 보는 내가 들어준다는 식으로 썼을 것이다.

생존의 필살기는 '쓰기'였다.


아, 나도 그랬던 거구나!


공선옥 작가도 그랬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단다. 

그것도 서러운데 선생이 놀리는 아이들 편을 들며 차별하니 가난하고 무력한 아이는 무엇에 기대랴.

기댈 바 없는 아이는 결심했다

너희들 다 글로 써버릴 거야!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여성 중 하나인 록산 게이도 그랬다.


시간이 생기기만 하면 글을 썼다. 아주 많이 썼다. 어린 소녀들이 잔인한 소년과 남자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어둡고 폭력적인 이야기들을 썼다. 내게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천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썼다. 큰 소리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목소리는 잃었지만 언어는 남아 있었다.

                                                                                                                                                  - 헝거록산 게이

젊은 시절에 그랬었다.

한낮의 고통이 클수록 밤을 기다리는 위안이 강렬했다.

집에 가서 쓸 수 있어. 집에 가서 쓰면 돼.

그리고 집에 가 식구들이 잠든 밤에 썼다. 쓰고 또 썼었다. 


뉴스앤조이에 연재하던 <신앙 사춘기>를 책으로 엮기 위해 글을 몇 편 더 쓰고 있다.

<신앙 사춘기> 연재는 그냥 연재글이 아니었다.

10여 년의 여정을 그대로 재경험 하는 일이었다. 

오래 농익은 분노에 성찰 한 스푼이 들어가여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비로소 써지곤 했다.

분노, 억울함이 어떤 어떤 어떤 어떤 과정을 거쳐 연민이 되었을 때 글이 되었다.

어떤 어떤 어떤 어떤 과정의 지난함을 당신은 모른다.

억울함으로 금이 가고 분노로 타들어간 가슴을 당신은 모른다.

이젠 그 가슴을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다.

내가 쓰고 또 쓰고 연재까지 하면서 충분히 알아줬으니.

<신앙 사춘기> 연재로 생각보다 더 많은 마음의 짐이 사라진 것 같다. 

지난 10여 년 글쓰는 힘은 '복수'였는지 모른다. 복수는 나의 힘. 

이제 더는 복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충분히 했다 아이가! 

이제 더는 복수를 위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작정한다고 될 일은 아니구나.


마지막 글을 남기고 있다.

저격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활활 타버린 후 연민의 재가 남을 때,

그때까지 기다렸다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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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셨던 오빠가 앞산을 보시며 

"상록수가 좀 있어야 겨울에도 푸르른데, 상록수가 하나도 없구나." 하셨었다. 

아, 그렇구나. 산의 갈색이 유난하다 싶었더니.


겨울산, 겨울나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겨울나무를 보면 주문을 걸며 눈을 흐리게 떴다. 

어서 봄이 와라. 어서 봄이 와서 푸르러져라. 금방 봄이 올 거야. 봄이 올 거야.


오빠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내게 상록수가 필요하지 않다.

이 쓸쓸하고 슬픈 겨울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오지 않은 봄을 가불하여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겨울산의 겨울이 참 길구나 싶었다. 

작년 12월 17일에 이사 왔는데, 길가에 개나리가 피었는데 산은 아직도 겨울산이다.

겨울이 참 길구나! 그래도 산이 있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있으니 춥지 않다. 슬프지도 않다.


남편은 "산 색이 달라졌어. 안 보여? 얘들아, 안 보이니? 보라색으로 바뀐 거야."

혼자 UFO를 본 것처럼 흥분하고 그러는데, 애들은 물론이고 솔직히 나도 감흥이 없다.

도대체 뭐가 달라져다고? 


봄은 왔지만 바람은 찬 월요일에 앞산에 올랐다.

따뜻하게 입고 노부부처럼 말 없이 1열종대로 걸어 산에 올랐다.

손톱만 한 연두색 초가 미약하게 봄을 밝힌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다음 주가 되면 일제히 봉우리를 터트리겠네!

진달래도 분홍빛 초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칙칙하다.  


종필 님의 마음을 뺏은 보라빛의 실체 확인!

고개들어 본 높은 가지에도 아기 같은 새순이 가득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대놓고 초록은 민망하다며 겨울산 품은 갈색으로.


찬바람 쌩쌩 봄의 산을 올랐다 내려간다.

이쯤엔 시나 노래가 하나 튀어나와야 제격이지.


산 밑으로 마을로 내려가자 

내 사람들이 또 거기에 있다.

맨발로 맨발로 내려가자 

내 그리스도가 또 거기에 있다.  


홍순관 <산 밑으로>


내려오는 길목엔 쓰러져 누운 큰 나무 한 그루. 에고, 어쩌다!

그 옆엔 쓰러지는 나무에 치어 덩달아 화를 입은 작은 나무 한 그루. 에고, 너는 또 무슨 죄냐!


산 밑으로 마을로 내려가자 

내 사람들이 또 거기에 있다.

맨발로 맨발로 내려가자 

내 그리스도가 또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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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3월의 마지막 주일은 봄이다!

개나리가 피었다.

봄이구나! 가볍게 옷을 입고 나갔더니 찬바람이 품을 파고든다.

봄이지만 춥구나!

 


일주일 전인 3월 24일, 3월 셋째 주일에는 확신이 없었다.

봄인가? 아닌가?

예배를 마치고 나와 채윤이가

"봄인데, 날씨가 이런데 집으로 그냥 못 가. 엄마, 어디든 가자."

중앙공원으로 갔다. 

봄이라는 느낌 없이 집을 나왔던 건데, 봄이었고 따뜻했다!

 ​


중앙공원에 온 봄은 미미하고 작았다.

들여다 봐야 보이는 봄이었다.

노란 산수유만이 파란 하늘 배경 삼아 애쓰지 않아도 보이는 봄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야. 제비꽃. 어렸을 적엔 '앉은뱅이꽃'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그런 말을 안 써."

"엄만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게 보여?"

"노안이지만 좋아하는 건 다 보여. 엄마가 이 꽃을 작아서 좋아하는 지도 몰라."

"엄마, 그러고 보면 엄마 하는 일은 다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네. 

장애인, 그중에도 장애 아이들, 성폭력 생존자들, 여자들......."


채윤이 말에 뭉클, 위로를 받았다.

작고 약하고 낮은 사람들과 연결된 일을 한다니!

과분한 영광이다.


3월 셋째 주일, 들여다 보며 찾은 봄의 흔적과 따스함의 여운이 길다.

3월 마지막 주일, 멀리서도 보이는 개나리가 한창이더니 심지어 눈발이 날렸다.

4월 첫째 주일에는 또 새로운 얼굴의 봄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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