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알지만.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살다살다 내가 후원 요청하는 일을 하게 될 줄이야. 더 놀라운 것은 이렇듯 떳떳하고 당당하게 요청하게 될 줄이야. 몸에 흐르는 지역감정의 피, 충청도의 피 같다. 굶어 죽어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겠다는 왜곡된 기질 같은 것. 곧 죽어도 수염 쓰다듬으며 팔자걸음 걸으며 내 속의 양반 어디 가고 기쁘고 당당하게 후원 요청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 말은 이명박이 쓰던 말이라 왠지 코미디 같지만. 확실히 해봐서 알게 된 것이 있다. 후원자 명단을 보며 매번 새롭게 놀라게 되는 것이다. 후원하시는 분들이 여러 모로 내 예상을 빗나간다는 것, 더불어 적은 금액의 후원일수록 더욱 감동이 되며, 돈이 자본주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엑셀 시트의 정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는 것.


말 그대로 후원, 後援, 뒤에서 도와줌이구나 싶다. 한 분 한 분에게 황송하고 송구한 감동이다! 조용히 후원신청 하신 한 분 한 분, 무슨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어 고심했다. 내담자들의 변화와 집단여정에서의 감동을 미주알고주알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 “저희가 뭐라고, 저희를 믿고 이렇게...” 머리 숙여 인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조용히 ‘이체’로만 말씀하시는 분들께 어떻게 연결될까? 고민 끝에 마음 품 많이 들여 선물 제작했다. 달랑 책갈피 하나이지만, 다섯 사람의 머리와 마음을 맞대고 깊은 애정과 의미 갈아 넣었다. 제가 한 음식 제일 맛있다고 누구보다 많이 먹는 느낌으로, 우리가 만든 걸 보고 보고 또 들여다보며 '예쁘다, 참 잘 만들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셀프 감동이다. 카드까지 따로 제작하여 꾹꾹 눌러 쓴 손편지와 함께 발송했다.


이 과정에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기억 저편으로 쫓아냈던(그렇다, 아마도 쫓아냈을 것이다.) 후원에 대한 기억이다. 중고등 시절 장학금 또는 후원금 명목의 돈을 몇 군데에서 받았었다. 학교에서 선생님 추천을 받기도, 이북 출신 아버지 덕에 이북 5도청의 장학회와 연결되기도 하였다. 선정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을 것이다. 아버지 없는 아이가 공부도 웬만큼 하고 모범생이기도 했으니.


한 달에 한 번 직접 가서 받기도, 일 년에 두어 번 등록금 내는 때 받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성적증명을 내야 하거나 가끔은 후원자게 보낼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사진, 바로 그 사진을 찍힐 때의 감정이다. 저 먼 곳으로 쫓아내고 숨겨뒀던,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수치심의 기억이다. 연구소 후원자들과 어떻게 연결될까 고민하며 생각했다. 


냉장고에 붙은 아프리카 어린이 사진 같은 걸로 연결되지는 말자. 아, 나 정말 그런 것 싫어하는 구나, 알게 되었다. 빈곤 포르노라고 한다. 후원받는 사람들을 선정적으로 다루는 사진 같은 것들. 지인의 집 냉장고에 붙은 아프리카 어린이 사진이나 선교사 가족 사진을 딱히 빈곤 포르노라 할 수 없지만, 생각해보니 참 불편했다. 


생각해보니 이 역시 내가 해봐서 아는 것이다. 후원자에게 보낼 사진 찍히는 심정을, 그 수치심을 안다. 나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될 것 같은, 동정심을 이끌어낼 불쌍한 표정에다 감사의 표정까지 담아야 하는, 그리하여 후원자의 후원하는 손에 자부심을 불어 넣어줘야 할 것 같은 부담. 청소년기의 나는 사회복지사의 나는 카메라 앞에 서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걸 고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 수치스러웠다.


후원의 혜택 드려야 하는 내담자들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 혜택의 방식과 모든 것도 우가 아니라 수혜자 자신이 선택하게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한다.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대상화 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후원의 혜택을 입으시는 분도, 후원하시는 분도 불필요한 수치심과도 우월감도 느끼지 않고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연결되어 함께 성장하게 되는 플랫폼이 될 수 없을까. 사람에 관한 일은 시스템화 할 수 없음을 알기에 한 분 한 분 사려 깊게 분별하여 도우려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숨겨뒀던 수치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 감정을 다시 경험하며 잠시 휘청했지만 결국 사랑의 뜰채로 건져 올려 마주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중고등 때 학생증 사진을 보면 상상이 된다.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옮겨 후원금 받으러 가던 내 모습, 후원자에게 보낼 사진을 찍고 감사의 편지를 쓰던 표정과 마음이. 치유자로 사는 내가 명확하게 이름 붙여주고 안아주고, 보호하며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게 되었다. 


어릴 적 증명사진 첨부할까 하고, 들여다보다 다시 한참 울었다. 슬퍼서 안되겠다. 그 사진의 아이는 내가 혼자 더 들여다보고 만나주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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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에 강의가 잡히는 것 흔한 일이 아니다.

포천의 작은 도서관에서 저자 강의로 초대받아 다녀왔다.


월요일 출근길에  외곽순환도로가 시원하게 뚫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막히는 길 예상하고 일찍 출발했더니 길은 물론이고 하늘까지 뚫려 있었다.


초면에 얼굴 맞대고 편안한 일상수다를 떠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수강자 한 분 한 분이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다가왔다.


도서관과 성당, 내가 좋아하는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일찍 도착하여 보니 도서관 뒤에 성당이라 얼른 주차하고 성당 뜰을 걸었다.


미세먼지 많아진 하늘, 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흰구름 보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다.

태풍이 지난 후 더욱 파래진 하늘에 흰구름, 그리고 십자가가 맑고 아프게 조화로왔다.


서울, 분당도 잘 모르는 저자를 포천 작은 동네에서 알아봐 주는 것 흔한 일이 아니다.

포천, 철원에서 오신 수강자 독자들이 이미 읽은 책 얘기를 솔깃하며 들어주셨다.


예수님의 상처난 손을 마주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성당 마당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길, 벽화의 커다란 예수님 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예수님의 못 박힌 손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에니메이션풍 벽화 탓인지 못박힌 예수님 손이 정겹게만 느껴졌다.


안팎으로 잠못 이룰 걱정이 많은데 속없이 허허 웃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이 달린 선택 앞에서도 마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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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웬만하면 질리고마는 거 알지? 나 잘 빠져들고 빨리 질려. 그런데 김종필은 안 질려.  김종필의 창의력을 사랑해. 내 인생 유일하게 안 질리는 건 김종필이야."


손잡고 산길을 걷다 툭 뱉은 말인데, 툭 튀어나온 진실인 것 같긴 하다. 물론 맥락은 있다. 몸의 한계를 느끼면 아이들 치료하고 들어온 날인데 거실 구도가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안쪽이 있던 소파가 창문 바로 앞, 화분들 코 앞에 가 있는 것. 장 본 것, 가방, 다 팽개치고 소파에 앉아 앞산을 보다 피로가 다 사라져버렸다. 


이런 얘기하면 조롱거리 되기 십상이던데. 나는 남편 설교에 거의 매주 은혜받는 남편 중독자 또라이 목사 아내이다. 남편 설교의 관점이 진부하지 않은 탓에 매주 감동이다.  대학원 리포트 하나도 자기 말이 아니면 쓰지 않았던 사람이니 자기 안에서 나온 것만 말하는 사람인 것은 알지만. 어쨌든 자기 몸을 통과한 말만 하려 애쓰는 것이 좋다.


진부한 반응을 못 견디는 병이 있는 내게 딱 맞는 짝꿍이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빨리 심드렁해지는데 20년 살아도 새롭다니까. 그러니 그의 최애 푸드 떡볶이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들더라도 같은 떡볶이는 없다. 같은 강물을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는 것처럼 질리지 않는 남편 헌정 떡볶이는 새로워야 한다.


아, 나 자신 헌정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쉽게 빠져들지도 않지만 쉽게 나오지도 않으니 매일 같은 떡볶이라도 맛만 있으면 좋을 터. 하다하다 파와 마늘을 과도하게 투입한 떡볶이를 만들어봤다. 물론 '마늘 떡볶이'라고 온통 마늘향 가득한 떡볶이를 먹어본 적이 있다. 착안하여 파까지 듬뿍 넣어 만들었는데, 쉽게 질리지도 않고 향신료 구별도 못하는 남편은 그저 맛있으면 되니까 좋아라 먹었고. 마늘 좋아하는 내겐 최고였다.


평생 이렇게 떡볶이를 만들면 1000 가지 떡볶이는 일도 아니겠다. 웬만하면 빨리 질리고마는데 떡볶이는 만드는 것도 만들어 먹는 것도 질리질 않는다. 떡볶이 좋아하는 김종필도 질리질 않고, 떡볶이와 김종필을 좋아하는 나 자신은 특히나 질리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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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10개월 증손자와 95세 할머니가 눈을 맞췄다. 한 세기 가까운 나이 차이가 둘 사이에 존재한다. 사람을 알게 되면 이름부터 물어보고, 그 이름을 성경 안쪽에 적고 굳이 ‘이름’불러 기도하던 할머니.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외우니 적을 필요도 없다.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하는 손녀 ‘지영이’가 낳은 ‘준우’의 이름은 듣자마자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는 귀도 눈도 어두워 정확히 들을 수 없는데다 글자를 읽을 수 없으니 새로운 단어가 입력되지 않는다. 준! 우! 준우! 주누! 고래고래 알려드려도 입력불가. 자꾸만 ‘아가, 아가~아’ 손을 내밀어 보는데 아가는 엉덩이를 뺀다. 아가는 아가대로 10개월 뇌로는 백발이 규명되지 않는다. 마주하면 무조건 좋은 우리 뭔가 엄마랑 비슷한데, 결정적으로 하얀 저건 뭐지? 못 보던 생물첸데. 아가, 아가, 손! 슬금슬금 엉덩이 빼기. 내내 그런 줄 알았는데 제 엄마 지영이 카메라에 이런 장면이 담겼다. 하얀 할머니 머리, 헤 벌리고 바라보는 준우 눈빛, 감동이다. 백발 할머니의 표정은 안보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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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성서한국에서 만난 학생이 하나 있다. 강의 후 개인적인 질문을 해왔는데 바로 다음 강의를 시작해야 해서 답을 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아니, 단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두 마디 답이 아니라 잠시라도 대화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미리 잡힌 상담 스케줄이 있었지만 틈새 시간을 빼서 만나자고 했다.

내용은 이렇다. 목사의 딸이다.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여러 이유로 고통스럽다. 교인들 시선이 부담되어 불편하고 싫다, 교회를 떠나고 싶지만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 아니, 그래라 허락하셨다 다시 안 된단 번복하신다고 한다. 목사 딸로 사는 게 부담된다는 그 이상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답게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고픈 간절함’으로 읽혔다.

부모님이 딸을 설득하며 대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 ‘교회에서 네 등록금을 대는데 네가 다른 교회를 가면 어떡하냐’이다. 이 문장을 들을 때 다리가 풀렸다. 강의에서 이미 말했다. ‘부모를 떠나야’ 자기 발로 서는 신앙, 삶을 살 수 있고 그것은 갈등을 자처하는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더 성숙한 사랑 하게 되는 일이라고. 그 이상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에서 주는 등록금은 아빠 직장의 복지이다. 목회자인 너의 아빠와 교회 사이의 문제다. 그 돈에 대한 채무감은 네 몫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목사 딸인 학생에게도 그 부모님에게도 감정이입이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늘 말한다. 아빠가 목사인 교회가 힘들면 언제든 교회 옮겨도 된다. 아이는 대번에 그런다. “엄마 아빠가 입장 곤란해지잖아” 곤란함은 엄마 아빠 몫, 엄밀하게 말하면 목회를 선택한 아빠의 몫이니 그 짐을 너까지 질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말하지만 마음까지 쿨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학생 부모님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등록금 얘기에서 읽히는 ‘밥벌이로써의 목회’의 무게 또한 공감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에게 하듯 확신을 갖고 말했다.

학생은 부모님을 맞서는 게 두렵다고 했다. 설령 자신의 뜻이 관철된다 해도 부모님이 교회에서 겪어낼 시선이나 여파를 상상하면 두렵다고. 거기까지 얘기하고 헤어졌다. 돌아와서 자주 그 학생을 떠올렸다. 떠오를 때마다 기도의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딱 한 달이 지난 9월 첫날 아침에 기적처럼 학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부모님과 대화를 잘해서 좋은 타협안을 찾았다고. 청년부 예배에는 가지 않고 대예배만 드리기로 했다고. 대화로 얻은 이 결과는 자신의 가족에게 있어 엄청난 도전이고 변화라고! 감동이다.

누가 정해준 답이 아니라 학생 자신이 맞서서 얻은 결과, 얼마나 소중한가. 헤어질 때 그 불안한 표정 잊을 수 없다. 그 불안과 두려움에 머물러 대면할 수 있어서 얻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목사님 또한 큰 용기를 내신 것일 터. 학생의 말대로 그 결과를 얻기까지의 대화는 가족에게는 큰 도전이며 변화였음을 알겠다. 학생은 물론 그 아버지 목사님, 가족에게 마음의 응원을 보내게 된다.

(‘아이가 견뎌야 할 가장 큰 짐은 바로 부모의 무의식적인 삶이다’라는 제임스 홀리스의 말에 아프게 동의한다. 청년들 만나 상담하다보면 그들이 끙끙거리며 지고 있는 짐은 대부분 부모가 자기도 모르게 지운 집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물며 목사의 딸, 후보자의 딸이라는 이름을 달고 대놓고 부모의 짐을 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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