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사랑꾼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귀기 직전, 썸이 한창이던 여름이었다. JP 포함 교회 청년 몇 명이 지리산 종주를 했다. 그 멤버에는 내 베프 둘이 끼어 있었고, 나는 시간도 안 되었지만 하루 등산도 아니고 지리산 종주라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장 친한 내 친구들과 썸남이 가는 산행에 끼지 못하는 마음이 어땠을꼬? 아쉬움을 뿜뿜 했을 것이다. 그때 (인생에서 아주 잠깐 사랑꾼이었던) JP가 했던 말이다.
누나도 같이 지리산 가시는 거잖아요. 제 마음에 담아서 가니까 같이 가시는 거예요.
(이 달달한 세레나데를 평생 들을 줄 알고 결혼했긔)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안다. 어떤 사람을 마음에 담는 것, 사람이 마음에 담기는 것을 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흔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누가 누구의 마음에 담겼는지 쉽게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사람이 담긴다. 내 마음에도 사람이 담겨 있다. 남몰래 담아 둔 사람이 많다.
내 마음에 담긴 사람으로 기쁘고 행복하거나 아프다. 내 마음에 담긴 사람을 내가 잘 알지만, 내가 누구의 마음에 담겨 있는지는 잘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내가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 있었구나... 확인할 때가 있다. 남편과 내가 같은 날, 다른 자리에서 각각 자기 벗과 식사를 하고 들어왔는데. 각각 그 사람의 마음을 손에 들고 왔다. 각각 들고 온 것이 한 사람에게서 온 것 같은 느낌이어서 신기하고 놀라웠다.
사람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고 동반하는 일을 하면서... 어떤 때, 거룩한 부담감이 임계치에 가까워 찰랑거리는 때가 있다. 그런 날, 바로 그 시간에 "언니, 소중한 언니, 언니를 위해 기도해. 함께 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 "언니, 기도로 언니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소장님께 힘주시길!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메시지가 날아들기도 한다. 내가 그 마음에 담겨 있구나! 그 마음에 기도로 담겨 있구나, 깨닫고 알게 된다. 기억한다는 것, 마음에 담는다는 것...
같은 책 네 권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나침반’에서 나온 1999년 판, ‘복 있는 사람’에서 나온 2010년 판, 이번에 출간 36주년에 맞춰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된 『영적 가면을 벗어라』 입니다. 2010년 판은 두 권입니다. 네 권을 가지고 있지만, 읽은 횟수로 치면... 몇 번인지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나 공동체와 여러 번 함께 읽는 경험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책을 좋아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후배에게 ‘너를 좋아해‘라는 말 대신 이 책을 함께 읽자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네요. 아, 2010년 판의 하나는 남편의 것인데, 남편 역시 청년 리더 교육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책의 추천사를 쓰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책을 받아 펼쳐 ‘25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서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한 장 한 장 꼼꼼히 다시 읽는 저를 발견합니다. 이러다 책에 실린 추천사보다 더 긴 글을 쓰게 될 것 같네요. ‘노을이 물드는 시간’, 밖을 향하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 시간에 읽기 딱 좋은, 입에는 조금 쓰지만 몸에 좋은 약 같은 책입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추천사]
“영적 가면을 벗어라!” 이 문장은 내게 책 제목 그 이상이다. 젊은 날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 내 심장에 화살처럼 꽂힌 사랑의 메시지였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인데, 흐릿해질지언정 사라진 적은 없는 불화살의 흔적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자 바로 얼굴에 열감이 느껴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니 나의 회심 체험이었지 싶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빠르게 신앙의 행위들을 배우고 내면화하며 자랐다. 태어나 보니 한국 사람이었던 것처럼, 태어나 보니 기독교인이었고 목사의 딸이었다. 나의 첫 번째 정체성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자부심은 열정을 낳았다. 교회 공동체와 후배들을 위해 시키지 않는 희생과 헌신을 자처하며 열정을 냈다. 그렇게 젊음을 불태우던 시절에 래리 크랩의 『영적 가면을 벗어라』를 읽었다. 아니, 그 책에 나를 읽혀 버렸다. 자부심이었던 그것들이 영적 포장지라는 진단을 받았고, 부끄러움과 충격으로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적 포장지가 벗겨진 실체는 ‘이만하면 됐지, 나만큼만 해라’는 바리새적인 자부심과 특권 의식이었다. 공동체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열정을 다하는 나이건만, 왜 자꾸만 크고 작은 갈등에 휘말리며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지도 설명이 되었다. 입에 쓴 책이었다. 써도 보통 쓴맛이 아니었다.
그러나 쓴맛에 그치지는 않았다. 가면 너머의 초라한 민낯을 마주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웠고 고통스러웠지만, 끝은 아니었다. 열심히 한 신앙생활의 대가로 잘되고, 복 받고, 이름을 얻고 싶은 죄된 욕망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다. 사랑의 예수님을 흉내 내는 것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예수님처럼 될 때만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래리 크랩이 일깨우려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거룩한 행동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내 안의 갈망이 깨어났다. 그러니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책 제목에 그칠 수가 없다.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수용하는 영적 여정을 안내하는 이정표 같은 문장이다.
그렇게 오래전 이 화살을 맞았건만 나는 또 래리 크랩이 책에서 예언한 그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충격적 경험과 회심 체험으로 단번에 변화되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그리스도인이 된 운명인지, 일찍 만들어 쓰고 오래도록 썼기에 이 가면은 거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다. 가면이 나인지 내가 가면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가면 뒤에 숨어 밖을 바라보며 외적인 행위에 매인 습관을 당장 떨쳐 버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더욱 세련된 영적 가면을 개발하고 살았던 것 같다. 래리 크랩의 책이 번역될 때마다 가장 먼저 찾아 읽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첫 만남 이후 십수 년이 지나 나는 ‘신앙 사춘기’ 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길게 겪었다. 내적인 삶을 돌아보지 않으면 삶과 신앙이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래리 크랩이 경고하는 바로 그 일을 겪었다. 신앙 사춘기를 통해 다시금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들어야 한다.
영성 생활은 ‘과정’이다. 영적 ‘여정’이라 부를 수밖에 없음이다. 영적 가면을 인식하고 벗기 위해 정직한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한 번 체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개정판의 출간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심지어 내게는 마땅한 일이다. 언젠가 이 책으로 영성 생활에 도움받았던 이들이라면, 오늘 이 자리의 삶을 개정판으로 쓰는 의미의 일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열정을 다하는 신앙생활이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헛헛함이나 삶과 유리된 분열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뒤통수를 때리는 망치가 될 것이다. 얻어맞아 아플수록 더 큰 사랑에 안기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36년 전보다 오늘 더욱 필요한 책이다.
지난 목요일 동반자과정 1학기 종강 날이었다. 모임 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읽고 있었다. 한 학기 내적 여정을 돌아보는 것으로 이보다 좋은 주제가 없다. 강의 대신 책 나눔으로 한 학기를 정리한다. 동반자과정 4기가 되니 벌써 네 번의 책 나눔을 한 것이고, 그때마다 새롭게 다시 읽고, 가끔 꺼내 읽은 것으로 치면 족히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그래도 또 새로운 것이, 지하철에 앉아 아무 데나 딱 펼쳤는데 바로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것이다.
옆에서 뭔가 뜨끈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맑은 초로의 여자 분이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 오랜만에 봐서요… 좋네요. 행복하시겠어요…"란다. 한참 쳐다본 모양이다. "(행복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좋아하는 책 읽으시는 것 같아서요. 이미 보신 책을 또 보는 거 아니에요? 좋아하는 걸 하시니 행복하시겠죠." 하고 잘 가라며 내리셨다.
행복합니다
행복하다. 이 소중한 책을 가슴으로 읽고 나눌 벗들이 있어서… 가르치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배우는 과정이라 더 그렇다. 무엇보다 이 책을 처음 만나서 읽던 그때를 떠올리면 꿈만 같은 오늘이다. 내면이 무너지고 신앙이 무너지고 몸도 함께 무너졌던 그 시절. 이전의 방식으로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시절이다. 가톨릭의 에니어그램 연구소에서 만난 영성이 한 줄기 빛이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행복한 1년을 지내고 떠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에서 처절하게 읽었던 책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을 내디디면 바로 낭떠러지일 것 같고, 그대로 지옥행일 것 같은 시절이었다. "책만 보는 바보"가 되어 읽던 시절이었는데, 돌아보면 책으로 다가온 영적 스승들과의 만남으로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혼자 읽던 책 중 하나가 <아래로부터의 영성>이었는데 마음으로 같이 읽고 나눌 벗들이 이리 많이 생겼다.
지난 수도원 순례 여정 중에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살고 있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다. 마침 방문하는 날에 수도원 행사가 있어서 개별 순례 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었고, 수사님 한 분 마주할 수도 없었다. 언감생신 사인 받는 기회는 못 얻어도 인증샷이라도 남겨 와야지 싶어 책을 들고 갔다. 그렇게 얻은 사진이 소중하네! 오래 머무르고 싶은 수도원이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성당과 경당에 앉아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기저기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다시 가서 오래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어쩌면 안셀름 신부님도 오래 앉아서 기도했을 지하 경당에서의 기도는 잊지 못할 것 같다. 하남의 작은 아파트, 카타콤 같은 거실의 기도가 십수 년의 세월 끝에 뮌스터슈바르작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 소중한 영적 벗들을 얻었다. 행복하다.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의 지저귐 같은 짧은 대화 끝데 지하철 아주머니는 떠나시고. 다시 아무렇게나 펼쳐든 책엔 이런 문구가 형관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은총으로 여기까지 온 내게 들려주는 저자의 말이다. 높은 이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마음, 가장 낮은 곳을 꿰뚫는 한 마디이다.
필자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논하는 이 순간에도 이 아래로부터의 영성 안에 공명심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내가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언제나 다시 반복하여 다음과 같이 주지시켜야 한다. "너의 모든 영성적 노력들, 네가 저술한 수많은 책들에도 불구하고, 너는 변덕스럽고 괴팍한 감정들과 명예욕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 내 머릿속에 '미역국 라면' 칩을 넣었다. 미역국을 보면 꼭 한 번은 거기에 라면을 끓이게 됨. 손감독과 진주작가의 꽁냥꽁냥 장면에 '파 많이 넣은 떡볶이' '평양냉면' '미역국 라면' '사골국' 등 음식이 등장하는데 희한하게 모두 내 취향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이병헌 감독 개그가 진짜 마음에 드는데... 개그 취향과 함께 음식 취향도 나랑 비슷한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됨. (아, 미역국은 내 '최애 국'이다. 현승이 낳고 산후조리원에 갔는데 끼니마다 다른 미역국이 나와서 행복했던 기억이다. 한 달 내내 미역국, 질린다며 억지로 먹는 산모가 대부분이었음. 그래서 식사 때마다 미역국 때문에 설레던 내 마음이 조금 부끄러웠던 기억... 미역국 라면을 끓이며 그 얘기를 현승에게 들려주었다.)
이 더운 날에 양지머리를 덩어리 째로 넣어 미역국을 한솥 끓이고 거기에 다시 라면을 끓였다. 당연히 맛있지!
글쓰기를 좋아하고 재능이 좀 있다고 모두 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책 출간으로 북 토크와 저자 인터뷰가 몰린 지난주를 보냈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질문이 쏟아져, 글 쓰는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꾸어보지 않은 꿈입니다. 차라리 어린 시절 내내 음악가의 꿈이 있었습니다. 작가가 된 것은 어떤 행운이 작용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은데 “야야, 니가 잘나서 된 것은 옶어. 교만하지 말어. 다~~아, 하나님 은혜여.” 평생 듣기 싫었던 말인데... 고까웠던 심정 빠지고 새롭게 들리네요. 하나님 은혜 맞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북토크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북토크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서 댓글 놀이나 하던 저를 발견하시고 공적 글쓰기의 장으로 이끄신 서 대표님과의 대담으로 진행했습니다. <복음과 상황>이라는,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자리였습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주제로 글쓰기에 도전하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좋은 글은 독자가 명확한 글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늘 구체적 독자를 염두에 둡니다. 구체적이라지만 상상 속의 독자이기에 막연한 얼굴이긴 한데. 어디서들 오셨는지 얼굴을 가지고 찾아와주신 독자들이 계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의 일상과 글쓰기에 가장 큰 힘이 되는 영적 여정의 벗들인 연구소 동반자 선생님들이 대거 함께 해주셨습니다. 멀리 해외에 있는 후배는 제 친구를 대신 보냈습니다. 후배와 꼭 닮은 아름다운 귀와 표정을 지닌 친구를 보니 그리움과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책을 디자인하고 편집하고 홍보하시는 출판사 간사님들께서 진행을 돕고 오신 분들을 환대하시니... 저를 계속 쓰게 하고 ‘저자’ 되게 하신 모든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인 셈입니다. 아름다운 사진으로 자랑해 봅니다.
저녁 먹으며 남편이 "현승아, 너는 어떤 때 만족감을 느껴? 만족감을 자주 느껴?"라고 했다. 내게 물은 건 아닌데 답을 찾게 된다. 흠... 나는... 끙끙거리며 쓰던 글을 완성했을 때! 그리고 갑자기 요리의 신이 임해서 전에 해보지 않았던 요리를 뚝딱 만들고 났을 때.
끙끙거리던 글을 마치자마자 냉동실에 있던 갈치 몇 조각과 야채 박스에서 뒹굴던 무 한 토막을 꺼내서 우다다다 갈치조림을 하는데, 마침 고사리 불린 것이 한 줌 남아서 마지막에 넣고 졸였는데, 식구들이 "대애~박!"이라며 어떻게 여기 고사리 넣을 생각을 했냐며, 엄지 척 처묵처묵 해주실 때. 만족감이 열 배였다.
또 뭐 갑자기 닭다리살에 소금 후추 등으로 최소 양념을 해서 파와 함께 구웠는데, 이거 당신이 양념한 거냐, 양념된 걸 산 거냐 하며 믿을 수 없는 맛있는 맛이라는 표정의 JP, 엄마가 한 거지! 그냥 생고기였는데 엄마가 양념한 거야, 엄마 간이 진짜 딱 맞아! 하는 아들, 처묵처묵하는 아빠와 아들을 볼 때. 만족감이란 것이 차오른다.
셋이 먹고 입 싹 닦으려고 했는데... 퇴근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 딸이 못내 눈에 밟혀서 퇴근 시간에 맞춰 1인분 용으로 한 번 더 해서 내놓았는데... 아, 이건 무슨 고기이고, 어디서 샀냐며 행복하게 드실 때... 참으로 만족스럽다.
로마를,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이다. 호텔 창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별다르지 않은, 아무럴 것 없는 풍경이었는데 뭐가 아쉽지? 로마 이틀은 마음의 순례로 치면 일주일이나 보름은 되는 시간이었다. 몬테카시노와 수비아꼬의 설레는 첫 만남 후 찾아온 혼란의 시간이었다. 나는 왜 어쩌다, 왜 이 수도원 순례단원이 되었을까 물어야 했다. 왜 굳이 남편과 함께 왔어야 했나 묻고, 무엇을 기대하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점검해야 했다. 포장지 없는 말이 필요했던 것 같다. 배려하느라 눌러두었던 말을 꺼내놓고 보니 미안함, 두려움 같은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려놓은 수도원 순례의 그림이 있었고, 늘 그렇듯 미리 그린 그림대로 되는 여행은 없으니까. 순례를 기다리던 몇 개월 동안 한껏 부풀려 놓았던 '꿈'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의 여백은 단지 아쉬움만은 아니다. 텅 빈 충만함이라고 할까? 충만까지는 아니어도 텅 빈 그 상태로도 괜찮은, 잠잠해진 마음이다. Pax, 평화라고 해도 좋겠다. 로마를 떠나며 평화가 왔는데, 이 평화는 깃발을 휘날리며 로마군대가 진군하듯 밀려오지 않았다. 축쳐진 어깨로 터덜터덜 걷는 이에게 다가와 "무슨 일 있어요?" 말 걸어오며 가만히 걸어주는 방식으로 왔다. 엠마오 길을 소망 없이 걷는 사람들 곁에 슬며시 다가가 걷는 갈릴리 사람의 발걸음처럼.
독일 순례는 인솔자 없는 여정으로 확정이다.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인솔 신부님은 로마 병원에 남아야 한다. 이에 독일에서 통역 정도로 참여 하려던 가이드가 못 하겠다고 나가 떨어졌단다. 가이드가 급조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괜찮다.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기대와 꿈을 걷어내고 지난 이탈리아 일정을 돌아보니 신부님이나 가이드가 들려준 정보는 다 내 안에 있었다. 노트북에는 대학원 수업 내내 꼼꼼하게 정리한 노트 필기가 있고, 기도와 수도원에 관한 독서 기록이 있다. 검색과 번역기능도 있지 않은가. 같은 내용이라도 평생 수도원 안에서 일하고 기도하며 살았던 신부님의 육성으로 듣는다면 더 좋겠지만, 카사마리와 몬테카시노, 수비아꼬 수도원에서 체험했다. 공간에 담겨 있는 것으로 충분한 기도가 된다는 것을. 많은 설명의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실은 그러려고 비용을 들여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 아닌가. 말 대신 침묵이다. 수도원은 침묵의 공간이다. 앞으로 가는 곳마다 회랑을 걷고, 성당 한 구석에 앉아 성무일도에 참여하면 된다. 기도를 배우러 왔으니 기도하면 된다. Pax가 임한다.
안팎의 평화가 연결되어 있고 동전의 양면이긴 하지만, 시간 차가 있다. 마음에 임한 평화가 밖으로 흘러가 화해가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간밤의 충돌로 인해 남편을 대하는 마음이 벌쭘하고 민망하다. 그래서 피차에 서먹하다. 마음으로는 충분히 화해했지만 거리를 두게 된다. 거리 두고 말을 멈추고 있는 시간이 주는 유익이 있다. 한 발 물러서서 낯설게 바라보면 그의 존재가 새로워진다. 사람의 관계도 이렇듯 서로에게서 한 발씩 물러나고, 언어 없이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 아빠스의 권고처럼 '나쁜 말은 물론 좋은 담화도 멈추는 것'이 침묵의 덕을 닦는데 도움이 된다. 독일로 가기 위해 다시 로마 공항으로 가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는 시간, 말 없이 적당히 예의를 갖추며 각자 할 일을 했다. 아니, 내가 일하는 동안 남편은 가만히 곁을 지켜주었다. 글을 하나 써서 보내야 했는데, 이 와중에 글이 써질까 싶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일사천리로 글을 썼다. 이 무슨 쾌거인가!
침묵의 덕을 (닦기) 위해 때로는 좋은 담화도 하지 말아야 했다면 하물며 죄의 벌을 (피하기) 위해서 나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좋고, 거룩하고, 건설적인 담화일지라도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완전한 제자들에게 말할 허락을 드물게 줄 것이다. 수도규칙 6장
순례단 분위기는 조금 더 무거워진 것 같다. 불안감도 느껴진다. 인솔 신부님, 영적 안내자가 사라진 빈 자리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 "목사님, 목사님" 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출국 수속 마치고 자유시간을 위해 흩어지고자 한다. "목사님, 몇 번 게이트라고요? 아직 안 떴다고요? 어디를 보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 비행기가 무슨 색깔이라고요? 목사님은 왜 팀 스카프를 안 맸어요? 스카프 매세요. 키가 크니 목사님이 매야 잘 보이죠." 젊고 빠릿빠릿한 데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순례단원들에게 주는 위안이 있는 것 같다. 개신교 목사 부부가 왜 수도원 순례단에 오지? (심지어) 신천지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는 분들이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어준 것은 벌써부터이다. "목사님 부부가 계셔서 다행입니다. 다 뜻이 있어서 함께 하셨나 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 로마 공항의 텅 빈 시간 동안 순례단원 사이 마음의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목자를 잃은 양의 마음,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원팀의 소속감이 생겼다.
순례 이틀 째 남편의 생일이었다. 유럽 순례지에서 맞는 생일이니 특별한 축하하고 싶었지만 산 위의 수도원에서 케이크 하나 구하기가 어려웠다. 순례 초반이라 아직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그래도 슬쩍 인솔 신부님에게 정보를 흘렸는데, 저녁 식사 시간 기도 끝에 "오늘이 목사님 귀 빠진 날이랍니다" 라고 하셨다. 그 말에 바로 생일축하 노래 떼창이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목사님, 생일 축하합니다." 감동이었다. 사랑하는 신부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목사님이라니! 남편이 일어나 멋지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여기 와서 여러분들과 얘기 나누다보니 개신교인들에게 상처받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대표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희 교회에 가서 제대로 가르치고 더 잘하겠습니다." 내가 다 고마웠다. 가톨릭 교회를 향해,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함부로 하는 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말을 듣는 분들의 입장에 서보지는 못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지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말들이었다. 개신교인 가족에게 받은 깊은 상처로 말씀을 나누는 중 연실 눈물을 흘리는 자매님이 계셨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럴 때는 '목사'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가 더욱 쓸모가 있다.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사과 같이 느껴졌다. 순례 여정 중 남편의 어떤 성품이 조용히 빛을 발하는 순간을 보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하기를 참 잘한다. 질문에 그치지 않고 가만히 듣는 것도 잘 하고. 좋은 풍경을 두고 사진 찍어주는 것도 좋아하고. 오히려 나보다 더 편하게 순례단에 녹아드는 것 같다.
내가 주도한 순례이기 때문에 부담을 지고 있었다. 순례단 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 남편이 꼭 보고 싶었던 사도바울 참수터 등에 가지 못한 것이 내 잘못이 아니건만 괜히 미안해져 눈치를 보게 되었었다. 그런 일로 남탓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다. 뭔가 꼭 얻어야지, 배워야지, 기도체험을 해야지, 남편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어야 할 텐데... 잔뜩 힘을 준 채로 혼자 마음으로 북치고 장구 치고 했다. 가만 보니 남편은 갈수록 더 밝아지고 가벼워지고 이 순례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남편에게 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뮌헨 공항에 내렸다. 뮌헨(bei den Mönchen)은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에 의해 건립된 도시이다. 비가 내린다. 기온은 뚝 떨어졌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공항으로 오다 사고가 났단다. 시작부터 뭔가 난항이지만, 수도원의 도시에 와 있는데 뭔들 순례 일정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훨씬 허허로워졌다. 아니, 이제 기대 따위가 없어졌다. 빗속에 성 오틸리엔 수도원(ST. Ottilien)을 방문하고 에탈수도원호텔(Klosterhotel Ettal Ludwig der Bayer)로 가는 길이었다. 독일에서 만난 가이드가 깜짝 선물처럼 이끌어 간 곳은 '오버아머가우(Oberammergau)' 마을이었다.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고간 페스트가 창궐하던 1633년. 이곳 주민들은 전염병으로부터 구해주시길 구하며 수난극 공연을 서약했단다. 그 이듬해 첫 공연이 열렸고,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수난극은 이후로 10년에 한 번씩 열린다. 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지난 2020년 코로나 기간에 열리지 못했다. 두 해를 미뤘지만, 2022년에 마흔두 번째 수난극이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팬데믹 초기, 사상초유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려야 했던 시기에 교인들 사이 혼란이 있었다. 그 즈음 남편이 설교 중에 이 마을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예배를 위해 모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진정한 예배이며 '이웃 사랑'이 되는지 말했던 것 같다. 바로 그 마을에 서자 남편이 기뻐 흥분하였다. 꼭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의 얼굴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탈 수도원(Ettal Abbey)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 - 1945)를 만난 것이다. 젊은 날부터 사랑하던 신학자 본회퍼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치의 폭정에 반대하는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설립과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신학자이자 루터교회 목사이다. 무엇보다 남편과 나를 이어준 분이기도 하다. 청년 시절, 성경공부 그룹의 리더이던 내가 새로운 교재를 설명하면서 "본회퍼가 말하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에 남편 귀가 번쩍 뜨였다고 했다. "아니, 저 누님은 누구시길래?..." (그렇게 종필은 신실에게 빠져들게 되었...) 그런 본회퍼 목사님이다. 수도원 벽에 개신교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니! 가톨릭 수도원 벽에 한국 분당 한 귀퉁이에 사는 순례자 목사가 가장 사랑하는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니! 1940년 즈음 본회퍼가 이곳에 4개월 여 머물렀다고 한다.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를 읽은 수도사들이 배움을 위해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수도원 전통의 영성을 개신교회 안에 살려내고자 새로운 수도회주의의 이상을 꿈을 꾸기도 했었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은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편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목사가 되어 한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는 지금, 특히 지난 7년 동안 남편은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는 말을 새기고 또 새기며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다. 《신도의 공동생활》에 나오는 말이다. 남편은 특수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민주적 교회 운영을 위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 '맡은 일' 이외의 차이가 없는 교회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오며 개신교회가 표방했던 그야말로 '만인제사장주의'의 극한을 실천하는 교회이다. 목회자들의 전횡에 깊이 상처입은 교인들의 주도적인 선택이었다. 남편도 나도 이 모든 이상에 동의하지만, 목사인 남편에게 쉬운 자리는 아니다. 잠재적 독재자, 잠재적 범죄자로서의 목사를 전제로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설교하는 일이란, 목양하는 일이란...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을 때는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꿈꾸는 교회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그 꿈은 대형교회 같은 야망도 아니다. 그의 교회를 향한 꿈이 아름답다 여겨 뒤늦은 신학교 행에 찬성하지 않았던가. 목사에게 상처 입은 이들에게는 목사 개인의 꿈 자체가 위협일 수 있음을 아프게 경험했다. 이제 그의 목회 이상은 '꿈을 내려놓는' 것이 되었다. 힘들 때마다 남편은 젊은 날부터 마음에 새긴 본회퍼의 말을 꺼내 들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의 꿈이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미워하신다..."
본회퍼가 앉아 기도했을 성당, 걸으며 기도했을 회랑이 있는 이 에탈수도원은 아무래도 김종필 목사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생일선물이다. 꿈을 내려놓기 위해 자기 꿈을 미워해야 했고, 자기 꿈을 미워하기 위해 자기를 혐오하는 어두운 날을 보내야 했던 그를 위해 "여기까지 잘 왔다"라고 등을 토닥여주시는 그분의 손길이다. "여기서 본회퍼를 만나다니!" 라는 탄성 같은 한 마디에서 남편의 영혼이 살아 춤추는 것이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신부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순례단원들이 자연스럽게 "목사님이 기도해 주세요"라는 요청을 했다. 남편은 여러 번 사양했다. 앞에 나서는 사람도 아닌데다 목사의 이름으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게다가 기도 문화도 다른 가톨릭 신자들 앞에서 기도라니. 나설 위인이 아니다. 남편이 쓴 순례기 일부를 옮겨와 본다.
아침 버스에 오르자, 단장님이 억지로 나를 가이드 옆자리, 인솔자 선탑자 자리에 앉혔다. 신부님이 부재하여 단장님이 대신 앉아 있던 자리였는데, 목사인 나라도 거기에 앉으라는 것이다. 그저 한 명의 순례단원이고 싶었는데, 억지로 십자가가 또 지어졌다. 가톨릭 순례단원들은 목자를 잃었다. 나와 내 아내는 그저 그들 주변부에 머문 객들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양들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본회퍼가 에탈 수도사들과 어울리며 기도했을 것을 생각하며, 나도 오늘 하루 그 임무를 받아들여 순명한다. 버스에서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 신자들을 두고 기도했다. 아멘 소리가 낯설지만 은혜가 된다. 목이 멨다. 이렇게 가까운 일인데, 제도는 왜 이렇게 먼 것일까. _남편의 블로그에서
맞다. 이렇게 가까운 일이다. 기도의 형식이 어떻든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하늘 아빠스는 사람이 만든 호칭에 갇히는 분이 아니다. 앞좌석 앉은 김에(마이크 잡은 김에) 방문한 순례지 관련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작고 소박한 교회 일치의 깃발이 나부끼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주어진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에 익숙한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의 자유기도를 신선하게 듣는다. 목회자도 아닌 사람들이 갑자기 시키는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신부님들조차도 자유기도에 익숙치 않아,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확실히 자유기도는 개신교인들이 가진 강점이다. 반면 정해진 기도문에 따라 드리는 가톨릭의 기도 역시 그 나름의 강점이 있다. '기도'라는 미명 하에 '자기 뜻'을 펼치고 '자기 의'를 드러낼 여지가 없다. 순례자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난다. 버스에 올라 하루를 시작할 때 정해진 기도문으로 아침기도를 드린다. 순례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저녁 기도가 있다. 아침 기도 후에 바로 묵주 기도를 드리고, 아픈 신부님을 위한 특별한 묵주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이들의 정해진 기도를 따르는 것이 순례 여정의 중요한 기도이다. 어느 아침, '사제들을 위한 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사제들을 위한 기도>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주님을 본받으려는 사제들을 지켜주시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에 올라 날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축성하는 사제들을 언제나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주소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사제들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사제들이 하는 모든 일에 강복하시어 은총의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저희로 말미암아 세상에서는 그들이 더없는 기쁨과 위안을 얻고 천국에서는 찬란히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문득 신부님들이 부럽다. 이 기도문으로 신자들의 축복 기도를 받는 신부님들이 부럽다. 아니, 이런 기도문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이 부럽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존경할 목자를 가졌다는 것과 함께 말이다. 인간에게는 존경할 대상이 필요하다. 신앙인에게는 하나님 사랑을 매개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의존이 아니라 존경할 목사님, 신부님이 필요하다. 단번에 삶과 신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가르침을 설파하는 초인이 아니라, 비록 당장 그분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렇게 따라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꿈꾸게 되는 그런 선생님 말이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으로 치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성직자주의 또는 사제주의의 양극단을 보는 것 같다. 순례여정을 기획하고 이끌어야 할 신부님이 사라졌고, 여행사도 소속 수도원도 책임있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 하나 없는 단원들에게 놀란다. 개신교인들의 순례였다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옳은 주장들이 난무할 것이다. 여행비 환불 청구가 들어갔을 것이다. 대신 이들은 기도한다. 사제를 위한 기도문으로 기도한다. 말 잘 듣는 착한 초등학생들 같다. 남편이 목회자로 서 있는 자리는 사제주의에 맞서 생긴 개신교회 중에서도 극단에 섰는 교회이다. 공동체와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공예배의 대표기도에서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조차 드물다. 부모의 말이라면 뭐든 어기고 보고, 독재자 아버지는 필요없다는 사춘기 아이들 같다.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 보면서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인으로 자란 자녀같은 신자가 있다면 어떨까. 사제와 목사를 넘어서는 영적 성숙에 이른 사람, 진정한 의미의 '만인제사장주의'를 실현하는 개인이 어딘가에 있을까.
오늘 아침 연구소 카페에서 드리는 '읽는 기도'를 옮겨 놓는다. 당신을 위해 이렇게 축복하고 싶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담임 목회자로 부임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하나님 사랑하시는 자녀'라고 축복할 기회가 있었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기도회를 시작하기 직전에 공동체 식구인 재닛이 내게 말했다. "헨리, 제게 축복해 주실래요?"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에 성호를 그으며 그녀의 부탁에 약간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아니요, 그건 효과 없어요. 진짜 축복을 받고 싶어요!" 재닛이 말했다. 내 반응이 적절치 못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고 재닛에게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모두 함께 모이는 기도 시간에 진짜 축복을 해 들릴게요." 재닛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내게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도회가 끝나고 약 서른 명의 사람이 마루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재닛이 제게 특별한 축복을 부탁했습니다. 재닛은 지금 자신에게 축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닛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닛을 맞이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렸고, 재닛이 다가와 머리를 내 가슴에 기댔다. 재닛의 양 어깨에 두 손을 올리자 내 옷 소매가 그녀를 감쌌다. 나는 재닛을 보며 말했다.
"재닛 자매님, 자매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딸입니다. 이 사실을 아셨으면 합니다. 하나님에게 자매님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자매님의 아름다운 미소,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자매님이 베푸는 친절, 자매님이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자매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요즘 기운이 없고 순간순간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자매님이 누구인지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자매님은 아주 특별하고, 하나님과 여기 함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재닛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헨리. 첫 번째 것보다 훨씬 낫네요."
《분별력》 09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정체성 분별하기 사랑받는 자녀임을 분명히 밝히기 218쪽
대학 친구들 중 가장 늦게 결혼했다. 남편과 만나며 결혼을 생각하던 즈음 친구들을 만났다. 육아 전쟁 중인 친구집 거실이 내 연애 얘기로 흥미진진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여러 질문 끝에 "걔가 어디가 좋냐?" 그 흔한 질문이 나왔고. 나는 어째서인지 그런 답을 했다. "가난하게 살고 싶대. 가난하게 사는 게 꿈 이래." 돌아올 반응을 예상치 않았던 건 아닌데, 아직까지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표현으로 치면 "결혼은 현실이다... "처럼 우리 엄마나 이모가 하는 걱정과 다르지 않았지만, 뭔가 다른 단절감, 깊은 외로움 같은 것이 남아 있다. 결혼도 모르고 현실도 모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상 너머의 이상이었다.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가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근본적인 지향 같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이제는 좀 알겠다. 나는, 우리 부부는 어쩌다 수도원 영성에 닿아 순례단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혼란과 울분의 로마 이틀을 보내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남편에게 물었다. 팔당대교 아래에서 강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서 했던 그 말이 생각이 나느냐고. 어떤 의미로 그런 얘길 했느냐고. 얼핏 기억이 나는 것 같다며, 그냥 예수님의 길이 그런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아, 나도 그렇게 알아들었던 것이다. "가난"이란 단어를 "예수님의 길"로 들었다. 한참 후에 읽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말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상향지향적 삶과 햐향지향적 삶 사이의 방향성이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 읽은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의 길을 알려주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하나님의 사랑은 물의 성질과 비슷해서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내적 세계에서는 나의 가장 은밀하고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면 된다. 내적 여정을 동반하는 이 자리에서 원칙처럼 새기고 있는 말씀이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베네딕도회 수도자이고, 이번 순례 여정의 끝자락에 그분이 계시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이 있다. 가슴이 뛰는 이유 중 하나이다.
로마 4대 대성당 중 하나인 성요한 성당(라테란 성당) 건너편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동상이 서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사랑한 성인이다. 그에게 가난보다 더 거룩하고 중요한 것은 없었다.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면 가난과 결혼했다 하여 '가난 부인'이라 부를 정도였다. 가난 그 자체를 사랑했겠는가. 가장 큰 선생님이신, 신랑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프란치스코의 소명을 담은 언표였을 것이다. 평생 가난하게 살고자 했고,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지만 프란치스코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직물 상인이었다. 프란치스코 타고난 매력과 유창한 말솜씨, 세련된 옷차림으로 어렸을 적부터 상인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런 그가 전쟁에 참전하고 하나님을 체험한 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함께 어울려 술 마시고 즐기던 친구들에게서 멀어져 칩거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한센병 환자를 마주하게 되는데, 충동적으로 그를 얼싸안고 입을 맞춘다. 그 입맞춤에서 '단맛'이 느껴졌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가장 낮고 가난한 곳에서 단맛을 느끼는, 스승 예수님을 따르는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무너진 성 다미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중, 또 다른 체험을 한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교회를 다시 세워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문자 그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돈을 가져다 성당을 보수하기 시작한다. 변해버린 아들이 탐탁치 않았던 아버지는 이 일로 아들을 두고 소송을 제기한다. 여기서 저 유명한 "떠남"의 의례가 등장한다. 프란치스코는 그 자리에서 옷을 홀딱 벗어 아버지 발 앞에 두고 말한다. "지금부터 제게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프란치스코를 프란치스코 되게 것은 안락함을 보장하는 세속의 아버지, 부자 아버지의 아들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능력으로 거저 누리는 것들을 떨쳐내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가난이다. 마침내 알아들었을 것이다.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건물의 교회'가 아니라 '체험의 교회'라는 것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무너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는 프란치스코의 방법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서 '가난'이었다.
Giotto di Bondone, Legend of St Francis 6. Dream of Innocent III, 1295
이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하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당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한센병 환자를 돌봄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프란치스코 주변으로 사람이 모여든다.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급진적 제자도는 늘 이단으로 몰리거나 거부당할 위험을 안게 된다. 제도권의 지지, 공적 인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프란치스코 역시 수도회 회칙을 만들어 교황의 허락을 받고자 한다. 그리하여 교황 이노센트 3세를 만나기 위해 라테란 성당을 찾는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함인지 라테란 대성당 맞은편에는 성당을 바라보면 두 팔을 들고 섰는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꿈 이야기가 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받아보고는 가난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이상적이라 여겨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꿈을 하나 꾸게 되는데, 무너지려는 라테란 대성당을 프란치스코가 홀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 꿈을 꾼 후에 마음을 바꾸어 회칙을 인준한다. 그리하여 가난한 삶을 살고자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탁발수도회, '작은 형제회' 라고도 불리는 프란치스코회 수도회가 설립된다.
고개가 빠져라 올려다 보아야 보이는 라테란 대성당이다. 그 크기가 하도 커서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크다 느껴지질 않는다. 맞은편 길 건너에는 그 교회를 바라보면 두 팔을 벌리고 섰는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있다. 그 사이에서 서니 묘한 심정이 된다. 프란치스코 옆에는 함께 했던 11명의 수사들이 지쳐 쓰러져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탁발, 그러니까 빌어 먹으며 여기까지 왔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거지, 가난뱅이, 거룩한 가난뱅이(santo poverello)들이 저 화려한 대성당 밖에 서 있다. 라테란 대성당은 당시 교황청이기도 했다. 돈과 권력의 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교회 앞에 예수님의 꿈, 가난의 꿈을 살고자 하는 수도자들이 서 있다. 성당 내부 천장은 콜롬부스가 발견하고 식민지화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공수해 온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지금도 라테란 성당에 입장하려면 (공항처럼 삼엄하진 않지만)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걸인 행색의 낮고 천한 이들이 드나들만한 곳이 아닌 것 같다. 저 보잘것없는 이들이 수도회를 설립한다니, 회칙 인준은 높은 벽을 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꿈을 동원해 저 가난한 이들의 소명의 길을 도우셨다 생각하니 뭉클해진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즈음,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연출되었다. 노숙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프란치스코 동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보란듯이 그 앞에 눕는다. 사진을 찍으라는 장면이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카메라를 들었고, 같은 생각을 했다. 로마 한복판, 머리와 온몸에 새똥을 뒤집어쓴, 썩 관리도 되지 않는 가난뱅이 성자의 동상 앞에 이보다 어울리는 그림이 있겠는가. 저 남자는 부러 작정하고 퍼포먼스를 해주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800여 년 지난 오늘의 교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돈과 권력으로 크고 화려해진 교회, 깨인 교인이라는 특권의식으로 끼리끼리 뭉쳐 담을 쌓은 교회 주변에 새똥을 뒤집어쓰고, 목마르고 배고픈 영혼들이 쓰러져 있다. 인정받는 다수가 되지 못한 소수자들이 교회 주변에서 방황한다. 혼란의 로마, 울분의 로마에서 오늘 내 조국의 교회를 본다.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섰다. 사람에 떠밀려 박물관을 훑고 나와 목마르고 지친 상태였다. 관람이 아니라 '옆에 두고 밀려서 걷기'였다. 그 많고 진귀한 소장품을 옆에 두고 말이다. 광장에 서니 그래도 숨통이 좀 트였다. 넓은 광장에 마음도 꽤 넓어졌다. 사심이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만나야 할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이 광장을 조성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1598 ~ 1680)이다. 이 광장은 대성당으로부터 두 팔이 뻗어나가 세상을 포용하는 형태이며, 베드로의 상징인 천국의 열쇠의 모양이라고 한다. 물론 그 안에 서서는 결코 조망할 수 없는 장면이긴 하다. 베르니니에 관심이 가는 것은 무엇보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체험을 형상화 한 <성녀 데레사의 법열>이라는 대리석 조각상 때문이다. 사랑의 불화살을 맞아 황홀경에 빠진 성녀의 표정이며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주름 등,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저렇게 섬세하게 조각된 성녀의 표정이 지나치게 관능적이라고 하여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로마까지 가서 이 조각상을 보지 못했지만, 내 평생 다시 로마에 가야 한다면 이 조각상을 영접하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애초 포기했기에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그러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서 제대 한쪽에 있는 베르니니의 무덤을 만난 것은 선물과 같았다. 구석진 곳, 작은 무덤이라 더 좋았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대성당을 바라보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무실 창이 보인다. 삼종기도 하러 나오는 곳이라 뉴스에서 가장 많이 보던 그 곳이다. 맨 윗 칸,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창이다. 잠시 저 창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을 뿐이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이 부럽다. 내게 현시점 존경하는 신앙인을 한 사람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그는 즉위 후 교황명으로 가난을 사랑한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땄다. 이름으로 다 설명되는 그분의 이후 행보이다. 과연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벗'이다. 무엇보다 나는 2014년 방한 시의 여러 일들을 잊을 수 없다. 시복미사를 집전을 위해 광화문으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유민이 아빠를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파파, 파파'를 목놓아 외치던 장면이 있다. 그 영상을 보면서 '파파'에 담긴 피 울음에 같이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교황이 타신 차가 바로 앞에 오자 '파파, 파파'하는 소리는 절규에 가까워졌다. 파파 여기 봐주세요! 여기로 와주세요! (다시 심장이 뛰고 눈물이 차오른다.) 차가 멈춰 서고 교황이 내리고 유민이 아빠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셨다. "파파, 파파" 부르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꼭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는 소리 같이 들렸다. 2014년 당시 예수님께서 이땅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제일 먼저 세월호 가족의 손을 잡아주지 않으실까, 생각했는데. 유민아빠에게 다가가 손잡아주는 교황의 모습은 내 상상을 실현시킨 장면이었다. 교황을 만난 세월호 유가족들이 참사 이후 처음으로 위로 받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저 으리으리한 성 베드로 성당은 교황 프란치스코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사는 집, 입는 옷... 이전의 관례를 다 깨며 전에 없는 파격적인 교황의 길을 가고 있다. 가난을 사랑한, 빈자의 친구 프란치스코가 천장에 금을 입힌 집에 사는 것은 상상되지 않는 부조화이다. 그럼에도 저분은 부조화 속 조화를 보여주신다. 제도 종교의 수장, 가장 높은 곳에 앉은 교황으로서 가난을 사랑하는 지향을 거두지 않는다. 하나가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갈 수 없는 길일 것이다. 성 베드로 광장에 서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계실 그 방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위를 향하고 동시에 아래로 향하는 영성의 길을 생각한다. 베네딕토가 왔다가 떠났던 로마, 성 프란치스코가 찾았던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가 계시는 지금 여기 로마를 떠나며 통합의 길을 생각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남자와 25년을 살았다. 단 한 번도 돈 걱정 없는 날을 살아보지 못했지만, 절대 가난을 산 적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길과 세상의 길의 방향이 다르다는 감각은 잊지 않았다. 그 감각을 일깨워 아이를 키우고 각자의 진로를 선택하며 여기까지 왔다. 신대원을 마치고 전임 사역자가 되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크고 깨끗한 아파트에 살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우리 형편에 맞지 않는 넓고 더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싫어"라는 내 말(싫어서 싫은 것이 아니라 좋아서 싫은 것이었다)에 보내온 친구의 냉소가 생각난다. 음악조차도 성적으로 줄 세우는 예술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일 년 안식년을 가지기 위해 예고 합격증을 포기했을 때 "아이를 바보로 만들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물리적 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봐도 마음고생이 뻔할 목회지를 선택했을 때 '신앙을 가장한 맹목적 희생, 하나님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라며 애정을 담아 말리던 노(老) 스승님의 말씀도.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하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구나, 싶다. 옳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부름 받았기에, 그 지점에서 부부의 마음이 딱 맞았으니까. 우리에겐 이것이 예수님의 길로 가는 방향이니까. 그렇게 살다 수도원 영성에 끌리고 여기 이 순례 여정에 와 있는 것이다. 가난하게 살고자 하는 꿈이 여기 이 순례 여정까지 이끌었다.
25년, 따로 또 같이 인생 순례길을 잘 걷는 우리 부부이다. 그런 부부가, 그런 부부이기에... 로마 이틑 날 밤, 우리는 다퉜다. 다소 격렬하게 말다툼을 했다. 그 다툼 끝에 내 정직한 몸에 발진이 생겼다. 발진은 반가운 '증상'이다. 마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증상이다. 겉으로만 평화, 아니 외적 평화를 가장한 내적 불화의 관계보다 때로 다투고 열을 내는 것이 낫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이기 위한 다툼이었다. 이렇게 혼란과 울분의 로마 이틀을 보내고 우리는 내일 독일로 간다. 독일의 수도원에서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막내 이모가 돌아가셨다. 막내 이모와 우리 엄마 아픔도 슬픔도 없는 천국에서 자유와 사랑으로 만나셨을까? 엄마 생신 사진마다 이모가 있다. 언니 생신이라고 시골에서 온갖 것을 다 바리바리 싸서 등에 지고 올라오셨었다. 김종필이란 이름 때문에, 아니 언니가 사랑하는 사위라서 남편을 참 좋아하고 예뻐하셨다. 우리 이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헤쳐온 인생, 우리 예수님께서 수고했다 애썼다 따뜻하게 안아주실 것이다.
장례식에 가서 사촌 언니들을 만났다. 큰 이모 큰딸 금순이 언니가 큰 이모와 똑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 큰 이모 오신 줄 알았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언니들은 "야, 신실아. 너 이모랑 똑같다. 한산이모 오신 줄 알았다." 했다. 한 세대가 떠나시고, 떠나신 그 자리에 우리가 앉았다. "야야, 쟁배기(정수리)서 물 부스면(부으면) 발뒤꿈치로 떨어지는겨"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뜻이다. 엄마와 이모가 내게 흘려보내주신 사랑을 흘려보내는 어른으로 살라는 소리로 듣는다.
이모, 고마웠어요! 사랑해요! 곧 다시 만나요!
아프고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다. 2017년 10월 11일, 이 사진에 붙인 페이스북 글이다. 이 자매는 그 먼 서울역 아닌 가깝고도 가까운, 해처럼 빛나는 그 나라에서 만나셨을 것이다.
"언니, 서울역이서 만나"
86세 이모가 93세 엄마에게 말했다. 사랑 깊은 자매가 그리움 가득 안고 서울역에서 만난다? 특별할 것 없는 설렘이겠으나 실현 불가, 환상 같은 일이다. 그래서 눈물 겹도록 황당하다. 93세 엄마는 타인의 도움 없이 현관 출입도 못하신다. 86세 이모는 그 연세에 건강하고 씩씩하여 엄마 생신 때마다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지하철 타고 충청도 공주에서 김포까지 찾아오셨었다. 등에는 콩, 고추 같은 선물 가득 짊어지고 말이다. 이제 그 이모의 기동력조차 쇠했다. 혼자 김포까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신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이모는 공주의 쓸쓸한 집 안방에서 전화로 안부를 묻고, 기도제목을 나누며 눈물짓는 일상이다.
엄마를 모시고 있는 동생이 '언니, 서울역이서 만나' 자매의 눈물겨운 통화 내용을 듣고 명절 끝에 93세 엄마를 모시고 공주에 다녀왔다. 허리 아파서 긴 시간 차 탈 수 없다는 엄마를 설득하고 설득하여 모시고 내려갔다. 마지막 만남이 아니겠냐며.
"느이 엄마는 나한티 언니가 아니라 엄마여. 언니라고 헐 수가 옶어" 이모는 늘 그렇게 말씀하신다. 엄마는 평생 신산한 삶을 사는 이모를 떠올릴 때마다 "너머 불쌍허다. 너머 불쌍 혀' 하며 눈물짓는다. 93세 이모와 86세 이모의 눈물 없는 만남은 이 땅이 아닌 천국, 그곳이 더 가까운 실재인가.
생애 처음 안식월을 보낸 남편의 복귀 첫 출근 날이다. 안식 후 첫날(부활하신 예수님...) 점심은 단호박열무국수를 해서 감동적으로 맛있게 먹었다. 안타깝게도 안식 후 첫날을 맞은 남편은 당연히 집에 없으니 채윤이와 둘이서 먹었다. 안식월 마지막 날인 어제 그는 혼자 홀연히 나갔다. 요셉수도원에 가서 낮기도에 참여하고는 수제 소시지를 사 왔다. 단호박열무국수에 소시지를 곁들였다. 그의 복귀 출근을 애도... 아니 응원하며 둘이 맛있게 먹었다.
월요일 점심은 벽산아파트에 서는 알뜰장 떡볶이 아주머니가 차려주신다. 운동 갔다 오다 들러 "오뎅 떡볶이 순대 일 인분 씩 주세요."라고 하면 "순대 내장은 섞어요?" 한다. "내장 많이 주세요." 하면 '이 사람 배운 사람이네! 순대 먹을 줄 아네!' 하는 표정으로 만족스러워하며 내장을 듬뿍 섞어 주신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한 번씩 MSG 듬뿍 넣은 떡볶이를 먹어줘야 한다. 맛있고 고맙다. 고맙고 좋은 마음에 오늘은 대놓고 사진을 좀 찍어봤다.
生의 오후를 건너고 계신 분들과 함께 중년 이후의 삶과 영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초여름 저녁, 노을빛 대화의 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일시: 2024년 6월 13일(목) 저녁 7시-9시
* 장소: 커피식구 성수 (성동구 아차산로13길 31 1층) - 성수역 2번 출구에서 600m - 주차 공간이 협소하니 대중교통 이용을 부탁드립니다.
* 안내: 참가비 무료 (선착순 30명, 다과 제공) - 저자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신청서에 남겨 주세요. (선정된 분께 성서유니온 도서 선물) - 사전등록자 중에서도 추첨을 통해 성서유니온 도서를 선물로 드립니다. - 북토크 후 사인회가 있습니다. - 행사 당일 현장에서도 도서 구매가 가능합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나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두어 주 낯선 곳을 돌아다니다 오니 이 자리가 꽃자리임을 더 잘 알겠다. 집에는 엄마가 없어도 잘 해서 먹고, 제 할 일을 잘하고 지낸 남매가 있고. 소장이 없어도 강의와 나눔 준비를 잘 하여 모임을 동반하는 연구소 선생님들이 있고, 각자 자기 발로 든든히 서가는 동반자 과정 벗들이 있으니 고맙다. 기도로 기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말 잘 듣는 학생들이다. 여기에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있다. 에니어그램 3유형의 긴장과 거짓과 기만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새롭게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배우는 일은 끝이 없구나,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일은 하나님 사람을 배우는 일이니 끝이 없겠구나! 여기가 꽃자리이다.
갑자기 남편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리 와 봐, 해서 보면 남편은 벌써 저기 멀리 걷고 있다. 빨라진 남편의 발걸음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몸이 정직하다. 때로 몸이 가장 정직하다. 그의 영혼이 뛰고 있는 것이다. 말년의 사도바울이 갇혀 있었던 감옥터, 마메르틴(mamertium)이다. 이 앞에서 남편은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수도원 순례에 오른 후 처음으로 말이다.
2015년 남편이 성지 순례단을 이끈 적이 있었다. 남편과 참여자들의 후일담에 비추어 좋은 순례였던 것 같고,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성지순례 모델이기도 하다. 순례 전에 여러 번 만나 다양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여정 중에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가는 곳마다 드리는 예배와 기도에 그 이야기를 반영하고. 남편에게 터키 그리스 순례지의 각 스폿은 참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신앙 이야기로 자리하고 있다. 모르긴 해도 작은 공동체 안에서 잘 묻고, 잘 듣고, 그것을 말씀과 기도에 반영하는 남편의 장점이 극대화되어 발휘되었을 것이다. 그 기억으로 남편은 성지순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사도바울로 인해 언젠가 로마에 꼭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몸과 영혼이 기뻐 뛰놀지 않겠는가. 남편의 글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2015년도에 바울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터키-그리스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가 걸었던 길을 걷고, 그가 설교했던 아레오바고를 오르고, 그가 세례를 줬던 빌립보 강기테스 강가에 앉았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은총이 쏟아져 내렸다. 순례의 참 의미를 알았다. 그때 비로소 로마가 가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것이 제일 큰 이유다. ❞ (남편 JP의 블로그에서 가져옴)
그런데 여기는 우리 순례 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앞에서 사진 정도 찍고 지나치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빠르게 들뜬 남편을 보고 따로 입장료 내고 들어가보자 했지만, 단체 여정 중이니 그리 할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합리적인 남편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더 안타깝고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내일 '사도바울 참수터'와 거기 세워진 '세 분수 수도원(TRE FONTANE)' 일정이 있으니까. 그리고 성 바울 성당이 있으니까. 아쉬움을 기대로 달랬다. 그러나 다음 날 예상치 못한 일로 그 앞까지 가서 버스를 돌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끝끝내 여기는 밟아보지 못하고 로마를 떠나왔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남편의 들뜬 모습을 보았는데, 여차저차 사도바울의 흔적과는 결국 교차하지 못한 순례가 되었다. 쉬 달래 지지 않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차곡차곡 쌓인 로마의 시간이었다. 감정은 에너지와 같아서 열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 꾹꾹 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인 감정들은 무질서하고 맥락 없는 것이 되어 엄한 곳에서 터지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사도바울 참수터 입구
로마의 첫날인 어제, 카타콤베로 가는 일정을 앞두고 인솔자 신부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신부님은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카타콤베 안에서 미사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당장 그것부터 문제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카타콤베 안에서의 미사는 로마 일정 중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2000여 년 전 숨어서 기도하던 신앙의 선조들의 호흡이 배어 있을 것만 같은 그 공간에서의 전례라니. 그 자체로 신비 아니겠는가. 예배라면 더 좋겠지만, 미사 형식이어도 얼마든지 좋을 것이기에 기대가 컸다. 기대는 아쉬움으로 바뀌었지만, 우리 부부를 제외한 가톨릭 신자들의 그것과 비할 수 없을 것이니 내 아쉬움 따위는 넣어 두어야 한다. 일상에서도 그렇지만 순례 여정 중 특히 '매일 미사'가 중요한 분들에게는 아쉬움 너머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나절 푹 쉬시고 회복되기를 바라며, 신부님을 위한 이심전심 기도의 마음으로 순례단은 모두 입을 닫았다. 그렇게 로마의 첫날밤을 보내고 이튿날이 된 것이다.
신부님이 몸은 조금 나아지셨지만 순례여정을 동반할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이 순례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막막한 마음이 되어 인솔자 없이 가이드만 의지한 채로 바울 참수터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니 키 큰 나무들이 도열을 하고 맞이하였다. 순간 마음이 넓어지고 커지며 부풀어 올랐다. 나는 누구보다 먼저 뛰어 앞으로 나갔고, 그 순간 뒤에서 남편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사도바울 참수터'와 '세 분수 수도원' 순례의 전부가 되고 말 줄이야. 모두 내려 그 길을 걷는데 심각해진 가이드가 다시 버스에 타라고 했다. 숙소에 있던 신부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채, 타라면 타고 내리라면 내리고 기다리라면 기다리면서 로마 이튿날 오전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한나절의 순례 일정, 그것도 남편에겐 간절한 것이 이렇게 날아가는 것인가. 마음엔 폭풍이 몰아치려 하는데, "느끼면 안 돼, 느끼지 마!" 꾹꾹 누르게 되었다. 신부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기도하는 것과, 일정이 틀어진 것에의 실망감은 별개의 문제인데. 당장은 두 개의 감정을 함께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텅 빈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나긋나긋하고 매끄러운 가이드의 말이 마이크를 타고 쾅쾅 울렸다. 자신이 어떻게 조치를 잘 취했는지 자분자분 보고했다. 아울러 무척 당황스럽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그러니 여러분도 그리하고,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라며 특유의 설교조로 마무리했다. 뱃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성 바오로 대성당
썩 내켜하지 않는 남편을 설득하여 데려온 순례이다. 사도바울의 흔적 앞에서 생기가 도는 남편을 보고 덩달아 기뻤던 것은 찰나로 지나가고 말았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한 마디를 할까말까 엉덩이 들썩이고 있는데 앞에 앉은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이드에게 갔다.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 남편인데, 가이드에게 가서 식사를 못해도 좋으니 오전에 가지 못했던 곳을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다행히 받아들여졌다. 오후 순례 일정 서두르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별다른 설명 없이) 오전 일정 중 성바울 성당만 채택되었고, 결국 참수터와 세 분수 성당은 가지 못했다. 이쯤 되면 그분의 메시지로 알아들어야 할 듯하다. 좋은 뜻을 가지고 바라는 것이라도 연거푸 좌절된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충분하다. 연연하지 말아라" 하시는 그분의 말씀으로 들어야겠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다. "네, 주님! 알겠습니다. 여기까지로 만족하겠습니다." 가슴이 뛰었다는 그것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고 나를 설득한다.
저녁식사 시간, 옆에 앉은 젊은 순례자 하나가 "저, 신부님 일로 멘붕이에요."라고 했다. "저도요!" 그리고는 꾹꾹 눌러 담았던 몇 마디를 꺼내 놓았다. 충분치는 않았지만 꺼내 놓은 몇 마디의 여백으로 종일 부글거렸던 마음과 꽉 조였던 가슴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멘붕이라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쉽고, 불편한 감정들을 느끼지 말자, 느끼자 말자, 하며 억압하니 어떤 울분이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순명'이라는 말과 덕에 익숙한 듯하다. "이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표현을 순례 중에 많이 들었다. 순명의 미덕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 미덕의 빛 앞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조차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순례단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베네딕도 수도원이라면 '아빠스' 아닌가)가 갑자기 증발한 상황에서 그분의 상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무엇하나 명확하게 알려지는 것이 없어도, 예정된 일정이 없어지고, 심지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미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는데도 모두 순순하다.
성 바오로 대성당
신부님의 건강 상태가 베일에 싸이고, 대번에 남편과 나는 혹시 우리 존재가 불편하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했다. 가만 보니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이드도 같은 생각을 했단다. 흔히 부부간의 갈등과 불화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것을 제 탓으로 가져간다. 학대 가정의 아이들이 학대의 원인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과 비슷하다. 맞을 이유가 있었다거나, 부모님이 나 잘 되라고 때렸다는 식으로 학대 가해자의 죄를 피해자가 뒤집어쓰게 된다. 힘의 차이가 있을 때, 약자가 자기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선을 가장하여 죄를 숨길 때, 아이들은 부모의 죄를 자기 잘못으로 가져가서 수치심의 존재가 된다. 엄마 아빠의 문제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명확한 표현과 설명이 필요하다.
저녁 식사 후 방으로 돌아와 남편과 나는 말다툼을 했다. 늘 그렇듯 시작은 사소한 한두 마디였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갈수록 창대해져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쌓이고 쌓인 울분이 터져버린 것이다. 서로를 향한 울분인가, 아니다. 참수터를 보지 못한 아쉬움인가, 아니다. 잘못 선택한 순례라는 자괴감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어머니 소식이 전해져 온다. 병원에 계신 어머니 상태가 갈수록 악화일로다. 어머니 거취의 중요한 결정을 남편이 해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남편은 막내인데 말이다. 여기도 저기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 명확하게 길을 제시할 어른이 없다. 결국 부부 다툼으로 끝난 하루는 아빠스 없이 헤쳐나가야 할 수도원 순례, 아니 일상 순례에의 울분인지 모르겠다. 우리에겐 아빠스가 필요하다.
프랑크슈테텐 수도원 지하 경당 벽에 그려진 성 베네딕도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중요한 특징은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라고 한다. 과연 읽어보면 그렇다. 그렇다. 탁월한 분별력으로 분별해주는, 그리고 그것을 명쾌하게 제시해 줄 아빠스가 필요하다. 영적 어른이 필요하다. 누가 나의 아빠스가 되어줄 것인가. "주님, 저의 아빠스는 누구니이까?" 맥락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했던 어떤 율법사의 말에 빗대어졌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리고 내 질문에도 되물으시는 것 같다. "네 생각에는 누가 아빠스가 되어야 할 것 같으냐, 가서 네가 그와 같이 되어라." 아빠스를 찾지 말고 네가 아빠스가 되어라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제 그만 울분을 거두고 네 발로 서서, 어른이 되어 너의 순례 여정을 가라고 하신다. 분별력과 명쾌한 말을 '어느 아빠스'에게 구하지 말고 네 안에서 찾아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