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신앙에 대한 고민이 사뭇 진지해져 풋내기 구도자가 되어가던 여고생 시절이었다. 어쩌다 손에 든 루이제 린저의 <고독한 당신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 한 장의 사진처럼 마음에 남았다. 수녀 두 분이 기차 안 맞은편 자리에 앉은 한 여자를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더라는 이야기이다. 여자는 화려한 복장과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마주앉은 수녀님들과는 다른 차림새였다. 그 여자의 외모와 두 수녀의 눈빛을 길게 구체적으로 묘사해놓았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심플한 정의를 내렸다. 사랑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제 막 신앙의 눈을 뜨기 시작한 여고생은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낯선 여자를 향한 두 수녀의 공격적 시선이 클로즈업 되고 그 위로 사랑이란?’ 하는 자막이 올라오며 화면이 정지된다. 이 화면 그대로 액자가 되어 내 의식의 한 벽면에 걸려있다.

 

오래 된 숙제

이것은 내게 막 베어 문 선악과 한 입이 되었다. 그로부터 눈이 밝아져서 내 안의 수녀님 시선을 알아채게 된 것이다. 그 시선은 사랑에 반하는 것이라 하니 당장 떼어내고 싶었지만 안경을 벗듯 휙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수녀님 눈빛 제거하기신앙 여정에 가장 부담이 되는 숙제가 되었다. 여고생 때 받은 숙제를 중년이 된 지금까지 붙들고 있음에도 딱히 큰 진전이 없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차마 내보이지 못하고 온유함의 선글라스같은 걸로 위장하는 기술만 늘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에게는 여과 없이 비아냥과 경멸의 시선을 쏘고 지나친다. 그런 나를 의식하는 순간 느끼는 고통은 매우 크다. 그 시선은 다름 아닌 나와 다른 모든 것을 향한 비판 또는 비난의 태도이다. 그리하여 비판이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 맞닥뜨려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며, 내게 죄책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나는 또 한편으로 비판의 화살을 맞고 상처받을지 모른다는 잠정적 피해자로서의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이렇듯 내 안에 충만한 비판주의오랜 시간 학습한 과제이지만, 안팎으로 오가면복잡하게 얽혀버려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비판의 기술,
or 예술

이런 내가 <비판의 기술>이라는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일단 카트에 담고 볼 일이다. 물론 기술이란 말이 목에 걸려 잠시 주춤하긴 했다. 한때 논쟁에서 이기는 법류의 책에 목을 매던 적이 있었다. 예의 그 수녀님 시선을 벗어나보자는 노력이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내가 쏟아내는 비판에 대해서,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논리적 근거를 만들어 낸다고 해서 수녀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고도의 세련된 기술을 제대로 익혀보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비판을 잘 하는 기술이라면 더 배우고 싶지도 않다. 아니, 그런 것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대화의 기술, 용서의 기술, 비판의 기술.....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그 지난한 일에 따라붙은 기술이란 말은 빠르게 달리는 달팽이라는 말처럼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편치 않은 마음으로 책을 살피던 중 원제에 눈이 꽂혔다.

“Making Judgments Without Being Judgmental”

그렇지! 딱 좋네. 그러고 나니 책 표지의 부제, ‘정죄를 벗어나 분별에 이르는 길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펼쳐 몇 페이지 읽어나가니 기술때문에 가졌던 부정적 혐의는 금세 사라졌다 

비판주의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첫 번째 단계는 비판주의가 얼마나 미묘한 문제인지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덜 비판적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혀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비판주의라는 주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가 비판적인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p24)”  


수녀님 눈빛 치유하기

책의 미덕은 끝까지 이 전제에 충실하게 풀어간다는 것이다. 미묘한 비판주의를 신중하게 다루고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비판주의에 겸허하게 접근한다. 그러면서 비판주의의 그늘에 숨어 있는 것들을-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죄스럽게 느끼는 수치심, 나르시시즘- 하나하나 드러내 보여준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비판주의의 원고석에서 피고석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며 좌불안석이었다. 진실로 비판주의로부터 자유롭기 원한다면 감수해야할 불편함일 것이다. 내 안의 수녀님 눈빛치유하기는 참된 빛을 마주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벗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자면 강렬한 태양빛으로 인한 아픔과, 암흑의 고통을 견뎌야 할 것이다. 이것은 비판주의의 그늘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과 권위적이고 경직된 태도가 모두 내 것임을 머리 아닌 가슴으로 인정해야 하는 고통이다. 그러자니 정죄를 벗어나 분별에 이르는 길은 한두 가지 기술을 익힌다고 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여정은 내 은밀한 내면을 깊이 성찰하며 나의 중심에 거하시는 그분께로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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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가 멀다하고 접속하여 마음을 뺏기는 SNS로 대변되는 우리의 일상은 크고 작은 비판의 향연 같다. 선한 가치를 위한 꼭 필요한 비판, 예의바른 언어에 포장된 독기 가득한 비판, 혼잣말 같으나 누군가 들으라는 비아냥조의 비판. 이 모든 비판에서 주어이기도 목적어이기도 한 우리에게 한 발 물러나 독을 빼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 그럴 때 좋은 안내가 되어줄 책이 <비판의 기술>이다. 물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판 기술자를 만들어주는 비법은 없다.

 

IVP 북뉴스 2013 11-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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