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후배 커플 사이에서 사랑의 매신저를 자처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지랖이 지나쳤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각각 좋아하는 후배였는데,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었지요. “누나, 연애를 사역처럼 할 수는 없잖아요.” 둘 사이를 오가면 들어주기도 하고 설득도 하며 오작교의 까치처럼 깍깍거리며 애쓰던 제게 남자 후배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언제까지 힘겨운 여친을 참아야 하겠냐는 항변이었지요. .... 사역처럼? 그렇더군요. 연앤데, 아골 골짝 빈들에 복음 들고 가는 심정으로만 만날 수는 없지요. 마냥 품어 주고, 무조건 참아내고, 끝까지 기다려 줄 수만은 없는 거죠.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맞아, 맞아. 연애를 사역처럼 할 수는 없지.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헤어짐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요. 갈등이 드러날 때는 물론이거니와 마냥 사이가 좋을 때조차 이 좋은 사랑을 잃으면 어쩌지하며 걱정하게 되는데 이것은 유행가 가사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분리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에 과도하게 사로잡힐 때 연애는 맹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연애를 지속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는 말입니다. 관계란, 특히 연인 사이의 관계란 식물과 같아서 그냥 두면 시들게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물을 주고, 누런 잎도 따주며 보살피는 것이 필수입니다. 돌봄의 시작은 있는 잘 살피는 것입니다. 물을 줘야 할 때인지, 영양을 공급해야 할 때인지요. 관계 역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돌봄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저 지속하는 것이 연애의 목적이 된다면 '있는 그대로 바라봄'이 어려워집니다. 혹여 어긋난 것들이 드러날까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이 사람으로 인해서 행복한지스스로 묻지도 못합니다. 불행한 연애를 할수록 더 그럴 거예요. 이렇듯 비참한 관계맺음 속에 자신의 방치해놓고 시들어가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모르겠습니다.


분노 폭발에 폭언이 잦은 애인
, 과한 음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남친, 예측 불가 감정기복으로 늘 눈치 보게 만드는 여친, 그리고 반복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파트너를 사역자 마인드로 감당하고 있지는 않나요? 다시는 안 그럴게,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정말 잘 할게, 한 번만 더 믿어줘, 하는 말을 그 거짓말 정말이지?’ 하며 환상 속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 이 정도로 최악은 아니라고 칩시다. 첫 싸움을 시작한 이래 적절한 사과나 화해 없이 계속 반복되는 다툼으로 감정이 상해 있는 커플은 어떤가요? 그래서 처음 연애하던 그때 그 희미한 행복의 추억으로 버티고 있다면 말이에요. 그렇다면 당장 멈춰서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나는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왜 이 연애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다음? 그 다음은 선택입니다. 의식적인 선택이죠.


연애를 사역처럼 할 수 없다는 후배의 말에 동의합니다
. 사역처럼 고되기만 하다면 그만둬야죠. 불행한 연애, 비참한 연애를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역처럼도 해봐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한 사람에 대한 오래고 깊은 헌신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첫눈에 반해 마법의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마법이 풀리는 시간은 반드시 오고, 그 후에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을 향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빠지는 것에서 시작하여 하는 것으로 진화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구원의 여신이었던 그녀가 어느 새 사람이 되고, 때로 무시무시한 오크가 될 때라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까지다. 최선을 다했다.’ 말할 수 있을 만큼 사역하듯 견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 얼마만큼 견뎌야 할까요? 안 그런다, 안 그런다 하면서 또 그러는 남친, 두 번 정도 옐로카드 주고 세 번째에 딱 자를까요? 얼마만큼 믿어주고 포기하면 적절하겠습니까? 바로 이 지점, 한계선을 정하는 것. 나의 의식적인 선택이어야 합니다. 누구도 정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잘 참을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유난히 견디기 어려운 지점이 있거든요. 내가 무엇을 잘 견딜 수 있는지, 인내심의 강도가 유난히 취약한 지점이 어디인지 내가 잘 알잖아요. 모른다고요? 알아야 합니다. 나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빠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참아주면 결혼하기 전까지는 변할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라는 거죠. 사람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변하지 않을 그(그녀)를 나는 얼마만큼 수용할 수 있는가, 숙고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 책임의 한계 또한 명확해집니다.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관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이 같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에 능숙해질수록 더 자유롭게 연애할 힘이 길러질 것입니다. 자유의 힘은 의지적 선택이라는 근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되어 선택할 수 있을 때 연애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한 번의 연애를 지속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삶의 주인 되어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QTzine> 4월호,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 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