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국제 음악제에 간 채윤이가 '엄마, 가족끼리 통영에 꼭 오자!'며 보내온 사진이다. 음악관 앞 바다란다. 그리곤 곧 출발한다며 전화를 해왔는데 어젯밤 통화 목소리와 사뭇 다르다. 다행이다. 어제 늦은 밤 시무룩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조금 문제가 있는데..... 언니가 나 내일 그냥 저녁에 함께 올라가면 안 되느냐고.....' 오전 10시 40분 버스로 올라와 4부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내려갔다. 반장 격인 Y 언니가 그랬단다. '선생님도 힘들어 보이시고 클래스 전체 분위기도 있는데 너 혼자 올라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선생님께도 죄송하고 언니들한테도 미안하고 엄마한테도 미안하단다.

 

주일 낀 1박2일 통영국제 음악제 참석차 통행 여행을 선생님께서 제안했을 때 채윤이의 첫반응은 그랬다. '엄마, 나 안 갈 거야. 중등부 반주도 그렇고. 주일 예배 빠질 수 없잖아. 안 가야겠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는 '엄마, 통영 가야할 것 같아. 엄마가 선생님하고 얘기해보면 안 돼?' 선생님과 얘기하기 전에 채윤이와 얘기하고 기분 좋게 합의 봤다. 토요일에 일찍 내려가서 연주 보고 저녁 늦은 버스로 혼자 올라와서 중등부 예배 드리기. 그런데 선생님과 의논하고 오더니 '선생님이 밤에 다같이 놀고 시간 보내는데 같이 하면 좋겠대. 나도 같이 바비큐도 하고 놀고 싶어.' 했다. 선생님과 통화 했다. 채윤이가 저녁에 올라가면 모두들 너무 아쉬워할 것 같다며 다음 날 아침 버스로 올라와서 예배를 드릴 수는 없냐고 하셨다. 다시 채윤이와 대화. 중등부 반주는 다른 선생님이 하실 수 있단다. 그리고 4부 예배를 엄마랑 같이 드리면 좋겠단다.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간 것이다.

 

막상 내려가보니 혼자 올라오는 게 더욱 미안해졌나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의리가 있는 반장 언니가 언니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한 것 같았다. '채윤아, 니 입장과 언니 말을 충분히 알겠는데 걱정하지 말고 계획한 대로 아침 버스로 혼자 올라와. 선생님께 죄송하지만 엄마가 충분히 말씀 드렸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야 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질 수도 있는 거야.' 채윤이의 말은 자신에게 예배가 중요하다는 것을 비신자 언니에게 설명하기가 난감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제가 많이 따르고 좋아하는 언니이다. '맞아. 그럴 때는 다 설명하지 않아도 돼. 언니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해. 너에게 중요한 것을 지키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을 때도 있어.' '알겠어. 엄마. 고마워.' 혼란스러운 지점이 정리된 것 같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채윤이와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주일 성수'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채윤이가 먼저 예배를 지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성경학교와 음악캠프가 겹치는 경우, 또 연주회와 주일 예배가 겹치는 경우, 지금보다 더 단호하고 분명하게 예배나 성경학교를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했었다. 성경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적지 않은 캠프비용을 다 내고도 반만 참석하여 레슨을 받기도 하였다. 그때는 채윤이가 아직 어렸다. 사춘기가 오기 전, 또는 막 시작할 때였다. 종교적인 내용을 많이 얘기하고 큰 틀에서의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분명하게 원칙을 가르쳐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니가 아무리 음악을 잘하고 좋아하고 세상에 음악보다 중요한 것이 훨씬 더 많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야. 내 삶에서 하나님이 제일 중요해요, 라고 말만 하는 것으로는 안돼. 정말 중요하다면 행동으로 보여야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선택하기 위해 포기하고 손해보는 것을 감수해야 해. 하나님 없이 음악을 잘하는 것, 하나님 없이 성공하는 것은 실패나 다름없어.'

 

그러나 이번에는 채윤이 자신이 선택하도록 했다. 몇 년 사이지만 채윤이가 많이 자랐다. 그 사이 청소년이 되었고 청소년은 거의 성인 대접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리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보다 주관이 분명해지고 생각하는 힘이 많이 생겼다. 스스로 자기  하나님을 찾으려는 모습에 가슴 뭉클할 때도 있다. 특히 중등부 반주를 하면서는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할 줄 알고, 찬양을 하며 힘을 얻기도 하는 것 같다. 확실히 채윤이와 하나님 사이에서 부모가 개입할 때가 지났다는 생각이다. 만약 채윤이가 주일 저녁 차로 올라오겠다고 해도 허락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였으니 허락이래야 허락이 아닌 것이군. 흠)

 

그렇다고 엄마의 도움이나 부모의 교육이 필요치 않을 만큼 커버렸단 얘기는 아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생각지 않은 것을 배우게 되어 다행이다. 하나님과의 약속, 예배를 지켜내기 위해서 아니 꼭 예배가 아닌 그 무엇이라 해도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 말이다. 둘 사이에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책임져야 한다. 책임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일정 정도의 불화, 미안함 등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채윤이의 표현대로 '선생님께도 미안하고, 언니들에게도 미안하고, 엄마에게도 미안한' 것은 신경증적인 상태이다. 계속 미안함에 머물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 말이다. 그렇다고 내 욕구(필요)에만 머물러 타인의 입장을 돌아보지 않는 것 역시 건강한 상태가 아니다. 김서영 교수가 말했 듯, 건강한 자아는 그 둘의 교집합 즈음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불안'에 있을 것이다. 그 불안 속에서 해야 할 일은 의지적 선택이다. 채윤이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렇게 선택하고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주일 성수에 대해서는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만큼 내 안에 이야기가 많다. 아이들에게 결코 강요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드시 목숨 걸고 지키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상존한다. 내 안의 이야기들이 여러 목소리를 내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처럼 그 다른 목소리들에 휘둘려 분열증을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다. 나의 주일 성수 이야기, 질곡의 개인사를 통해서 나는 고착됐고, 상처 받았고, 상처 주었고, 회의했고, 아파했고, 성장해왔다. 실은 아버지를 넘어서 하늘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길게 풀어내야 할 때가 있으리라. 아이들과 함께 자라가는 엄마됨으로 이 부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니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다. 내가 바라는 한 가지는 우리 채윤이가, 현승이가 자기 자신이 되어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정을 제 발로 걸어가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 잘 도와주고 동행할 수 있는 곳까진 함께 걸어주고 싶다. 오늘은 채윤이와 함께 예배 드릴 것이다. 게다가 아빠가 사회를 보는 날이라 더 설레고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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