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강의로 한 주간을 보냈다. 정신이 들어서 보니 현승이와 둘이 텅빈 거실에 앉은 금요일 밤이다. 기다란 아빠, 2등으로 기다란 채윤이가 각각 수련회와 캠프 일정으로 집을 비웠다. 기다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탓인지 집안이 유난히 조용하고 휑하다. 피곤에 절어서 책에도 음악에도 폰게임에도 현승이와의 수다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엄마, 내일 아침에 일찍 [인사이드 아웃] 볼까? 그냥 우리 둘이 먼저 보자. 궈래? 좋아. 조조로 예매하자. 토요일 아침 7시 50분, 6천 원 티켓을 예매했다. 밤 10시가 되기 한참 전인데 '우리 일찍 잘까? 내일 영화 제대로 보려면...' ZZZZZZZZZZZ

 

관객이 열 명 남짓한 극장에서 에어콘 추위에 덜덜 떨면서 관람했다. 잠을 깬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영화가 심지어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현승이 몰래 울었다. 조금 울다가 어떤 장면에서 많이 울었다. 기억의 구슬 저장고에서 구슬 하나가 튀어나왔고 슬픔이가 재빨리 영상 재생버튼을 눌렀나보다. 사실 현승이의 영화평이 몹시 궁금했지만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마음을 접었다. 현승이 감상평 물어보지도 말자. 이 영화를 이해하기엔 아직 기억의 저장고가 헐렁해. 채윤이? 채윤이는 조금 나을 수도. 우정의 섬이 무너지고 가족 섬이 무너지고 어릴 적 쌓았던 것들이 마구 무너지며 감정의 불들이 나갔던 기억이 최근일테니까. 그렇다 해도 쉽게 이해되진 않을 거야. 기억이란 한 30년 이상 묵혔다 꺼내야 제 맛이거든.

 

아이들이 보고 재밌어 하긴 어려울 듯하다. 기억의 구슬 저장고가 꽉 찬 어른들, 그 중에서도 가끔씩 기쁨이와 슬픔이가 합작해서 내보내는 구슬에 민감한 어른들은 보다 울다 말을 잃을 듯.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먹먹해지거나 덤덤하거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일 거야. 

 

난 '음악심리치료'를 전공했는데 어쩌다 '음악'은 잊고 '심리치료'만 만지작거리고 있냐. 어쩌다 내적 여정을 안내하는 에니어그램에 꽂혀서 '내면을 바라봐, 내면을 바라봐' 허경영 코스프레를 하고 있냐. 내면을 바라봐, 내면을 바라봐, 인사이드 본부로 가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버럭이 까칠이를 만났더니 이 녀석들 결국 나를 기억 저장소로 데려가 던져 놓고 도망했다. 야, 야 이놈들아! 나 꺼내줘. 나 음악심리치료 전공인데, 왜 자꾸 나를 '기억심리치료사' 만들려고 해!!!

 

(얘들아, 고마워. 실은 나 이거 좋아해.) 

기억 저장소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기쁨이의 노란 구슬을 눈물로 닦아 슬픔이의 파란구슬 만드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리햐여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초록 구슬이 되게 하는... 아니

한 구슬이 한 가지 색인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노랑, 파랑, 초록, 빨강, 보라가 함께 어우러진 기억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이런 작업을 좋아한다.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에니어그램]의 일부분이다.

노란 색인 줄 알았으나 파란 색이었던,

기쁨이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다른 면도 볼 수 있었던 내 기억의 구슬 하나.

이 구슬은 '진리'가 되어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거듭난 나날은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롭고 있다.

 

 

 

어린 시절 작업이라면 나도 할 만큼 했잖아 하면서 교만한 마음도 있었어. 어린 시절이 다 그렇지 뭐. 너무 인위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끌어내고 짜 맞추는 거 아냐? 하면서 방어하기도 했던 것 같애. 그러면서 여러 내적 여정 훈련을 받았지. 내게 어린 시절 그러면 아직도 엄마가 해주시는 레퍼토리가 있어. ‘너처럼 사랑받고 큰 애는 없다. 너를 늦게 낳아 가지고, 느이 아버지가 자다가도 일어나서 불 켜고 앉아 너를 들여다보고 그랬단다. 내가 너를 안아볼 새가 없었다. 하도 너를 이뻐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 말이 내 의식에 새겨져 있어. 그래서 '나는 엄청 사랑받고 자란 아이야' 라고 머리로 믿고 있었던 거야. 의심의 여지없이 말이다. 헌데, 내 마음과 몸은? 이런 질문과 함께 이제껏 눌러놨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봇물처럼 생각나는 시점이 있더라. 더 중요한 건 기억과 함께 떠오른 당시의 느낌이야.

 

동네 친구 집에 갔던 기억이 나. 남자 애였는데 친구가 무슨 말을 하면서 막 까불었어. 그랬더니 친구의 엄마가 ‘저런 미친놈. 내가 못살어.’ 하면서 고개를 젖히고 웃으시는 거야. 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장면이 먼저 선명하게 떠올라.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서 동네 사람 모두 업신여기는 집이었지만 어린 나는 그런 엄마와 아들 사이가 부러웠던 거야. 기억해보면 목사님이었던 아버지는 교인들 앞에서, 아니 교인들 없는 곳에서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가족을 대하지 않으셨어. 엄마? 내 기억 속 엄마는 ‘사모님’일 뿐이었던 것 같애. 엄마는 언제나 곁에 없었다고 느껴져. 교인들 중에 아픈 사람, 힘든 사람을 찾아 심방을 가 계셨지. 그리고 집에 오시면 남편이기 이전에 ‘주의 사자’이신 목사님을 위해 열심히 밥을 하셨고. 밤이 되면 철야기도를 위해 교회당으로 가셨어. 나는 알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는 것을. 그렇지만 상황을 통합적으로 볼 수 없는 어린 나는 그저 ‘차가운 아버지’와 ‘부재중인 엄마’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었다는 거야. 아주 가끔 나와 동생이 아버지가 쓰던 이북 사투리를 흉내 내고 온 몸을 던져 익살을 떨면 아버지가 아주 살짝 웃으셨어. 나는 아주 살짝 웃을락 말락 하는 그 웃음만 보아도 ‘나를 사랑한다는 뜻’인줄 알고 좋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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