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고가 강하고 고집이 센 편이라(같은 말이군) 남의 말을 잘 믿거나 듣지 않는 편이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이긴 하지만 믿고자 하는 사람, 또는 상황은 거침없이 무한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운동이라곤 수영밖에 모르는 바보가 그나마 어렵게 친해진 수영도 연을 끊은 지 몇 년이 되어 남의 말 듣고 필라테스를 하게 된 얘기다. 누가 뭘 하라고 해서 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이 두 번이나 세 번 정도 말하면 그냥 무조건 들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남편 김종필 류의 사람들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쉽게 추천하지 않는 사람, 강요는 더더욱 못하는 사람, 웬만해서는 두 번 이상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두 번 정도 말하거나, 한 번 하는 말인데 힘이 들어가 있다면 가급적 듣는 편이 좋다. 동의가 되지 않아도 듣는 편이다.  

 

H가 허리 통증 달랠 요량으로 수개월 전,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허리 통증이 나아졌을뿐 아니라 몸과 가까워지는 좋은 운동이라고 했다. 요통은 아니지만 일찍 오십견에 테니스 엘보 같은 갱년기 질환을 겪은 내게 "언니도 해 봐"라고 했다. 한 번 아니고 여러 번 말했다. H가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하면 그냥 이유 묻지 않고 듣는 게 좋다, 여기기 때문에 꼭 해봐야지 싶었다. 시간, 비용, 무엇보다 몸치로서 새로운 운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백 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집 근처에 생긴 대형 헬스클럽에서 오픈 행사로 저렴하게 회원 모집하는 데 힘입어 등록을 했다. "해보고 안되면 그만두기!"용으로 시험 삼아 해보기 딱 좋은 시간과 비용의 3개월 도전이었다. 

 

수영을 제대로 즐기기 전까지 내 몸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정신만 가지고 살지, 몸은 왜 데리고 살까 싶었다. 학창 시절 체육은 내 몸을 혐오하라고 주어진 시간이었다. 체육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몸, 실기 성적 안 나오는 몸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몸이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것은. 어쩐지 수영만큼은 꼭 해보고 싶어서 젊은 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역시 어려웠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뭘 해도 우습기만 한 부적절한 몸의 재확인이다. 자유형 호흡에서 막혀 번번이 포기하고 말았다. 채윤이를 품고 임산부 수영교실을 다니며 다시 시도.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까지 진도를 빼고 출산했다. 한 생명이 들어서서 두 생명의 에너지가 된 것인지, 그저 부풀어가는 포궁의 부력 때문인지 수영이 잘 배워졌다. 그렇게 극복하고, 채윤이 낳고 현승이 낳고 두 아이 모두 어린이집 다니던 즈음부터 꾸준히 하여 수영人으로 거듭났다. 수영은 내게 영적 훈련이었다. 내 몸에 가까워지고, 조금씩 화해하며, 믿어주게 되었으니.

 

내 인생 운동은 수영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H의 간증에 힘입어 시작한 필라테스다. "뭘 해도 웃긴 몸"으로 새로운 운동을 하면 또 얼마나 웃긴 몸이 될까, 시작도 하기 전에 수치심이 올라오지만 그냥 열심히 했다. 전자동으로 "어떻게 보일까, 얼마나 웃기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그럴수록 더욱 내 몸에 집중했다. 다행히 편안한 선생님을 만났다. 분명 잘 못 따라가고 있는데 기다려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갈수록 재미가 붙어 50분이 어떻게 지나갔나 싶게 끝나곤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고 몸인 나로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 참말로 좋았다. 어떻게 보일까, 하는 걱정은 저 너머로. 

 

이사가 결정되고 가장 아쉬운 것은 앞산이 아니라 모처럼 적응한 필라테스였다. 어디든 가서 다시 할 수 있겠지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이끌어주는 선생님이었다. 3개월 수강권이 끝나고 이사까지 애매하게 한 달 정도가 남았다. 원래 한 달 수강권이 있지도 않지만 굳이 등록하자면 할인된 3개월 비용과 비슷하다니, 그렇게까진 할 수 없어서 마음을 접었다. 이사 때문에 그만둔다고 하니 선생님도 많이 아쉬워했다. "어, 저 이제 오전 수업 허전해서 어떻게 해요? 신실님 늦게 오시면 막 기다리는데..." 채윤이보다 몇 살쯤 더 보이는 앳된 선생님의 말이 슬프게 들렸다. 그저 하는 말이려니 했지만, 슬픈 만큼 따뜻하기도 했고. 마지막 수업 마쳤는데 선생님이 내 팔을 잡아끌어 라커룸으로 가더니 선물 봉투 하나를 내밀어 깜짝 놀랐다. "신실님 정말 열심히 하셨는데 너무 아쉬워요. 처음부터 영상을 찍어 놓았을 걸... 했어요." 학생이 선생에게 고맙다고 선물 주는 것은 흔하지만, 선생이 학생에게, 그것도 필라테스 강사가 3개월 반짝 운동하고 그만두는 학생에게 선물이라니! 실은 나도 선생님에게 줄 기프트 카드를 준비해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선생님, 실은 저도요...." 하고 내미는데 주책맞게 안구에 습기가 차올랐다. 

 

남편이 "셀카라도 하나 찍지 그랬어?" 했다. 그러게,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연락처도 없고,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3개월의 만남이다. 기억에만 남은 따뜻한 만남이다. 아쉬울 것은 없다. 몸에 남은 기억은 스마트폰의 사진 한 장보다 더 선명하다. 간간이 그 시간에 배운 스트레칭을 한다. 앳되고 차분한 그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짧고 흐릿하여 더 선명한 만남, 따뜻한 만남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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