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이제야 나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몸을 입고 인간이 된 이유를 알았다. 죽음으로, 가장 극적인 죽음, 극형으로 '몸'을 버리신 이유를 알겠다. 아주 잠깐 인간으로 사시다 그 몸을 버리고 돌아가신 이유를 알겠다. 함께 먹고 자고, 몸으로 부대끼던 당신의 제자들 앞에서 무력하게 끌려가신 이유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를 알겠다. 두려움과 호기로움 사이 좌충우돌하던 베드로의 인격이 변형되었다. 선생님의 죽음을 수치스럽게 통과한 베드로가 그 새벽 자기혐오 속에 헛 그물질을 하는 그 심정을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불을 피우고 아침을 준비하며 따뜻하게 맞아주신 선생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그 수치스러운 지점을 짚어내시더니 용서 너머 부탁을 하시는 선생님. 그리고 나서 떠나신 선생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선생님의 부재 속에서 베드로는 비로소 가르침을 새록새록 알아듣고 그분의 못다한 삶을 대신 살 수 있게 되었다. 있다 없어진 몸, 그 물성이 사라진 공간은 얼마나 큰지! 있다 없어진 그 빈자리가 드러내는 존재는 얼마나 또렷한지. 그 가르침은 또한 얼마나 명료한지. 2021년 사순기간에 나는 몸과 영혼을 새롭게 알아듣는다. 

 

사라짐

 

바쁠 때는 한 달 정도는 엄마랑 통화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한 달이 뭐야. 김포 현대프라임빌 1층 그 방 그 침대에 엄마가 여전히 누워 졸고, 가끔 일어나 기도하고, 다시 졸고 있을 거라면 1년 동안 통화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지냈다. 전화가 좀 뜸하면 바로 태클 들어오는 시어머니는 신경이 쓰였지만, 이제는 늙어서 섭섭해 하지도 않는 엄마다. 괜히 허하고 마음 둘 곳 없어 전화하면 "얼라, 우리 딸이네. 바쁜디 전화를 혔네." 하는 순진이 무궁한 엄마. 연세가 드셔서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이틀 사흘의 시간 개념이 모호해진 것도 무심한 딸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그러니 크게 죄책감이 들지도 않았다. 엄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고, 끊을 수 없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었을까. 

 

존재함

 

엄마와 함께 한 하늘 아래 살던 52년인데. 그냥 공기처럼 존재하던, 아니 공기처럼은 아니다. 가끔 좋고, 자주 성가신 그런 존재니까 공기나 하늘 같은 존재는 아니다. 어쨌든 엄마는 52년 동안 있었던 엄마다. 없는 엄마와 1년을 보냈는데, 52년보다 더 많이 엄마 생각하며 지냈다. 없어진 엄마 때문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없어져서 세상이 이렇게 됐는지도 몰라. "있을 때 잘할 걸." 이런 말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엄마가 다시 살아와도 잘할 자신은 없다. 예수님이 딱 33년, 그것도 30년은 숨소리도 안 내고 계시다 3년 반짝하고 떠나셨다. 그래서 기독교가 잘 되는 거다. 몸을 너머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들은 거다. 그분과 함께 했던 제자들이 알아들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분께 배운 걸 전했고, 그러다 그분처럼 조롱당하고 버려지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거다. 나도 엄마의 부재를 절절하게 느끼며 몸 너머의 존재를 상상하게 된다. 

 

무덤

 

엄마 무덤은 가난하다. 시립추모공원 안에 있고, 딱 한 줌으로 남은 몸을 담은 한 주먹의 땅을 차지한다. 엄마 떠난 지 1년이 된 날에 엄마 무덤에 갔다. 주말에 이미 추도예배를 드렸다. 2월부터 내내 동생과 통화하며 울고불고했던 터라 '당일'을 기념하는 것도 벌쭘하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니 3월 11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혼자 엄마 무덤에 다녀왔다. 혼.자. 라는 말에 왜 이리 에너지가 들끓는지. 남편이든 동생이든 함께 해주길 기대하면서도 혼자 가고 싶기도 했다. 아이들이 "엄마, 같이 갈까?" 하는 말에 솔깃하기도 했지만 혼자 가야 했다. 실컷 울려고 했는데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하얀 꽃

 

엄마와 나 사이, 우리 둘만의 끈이 있다. 평생 엄마와 사이가 더 좋았던 건 동생이었고, 엄마는 나보다 동생을 더 착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여기긴 했지만. 동생이 엄마를 헤아리는 마음이 나보다 깊고, 내가 넘볼 수 없는 동생과 엄마 사이 끈끈함이 있지만... 나와 엄마 사이 그 무엇이 있다. 엄마의 초라한 무덤가에 가만 혼자 앉아 있으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나와 엄마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내 몸과 영혼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엄마 떠난 이후로 이렇듯 삶이 텅 빈 느낌인 것은 내가 엄마고, 엄마가 나라서, 내 삶이 엄마의 94년 삶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쩐지 엄마의 삶 그 이상을 살지 못할 것 같다. 엄마 만큼만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생, 아니 한때 치우고 싶지만 치울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끄러운 존재였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 45세 쯤 되었을 때, 깨달았다. 엄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엄마에 대한 부끄러움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 엄마는 걸림돌이 아니라 내 인생 디딤돌이었다는 것. "엄마, 내가 엄마야. 엄마가 살지 못한 삶을 잘 살게. 말끝마다 예수님을 달고 살았지? 말만 그렇게 하면서 삶은 그렇지 못하다고 내가 무시하고 조롱도 많이 했어. 엄마 정말 무시 당하기 딱 좋은, 푼수 같은 사람이야. 그래도 착한 마음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생을 감사하며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어. 엄마처럼 살래.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처럼 있는 그대로, 분수를 따라 살래. 엄마처럼." 

 

엄마 돌아가시고 익히 알던 '영혼'의 존재를 더욱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그 느낌을 믿기로 했다. 거부하지 않고 순간순간 감동하기로 했다. 몸과 말, 말과 행동, 행동과 생각 너머 사람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순간순간 빛나는지 더 적극적으로 발견하기로 했다. 아빌라의 테레사 말씀처럼 "영혼이 지니고 있는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그 위대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건 엄마가 남긴 자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작년 2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엄마를 걸어두고 "빛나는 영혼"이란 상태 메시지를 적어 두었었다. 아, 그때도 알고 있었다. 망가진 몸 때문에 더욱 찬란하게 돋보이는 엄마의 영혼을. 

 

작년 장례식날엔 그렇게 추웠는데. 비석을 하러 갔던 날도 차겁고 거센 바람에 머리가 쪼여 두통이 올 정도였다. 추모공원 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쑥이며 냉이가 군데군데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날은 따뜻하고 메마른 잔디 사이 손톱만 한 초록이들은 보잘것 없이 예뻤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볼펜심 정도나 되는 하얀 꽃 한 무더기가 피어 있었다. 냉이 비슷한데, 이름을 알 수 없다. 우리 엄마 무덤가의 하얀 꽃. 이름 없는 하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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