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지인들은 무기력과 분노를 토로해왔다. 교회 교우들을 비롯해서 대선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분들이 꽤 많을 텐데 그분들과 마주할 일은 없었다. 가족 중 한 분이 승리에 도취되어 (목적어는 분명치 않지만) 조롱하고 비하하는 내용을 동생에게 보냈단다. 그 내용을 전달받고 정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었다. 하필 엄마 추도식 다음 날이었다. 하긴 그분은, 임대차 삼법의 여파로 전셋값을 부르는 대로 올려준대도 나가라는 주인 때문에 잠시 거리에 나앉는 상황에 몰린 내게 그랬다. "좋겄다, 니가 좋아하는 문재인이가 부동산 잘해서..." 그때는 다리가 아니라 가슴이 무너졌다. 정치가 무엇이기에,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기에 이렇듯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단 말인가. 가족 간의 인지상정조차 말소해버린단 말인가. 그 조롱의 톡을 받은 동생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대선 이후 나는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다. 화도 내지 않았고, 그리 절망적이 되지도 않았다. 뉴스만 보지 않으면 살 수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견뎠고, 전두환 시절도 살았는데.

현승이가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 집에서는 물론 다니는 학교도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해 제 생각을 말하고 피력하는 것에 익숙한 환경이다. 거기다 타고난 기질까지 작용하여 뉴스로 보고 나름대로 의문을 품고, 식탁에 앉아 아빠와 끝없는 대화를 하곤했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첫 촛불 집회가 열렸던 날, 나는 지방에서 1박 2일 강의가 있었다. 세 식구가 촛불집회 나간 사진을 보내왔는데, 가슴이 떨렸다. 내가 여기서 한가롭게 강의하고 있을 때인가 싶었었다. 그 집회에서 이재명을 만났고, 같이 찍은 사진을 또한 보내왔었다. 두 아이는 그때 받은 좋은 인상을 기억하고 있다. 셀카를 찍자고 하니 보좌관에게 찍어달래자 하고, 보좌관을 대하는 태도 역시 참 좋았다고 했다. 그때 찍은 사진과 이번 선거날에 채윤 현승 둘이 가서 투표하고 찍은 인증샷이다.

사진에서 시간이 보인다. 성인이 된 남매는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대입을 치르고, 성인식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겪어냈고, 또 사춘기를 통과했고, 엄마 아빠 인격의 이면으로 실망했고, 반항도 했고.... 그리고 둘 다 성인이 되었다. 정치적 입장이든 개인의 삶이든 더는 엄마빠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로 커졌다. 이러기까지 보낸 시간은 성장통을 앓는 시간이었다. 그렇다. 성장통이다. 아빠가 목회하는 교회를 떠나겠다 선언하는 일도, 엄마빠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줄 알았는데 매일매일 실망하는 것도. 아이들의 시간이 그러할 때, 엄마 아빠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상실감과 함께 아이 눈에 비친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아픔의 시간이었다. 좋다 나쁘다 하나의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만, 결과적으론 좋다. 성인 넷이 사는 오늘, 양육자와 피 양육자가 아니라 자기 빛깔로 사는 네 사람으로 만나는 오늘이 참 좋다.

아포리아(a-poria), 길이 없음. 어디서 풀어야 할지 모르는 난제를 일컫는 말이다. 살면서 흔히 맞닥뜨리는 길을 잃었다거나, 절망적이다, 이런 상태까지 아우르는 것 아닐까 싶다. 피하고 싶고 당혹스러운 지점이지만, 철학에서는 여기를 '낙담'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가는 중요한 지점으로 본다. 대충 알면서 자기확신에 빠진 이가 아포리아에 들어서 혼란을 통과하며 더 큰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좌절과 혼란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피상적이고 쉬운 성공보다 더 소중한 것일지 모른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물론 삼라만상은 변하기 때문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 사이 남매의 질풍노도며 가족의 성장통으로 변화무쌍의 시간이었다면, 이재명과의 관계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트위터에서 만난 시원시원한 정치인으로 시작하여 19대 대선을 향한 경선, 그리고 그 이후...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관계는 여느 개인적 관계 맺음과 다르지 않았다. 끝없이 변하되 어디로 향하느냐, 가 관건이 아닐까. 한 인생이 어디로 향해가는지, 그 흐름과 맥락 속에서 삶의 의미는 찾아지는 것이다. 지난 목포 여행 마지막 시간에 선물처럼 만난 카페가 있다. 김대중 공부방을 탐방하고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만난 카페다. 주인 취향이 너무나 뚜렷하여 정겨운, 바다가 보이는 카페였다. 밖에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사진이, 실내 어느 벽에 시편 23편이 걸려 있었다. 목포 여행 첫날에 들렀던 '손소영 갤러리 카페' 벽에는 이재명 사진이 걸려 있었고. 사진의 순간은 모두 지나간 어느 날의 순간. 거기로부터 시간은 여기까지 흘러왔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가 있다. 사람도 다 때가 있다. 그래서 한 번씩 대중 목욕탕에 가서 잔뜩 불린 다음 빡빡 밀어줘야 한다. 응?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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