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해둔 마지막 인사가 있었다.

"엄마, 고마워. 엄마 딸이라서 정말 좋았어."

식상하지만 사무치고 절절한 말이다.

 

마지막 말만 준비된 것이 아니다. 그 인사를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뒀었다. 엄마의 죽음을 오래 준비해왔다. 39년 동안 늘 준비하고 있었다. 어려서는 무의식적으로, 마음공부와 내적 여정을 한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준비했다. 내적 여정으로 치유의 눈을 떠가는 중 오래된 상복을 발견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떨결에 입었던 상복,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입었던 무섭도록 낯선 옷이다. 그것을 내다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의 서랍 깊숙이, 그러나 언제든 쉽게 찾아 꺼내 입을 수 있게 기억하며 간직하고 살았던 것이다. 쾌활함으로 위장한, 당당함으로 감췄던 불안, 가족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이 거기서 기인한 것 같았다. 앎이 즉각적으로 치유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화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상실과 애도 과정에 함께 하면서 엄마만은 잘 보내드려야지, 늘 생각했다.

 

아버지 목회를 도우면서 교우들의 죽음을 돌보던 엄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의 임종을 의연하게 지키고 진두지휘 했던 엄마다. 엄마가 일부러 외워준 것은 아닌데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생각이 난다. '옆에서 울고 그러면 안 된다. 찬송 불러 드려야 한다. 마지막 숨을 넘기는 일은 매우 힘들다. 그때는 물을 한 숟가락 준비하고 있다 한 방울을 입에 넣어 넘기도록 해드리면 수월해진다.' 매뉴얼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축복 속에 고요히 마지막 호흡을 내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엄마의 사랑받은 이들이 모여 찬송 부르는 동안 잠자듯 눈을 감으시는 것을 상상했고 기도했다.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고마워, 엄마 딸이라 좋았어." 이 말 외에 없었다. 

 

"가, 엄마 이제 가, 나는 괜찮으니 이제 가 엄마......"

39년 준비가 무색하다.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엄마 귀에 대고 뱉은 말이. 그것도 절제하지 못한 통곡과 함께. 호흡기도 차고 있었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의식이 또렷하고 다 알아듣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며칠 전 밤에 이 생각이 났다. 엄마의 호흡이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한 번 한 번 호흡을 끌어올리는 일이 힘겨운 고통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혹시 엄마가 나 때문에 그 버티고 있다면 마음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격리된 상태로 외롭게 보내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엄마에게 고통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엄마의 빛나는 영혼이 무너지는 육체 안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엄마와 마지막 통화였다. 엄마와 연결되는 유일한 끈은 전화기에 대고 부르는 찬송이었다. 행여 엄마 귀에 들리지 않을까 큰 소리로 불러야 하는데, 목소리를 크게 낼수록 울음도 함께 커지니 드레스룸 구석에 머리를 파묻고 통곡하며 불렀다. "성령 감화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호흡기에 막힌 엄마 숨소리만 들리는데, 엄마가 너무 힘겨워 보여서 엄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안심시키고 싶었다. 이제 신실이가 다 컸고, 김서방도 있어서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편히 가라고. 하지만 마지막 말이 될 줄을 몰랐다. 

 

엊그제 늦은 밤. 책을 읽고 몇 줄 글을 남기려다 "숨을 거둔 후에도 청각은 한참 더 남아 있대" 하는 말이 생각났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엄중한 사랑의 태도로 임종을 지켜야 하겠느냐, 그런 의미를 담았었다. 우리 엄마는 존경과 사랑에 둘러싸여 속에 마지막 숨을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무엇. 마지막 말이 저거였다고? 엄마가 저걸 들었다고? 저 말을 듣고 끝이었다고?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 씻어낼 수 없는 죄다. 자책감이란 말도 과분한 감정으로 가슴이 다시 죄어드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어떻게 해버려야 할 것 같은, 나를 가만 둘 수 없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동생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동생도 그랬을 것이다. 피차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알기에 각자의 몫을 감당할 뿐, 서로 더 아프게 하면 안 되었다. 참지 못하고 전화했다. "엄마랑 내가 마지막 통화할 때 내가 엄마한테 했던 말 기억하니?" 못 들었길 바랬다. 울음이 전부였기 때문에 못 알아들었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복기해보니 내가 그 말을 할 때 얼른 동생이 말을 가로채고 전화를 끊었었다. 상황을 파악한 동생이 '그때 누나 편하라고 엄마가 찬송 다 듣고 따라 불렀다고 했는데 사실 그때 엄마 의식이 거의 없었다. 찬송도 못 알아듣고 누나 말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데 확인사살과 같았다. 그랬구나. 정말 내가 엄마 귀에 대고 한 마지막 말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되돌릴 방법이 없다. 차분히 찬송 부르고 "엄마 잘 자. 곧 보러 갈게"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입에 발린 말이라도 "사랑해. 또 전화할게" 할 일이지. 비록 몸으로 함께 하진 못했지만 엄마가 늘 말하듯 찬송을 불러드렸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는데. 새롭게 견디기 어려운 밤이었다. "어머님이 당신 마음을 듣지, 말을 들으셨겠냐" 몸부림 하는 나를 끌어안고 남편이 하는 말도 위로되진 않았다. 어떤 늪으로, 죄책감의 구덩이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늪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싶긴한 건가. 

 

하지만 아침이 되니 괜찮아졌다. 밤에 했던 남편의 말을 복기해보면 이해도 되고 수긍도 되었다.  무엇보다 그런 위로의 말이 필요치 않게 말짱하다. 말짱한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엄마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말짱해지는 것이냐. 밤이 와 슬픔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 파도를 부풀리고 부풀려서 그 안에 갇혀버리고 싶다. 그렇게 슬픔에 머무르는 것이 엄마와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엄마를 잊을까 봐, 나조차도 엄마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두려운 건지 모른다. 엄마가 죽었는데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이 잔인하다 했으면서 숲이 연둣빛으로 변하는 것에 다시 설레다니. 그 숲에 안기려 하다니. 일상의 감각을 되찾는 나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어떤 사실을 일부러 지우고, 나를 고통에 빠트릴 것만 붙들려고 한다.

 

사고 나던 날 응급실에서 보고, 바로 요양병원으로 간 엄마를 처음 면회한 날은 2월 24일 내 생일이었다. 생일이라 엄마가 더 보고 싶어 돌아서면 자꾸 눈물이 났다. "면회는 못하겠지만 병원 앞에라도 갔다 올까?" 말해준 남편 덕에 병원에 갔고, 눈물로 엄마 안부를 묻다 면회를 허락받게 되었다. 아직 엄마가 호흡기 달기 전이었다. "엄마, 오늘 내 생일이야. 엄마, 나 낳아줘서 고마워. 잘 키워주서 고마워.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랑 함께 울었다. 얼굴 보고 나눈 마지막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많은 마지막이 있다. 입관식에서 엄마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 말도 있다. 그것도 마지막이다. 사실은 그렇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둘의 차이를 '자기 비하'로 구별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국가, 자유, 이상 등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추상적인 것을 잃은 것에 대한 반응'이 애도라고 했다. 대상의 상실을 자기 비하의 감정 없이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우울증은 극단적인 자기 비하로 상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현상이라고. 정확히 그 밤의 내 태도이다. 하지만 일말의 자기 비하와 죄책감, 후회 없이 애도의 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까? 그때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저 "엄마, 전염병 끝나면 보러 갈게" 하고 말 걸, "우리 딸 보고 싶다" 하면 바로 달려가서 얼굴 보여줄 걸, 더 많이 엄마 얘기 들어줄 걸...... 후회 없이 이 시간을 지날 수 있을까. 떠나보내야 하지만 붙들고 싶기도 한 내 마음을 어쩔 것인가. 프로이트의 통찰이 주는 유익이 있다. 그에 힘입어 애도에 대해 강의도 상담도 했다. 하지만 그리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밤 "엄마, 가!" 이 말이 떠올라 다시 늪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 말이 마지막 말이라고, 그 말만이 마지막 말이라고 내게 우기겠지. 엄마와의 마지막 말은 끝나지 않았다고 믿기도 한다. 요즘 자기 전엔 밤마다 기도를 하거나, 엄마에게 같은 내용을 부탁한다. "엄마, 꿈에 나와줘. 꿈에 나와서 엄마가 지금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 이 말이 엄마와의 마지막 말일 수도 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며 아직 적응 안 된 엄마 없는 날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락가락해도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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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서 안 받는다" 비위가 약한 엄마가 앞에 놓인 음식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하는 말이 그립다. 잃었던 입맛을 찾은 후에는 "입맛이 잽혔다"라고 했다. "입맛이 잽혔다" 끝에 따라붙을 "고맙다, 복 받어라"하는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들어보면 좋겠다.

 

입맛을 잡아오는 음식이 있다. 도다리 쑥국이 입맛을 찾아주진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찾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일단은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도왔다. 통영으로 불러들였다. 한 번 먹어보지도 않은 도다리 쑥국이다. 도다리라는 생선에 여린 쑥을 넣어 맑게 끓인 국이려니. 유명하다는 집을 찾았다. 상상했던 그 맛을 그럭저럭 맛있게 먹었다. 맛집에서 나오면 왈가왈부 맛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가만 걷다 "국물이 따끈했으면 더 맛있었겠다. 국물 온도가 좀 아쉽네." 했더니 남편도 동의했다. "아, 그러네!" 

 

말로 내놓고 나니 몹시, 절실하게 아쉬워졌다. 국물은 온도지! 왜 그랬을까? 사장님의 말과 태도에선 도다리 쑥국에 대한 전문가적 자부심이 넘쳤는데. 따끈한 국물이 정말 필요했는데. 며칠 전 밥을 차려 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끓여준 따뜻한 국물 먹고 싶다." 국도 끓이고 단품 요리도 하면서 잘 먹고 먹이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왔다. 그 욕구와 휴대폰 창에서 본 도다리 쑥국이 마주쳐 손뼉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따끈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 엄마 영안실 안치하고 며칠 동안 먹은 것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따끈한 맑은 국물이었다. 

 

발인예배에 왔던 친척 언니 오빠들, 메시지를 보내주는 친구와 지인들이 한결 같이 "잘 챙겨 먹으라"였다. 살 의욕도, 먹을 의욕도 없지만 그 말들이 마음에 남아 있어 뭐든 먹으려고 했다. "여보, 뭐 먹을래? 뭘 사 올까?" 잔치국수, 콩나물 해장국 같은 걸 사서 국물만 먹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따뜻하고 맑은 국물이었다. 식도나 위 어느 부분에 체망이 걸려 있나? 며칠을 그렇게 국물만 들어갔다. 국물이 아니라 따뜻함을 원했던 거다. 내장을 타고 몸 구석구석에 따뜻함이 스며들었으면. 

 

장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조카 부부가 아이와 함께 집에 와 식사를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다 답을 못하기에 나름대로 식사 준비를 했다. 식사 후 이런저런 얘기, 결국 엄마 얘기를 하는데. "고모, 나 실은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김칫국이 너무 먹고 싶어요. 끓여 보려고 해도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고. 그 맛을 알고 끓일 수 있는 사람은 고모일 것 같은데... 말을 못 했어요." 해서 같이 울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급히 김칫국을 끓여서 담아 보냈다. 다음 날 '바로 이 맛이었다'며 눈물 흥건한 메시지가 왔다. 나도 엄마가 끓여준 따뜻한 국이 먹고 싶었던 거다. 몸과 마음을 데우던 엄마의 국물을 먹고 싶었던 거다.

 

오묘한 연상작용이다. 도다리 쑥국 - 미지근한 국물 - 따끈함을 원했었지 - 따끈한 맑은 국물 - 엄마가 끓인 국 - 엄마만이 줄 수 있은 온기. 온기가 사라진 낯선 엄마 몸이 다시 떠오른다. 식어버린 엄마 몸을 매만지다 마음의 온기를 잃어버렸다. 뱃속이 가슴이 세포 구석구석이 비어 바람이 든다. 국물로 버티던 며칠 동안 집에서도 목도리를 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 추위 때문이라 여겼다. 하루 종일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웬 목도리나고 놀렸다. 통영에서 자던 밤에는 집에 있던 채윤이가 내가 했던 목도리를 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오며 다시 놀렸다. 엄마 몸이 없어졌다는 것은 엄마만의 온기가 사라진 것이구나. 

 

결핍, 비어 있는 느낌, 텅 빈 결핍의 공간에서는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분다. 아버지가 남긴 결핍의 공간에서 불던 찬바람을 맞으며 살아왔다. 찬바람에 마음이 추울 때마다 일기를 썼다. 그 텅 빈 공간을 글로 채웠다. 그렇게 쓰다 쓰다 작가가 되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 그 결핍이 치명적인 부끄러움이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자 살아온 세월인데. 돌아보면 그 세월이 나를 만들었고, 존재하게 했고, 그 세월이 그냥 나다. 엄마가 남긴 또 다른 결핍과 냉기는 다시 내 인생 후반을 이끌어 갈 것이다. 여전히 "다른 사람이 끓여준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그 다른 사람, 그 타자, 그 국물을 끓여낼 유일한 타자, 절대 타자인 엄마가 없으니 허튼 바램으로 슬픈 나를 더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뜻한 국을 끓여 주는 그 사람이 되어어 할 시간이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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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진 2020.04.05 23:29

    몸이 기억하는
    잊혀지질 못할 엄마의 온기...🧡

  2. BlogIcon pratigya 2020.04.06 11:48 신고

    그래도...언니가 잘 드셔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남편이 어디든 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행이라니. 겨우 '삶'의 최소한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행이라니. 어디 가고 싶은 곳 없냐고 또 자꾸 묻는데 역시 가당치도 않은 질문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뭐지? 그런 게 있었나? 느낌이 없어졌는데.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경탄하는 것인데 지금 어떻게 여행이 가능하지? 앞산 진달래가 피어도, 목련이 봉우리를 터트려도, 여린 새순이 돋아나는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꽃이든 낙엽이든 계절 없는 흑백의 시간을 산다고 하는 게 좋겠다. 꽃 사진을 보내오는 벗들이 있어 '아, 그렇구나. 이런 시절이지. 생명이 움트는 때……' 그제야 목련, 개나리가 색을 입고 눈에 들어오는데, "무심도 하다. 엄마가 죽었는데 꽃이 피고 움이 트다니" 하다 이내 다시 흑백 이미지가 된다. 

 

'긴 여행 말고, 아침 일찍 출발해 돌아오는 것으로 통영 갈까? 도다리 쑥국 먹으러 가볼까?'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도다리 쑥국 기사를 보고 툭 나온 말이 1박2일 통영이 되었다. 기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통영도, 바다도, 도다리 쑥국도 그저 흐릿한 흑백사진이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면 자동반응으로 설레곤 한다. 강동 쪽에 오래 살아서 어딘가 떠날 때 지나는 첫 관문이 동서울 톨게이트였다. 딱 그 지점을 지나면 '떠나는구나!' 들뜨곤 했었지.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익숙한 휴게소들 지나는데 덤덤한 내 마음이 슬픔을 일깨우고, 잠시 스치는 슬픔도 싫어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좋고, 설레고, 행복한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의 걱정에 내가 먼저 하는 말인데.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만큼의 시간일까. 

 

도다리 쑥국 정도 상상하고 내려간 통영에서 동백꽃을 만났다. 무계획 여행이라 그야말로 발길 닿는대로 움직이다 어느 공원을 걷는데 동백숲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다. 아, 동백꽃! 걸을 기분이 되었다. "여기 좋다. 좀 걷자." 걸어야 하니까 걷는 것이 아니라 걷고 싶어졌다. 다리에 없던 힘이 들어갔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서 만났다. 흑백이 아니라 컬러다. 아니, 흑백 속 컬러라고 하는 게 더 나을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흑백 속 컬러,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처럼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봉오리들이 색을 입고 마음에 들어왔다. 예쁘다…… …… …… 슬프도록 아름답다. 살아있는 엄마와의 마지막 연결, 전화기로 함께 찬송 부르던 장면을 두고 남편이 '찬란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시간'이라고 표현했었다. 떨어져 뒹구는 동백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찬란한 슬픔이었고, 그 슬픔은 잊었던 심미감을 흔들어 깨우는 강렬한 자극이 되었다. 엄마와 연결되었던 전화기, 아니 카메라를 꺼내 이 각도 저 각도로 담았다. 아름다움이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음악치료는 음악을 선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질성의 원리'는 음악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다. 클라이언트의 정서와 음악 사이 동질성이 있어야 한다. 가라앉은 정서에 사용하는 음악과 흥분된 사람에게 쓰는 음악을 우선 동질성이라는 기준으로 골라야 한다. 우울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다짜고짜 밝고 경쾌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음악치료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모든 치료의 원리일 것이다. '공감'이라고도 한다.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이 내 마음에 공감으로 다가왔다. 동질(同質) 성의 작용이고, 바깥의 풍경과 마음의 풍경이 공명했다. 동네 흔하게 핀 꽃을 볼수록 덤덤해지고 냉담해진 것은 동질성의 원리에서 벗어난 탓이었구나. 나는 이렇게 슬픈데, 꽃천지라니. 이토록 처절한 상실의 시간에도 생명이 움트고 있다니. 자연의 섭리조차도 나를 외면하고 고립시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만 슬퍼하라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기분을 전환하라고 채근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품고 일한다. 내면과 외적 상황의 연결, 나와 너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치유를 일으킨다. 그 어떤 연결보다 슬픔의 연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연대가 가장 치유적이다. "결코 연결되지 않겠다"는 태도로 글쓰기, 꿈집단 첫 시간에 앉았는 이들이 있다. 상처로 피 흘리는 중이라고 나는 읽는다. 몇 회기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은 보통 첫 시간의 그 사람이다. 상처를 발설하고, 내 상처와 마주 앉은 이의 아픔이 공명할 때 존재가 우리를 일깨운다. “아, 연결되어 있었어!” 좋은 얘기, 다 나아져서 이제는 괜찮은 얘기, 은혜로 축복받은 간증만으로는 어렵다. 상처는 존재의 무늬라고 박정은 수녀는 말한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연결은 상처, 실패, 상실을 투명하게 드러낼 때진정한 것이 된다. 사람의 상처와 공명하며 연결된 경험이 많지만,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자연이 동질성을 드러내 주었다. 

 

어제는 4월3일. 동백꽃으로 가슴에 담긴 4.3의 날이다. 4월 3일 저녁엔 한 동네 이 집 저 집에서 동시에 곡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일상을 살던 엄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아들, 딸이 동시에 죽임 당한 날인 것이다. 그 죽음 하나하나 내가 엄마를 잃고 모든 감각을 다 잃은 그런 살아 있는 죽음의 경험일 텐데. 그 죽음에 이름도 제대로 붙여지지 않은 채, 끝나지 않은 애도로 피맺힌 슬픔이 툭툭 떨어지는 날이다. 동백꽃은 내게 4.3의 무고한 죽음들,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들의 죽음이다. 동백꽃은 내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꽃 같은 청춘이다. 작년 1월, 성폭력 상담가 교육을 받는 중 김복동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1926년 생이다. 우리 엄마는 1925년 생이다. 장례식 어간에 인터뷰와 영상들 찾아보며 먹먹한 시간을 보냈다. 그 할머님들의 삶을 마주할 때, 또 돌아가셨단 소식이 들릴 때마다 동백꽃 한 송이 떨어지는 느낌으로 가슴이 내려앉는 것은 우리 엄마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어느 죽음이 안타깝지 않고,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은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말처럼 성별, 얼굴색, 빈부와 학식의 차이, 그 모든 차이가 태양볕 아래 눈처럼 녹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라는 기쁨을 느낀다. 내가 다른 사람과 같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큰 고통과 슬픔은 우리 모두 예외없이 힘없는 존재로 태어나 힘없는 존재로 죽는다는 것을 일깨운다. 가진 것, 이룬 것,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예외 없이 힘없는 존재로 태어나 힘없는 존재로 죽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결속시킨다.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은 '죽음'이다. 통영 어느 공원에 떨어져 나뒹구는 동백꽃은 나와 연결된 수많은 죽음, 아버지와 아버님, 엄마와 김복동, 김학순 할머님, 4월 진도 앞바다의 아이들, 제주도의 이름은 모르지만 하나하나 특별하고 고유한 죽음에 연결시켰다. 슬프지만 슬픔 속에 깊은 연결이 어떤 말로도 만져지지 않았던 마음을 만져주었다. 

 

집으로 올라오기 직전 한산도를 바라보며 바닷가 벤치에 앉았다. 한결 기운이 났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가 아름답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고마웠다. 동백꽃이 공감해준 덕이다. 집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 "여보, 나는 우리집 거실과 안방 침대가 무서워. 거기서 견뎌야 할 시간이 두려워. 그럼에도 거기서 견뎌야 할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아. 피할 수 없다는 것,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렇게 말하니 다시 마음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이젠 자꾸 밖으로 나와. 이제 다른 시간도 필요해." 절대시간은 남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떤 감각이 되살아났다. 마침 앞산에 연둣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서서히 다가오는 생명의 기운이 위협적이지 않고, 고맙고, 아름답다. 6시, 클래식 FM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간, '데니 보이'가 흘러나왔고 오랜만에 음악에 귀가 열렸다. 넘어가는 해가 남긴 한 조각 아쉬움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생명의 기운을 수줍게 머금은 나무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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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장례식 이틀 후, 동생 가족과 만나 얘기 나누는 중. 회의주의자 동생이 "결국 천국에 대한 믿음이 또렷해지지 않을까"라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 말 끝에 "천국? 나는 천국이 믿어지지 않아."라고 내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가 통곡을 되었다. 예상치 못했지만 내 속에서 나온 말이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진실이다.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훨훨 타는 화장장 불에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된 엄마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 엄마 몸이 그렇게 내 눈 앞에서 사라졌는데 다시 살아난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천국? 그런 허튼 희망을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말고, 특히 위로의 말로 건네지도 마시라. 당신 엄마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 좋은 곳에 갔다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당신 엄마 죽음 앞에서 그 말 그대로 해보시라.

 

진공상태의 경험은 없다. 트라우마로 남은 아버지 죽음의 경험이 아버님과의 이별을 다르게 경험하게 했고, 그로 인해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아버지를 황망히 빼앗기고 보낸 세월과 달랐다. 두려움이나 슬픔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다시 만날 확실한 소망으로 엄마에게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고마웠어! 곧 만나!" 특히 '곧 다시 만날 것'에 대한 믿음이 견고 해지는 나날이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지진으로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의 한 면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평생 여진의 두려움에 붙들려 살던 내 인생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입에 올리지도 말고, 죽음이나 죽음을 상상하게 하는 아프고 어두운 생각은 떠올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한 생각만 하자, 고통의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자! 오래 붙들었던 무의식적인 신념을 마주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남편도 비슷한 길 위에 섰을 것이다. 아버지,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어찌 전과 같은 삶을 살며 예전 같이 신앙하고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즈음 남편의 설교 제목이기도 했던 "죽음을 짊어진 삶"은 이때로부터 나를 이끄는 한 문장이 되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책 제목처럼  죽음을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브레넌 매닝의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는 말도 조금 알아들어졌다. 오늘 여기를 산다는 것이 현존하는 부활을 믿는 믿음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죽음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present is preset'이 된다는 것도. 실제로 아버님의 죽음으로 남편은 새로운 길을 갈 용기를 얻었다. 떠나야 할 곳을 떠나기로 결단할 수 있게 되었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남편의 결정적인 진로를 열거나 닫는 것은 모두 가까이 일어나는 죽음이었다. 융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치유의 다른 이름은 성장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치유자가 되는 내적 성장을 멈추지 말아야 함 또한 깊이 새기고 있다. 멈추지 않아야 할 성장의 정점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인생 두 아버지가 인생의 오후 시간에 접어든 내게 따스하게 가르쳐주셨다.

 

이랬던 내 입에서 부활이나 천국 같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 함께 앉았던 가족들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말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어지는 삶이었다. 죽음 이후의 삶이란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고통, 몸이 사라진 엄마의 '현재'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캄캄한 구멍 속에 빠져 있는 느낌. "우리 엄마 지금 어딨지? 엄마, 엄마 엄마 어딨어?" 몸과 함께 엄마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 구멍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까만 창 앞에 하염없이 서 있는 순간도 있었다. 엄마와 행복했던 과거는 그리움으로 고통스럽고, 사라진 엄마가 그려지지 않아 고통스럽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과 웃고, 얘기하고, 남편과 걷는 오늘의 기쁨은 미래 어느 순간의 상실의 고통이 될까 하여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맞다. 쓰는 지금은, 아니 이 며칠은 그 어둔 구덩이 속 느낌은 아니다. (쓰다 보니 알게 된 것, 쓰다 보니 알게 되는 것!)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신념이나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신앙을 부정하는 것도, 믿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동도 아니었다. 감정의 표현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내 앞에서 천국 운운하며 허튼 위로할 생각 하지 마!"라는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하관예배의 설교가 상처가 되었다. 신뢰하는 목사님이고, 좋은 설교였다. 참석한 친구는 "설교가 참 좋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힘들었다. 엄마를 땅에 묻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말씀을 듣기가 힘들었다. 빈소 없는 이상한 장례식을 치른 이틀을 지나며 몸과 마음에 남은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자꾸 주저앉으려 했다. 다른 힘듦이었다는 것은 쓰다 보니 알겠다.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들을까 먼저 방어막 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찬송을 부르면 걷던 길. 어느 어른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혼자 울며 걷던 길, 아버지 친구가 했던 그 말을 누군가 다시 할까 봐. "울지 마라. 너희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냐?" 누군가 신앙의 이름으로 허튼 위로를 건네 올까 봐 금기어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정말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그 말로 인해 빼앗긴 나날, 감정은 죄 나쁜 것이라 여겨 내 감정을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며 살아온 나날,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닿는 유일한 길이라 여겨 종교적 행위 모든 것을 대체하며 살아온 나날을 보상할 자신이 있으면 한 번 지껄여 보라 하고 싶었다.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 친구 목사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아버지 친구 목사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차라리 가만히 안아주시지요. 따스한 눈길로 가만히 바라봐 주시는 게 좋았어요."

 

캐시 피터슨의 『애도 수업』에서 위로와 격려로 건넸지만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대놓고 정리했다. 그 첫 번째 말이 "그는 더 좋은 곳에 있어", 두 번째는 "그는 더 좋은 곳에서 더 잘 지낼 거야"이다. 이 좋은 말이 왜 상처가 되는지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모르겠는 분, 아직 엄마나 아버지를 잃어보지 않은 분이라면 내 이 마음을 읽어 보시라. 쓰면서 알게 된 내 마음에 귀 기울여줘 보시라.

 

믿음의 문제라면 그 부활을 믿는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두 아버지 죽음의 상실을 짊어지고 처절하게 배운 믿음이다. 부활보다 먼저 나는 죽음을 믿는다. 확신한다. 죽음을 믿는 만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그러니 저의 불신앙을 걱정하진 않으셔도 된다. 건강도 괜찮다. 잘 먹고 잘 웃는다. 잠도 곧 잘 자게 될 것이다. 

 

나는 믿는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들의 연결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드는 오만불손한 내 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우리 엄마, 한솔이, 박광혜 권사님, 구은회 장로님의

몸, 그 몸들이 다시 사는 것과,

나의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4 02:11 신고

    빼앗겼던 들에 찾아온 봄을 같이 기뻐합니다~~

 

소설가 이승우의 말처럼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다. 편집된 과거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세월이 만드는 거리는 그때 그 사건을 달리 보게 한다. 엄마 죽음이 불러낸 아버님의 죽음은 다시 개정판이 되었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 격리된 몸이었다는 것이 떨쳐지지 않는 고통이다. 아버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다시 떠올리니 얼마나 축복된 시간이었던가 싶다. 1주기 즈음 쓴 글이 있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에 실었던 '아버님의 소주잔'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아버님과 함께 한 시간이 오늘도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구나 싶다. 아버님의 소주잔은 내 마음에 살아 내 종교적 독선에 찬물을 끼얹어 일깨우고 있다. 채윤이와 현승이가 이렇게 잘 큰 것은 착한 할아버지 덕분이다. 아이를 키우며, 내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의 헌신이었다. 오늘 내 일상에 아버님의 삶이, 그렇다 '삶'이다. '죽음'이 아니고. 종말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계신다. 어제 쓴 글과 겹치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나름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잘라내고 오려붙이고 확대하고 축소하며 반복되는 기억, 편집된 과거를 한 번 더 읽어주시길. 

 

 

아버님의 소주잔

설거지를 하려고보니 그릇 사이로 소주잔 하나가 뒹굴고 있다. 배시시 웃음이 샌다. 큰 녀석이 그릇장 안쪽에 있던 걸 꺼내서 물 컵으로 사용하고 휙 던져 놓은 것일 터이다.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의 집에 웬 소주잔? 이것은 정통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인 며느리가 단 한 분, 시아버님을 위해서 마련한 아버님 전용 소주잔이다.

나는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대학(그것도 걸걸한 여대)도 다니고 사회생활도 했기 때문에 술자리, 술 문화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에서의 음주행위는 상상도 못하고 자랐다. 신혼 초에 시댁에서 잔치가 있어서 처음으로 설거지 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설거지 그릇 중에 소주잔이 여러 개 있었는데 살짝 손이 떨리는 거였다. ‘아, 내가 술잔 설거지를 하다니. 우리 엄마 알면 뭐라 하실까?’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문화충격이었다.

겉으로는 ‘술도 같이 한 잔 안 마셔주는 아들 소용없다’며 호기로우셨지만 아버님도 늘 아들 며느리 눈치를 보셨다. 착하고 소심하신 아버님은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가서 한 잔 생각이 나셔도 냉큼 주문을 하지 못하셨다. 어느 날 부턴가 식당에 가면 쭈뼛거리시는 아버님에 앞서 내가 먼저 소주 한 병 주문을 했다. 착하고 소심한 아버님의 약주사랑이 참 곱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평소 말이 없으신 분이 약주 한 잔 하시면 유쾌해지시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뿐 아니라 아버님 생신을 우리 집에서 차려야 하는 날에 장을 보면서 과감하게 소주 몇 병을 카트에 담았다. 상을 받으시고 뭔가 허전하다 싶으셨던 그 순간에 냉장고에서 나온 초록색 병에 ‘아니, 이걸 샀어?’ 하면서 좋아하시던 아버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집에 소주잔이 없어서 머그컵에 소주를 따라 드셨고, 그 이후 언젠가 아버님만을 위한 소주잔을 갖춰 놓게 되었다.

그 힘들다는 ‘워킹 맘으로 두 아이 양육하기’가 아버님의 도움으로 참 수월하였다. 아이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여성보다 더 섬세하고 살뜰하게 보살피시는 아버님으로 인해 남보다 수월하게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느 정도 독립이 되었을 때도 필요할 땐 언제든 집으로 오셔서 유치원 마친 아이를 받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집에 오셔서 방과 후의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기간이 있었다. 막내아들이 늦깎이 목회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일을 하고 밤에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검정 비닐봉지로 꽁꽁 싸인 병이 하나 들어 있다. 낮 시간에 아이들과 떡볶이 간식 사다 드시며 한 잔 걸치시고 남은 막걸리였다. 행여 목회자 아들 집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가 누가 될까봐 어찌나 꽁꽁 싸매두셨는지…….

무엇을 드셔도 척척 소화시키신다고 자랑이시던 아버님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50여일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가신 지 1년이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시기에는, 남은 우리들이 떠나 보내드릴 준비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당황해하며 혼란스러워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니셨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살가운 표현 한 번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믿음 좋은 아내와 자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신다는 식으로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는 빠지지 않으셨다. 교회 일에 열심인 어머님을 향해 ‘내가 수염 영감탱이 예수한테 마누라를 뺏겼어. 아니 영감탱이가 아니지’ 하셨다. 늦게 신학교에 가서 열정을 다해 공부하는 아들이 좋은 성적에 장학금을 받아오자 못내 아쉽다는 듯 ‘이제라도 그 머리로 공무원 시험 봐라’시며 먹고 살 걱정을 하시기도 하였다.

그런 아버님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함께한 마지막 50일 동안 내가 한 짓이 무엇이었던가. 믿음 없는 아버님이 입술로 고백하시도록 해야 한다며 속으로 얼마나 안달복달 했던지. 맘먹고 사영리를 들고 아버님과 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서는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막내며느리가 제격이라며 서둘러라하는 사랑어린 재촉도 있었다. 새벽기도에 가면 내 불안에 겨워 ‘이 땅을 떠나시는 아버님이 당신의 품에 눈뜨게 해달라’며 빗물 같은 눈물을 쏟아내곤 하였다. 설상가상 아버님께서는 심방오신 분들과 예배드리는 걸 거부하셨다. 마지막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병문안을 오셨다. 간단히 예배드리려 하는데 고개를 돌리신다. 싫어하시는 것이 역력한데 그 자리에 계시도록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버님, 한 바퀴 돌까요?’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기도하시는 분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한편으론 불안의 솜방망질이던지. 믿음, 구원, 믿음, 입으로 시인, 구원.... 아, 혼란스럽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만큼 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버님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우연인지 (그 분이 계획하신 필연인지) 연거푸 세 번 씩이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미 의식을 많이 잃으신 아버님께서는 그저 모든 것을 보호자의 판단에 내어맡기고 누워계실 뿐이었다. 마지막 예배는 막내아들이 함께 한 자리였고 예배를 마치고 찬양 한 번 더 부르자는 목사님의 제안이 있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 오셨네’를 부르는 중 ‘예수 안에 생명 있네.’ 후렴을 부르는 순간 우리 착한 아버님 가만히 이 세상을 붙들었던 손을 가만히 손을 놓고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것처럼 이 땅에서의 마지막 50일 동안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큰 육체적 고통도 없이 그렇게 지내시다 하늘 그 곳으로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의 마지막 50일은 한 없이 고요하였는데, 내 마음은 양철지붕에 소나기 떨어지듯 요란했다. 그 요란한 양철지붕 아래에는 ‘나는 믿음이 있고, 아버님은 믿음이 없다’는 일말의 의문도 없는 전제가 숨어있다. 도대체 그 근거 없는 판단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아버님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일하는 엄마’ 였던 내게 든든한 기댈 언덕이셨던 아버님께서 떠나신 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돌봐주시던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돌볼 만큼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아버님께서 내게 무엇보다 큰 숙제와 더불어 엄청난 선물을 남기고 가신 탓이다.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한 마디를 마음 깊은 곳에 넣어주시고 가신 탓이다. 마지막 50일 ‘아버님 믿음의 고백, 입술의 고백....’ 이러면서 안달복달 하던 내 마음의 깊은 동기가 진정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는지, 믿음의 기도였는지를 처음부터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의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하는 영원의 원점 같은 곳으로 돌아와 섰다.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하던 기간과 신종플루 걸렸던 주간 외에는 주일에 빠져본 적이 없다?(이걸 가지고 주일 성수했다며....), 청년 때부터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교회봉사를 했다? 미운 사람이 생겨도 ‘하나님,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예수님 코스프레를 좀 하고 산다? 그런 것들에 근거한 ‘나는 믿음 있는 사람’ 라는 확신에 겨워 살아온 날들에 씌운 거품을 비로소 확인한다.

소주잔을 보면 한 잔 하신 아버님께서 흥에 겨워 부르시던 뽕짝 멜로디가 생각난다. 또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라 하시며 부르시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소심하게 흥얼거리시던 허밍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지막 50일을 걱정 대신 사랑으로 더 잘 떠나 보내드릴 걸’ 하는 후회 같은 건 넣어두려 한다. 터무니없는 ‘자기의’의 발로로 발을 동동 구르며 보냈을지언정 아버님과 하늘 아버지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 같은 사랑의 교제가 있었을 터이니. 또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 없음에 관한 걱정이랑 집어치우고, 과대 포장된 내 믿음의 자가 평가서나 돌아볼 일이다. 다만, ‘거기서 해처럼 밝게 빛나실’ 아버님이 오늘 더욱 그리운 것이다. 소주잔을 닦다 그 투명한 유리에 어른거리는 아버님의 모습이, 생색내지 않으셔서 더 따스했던 그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입으로는 ‘하늘소망’을 그럴 듯하게 노래하면서도 마음으론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천국이다. 이 땅에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손주의 작은 손을 놓자마자, 바로 그 순간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생각하니 천국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우리네 삶과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 곳인지. 아버님과 함께 한 13년 동안 내가 필요한 것을 그렇게 주시기만 하시더니 떠나시면서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두고 가셨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소주잔에 남겨두신 사랑과 선물이 어른거린다.

 

 

 

 

 

2011년 고난주간을 지나던 어느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가벼운 증상으로 입원하셨던 아버님이 위암 선고를 받으셨다. 60대, 아니 50대 같은 70대 아버님이었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을 처음 경험한 날이다.  처음 병원에선 6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했지만, 2개월이라고 하더니 50일이 되지 않아 6월 7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50일은 그렇게 건강하셨던 아버님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도 짧은 시간이었다. 죽음은 늘 그렇게 예고 없이 우리를 덮친다. 아버님의 병든 몸에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너무 짧은 봄이었다. 하지만 그 짧았던 봄은 내게 기나긴 여운을 남기며 소위 '부활 신앙'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비로소(그렇다, '비로소'다) '부활 신앙'을 실존적으로 믿게 되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이 구절을 전율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믿어졌다. 천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백지 한 장 너머에 아버님 계신 천국이 실재하는 것 같았다. 반짝, 하고 마는 믿음이 아니었다. 더는 신학적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었다. 이생의 짐이 버거워 그려보는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실체였다. 부활과 천국이 관념이 된 것은 일찍이 재난처럼 닥친  아버지 죽음의 경험이었다. 목사 아버지의 죽음이 천국의 관념을 심어주었고, 관념에 붙들려 분열의 일상을 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음 없는 시아버지의 죽음은 '몸'의 부활을 일깨웠다.   

 

아버님과 함께 한 마지막 50일, 아버님 몸과 함께 하였다. 학교 숙제, 피아노 연습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지만 거의 매일 저녁, 모든 것을 멈추고 아이들과 함께 아버님께 갔다. 고작 가서 멍하니 텔레비전보다 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무작정 갔다. 원래 말씀이 없으시지만 더욱 조용해지신 아버님, 가까스로 농담이라도 한 마디 하시면 가슴에 금이 가곤 했다. 주방 구석으로 가 숨죽이고 울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시기 전날에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두둑이 주셨다. '고맙습니다' 늘 하던 말 외에 할 수 없는 아이들, '그래' 하시는 아버님. 아무렇지 않아서 더 특별한 고통이었다. 설마 이것이 마지막일까? 마지막 용돈일까? 설마 그럴 수 있을까? 스치듯 생각했지만 마지막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셔서는 더 빠르게 멀어져 가셨다.

 

세월이 지나야 보이는 것이 있다. 돌아보면 그 50일,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의연했었다. 겨우 예배를 가 주는 정도로 신앙생활 하셨던 아버님의 '구원의 확신'에 안달복달했고, 내내 눈물로 보낸 50일이지만 꽤 어른스러웠다. 회피하지 않았다. 야위어 가는, 두려움에 더욱 긴장되어가는 아버님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고 마음에 담았다. 한 달 남았다는 진단 후에는 손발 오그라드는, 웬만해서는 누구한테도 할 수 없는 표현을 담아 메시지를 드렸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그 문자를 확인조차 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수줍음이 많은 아버님께서는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으셨다. 특히, 그 50여 일은 거의 입을 떼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님께 평생 '사랑한다'는 고백을 제일 많이 들은 사람은 채윤이와 현승이다. 그 다음은 나다. 비록 문자였지만 생애 마지막 시간에 남겨주신 말씀이다. '사랑한다 둘째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등극시켜주셨고, '둘째 딸아, 둘째 딸아' 하고 불러주셨다. 

 

아버님과 떠나시기 며칠 전, 오후 내내 아버님 곁을 지킬 시간이 있었다. 전날 채윤이가 "할아버지 손톱이 너무 길어요" 했던 말이 생각 나 손톱깎기를 챙겨갔다. 손톱 발톱을 깎아드리고, 손을 꼭 잡아 드리고, 쓰다듬어 드렸다. 죽음 같은 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 찢어지는 슬픔에도 피하지 않았다. 어려웠던 시아버님이었다. 수줍음이 많으셔서 더 조심스러웠다. 어쩐지 하나도 어려운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그날 집에 와 긴 글을 썼었다. "아버지다, 내 인생 두 번째 아버지다." 첫 아버지를 죽음에게 뺏길 때는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렇게 당한 재난으로 평생 구멍 난 마음으로 살았지만, 두 번째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후 강의하러 나가려는 순간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 울음에 묻힌 격앙된 목소리의 남편 전화를 받았다. "어서 와, 빨리 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대로 달려가 꼬옥 감은 아버님의 눈을, 아직 온기가 남은 아버님의 손을 매만지고 붙들었다.  

 

평생 그렇게 두려워 했던 죽음을 어떻게 그렇게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아닌 착한 아버님, 우리 아이들을 살뜰히 키워주신 것에 대한 사무치는 고마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암 선고받으시던 날, 병원 바닥을 뒹굴며 "아빠, 아빠" 하며 울던 시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채윤, 현승이의 '낮의 엄마'인 할아버지인데, 아이들이 느낄 상실감을 어떻게 만져줘야 할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평생 아버지와 살갑게 지내지 못한 남편이 진 죄책감의 짐이 가여워서 나라도 잘해야겠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즈음 나는 '신앙 사춘기' 어두운 숲에 있었다. 정점을 지나 일말의 빛을 감지하고 있었던 때다. 어릴 적 아버지 이미지와 혼재된 하나님, 그리운 아버지인 듯 무서운 심판자인 듯한 하나님 이미지를 버리고 새로운 관계에 돌입하는 중이었다. 아버지 죽음이 남긴 상실감의 공간을 채우던 종교 중독을 알아채고 멈추는 중이었다.

 

위로부터의 영성에서 벗어나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걸음마 하듯 배우는 여정에 있었다. 신앙의 이름으로 초월하고 회피했던 인생의 어두운 면들을 비로소 마주하는 힘이 조금 생겼을 때, 그때 아버님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암 선고는 아버지 죽음처럼 예고 없이 닥쳤지만, 시간이 주어졌다. 6개월 남았습니다, 아니 2개월 입니다, 한 달입니다. 6개월 예상이 결국 50일이 되었지만 아버지 죽음과 견주면 예행연습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50일, 허튼 부활 신앙 같은 것으로 도망치지 않고 오직 아버님의 몸을 마주했다. 교회에서 심방 오신 분들이 싫다 하시면 휠체어를 밀고 피하게 해 드렸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만만치 않았다. 마음의 전쟁은 끝이 없었지만 적어도 아버님의 몸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아버님을 보내드린 후 부활의 소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천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 소망으로 아버지 죽음 또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아버지를 뺏어간 하나님도 화해했다.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를 아버님 죽음으로 세심하게 치유해주시는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하늘 아버지와 두루 편안해졌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사라졌다고 존재가 사라질 수는 없다. 불가능이다. 아버님은 몸 그 이상이었다. 암 환자의 몸으로 사신 세월은 짧다. 아주 오랜 시간 힘세고, 건강하시며, 좋은 손재주로 뭐든 고쳐주시고, 닭백숙도 잘 끓이셨다. 그런 몸이었다. 몸이 쇠약해졌다고 아버님의 존재가 어찌 되지는 않았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님은 존재하셔야 마땅하다. 교리에 매여 아버님의 구원을 운운하던 50여 일이 부끄럽고, 부끄러울수록 아버님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 깊이 믿어진다. 아버님이 남기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2 00:14 신고

    그 선물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한 우리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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