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이다. 40일, 한 달, 21일. 이런 시간을 문득 인식하곤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애도일기를 쓰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그 40일은 아침, 저녁, 하루, 이틀로 분절되지 않는 한 뭉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21일째 아침, 한 달 되던 아침은 조금 달랐던 것도 같고 오늘 아침도 그렇다. 괜히 21일, 한 달, 40일이 아닌가 보다. 며칠이 지났지? 날을 세는 때는 나로부터 한 걸음 빠져나올 때니까 말이다. 한 걸음씩 물러나 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아침엔 엄마 떠나고 읽었던 책을 모아봤다. 노트북 옆에 쌓여 있거나 침대나 소파 옆 탁자에 굴러다니던 것들이다. 기념사진 한 장 찍고 책꽂이에 꽂으려 한다. 

 

깨어 있는 시간이 고통스러울 때, 가장 좋은 진통제는 책이다. 책조차 읽을 수 없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동굴 속 40여 일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활자 덕분이다. 읽을 수 있었고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고 특권인가. '애도'를 다룬 여러 책을 읽었다. 이미 읽었던 것을 다시 읽기도, 새로 주문한 책도 있다. 세상의 모든 애도를 다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며칠은 미친 듯이 읽어댔다. 공부로 읽던 때와는 비할 수 없는 공감이었다. 나를 통과한 읽기란 이런 것이다. 정신분석 이론으로 복잡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설명'하는 내용조차 위로가 되었다. "이게 이런 말이었구나!" 비로소 알아듣게 된 문장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두 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한 인생 책으로 남을 것 같다.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와 스에모리 지에코의 에세이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이다. 이전에 읽었던 왕은철의 『애도예찬』에서 추천받은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나도 모르게 주문해 읽게 되었다. 무엇엔가 홀린 듯 선택한 것 같다. 아니, 선택되었는지 모른다. 읽는 내내 죽음이란 죽음을 다 찾아다니는 주인공 시즈토의 애도가 우리 엄마에게까지 닿을 것 같은 희망, 아니 이미 닿아 연결된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깊은 위로였다. 소설 한 권이 가장 어두운 시간을 버티는 촛불 하나가 되었다. 엄마 장례 후 처음으로 혼자 산책 나간 날이었다. 하염없이 걷다 지하철역 근처 성바오로 서점에 끌리듯 들어갔다. 막 나온 신간의 표지가 예뻐서 집어 들었다. 그대로 머리말과 몇 편의 글을 읽었다. 결혼 생활 11년 만에 갑자기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고이 키우는 중 아들이 사고 후 불치의 병을 얻고, 55세에 재혼한 철학자 남편은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고 있고 뇌출혈로 언어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이런 사람이 쓴 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긍정적이고, 언어가 곱다. 평소 같으면 선택하지 않았을 책이다. 나는 엄마가 "부활을 믿네 못 믿네" 하며 분노와 냉소를 오가는 중이었다.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지만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상실, 상실'들'을 이렇듯 순화된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고? 깊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소망으로? 묘한 끌림과 거부감이 함께 일렁였다. 그래서 샀다.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이며 그림책을 편집하는 저자의 앞에 서니 기복 심한 내 감정과 얕고 경박한 내 믿음이 보여 작아지기만 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내가 참 멀리 왔구나, 착한 믿음과 순한 언어를 너무도 많이 잃었구나...... 당장 이런 나를 내가 품고 가는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나도 절제된 언어로 이 시간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일기 쓰기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때로부터 시작한 '쓰기'가 나를 나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때의 '쓰기'는 뭐가 뭔지 모르는 쓰기였다. 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사라진 세상의 부조리를 유치한 질문으로 쓰고 또 쓴 것이다. 낮에는 그 무엇도 잃지 않은 아이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이처럼 쾌활한 웃음으로 살고 밤에는 울며 불며 쓰고 또 썼다. 어린애가 살자고 선택한 방식이라니, 얼마나 안쓰러운가. 아니 그것이 '쓰기'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아버지를 잃은 열세 살엔 뭘 모르고 썼다. 나는 뭘 모르고 글이 나를 썼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떠나보낸 나는 열세 살이 아니라 쉰둘이고, '치유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리님'(글쓰기 등 치유모임에서 쓰는 내 별칭)이다. 상실과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발설의 힘을 안다. 소름 끼치도록 경험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것이다. 뿌득 뿌득 포기하지 않고 쓰는 것이다. 엄마 떠난 40일, 그 어떤 생산적인 활동 없이 좀비 같은 날을 살지만 한 편씩 써내는 것에 사는 의미를 두고 쓰는 것이다. 처음 글쓰기가 상실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이었다면 나는 이제 충분히 의식화되어 나의 이야기를 쓰는,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작가이다.

 

이 글들의 시작은 나를 위한 것, 숨쉬기 위한 인공호흡의 행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에 세우는 존재들이 생겨났다. 엄마를, 아버지를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고 어정쩡하게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은 저도 그랬어요, 실은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그렇게 느낄 수도 있었던 건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뒤늦게 감정이 올라와요......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나는 아버지 죽음을 글로 풀어내게 되었고, 평생 그 상실의 경험을 쓰고 또 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내 생애 가장 부끄럽고 극복하고 싶었던 아버지 부재가 결국 나를 만들었고, 나를 구축하는 힘은 '언어'였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엄마를 잃은 사람, 아버지 없는 사람인데 쓸 수 있는 내가 써야겠다. 나라도 얘기해야겠다. 아버지 잃는 것이 엄마를 잃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고, 그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지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고 말해야겠다. 빨리 정상화되지 않았어도 된다고, 당분간 미친년이었어도 된다고, 이제라도 얼어붙은 감정 몇 조각 녹여내는 것이 좋다고 떠벌이고 싶다. 내 안에 아직 다 울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고 허용해주며 나와 연결된 당신에게도 그러자 하고 싶다.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게 과분한 행운이다. 아버지 죽음의 상실감으로 인생 자체가 실존적 피해의식 덩어리이다. 정희진의 말처럼 글쓰는 사람에게 '상처'는 권력이라고, 그 상실이 내게 힘이 되었으니 이 역시 남다른 행운이다. 상실의 역설이다. 그러니 나도 감사하려고 한다. 『언어, 빛나는 삶의 비밀』의 저자의 곱고 맑은 감사와 긍정은 없지만 너덜너덜하고 거친 언어로 빚는 감사가 있다. 스에모리 치에코, 그녀에게 언어가 빛나는 비밀인 것처럼 내게도 나름대로 소중한 비밀이다. 내 나름의 언어로 조금 더 쓰겠다. 아버지의 부재, 엄마의 죽음과 (권력이 된) 내 상실과 상처를 조금 더 쓰려고 한다. 쉰둘의 내가 열세 살 나와 손을 맞잡고 쓰는 거다. 더는 쓰고 싶지 않을 때까지 쓰고, 발설하도록 같이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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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제야 엄마의 장례식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애도일기를 시작한 이유는 엄마의 영예로운 장례식 얘길 잘하고 싶어서였다.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평생 마음으로 엄마의 장례식을 준비해왔다고 하지만 정작 준비된 것은 없었다. 죽음은 또다시 예고 없는 재난으로 밀어닥쳤다. 겪어보지 않은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정신 차리고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없었다. 빈소를 차리지 않는 가족장으로 결정한 것은 단지 코로나 때문이 아니었다. 코로나를 코로나로 부르느냐, 우한 폐렴으로 부르느냐는 가족 안에서도 입장이 달랐고 그 차이가 갈등이 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해놓고도 설마 그리 빨리, 코로나도 끝나기 전에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발인예배만 드리기로 했다. 가족끼리 드리되 교우들과 친척들 중 정말 아쉬운 분들께는 열어두기로 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오직 주일 11 예배를 기준으로 지남력을 유지했던 엄마. 엄마의 뜻을 받들자면 함께 예배했고 엄마를 사랑했던 교우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목사님 두 분과 교인 서너 분을 초대하고 예배를 부탁드렸다. 입관식 후 바로 발인예배를 드리고 화장장으로 가기로. 다른 준비는 없었다. 새벽 6시, 엄마를 안치하고 그날 하루를 '이게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멍하니 지냈다. 동생 집에서 돌아와 밤에 앉았는데 이대로 엄마를 보내다니...... 싶었는지 나도 모르게 말이 툭 나왔다. "나 내일 예배에 특송 부를래. 떠나서 다다른 사랑, 그거 부를게. 채윤아 MR 준비해줘" 남편과 채윤이 동시에 말린다. "부를 수 있겠어?"란다. 실은 나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이 아니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을 뿐. 한 소절도 못 부를 거라며 가족들이 만류하는데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나 불러볼게, 안 울고 불러볼게, 나한테 힘을 줘."

 

입관식과 발인예배에 사촌 언니 오빠들이 거의 오셨다. 엄마의 특별한 동생 삼촌과 막내 이모까지. 특송 부르기 전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말씀 드렸다. 끝까지 명료한 의식, 마지막까지 외우고 붙들고 있었던 시편 23편의 말씀을. 특히 동생 전화로 엄마와 함께 찬송 부를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말을 하다 보니, 하고 보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임종을 지키진 못했고, 엄마의 마지막 시간 격리된 채 외롭게 보내드린 것이 아쉽고 아쉽지만 전화기 붙들고 찬송 부른 시간이 선물이었구나! 돌아보니 그러했다. 엄마 귀에 잘 들리게 노래를 크게 불러야겠고, 노래와 함께 울음소리도 커져 통곡이 되니 식구들 걱정 끼칠까 걱정되고. 구석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부르던 찬송들. 엄마, 동생, 나의 마지막 시간을 연결시켰구나! 그 순간은 내장이 끊어지도록 아프고 안타깝기만 했는데, 그렇게 절절하게 연결되었었다.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로 그 얘길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리고 바로 엄마가 부르는 찬송이 예배당 공간에 울려 퍼진다. '예에수 사랑허심은...... 날 사랑허심 승경이 쓰셨네' 엄마의 노래를 받아서 내가 부른다.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힘을 내서 존재를 부풀리고 섰다. 나는 어른이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는 열세 살 어린애가 아니야. 울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불렀다. 내 노래가 끝나고, 바로 엄마 육성의 시편 23편이 울려퍼진다. 

 

예배를 마치자 동생이 앞으로 나왔다. 감사 인사와 이후 일정 안내를 하려는 거겠지. 예배 시작하자마자 내 뒤에서 누군가 주체하지 못하는 울음을 울었다. 안 봐도 동생이었다. 앞에 나와 마이크 잡았는데 표정이 환하고 여유롭다.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엄마 얘길 하며 몇 번 웃음을 유발하더니 "오늘 목사님 말씀을 듣고 혼란스러운 분들이 계실 겁니다. 목사님께서 아까 저희 형제를 6남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어, 남매 아닌가? 목사님이 잘못 아셨나? 하셨죠. 그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며 생각지 못한 얘길 꺼냈다. 6남매의 진실을 더듬어 가는 것은 그대로 엄마의 신산한 삶이었다.

 

열아홉에 결혼 한 엄마는 아들 둘을 낳자마자 남편을 잃었다. 친정살이를 하며 두 아들을 홀로 키웠다. 두 오빠들 장성하여 대학을 졸업한 이후 우리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북에서 월남한 홀아비 목사였고, 엄마가 다니던 교회로 부임했다. 그렇게 아주 늦은 나이에 아버지를 만나 동생과 나를 낳았다. 여기까지 4남매다. 엄마와 아버지가 각각 수양아들, 수양딸을 삼아 키운 오빠와 언니가 있다. 그래서 6남매다. 어릴 적부터 가족소개를 할 때 남매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늘 곤란했던 기억. 어, 오빠들과 왜 성이 다 다르지? 했던 기억. 이런 가족사 역시 어린 내게는 부끄러움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부끄러움보다는 복잡한 책임감이 앞섰던 것도 같다. 마이크 잡은 동생이 엄마의 인생을 6남매 키워드로 풀면서 모두 인사를 시켰다. 이 부분, 그 순간에도 그러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짧은 장례식 중에도 2, 4, 6남매로 정리되지 않는 혼란과 곤란이 있었다. 입관식 중에 '장남, 상주 나오세요' 하면 모두 큰오빠를 보고, 큰오빠는 동생에게 손짓을 하고. 우리에겐 익숙한 상황이라 순간순간 넘길 수 있는 정도의 혼란과 곤란이긴 하다. 그럼에도 동생의 소개와 인사로 모든 것이 당당해졌다. 엄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함으로 몸을 움츠리는 오빠와 언니들까지 한 형제자매로 환대하는 시간이 되었다. 영정 속 엄마의 어정쩡한 표정이 '웃는 얼굴'로 보였다. 

 

엄마 장례식을 상상할 때 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장례식 안내 모니터에 형제들 이름이 뜰 때 어떨까? 내 지인들 중엔 '남매'로만 아는 사람도 있는데. 자녀들의 성(姓)은 각각 다 명기해야 할까? 큰 걱정은 아니었으나 소소한 곤란함이었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는 더 큰 마음의 짐이었을 것이다. 평생 품고 산 곤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당신의 인생을 복기하고 또 복기하는 것 같았다. 어릴 적에 내가  아팠던 얘기, 아버지 돌아가시고 막막했던 얘기, 결론은 늘 기도로 고난을 이겨냈다는 것이지만. 같은 얘기 하고 또 하는 게 귀찮아 나는 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정리하던 엄마에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겠는가. 어느 날 단둘이 있을 때 엄마가 그랬다. "내가 두 아들한티 너머 미안허다. 그때는 젊고 은혜도 받기 전이고 너머 많이 때리고 쌀쌀맞게 키웠어. 어트케 그렇게 모질게 키웠을꼬......"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남매, 사 남매, 육 남매 엄마로서의 인생은 어떤 것일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엄마도 혼자 걱정했을지 모르겠다. 매끈하지 못할 남매, 사남매, 육 남매 엄마인 당신 장례식을. 헌데 동생의 따뜻한 소개와 인사로 우리 모두 당당해졌다. 엄마가 남긴 우리가 모두 당당해지며 누구보다 엄마가 영예로워졌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엄마, 엄마 인생에 부끄러움이란 없어! 

 

아버지 장례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장례식 주변 어느 구석에서 찔찔 울던 남매, 누구 하나 따뜻하게 돌봐주는 어른이 없었다. 다들 조용히 "아이고 불쌍해라" 혀를 끌끌 찼겠지. 기껏 들은 말은 "울지 마라,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느냐"였고. 그랬던 남매가 어른이 되어 엄마 장례식의 주체가 되었다. 형식적인 상주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순간순간 화평을 이루는 선택을 했다. 무엇보다 엄마를 영예롭게 보내드렸다.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이 감동적인 후기를 전해온다.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생애 가장 감동적인 장례식이었다.' 나의 지인들에겐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해서, 우리 엄마의 영예로운 장례식을 자랑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육 남매의 엄마, 사 남매의 엄마, 남매의 엄마, 내 엄마.

내 엄마의 떠나는 길이 아름다웠다. 살아온 날들의 열매이며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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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pratigya 2020.04.21 02:49 신고

    아팠던 한 시대를 안아주고 가신 어머니 덕분에 저도 글을 쓰고 있네요. 언니..정말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너무 감사해요. 이 힘든 길을 멈추지 않고 와주셔서요..

몇 년을 두고 언제 접나, 언제 접나 하던 일을 접었다. 키보드며 무거운 악기를 들고 옮겨 다니는 프리랜서 음악치료사 생활이 15년쯤 된 것 같다. 차츰 일을 줄이고 있었고, 4년 전쯤에는 그 해를 끝으로 그만 둘 생각이었다. 가족 상황이 달라지며 하던 일들을 계속해야 했다. 계속할 뿐 아니라 더 일을 늘려야 할 상황. 악기 무게에 더해 심리적인 부담을 더 떠안는 선택을 했다. 시작부터 돕고 관여했던 한 기관에 급여 인상을 요청했다. 아이들 교육 외에 다른 일을 더 할 테니 급여를 올려달라고 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부탁이었고,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당시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몇 년 그렇게 유지해왔다.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 들었어야 했는데 무리를 하니 다음 해 오십견이 와서 고생을 했다. 오십견 지나가니 테니스 엘보라는 팔꿈치 쪽 질환이 오고. 결국 작년까지의 계약을 마지막으로 치료교육을 접기로 했다. 한 곳만 남기고! 가장 먼저 정리하고 싶은 곳이었으나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엄마 장례식 마치고 바로 수업 계획을 의논하다 그만둘 마음이 생겼다. 급여 인상 이후 몇 년 동안 미세하게 쌓인 서러움이 복받쳤다. 대놓고 갑-을이 되진 않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사이였지만 어쩐지 늘 찜찜한 감정이 남곤 했었다. 다시 그런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사무쳤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살지, 하는 짧은 질문이 스치면서 빠르게 결정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살지? 의미를 묻는 질문이 올라올 때가 있다.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요일과 일정에 따라 정해진 일을 하며 산다.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자발적으로 선택해온 오늘이기에 큰 불만이 없다. 잘 굴러가는 일상이다. 그런데 잘 굴러가는 일상의 바퀴에 '무의미'의 작은 막대기가 하나 끼면 덜그럭거리거나 잠시 멈춰 서기도 한다. 혼자 걷는 중,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특별한 이유 없이 허무의 바람이 불 때가 있었다. "이게 사는 건가? 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본향이 그리워요, 주님!" 하지만 웬만하면 일상은 다시 굴러간다. 잠시 멈춰 서게 했던 무의미의 막대기는 굴러가는 바퀴의 힘에 휙 날아가고 만다. 일상의 바퀴는 웬만하면 굴러가는 관성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 텅 빈 공허 속으로 무의미의 강물이 들이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이게 사는 건가? 의미가 찾아지지 않아도 관성을 따라 그럭저럭 흐르던 일상을 거스르는 강한 물살이 밀려오는 것이다. 허무의 강물이 밀려와 내 몸 하나 부지할 수 없을 때, 그간 붙들고 막아내고 견뎌내던 것들이 마구 떠오른다. 무의미라는 실존의 압력을 견디며 몸으로 누르고 있던 튜브공들이 무력하게 떠오른다. 어쩌어찌 견뎠던 것들이 더는 참아지지 않는다. 꽉 쥔 손에 힘이 빠지면서 하염없이 위로 떠오른다. 그렇게 떠오른 것들을 뜰채로 건져내 싹 갖다 버리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들이 남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몇 년을 두고 그만둬야 하는데, 이러다 몸이 완전 망가질 텐데, 하다 또 허접한 이유를 찾아 나를 설득해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는 나를 설득할 수 없게 되었다. 버티기 위해 온갖 좋은 이유를 갖다 댔지만 실은 나를 착취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포장하기 위해 애쓸수록 자기 연민에 빠지고, 남모르는 분노를 독처럼 몸에 쌓게 된다.

 

그러니 가끔 만나는 무의미의 강, 허무의 강은 나를 나답게 하는 기회인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남편은 평생 해보지 않은 선택을 했었다. 결혼 후 한참 만에 신학교에 간 것은 평생 꿈꾸던 소명에 따르는 일이었다. 신학교를 마치고 한 3년 전임 목회를 하면서 인생 가장 행복한 시간,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비참한 시간을 보냈다. 평생 꿈꾸던 삶, 목회라는 이름으로 청년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행복했지만 그것은 목회자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평생 꿈꾸던 '행복'에 방점을 찍고 많은 부조리한 것들을 견뎌내고 있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사임을 결정했다. 젊은 날부터 다니며 교회의 희망을 보았던 곳이고, 우리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던 곳이다. 그런 곳을 떠나겠다고 결단했다. 단지 교회를 사임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 자체를 접겠다는 선택이었다. 목회자의 삶이 이런 것이라면, 그만두겠다는 생각이었다. 다음 행보는 백수, 이런 선택을 했다. 아버님이 떠나시고 남편 가슴에 밀려오는 허무의 강이 이끈 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 극적인 사건들이 있었고 결국 지금까지 목회를 지속하고 있다.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 인생에 길이 남을 선택이다. 선택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 아빠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애쓰며 살고 있다. 많은 것들이 버겁지만 다 의미가 있으니까 견딘다. 불편한 관계를 웃으며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상처주는 사람을 내치지 못하고 둔다. 내 몸이 다 부서져도 가족을 위하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견딘다. 다 의미가 있으니까. 가끔 허무의 강이 들이닥칠 필요가 있다. 그 모든 '의미'들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무게를 달아보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회피하지 않는 것이 먼저다. 그 강물을 온몸으로 맞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일 것이다. 공허와 허무에 오롯이 머물러야 한다.

 

엄마가 떠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확인되는 것은 빈자리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다. 이 코로나 사태가 더욱 그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일로 도피할 수도, 사람을 만날 수도, 맘 편히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그저 여기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 보니 많은 것들이 의미의 무게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조금 충동적인 결정이긴 했지만 마지막 남은 음악수업을 접은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속이 후련하다.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이 남긴 실존적 물음 앞에서 얻은 소중한 답이다.

 

그러고 보면 나이 50의 중년, 그때 맞는 부모의 죽음이란 기가 막힌 인생 타이밍이다. 하나님의 작품일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죽음이 허무의 강물로 밀려온다. 우리는 삶을 묻는다. 삶의 의미를 묻는다. 중년은 원래 그런 질문을 하는 시기이다. "내가 뭐하고 산 거지? 그렇게 애써서 가르쳐 놨더니 이 자식들이 지 혼자 큰 줄 아네. 내 인생은 뭐야?" 빈둥지 증후군으로 방황하는 시기이다. 카를 융을 비롯한 심리학자와 영성가들이 중년의 위기는 영적인 기회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뭐하고 산 거야? 묻는 그 시기에 만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너 앞으로 어떤 의미를 건지며 살래?' 영적 초대장을 받는 것이다.

 

인생은 원래 그렇게 허무한 것이었어, 이제껏 소중하게 여겨온 것들을 허무의 강에 한 번 띄워 봐, 가벼워 떠오르는 것들은 죄 건져 던져버려, 영원한 것만 붙들고 사는 것 어때?  

이런 초대가 아닐까. 상실과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회복과 치유란 그 경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로 인한 깊은 상실감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회복과 치유란 그 경험을 안고 '어떤 새로운 자리로 가서 사느냐'라고 한다. 충분히 준비되었다 자부했지만 막상 엄마가 떠난 시간은 예상과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나도 엄마를 떠나보내기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씻겨지지 않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게 되겠지. 그저 그렇게 무의미한 슬픔을 안고 살고 싶지 않다. 엄마 잃은 빈자리에 자주 생의 의미를 달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가볍게 버려질 것이라면 기꺼이 내던져 버릴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시작은 좋다. 이제 그 무거운 키보드와 악기들을 처분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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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외할머니 장례식 예배 말이야. 참 좋았어. 나도 많이 울었어. 그런데 엄마한테 이런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나 실은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더 났어."

 

현승이의 말이다. 현승이에겐 엄마 같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누구보다 상실감이 컸을 텐데 얼음처럼 그대로 얼어버렸었다. 울지도 않고 멍한 표정으로 장례식장을 빙빙 돌았다. 이후에도 슬픔, 그리움, 그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나도 "할아버지 얼굴이 생각이 안 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어느 날 마트의 장난감 코너에서 가만 서있는 현승일 봤다. 늘 하던 장난감 구경이 아니었다. 어느 할아버지와 아이였다.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장난감을 사주시는 모양. 물끄러미 서서 바라보고 있는 현승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엄마가 안 사주는 장난감 대신 사주시던 할아버지, 현승에게 흔하디 흔한 일, 장면이었다. 나는 아이 마음을 알겠는데, 할아버지 얘긴 거의 꺼내는 일이 없었다. 그랬던 현승이가 처음으로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단다. 그리고 내게 미안해했다. 

 

당연히 괜찮다고 말해줬다. "엄마도 외할머니만 보고싶은 게 아니라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현승이처럼 할아버지도 보고 싶어 눈물이 나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모든 죽음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어쩌면 모두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건 현승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리움, 사랑 같은 거라고 말해줬다. 

 

어릴 적 엄마를 잃은 청년이 있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다. 엄마 장례식 마치고 위로하는 메시지가 왔다. 특별히 위로가 되었다. "이제 나도 엄마 없는 사람이니까 더 친하게 지내자"라고 답신을 보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엄마 없는 존재가 된다. 모두가 가야 할 길이다. 그 점에서 공평하다. 공통점이 있을 때 우리는 연결되었다고 느끼고 더 많이 안도하게 된다. 모든 죽음은 연결되어 있고, 죽음은 우리를 연결시킨다.

 

지난 월요일에 전주에 다녀왔다. 캐나다에서 몇 년 지내고 온 남편의 벗, 내게도 좋은 벗인 부부와 그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전 날 저녁에 갑자기 약속을 잡았다. 아침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친구들 단톡방에 부고가 올라왔다.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조문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데 장례식장이 전주다. 이런 뭉클한 우연이라니! 잠시 가서 친구를 보고 왔다. 텅 빈 빈소를 지키던 친구가 첫 조문객이라며 반가워한다. 길지 않은 시간 마주 보고 눈물 글썽이며 얘기 나눴다. 어머니를 7년 전에 먼저 보내드렸다며, 어머니 얘기로 또 눈물이다. 실은 사이가 서먹했던 친구이다. 『신앙 사춘기』에 썼던 '단톡방 탈퇴 사건'을 유발했던 친구다. 이후 다시 만나긴 했지만 썩 편하지는 않았다. 비닐 덮인 텅 빈 상이 즐비한데, 한 구석에 앉아 나누는 대화가 마음을 채웠다. 한없이 가깝게 느껴지고 깊은 위로가 되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 상실감이 우리를 연결시킨다.

 

세월호 6주기이다. 아침부터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세월호 막말로 진저리가 쳐지는 김진태가 낙선해서 기쁜데, 선거 결과가 기쁜데도 자꾸만 가라앉았다. 내내 누워있다 오후엔 걸으러 나갔다. 지나치게 걸었다. 분당천을 지나 탄천까지 걸었다. 다리를 절룩이며 돌아왔다. 해가 지는데 또 눈물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많은 이들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 엄마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공평함으로 수용한다 쳐도. 자식 잃은 부모가 되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눈을 뜨고, 자식이 빠져가는 걸 하루 종일 방송으로 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가혹함이다. 그 6년을 어떻게 지냈을까. 이 엄마들은. 다시 눈물이 난다. 100년에 한 번 나올 국회, 진보정당이 얻은 힘으로 진실을 밝혀주길. 진실만이 이 엄마들 피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   

 

전주에서 장례를 마친 친구가 잘 마쳤다는 소식을 친구들 방에 올렸다. 눈물 나면 울고, 아버지 보고 싶으면 아버지 부르라고, 나도 아직 그러고 있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우리들, 함께 우는 것 말고 다른 헤어날 길이 있을까. 함께 울고, 그리고 세월호는 진실이 밝혀지고 처벌 받을 자가 받을 것을 받아야 한다. 치유는 눈물과 진실이다. 오늘만큼은 모든 연결된 죽음, 진도 앞바다 꽃다운 아이들, 사랑을 위해 눈물이 나오는 대로 울겠다.

 

어쩌자고 [전기현의 세음]에선 포레의 레퀴엠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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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4.16 23:54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larinari 2020.04.18 10:35 신고

      눈물이 나면 울자. 같이 울자. 눈물 끝에는 다른 우리가 있을 거야. 분명히.

 

 

 

2000년 생 채윤이가 생애 첫 투표를 했다.

저렇게 간절히 선거권 행사의 날을 기다리는 아이가 있을까 싶었는데.

2020년 19대 총선에서 어마어마한 한 표를 행사했다.

 

2002년 대선 때 채윤이 나이 세 살이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 수민네로 개표방송을 보러 갔다.

방송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추운 겨울이 춥지 않았다.

세 살 채윤이가 우리 앞에서 춤을 추며 걸어갔다.

"창 바꿔보니 창 바꿔보니 희망이 보인다 창 바꿔보니 창 바꿔보니 노무현 대통령"

"두우 번 생각하며언 노무현이 보여요오~"

노래와 구호를 똑 부러지는 발음으로 따라 하던 채윤이.

그 날 그 밤의 벅차오르던 마음, 우리 채윤이의 춤과 노래 잊을 수 없다.

때가 때이니 만큼 식탁에서 그때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현승이가 끼질 못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현승아, 너도 있었어! 엄마 뱃속에 현승이 있었어!"

6개월 태아로 현승이도 함께 한 시간이었다.

아, 그리고 생각해보니 민주당 경선 기간에 마음이 절박하여 금식기도를 했었다.

얼마나 절박하면 임산부가 금식기도 했다고 떠벌이던 기억도 새록새록.

 

2004년 탄핵정국 때 아기 현승이 부모님께 맡기고 다섯 살 채윤이 데리고 광화문에 갔었다.

"타낵꾸요, 민쥬수호, 타낵꾸요, 민쥬수호!" 
제 성격대로 가열차게 외쳤다.

돌아오는 길에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채윤이가 아빠 어깨에 올라앉아 화통 삶아 먹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젖혔다.

"갓써 제에자 사므라 셋쌍 마는 사람드를 셋쌍 모오든 영호니 네게 달련나니~~~이"

어린 채윤이와의 잊지 못할 몇 개의 장면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계셨다.

 

2020년 총선.

채윤이의 정치적 입장은 이제 엄마 아빠와 같고 또 다르다.

뉴스를 스스로 보고, 책을 찾아 읽고, 역사를 공부하고, 제 마음에 끌리는 곳으로 표를 던진다.

혹여 칸을 밀려서 찍을까 손이 떨렸다며 나와서도 "잘못 찍은 건 아니겠지?" 걱정을 한다.

 

내 절박함과 초조함도 채윤이와 다르지 않다.

2002년 대선 때와 다르지 않고, 내 인생 첫 선거 87년 대선 때와도 다르지 않다. 

선거는 내게 간절한 기도다. 

 

사전 투표로 먼저 기도하고, 오늘 하루도 기도의 마음으로 보낸다.  

"잊지 않겠습니다" 가방에 붙이고 다니던 약속을 떠올리며,

4월 16일을 기억하는 기도와도 한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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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떠난 지 한 달이다.

 

그리고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던 월요일이 내 생일이었다. 사순시기를 특별한 기도의 시간으로 보내려 했었다.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코로나로 인한 우리의 아픔을 품어야지 싶었다. 아이들에 생일 선물로 화분을 사주기로 해서 화원에 갔었다. 커다란 해피트리 화분을 봤는데 어쩐지 우리 엄마 같았다. 엄마가 공들여 키우던 벤쟈민 화분이 있었다. 좀 시들라치면 잎을 닦아주고 매만지며 엄마가 기도를 했다. 그럼 또 어느새 싱싱해졌고, 키가 천정 가까이 자랐다. 자칭 타칭 죽어가는 화분도 기도로 살려내는 여인이 되었다. 바로 그 벤자면 화분과 닮을 커다란 해피트리였다. 마음으로 생각했다. 사순시기를 기도로 보내야지, 부활주일 즈음이면 코로나도 끝나고 병원의 엄마와 마음껏 면회할 수 있을 거야, 두 달이라고 했으니 부활주일 지나면 골절된 손목이 꽤 붙었을 거야, 부활주일과 함께 아픔이 끝날 거야, 그때 와서 저 화분을 사야지, 이 사순시기를 잘 보내고 엄마 닮은 저 해피트리 사러 올 거야! 

 

시간이 이런 거구나, 한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달라지고 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앞산의 연둣빛의 생명을 느낀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덜 힘들다. 부활주일 영상예배를 드렸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 첫 찬송을 부르는데 마음이 갑자기 냉랭해진다. 성경을 읽고, 설교가 시작됐는데 부활, 부활, 부활...... 이 단어를 들을수록 설교가 마음에서 멀어진다. 더욱 차거워지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웬만하면 남편의 설교에 마음이 움직이고 은혜를 받는다. 헌데 진행될수록 귀를 막고 싶은 심정. 냉소, 차가웠던 마음이 어느 순간 분노로 끓기 시작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 옆에 아이들이 앉아 있어서 내색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겨우 설교를 견디고, 기도시간 다시 눈을 감고 화를 다스리고 다시 찬송을 부른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참 좋아하는 복음성가다. '살아계신 주'. 그런데 누가 이렇게 가사를 이상하게 바꿔놓은 거야. 찬송가로 들어오면서 가사가 많이 바뀌었다. 화가 치민다.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가슴속에 넘치는 확신 우리의 가는 길에 소망 넘치네' 이 가사를 지날 때 분노가 극에 달했다. 눈물이 났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예배를 마치고 점심 준비하는데 남편이 곁에 와 표정을 살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화가 나." "왜 화가 나?" "그러게, 부활주일이라 화가 나."라는 말이 나왔다. 부활주일이었고, 부활에 대한 찬송을 부르고, 설교 주제가 부활이어서 화가 났다. 부활을 믿으라고, 소망을 가지라고 강요받는 것 같았다. 그 외 더 긴 설명은 어렵다. 장례식 며칠 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천국이 믿어지지 않아."라고 말했을 때처럼 황당한 상황이다. 부활주일이라 화가 난다니, 가족들은 그때처럼 황당할 것이다. 나는 이런 내 마음이 괜찮다. 갑작스런 감정 변화가 다소 당혹스럽긴 하지만 허용할 수 있다. "그러면 못 써!" 하는 목소리는 전처럼 크지 않다. 느낌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맘에 들어하시는 느낌이 따로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느낌에는 윤리성이 없다'라고 내 입으로 수백 번 했던 말을 내게 들려줘야 할 시간이고, 조용히 허용해주고 있다. 부활의 예수님도 그렇게 들어주실 줄 알고 있다. "그렇구나, 나의 부활이 멀게만 느껴지는구나. 엄마가 그립지? 얼마나 그리운지, 얼마나 슬픈지 알겠구나. 화내도 괜찮아. 진실로 부활을 믿고 싶고, 피부로 닿는 위로를 얻고 싶은 마음의 표현인 걸 내가 왜 모르겠니? 괜찮다. 네가 편하게 화를 내주니 오히려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좋구나. 얼마든지 더 화내고 울어도 된다. 내가 다 들어줄게."

 

상실과 애도는 짝이다. 상실을 벗어나(온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는 것은 애도를 통해서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젠 정설이 되었다. 충분히 슬퍼해야 떠나보낼 수 있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이 시대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 불리는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일찍이 상실을 수용하는 다섯 단계를 정리했다. '부정(그럴 리 없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 분노(왜 나야, 불공평해, 이럴 수는 없어!) - 타협(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면 이제 정말 제대로 살게요!) - 우울 - 수용'이다. 꼭 이 순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애도를 위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 다양한 감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뇌졸중으로 9년 간 마비된 몸으로 살아가던 퀴블러 로스가 죽기 한 달 전에 작업을 마친 마지막 책 『상실 수업』은 더는 이론이 아닌 자기 경험의 고백처럼 들린다. 엄마 없는 빈 자리를 마주하는 낯선 시간을 통과하며 읽으니 더욱 그러하다. 마치 내게 들려주려고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책이 다가왔다. 슬픔, 공포, 아픔이나 외로움보다 분노가 먼저 다가오면 더 강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분노가 슬픔에 앞설 수 있다. 나 역시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이란 제목으로 교회 문제로 상실감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만나기도 했다. 애도의 시간, 충분히 슬퍼하라고 하는 말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충분히 분노하라! 분노가 논리적이거나 타당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퀴블러 로스의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분노는 곧 저항의 힘이다. 다시 말해 상실의 공허감 속에 잠시나마 붙잡을 수 있는 하나의 닻이 될 수 있다. 처음에 슬픔은 마치 바다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내 누군가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 누군가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주변에 없는 사람일 수도, 사랑한 이가 죽은 후 태도가 달라져버린 사람일 수도 있다. 갑자기 큰 구조물이 올라온다. 그들을 향한 분노가 바로 그것이다. 분노는 드넓은 바다 위로 당신과 그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다리가 된다. 그것은 지지대와 같은 것이 된다. 분노의 힘으로 만들어진 그 연결선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우리는 분노를 느끼는 법보다 억제하는 법을 더 많이 알고 있다...... 화를 허락하면 할수록 마음속 깊이 감춰진 감정들을 더욱더 찾게 된다. 분노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그것을 다스리면서 숨어 있던 또 다른 감정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통은 상실을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분노의 강도가 감당하기 버거울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잃어버린 사랑의 양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반대편 출구로 나오게 될 것이다. 고통은 가라앉고, 상실의 감정들은 다시 형태를 바꾼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말라. 심지어 당신 자신이라 할지라도.

 

깔깔 웃다 갑자기 눈물이 날 때도 있고, 한 없이 내려앉던 마음에 불끈 힘이 들어갈 때도 있다. 부활주일 찬송 하나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기도 한다. 이렇듯 예측불가의 감정 상태에도 당황하지 않으려고 한다. 더욱이 나를 비난하지 않으려고 한다. 판단하지 않고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느끼려고 한다. (나 잠시 미친년이야, 엄마를 잃었는데 미치지 않는 년이 미친년이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칼끝이 내게로 향할 때는 죄책감에 끌려다니게 된다. 이 역시 '이렇게 느끼지 말자'라고 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느끼고 지나가게 둘 생각이다. 그러니 당신 옆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냥 느끼도록 두라. 감정이 오락가락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기 바란다. 다른 것을 느껴라 강요하지 말고, 그만하라고 재촉하지 말기를. 충분히 머무르다 반대편 출구로 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고통에 빠진 당사자이다. 

 

찜해 뒀던 해피트리를 생각하면, 그때 그려두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생각하면, 이렇듯 멀기만 한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다 보면 화가 나고 슬프다. 사순 시기를 기도로 근신하며 보내면 내가 바라던 그 부활을 보상으로 받을 거라 생각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 자주 화가 났지만, 엄마 죽은지 한 달 만에 맞는 부활주일이라 특별히 화가 난다. 분노를 위한 시간이다. 분노에게 내어준 시간 뒤에는 무엇인가 또 다가오리라. 어떤 미친 감정이 됐든 피하지 않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겠다. 달리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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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꿈을 꿨다.

 

캄캄한 골목길을 통해 집으로 간다. 모퉁이를 돌아 몇 발짝 올라가서 우리 집이다. 작고 깔끔한 느낌이 일본식 집을 연상시킨다. 조금 낮은 곳으로 마주 보는 집이 있다. 우리 집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 동네다. 그 집에 사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엄마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 엄마를 존경한다는 그런 비슷한 얘길 한다. 엄마가 동네에서 대체로 그런 평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집에 들어갔는데 한복(옷고름 없는, 브로치로 고정시키는 단출한 한복)을 입은 엄마가 노트북 앞에 있다. '선교'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잘 안 써진다고 한다. 낯설게 젊고, 말이 없고, 지적인 느낌의 엄마다. 나는 아까 젊은 여자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엄마 때매 챙피해 죽겠어"라고 말한다. 엄마에 대한 호평이 좋다는 뜻인데 조금 장난스럽게 돌려서, 꼬아서 말하는 것이다.

 

잠을 깬 후에 꿈 속 마지막 말에 붙들렸다. 챙피해 죽겠어! 꿈 자아의 마음, 본의는 그게 아니다. 자랑스러워, 라거나 엄마 인기가 좋으니 덩달아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좋은 걸 좋다고 하고, 자랑스러운 걸 자랑스럽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될 것을. 왜 그러지 못했을까. 꿈속의 나는!(의식의 나도! 왜 그러지 못할까) 지난번 꿈에서는 시간이 별로 없는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었고, 나는 또 예의 그 장난스러운 태도로 설레발 하다 엄마가 하고 싶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엄마를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는 태도가 비슷하다. 감정을 있는 대로 느껴 머무르지 못하고 가벼운 농담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비슷하다. 평생, 특히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내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였다. 귀나 눈의 감각이 둔해져서 못 알아듣고 실수하는 엄마를 보며 깔깔거렸다. 실수들이 정말 귀엽고 재밌기도 했지만, 몸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노화 증상을 거부하고 회피하고 싶은 방어였다. 희화시키고, 농담과 유머로 대체하는 것이 내겐 가장 익숙한 방어기제이다. 

    

'엄마 때매 창피해 죽겠는' 느낌은 철들기 전 나를 지배하는 일상적 감정이었다. 엄마가 늘 창피했다. 버스에 타서 자리 맡기 위해 빛의 속도로 움직이던 엄마, 자리를 맡고 앉아 "신실아" 엄마의 큰 목소리. 물건 사러 가서 집요하게 깎기. 이런 창피함이야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너무나 흔한 부끄러움이지만 웃음만 나올 뿐이다. 제 부모가 하는 모든 것에 짜증내고 창피해하는 것이 사춘기 증상이니까. 그런데 어쩐지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사춘기, 청소년기 다 지나고 나름 성인이라고 자부하는 때였다.

 

엄마에겐 철야기도가 일상이었다. 매주 금요일 철야기도 외에도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 9월엔 한 달 내내 철야였다. 대학생 때 작은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전담 목회자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주변에 있던 교회 주일학교 교사 연합회 모임에 나가 찬송 율동 레크리에이션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그들과 어울려 놀며 늦은 시간 함께 동네를 걷고 있었다. 저 멀리 옷 무더기 같은 엄마가 걸어왔다. 겨울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갈 때는 옷을 입고 또 입고, 그 위에 또 입고는 하셨다. 엄마가 벗어 놓은 옷이나, 입고 움직이는 모양이 다를 바 없이 그냥 옷 무더기였다. 밖에서 엄마를 만나면 '창피함 관성'이 있어서 일단 흠칫하곤 했지만 철이 든 때였다. 흠칫, 이후에는 반갑기도 했다. 가까이 오면 장난 치며 아는 척하려고 했다. 할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멀리서 걸어오는 엄마를 보고 "저 할머니 분명히 철야기도 가신다." 하며 웃었다. 아무렇지 않았던 마음이 순간 요동치며 고개를 돌리고 엄마를 지나쳐 버렸다. 창피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그 장면은 왜 이리 지워지지 않을까.

 

엄마가 창피한 이유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엄마의 늙음이 무엇보다 창피했다. "너네 할머니 왔다" 이런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동생은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 나이 마흔 다섯에, 동생은 마흔일곱에 태어났다.) 동화 같은 데서 읽으면 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늙어서 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늦게 낳은 딸이라 나름대로 예쁘게 키우려 했던 것 같은데 뭔가 늘 이상했다. 분수 머리가 유행하던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묶어준 머리는 어딘가 친구들과 달랐고 어설펐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엄마의 사명은 오직 남매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콩나물 장사를 허드라도 서울로 가야겄다, 애들 공부시키는 방법은 서울로 가는 거 밲이는 옶다" 하고 무작정 이사를 결정했다. 교육비와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 돈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살았다. 욕구가 많고 다양한 나는 그런 엄마가 힘들었고 창피했다. 대학에 들어간 딸에게 정장 한 벌을 사주지 않았다. 대학 신입생 때 종로 어느 구두가게를 지나다 노란 구두를 봤는데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몇 날 며칠 엄마에게 사달라 졸랐다. 엄마의 뇌엔 다음 학기 등록금밖에 없었는데 노란 구두 같은 것은 입력이 될 리 없지. 결국 내가 모은 돈으로 노란 구두를 사고야 말았지만  발이 아파 몇 번 신지도 못했고.

 

가장 답답한 것은 신앙생활이었다. "주일에 물건 사면 안 된다. 새옷을 사면 주일에 먼저 입어야 한다. 교만하지 마라. 니가 잘나서 된 것 아니다. 다 하나님 은혜다. 믿는 사람이 미운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너 기도 안 허지?" 작년에 낸 『신앙 사춘기』에 '종교중독'이라 언표 했다. 그렇게 이름 붙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 지난한 싸움의 시간이었던가. 젊은 날엔 엄마와 얼굴을 맞대고, 이후엔 내 마음 엄마 목소리와 싸웠다. 『신앙 사춘기』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런 엄마를 팔아먹은 대가다. 그 글을 한 편 한 편에 담긴 눈물은 엄마 팔아먹는 딸년의 참회의 눈물이기도 했다. 평생 가장 벗어나고 싶고 극복하고 싶었던 엄마, 엄마의 종교 중독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그 사연을 팔아 글을 썼다. 가장 부끄러운 건 내 안의 종교 중독이었건만 '종교 중독자'라 이름 붙여 엄마를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그 책이 나올 즈음 엄마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리고 설명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엄마의 귀와 눈과 뇌는별 일 없다, 다들 건강하다, 잘 지낸다는 소식으로 족했다. 아니 이전부터도 엄마에게 출간 소식을 알리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내게는 목숨 같은 일이지만 엄마에겐 별 일이 아니다. 엄마에게 유일한 책은 성경이고, 평생 의미 있는 활자란 성경과 찬송 뿐이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엄마가 1년에 한 번, 어떤 때는 그 이상 성경통독을 한다는 것이 차라리 기적 같은 일이다. 성경 외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인생이다. 

 

나도 엄마가 되었고, 어떻게 해도 아이에게 부족함의 공간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엄마 됨이 아이들에게 결핍과 상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아픔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엄마인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엄마가 내게 했던 정반대로 한다 해서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엄마에게 느낀 결핍감에 매여 엄마 노릇할수록 아이와는 더 멀어진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이런 걸 받아본 적이 없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냐" 최악의 말이다. 이걸 채워주느라 저쪽에 구멍을 내고, 저 구멍 메우느라 여길 놓치는 것이다. 엄마보다 많이 배웠고, 합리적 신앙을 가졌고, 센스가 넘치더라도 아이들의 모든 욕구를 채워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원죄는 결핍감의 대물림인지 모른다. 결핍감이 낳는 갈망, 깊은 갈망, 무엇으로도 채워질 것 같지 않은 갈망. 다시 말하면 부모는 창피한 존재이다. 어느 부모랄 것 없이 부모는 자식의 부끄러움이다. 마음공부하고 일을 하며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 엄마의 모든 것이 창피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창피하지만 그건 정상이다.

 

꿈에서 엄마는 노트북을 앞에 두고 글을 쓰고 있다. 무의식의 세계, 꿈에서나 가능한 장면이다. 노트북과 엄마, 글을 쓰는 엄마란 죽었다 깨어나도...... 아, 엄마는 지금 죽었다 깨어난 건가? 꿈 얘길 했더니 남편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 어머님은 천국에서 당신이 살아오신 인생을 쓰고 계신가보다." 그렇게 상상해볼까? 죽음 직전까지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인생 가장 소중하게 붙든 말씀과 찬양을 잊지 않았던 엄마다. 노인이 될수록 허튼 말이 줄고 지혜가 빛이 났었다. 그랬던 엄마지만 지성의 결핍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땅을 살았던 엄마의 치명적 한계였다. 사고로 멍든 얼굴, 인공관절로 겨우 버티던 걸음걸이, 골다공증으로 칼슘 다 빠져나간 몸과 함께 이 땅에선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다. 몸을 벗은 빛나는 영혼은 못 배운 한, 지성의 결핍까지도 말끔히 지워진 새로운 모습일까. 그럴까. 부디 그러하기를! 엄마가 천국에서 글을 쓰면 좋겠다. 빛나는 천국에서 그 무엇보다 엄마의 지성이 빛났으면 좋겠다.

 

꿈이 드러낸 내가 모르던 마음, 모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극복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엄마가 창피한 것이다. 아니, 엄마와 연결된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엄마가 아니다. 엄마로 치환된 나의 어느 부분이다. 믿어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의 글, 나의 지적인 기반이 늘 부끄럽다. 뿌리 없는 지성이라 생각한다. 수치심과 결핍감은 끝없이 온라인 서점을 들락거리는 것으로, 불안과 혼란이 올 때마다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이 학교 저 학교 박사과정을 서핑하고 다니는 것으로, 어떤 사람들의 글을 질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잘 배운 엄마에게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한다.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맘껏 공부해서 유학도 갈 수 있었다면. 그랬으면 어땠을까. 이 유치한 상상을 자주 하는 것은 존재 깊은 곳의 수치심이다. 엄마에 대한 창피함이라고 하기엔 너무 뿌리 깊은...... 그냥 내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꿈이 드러내고 마주하게 한다. "엄마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가 아니다. 나다. 나 때문에 챙피해 죽겠는 거다. 심플한 한복을 입고,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엄마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표정으로 글을 쓰는 모습이 숭고하게 다가온다. 내 엄마다. 내 안에 그런 엄마도 있다.

 

내가 몰랐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엄마가 있다. 야학에서 공부하던 얘길 엄마가 자주 했었다. 수학을 배우는데 십의 자리 뺄셈 배우는 날에 결석했다고 했다. 다음 시간에 가서 시험을 치는데 배우진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봉게 앞이서 꿔다 쓰면 되겄다 싶어' 그렇게 풀었단다. 배우지도 않고 100점을 맞았다고, "옥금이가 보통 비상헌 머리가 아니다"라고 선생님이 칭찬을 했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서울에 왔을 때 아버지 양복을 하려고 뒀던 천으로 엄마가 투피스를 맞춰 입은 적이 있다. 그레이 색 천의 재킷과 스커트는 지금 생각해보면 'KEITH' 느낌이 나는 세련된 투피스였다. 비단 장사를 하던 엄마가 남는 천으로 한복을 해 입으면 교인 중 어떤 집사님들이 그렇게 질투를 하더라고 했다. 늙고 무식하고 감각 없는 엄마보다 내가 몰랐던 엄마가 더 광활할지 모른다. 꿈은 내 수치심에 가둬둔 엄마를 다시 만나라고 말한다. 아니 꿈의 엄마가 새롭게 만나자고 말 걸어온다. 다른 엄마를 만나봐야겠다. 슬픔고 죄책감을 피하지 않고, 애도의 시간에 오롯이 머물며 새 엄마를 만나야겠다. 필연, 엄마가 아니라 다른 나와의 만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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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렘브란트

고난주간 지나고 있습니다. 성금요일과 부활주일 사이, 성토요일입니다. 작년에 깊은 공감으로 읽은 셸리 램보의 『성령과 트라우마』의 부제목은 '죽음과 부활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이었습니다. 금식과 눈물 콧물로 성금요일을 지내고, 우리는 바로 부활의 새벽으로 도약했습니다. 부활을 성경공부로만 배운 탓입니다. 정작 우리의 일상은 이미 덮친 고통의 실존을 살아내는 토요일인데 말입니다. 상실과 애도의 시간 성토요일. 저는 더 이상 여기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머물러 느끼고, 견디고, 애도가 필요한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 뿐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은 상실의 늪에서 오지 않은 부활을 상상하는 법을 배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깊이 머무르지도 못합니다. 남편이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 일주일 동안 소설 같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신학도로서 본문을 연구한 후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상상력을 덧입혔습니다. 이번 주에는 밴드에 글이 올라오는 알람 소리로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로마 병사들, 빌라도, 백부장이 등장했는데 오늘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오늘 아리마대 요셉의 목소리는 유난히 공감이 됩니다. 전문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집에만 있자니 너무 분하고 답답했습니다. 골고다로 가자니 차마 그분의 죽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열린 산헤드린 의회 때, 광기에 휩싸인 의원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반대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습니다. 니고데모 의원과 저, 단 두 사람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이려 드는 의회원들의 기만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자기들이 하는 일이 여호와의 명예를 가리는 일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내세우고, 전통을 보수하고, 나라의 안위를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도둑놈들임을 백성이 다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온갖 특혜는 다 누리며 권세를 부리는 의회원들은 죽은시체나 다름없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위선에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언젠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실 때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바꿔주실 줄 믿었습니다. 그분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 의원과 저 요셉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다고 했을 때, 드디어 그날이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어떤 방법일지는 잘 모르지만, 선생께서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때가 왔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선생을 배신했습니다. 의회는 유월절 전에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와 저는 여러 사람을 만나 어떻게 해서든 이를 막아보려고 했는데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가만두면 안되었습니다. 그동안 정체를 숨긴 채 중립적인 척하면서 예수 선생을 지켜주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비겁했습니다. 제가 더 확실히 노력했어야 했는데. 저 때문에 선생님의 운동이 좌절된 것 같아 비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옷을 차려입고 골고다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그분이 죽었다고 알려줬습니다. 아,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시간은 벌써 오후 3시쯤 되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안식일이 시작될 텐데, 자칫 선생의 시신은 공동묘지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서둘러 빌라도의 공관으로 갔습니다. 총독을 단독으로 찾아가 만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쪽저쪽에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는 숨지 않기로 했습니다. 더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시신이라도 잘 거둬 최소한의 장례를 치르게 해야 그나마 제 마음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패로 몰려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사람을 보내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순순히 내어 주더군요. 그는 끝까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음을 입증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었습니다. 빨리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얼른 한 사람을 시장으로 보내 시신을 쌀 삼베를 넉넉하게 사 오게 하고, 또 다른 종을 보내 제가 죽으면 가족 묘로 사용하려던 무덤에 선생의 시신을 임시 안치할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올라온 예수의 어머니와 여인들에게 장례 절차를 설명해 드리려고 저는 서둘러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마침 예수의 시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마치 아기를 안 듯 안고 있는 모습에 저는 기어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내었어야 했는데. 돈을 좀 써서라도 의회원들의 마음을 좀 돌려놨어야 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시신을 들것에 옮겨 두고, 운구할 종들을 지목했습니다. 예수 선생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습니다. 니고데모 의원의 말을 듣고 저 역시 밤에 그를 찾아갔었지요. 저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오래 기다리고 기도해왔던 메시아 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무수히 보아왔던 랍비들과 달랐습니다. 따뜻했지만 그 지성은 말할 수 없이 깊었습니다. 율법의 의미가 그렇게 선명하게 이해될 줄 몰랐습니다. 예수의 묵직한 손을 무심코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너덜너덜해진 그의 손은 차마 보기가 민망하고 끔찍했습니다. 가만히 예수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 보았습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랍비여, 저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가져다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용기가 없어서 오늘 새벽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마귀처럼 날뛰는 의회에서 제가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제가 미온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목숨 부지하고자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지 못한 까닭입니다.’

저는 울움을 참아야 했습니다. 곧 안식일이 시작되면 모든 게 허사가 됩니다. 얼른 움직여야 했습니다. 무덤은 가까웠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선반 위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준비한 향품과 향료를 서둘러 발랐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삼베로 시신을 둘둘 싸매었습니다. 마지막 얼굴을 가리기 전에 선생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다짐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죽었지만, 여러 차례 다시 살아나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선생님의 꿈은 내 안에서 죽지 않았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예수여, 잘 가시오. 못다 이룬 꿈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 이어 보겠습니다. 당신의 가족들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얼굴을 삼베로 싸매고, 인사를 드리고,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돌을 굴려 무덤을 막았습니다. 1년 후에나 다시 와서 흙으로 되돌아간 시신의 뼛조각을 모아 유골함에 담아 드릴 때나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여인들이 울면서 무덤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보낸 백부장의 부하들이 무덤 앞을 지키기로 했나 봅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갈 것을 대비하는 모양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그동안 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왔습니다. 실은 의회에서 제가 예수의 제자임을 알리면 저는 곧장 파문당할 것이고, 제 사업장은 위기를 맞을 것이 분명합니다. 선생께서도 제게 굳이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라고 하진 않으셨습니다.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당신의 시신을 거두는 때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하고 송구할 뿐입니다.

3일 후 선생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갈릴리를 다녀온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저도 부활하신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할 일이 많을 거라며, 사도들과 한마음으로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긴히 부탁하셨습니다. 지난번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의회에 붙잡혀 왔을 때 이미 의회원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을 풀어주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들은 광장에서 복음을 전했고, 저와 니고데모는 의회에서 우리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일로 정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야고보 사도는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힘내십시오. 여러분 뒤에 제가 있습니다. 니고데모 의원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 두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맡은 의회원 요셉 드림

<마가복음 15: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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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교황>,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미국, 2019 

 

❝이렇게 인기 있는 이유가 따로 있소?❞

영화 <두 교황>을 선택한 이유다. 이유를 따져가며 영화를 고르진 않는데. 관람하다 대사 한 문장을 듣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 나도 이게 참 궁금했지!’ 교황 베네딕토 16세 역의 안소니 홉킨스가 교황 프란치스코 역의 조나단 프라이스에게 묻는다. 내 말이 그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기비결, 나도 그게 궁금했다. 매력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다. 매력은 자석의 성질 같은 것이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 건네고 싶은 끌림 같은 것. 한 번쯤 만나서 내 얘기를 해보고 싶은 사람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게 그런 분이다. 역대 가장 존경받는 교황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은 존경심 반 팬심 반이다. 안소니 홉킨스 분의 베네딕토 16세가 묻는 ‘인기 있는 이유’를 찾아 런닝타임 2시간을 함께 달렸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찾았다. 이 글은 그것을 찾는 보물지도다.

❝로마에서는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답니다❞

제목이 <두 교황>이다. 한 교황이 아니고, 여러 교황들이 아닌 두 교황. ‘2’는 선택을 종용하는 숫자다. 2, 둘 앞에 서면 둘 중 한 편을 선택하고 하나는 버려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인다. 남자와 여자, 이성과 감정, 진보와 보수, 심지어 성과 속. 두 개의 바구니에 칼 같이 나눠담고 중간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원론이다. 둘 사이는 넘나들 수 없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의 딱지를 각각의 바구니에 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이 있으면 하나는 옳고 나머지는 틀린 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뼛속까지 이원론자인지, 생활형 이원론자인지 늘 확인한다. 제목 <두 교황>을 보는 순간 이미 한 교황 편을 들기로 작정했다. 무의식적인 작정이다. 영화 역시 나 같은 이원론자 관객의 심리를 잘 부추겨 교황선출 투표에 참여시킨다. 물론 나는 주저함 없는 한 표를 행사했다.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지도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한 턱슨 추기경에게 기꺼이 설득 당했다. 라칭거(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이 되기를 정말 원하고, 게다가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에 차있다. 벌써 편은 나뉘었고, 나는 호르헤(교황 프란치스코) 편이다. 내 편을 정하고 나니 자기 확신 뚜렷한 보수주의자 라칭거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은퇴허락을 받으려는 추기경 호르헤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만난다. 교황의 여름별장 정원에서 만난다. 언뜻 봐도 많이 다른 두 사람이니,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사사건건 부딪치고 만다. 교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강한 담을 치려는 교황과 예수의 자비로 담을 헐어야 한다는 추기경. 지키려는 보수와 변화시켜 앞으로 나아가려는 진보는 동성애, 이혼, 피임, 성직자의 삶 어느 것 하나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교회를 향한 비판이 거세지는 이유를 교황은 담 밖에서 찾는다. 서구의 상대주의, 방임주의. 추기경은 그 반대, 내부에 원인이 있다며 치명타를 날린다. 신부의 아동 성추행과 그것을 묵인한 교황! 분노와 슬픔으로 벌게진 눈을 하고 당장 그 성직자를 해임하고 교회법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고 한다. 고해신부의 몇 마디 마법 같은 말로 죄를 용서해주는 것으로는 안 된다면서. 죄는 얼룩이 아니라 치료받고 아물어야 하는 상처라며. 가장 몰입해서 관람한 장면이다. 두 사람의 논쟁을 숨 가쁘게 따라갔다.

 

초유의 사태 코로나19 정국이다. 온 나라와 개인의 일상을 멈춰 세운 바이러스를 부르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이분되어 있다. 우한폐렴으로 부르는 사람, 코로나로 부르는 사람 사이에 견고한 담장이 서 있는 듯하다. 저쪽 편 사람이라고 느껴지면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아도 벌써 분노 섞인 피로감이 밀려온다. 분단된 남쪽에서 정치 정서적으로 다시 한 번 나뉘어 오갈 수 없는 땅에 사는 느낌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담을 세우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인 줄 알면서도 나 역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때로 드러내고, 때로 흥분한다. 두 교황의 물러섬 없는 입장차를 관객의 객관, 객관적 관객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골수팬이며, 호르헤 추기경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어쩐지 영화초반 콘클라베의 투표 때처럼 확실하게 마음이 기울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한 말 중 어느 것도 동의할 수 없소”라는 말로 대화는 끝났다. 기시감이 드는 슬픈 단절감이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정원에서 교황을 기다리던 호르헤 추기경에게 수녀가 우산을 하나 주었었다. 비가 오지 않으니 필요 없다는 말에 수녀가 복선을 깐다. “로마에서는 뭐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렇다. 이제 영화의 시작이고, 두 사람 사이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은가. 게다가 잊을 만하면 교황이 찬 심박조율기가 소리를 낸다. 정신을 일깨운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커피 드시겠소?❞

두 번째 대화가 시작된다. 밤이다. 낮이 가고 밤이 왔고, 쉼의 공간에서 다시 만났다. 용건이 있는 호르헤 추기경이 은퇴서류를 꺼내자 교황은 그냥 조용히 쉬자고 한다. 그리고 말을 건넨다. “차나 커피 드시겠소?”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대화로는 날씨 얘기가 딱이다. 아니면 차나 커피를 권하는 것. 뻔하고 흔한 이 제안이 좋았다. “아니요, 밤늦게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서요.” “나도 그렇소.” 두 사람 대화가 처음으로 교차한다. 낮의 정원에서 평행선을 달리던 두 교황이, 각각 와인과 환타를 마시며 혼밥 했던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오늘 밤은 형제처럼 있고 싶소.” 그리고 밤의 대화가 시작된다. 환한 낮에 내놓기 어려운 속내 드러낼 용기가 생기는 시간이다.
확신의 아이콘과도 같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아니 라칭거 형제가 불확실함과 모호함에 대한 두려움을 꺼내놓는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호르헤 추기경의 이야기 역시 불확실 아니, 확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호르헤는 신부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위해 오래 기다렸다. 이렇다 할 확신 또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자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얄궂게도 신은 청혼하러 가는 길에 호르헤를 부르신다. 청혼의 아름다운 시간을 기대하고 나온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신감의 상처를 남기고 신과 결혼한 호르헤 베르골리오의 러브스토리이다. “커피 한 잔 할래요?”로 시작한 밤의 대화는 좋아하는 음악, 텔레비전 프로그램, 점점 가벼워지다 농담으로 끝난다. 늘 혼자였던, 인기 없는 라칭거가 호르헤에게 말한다. “같이 있으니 좋군요.” 형제처럼 함께 보낸 시간이다.

❝당신이 신이 아닌 것을 용서합니다❞

호르헤 추기경에게는 용건이 있었고, 베네딕토16세 교황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두 교황의 세 번째 만남 장소는 바티칸 교황청의 중심이다. 교황의 계획은 종신직인 교황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교황으로 적절한 사람은, 아니 꼭 필요한 사람이 베르골리오라는 확신이다. 말, 행동, 생각 등 어떤 것에도 동의가 되지 않는 사람, 자신과 너무나 다른 베르골리오가 말이다. 전통의 수호자, 보수의 아이콘인 라칭거가 스스로 전통을 허물어 종신직에서 물러나겠다니.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의 충격적인 선언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호르헤의 용건이 아니라 라칭거의 계획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정원에서의 날 선 논쟁도, 형제처럼 함께 한 밤의 대화도 다 라칭거 계획의 일부였다. 라칭거의 파격 선언과 제안대로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면 넘어야 할 산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산은 물론 담장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다. 호르헤 자신 안에.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 시절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예수회 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많은 신부와 수녀들이 군사정권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베르고글리오는 정권에 저항하던 예수회 사제들과 친구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십자가처럼 지고 있다. 죄책감에 그치지 않고, ‘독재자의 친구’라는 오명을 주홍글씨처럼 가지게 되었다. 진보의 아이콘, 가난한 이들의 신부, 소박한 삶을 사는 인기쟁이 추기경에겐 이런 흑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호르헤를 선택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겐 계획이 있었고, 또 호르헤 추기경에 대한 파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비밀처럼 품은 부끄러움을 누군가 이미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괜찮다고 말해줄 때는 치유가 일어난다. 파일을 가지고 있는 교황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차기 교황에 적합하다 인정해준다. 그런데 은밀한 부끄러움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교황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호르헤 스스로 자기를 받아주어야 했다. 젊은 날의 자신과 화해해야 했다. 아니 용서해야 했다. 여름별장 정원의 첫 대화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값싼 용서를 비판했던 호르헤 추기경. 그 날선 비판의 칼끝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죄를 씻을 수 없고,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를 겨눈 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그것은 자신과의 화해이며 무엇보다 용서여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정신적 자만심에 시달린다오. 당신은 신이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일 뿐입니다.” 형제인 라칭거가 교황의 권위를 가지고 일깨워준다. 그리고 교황으로서 추기경의 죄를 용서한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교황의 용서가 바로 신의 그것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선언은 얼마나 중요한가. 가톨릭의 전통이 가진 고해성사의 힘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들렸다. “당신이 신이 아닌 것을 용서합니다.” 호르헤도 나도 우리 모두는 신이 아닌데,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신적인 완벽함, 결벽을 요구하며 비난하는가. 나도 그 선언을 듣고 싶다. “당신은 신이 아니고. 신이 아니기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합니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인기의 비결을 묻는 교황 베네딕토16세에게 호르헤 추기경이 답했다. “그냥 나 자신으로 살려고 할 뿐입니다.” 그냥 자신으로 사는 거라…. 질문보다 더 어려운 답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교황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나답게 살려고 할 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군요.” 자기다워진다는 것, 얼마나 막막하여 어려운 일인가. 인기의 비결을 찾아 여기까지 왔건만 싱거운 답이다. 보물이 이렇게 쉽게 숨겨져 있을 리 없지! 이번에는 교황이 추기경에게 고해성사를 청한다. ‘삶을 즐기는 용기가 없었다’ 고백한다. 나름대로 자기다움에 충실한 라칭거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즐길 수 있는 용기’인 듯하다. 성추행 범죄를 덮어준 것보다 본질적인 죄인지 모른다.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 수많은 당위의 담을 쌓아 자신을 가두는 것. 라칭거 역시 용서받음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즐기지 못하던 자기와의 화해라고 할까.

 

원칙주의자 라칭거, 자부심에 찬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실패를 인정한다. 호르헤 신부가 젊은 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것을 보상하는 삶을 살고 있듯이. 자기다움이란 실패, 또는 실패에 대한 아픈 성찰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실패자에 머무르지 않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떠안는 태도를 두 교황에게서 본다. 자기 안에 갇혀 성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해성사를 봐줄 신부, 죄를 사해줄 신의 대리자, 아니 그저 함께 해주는 형제가 필요하다. 자기다움으로 가는 길엔 분명 나를 비춰주는 거울인 누군가가 필요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의 대화는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두 형제의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보물을 찾았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 또는 둘을 넘어 제 3의 자리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실패한 나에 멈춰 있지 않고 화해라는 신발을 신고 계속 움직이는 것. 생각이 다른 너와 나 사이 옳고 그름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정작 답은 라칭거의 입에서 나왔다. “당신은 권력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고 특별하게도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추기경님은 달라졌어요.”

 

호르헤는 호르헤대로 라칭거는 라칭거대로 나는 나대로 내가 살아온 방식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실패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화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용건’ 아닌 ‘계획’을 가지고 내내 대화를 이끌어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마음이 끌린다. 프란치스코 교황만큼이나. ‘둘’을 보면 꼭 하나로 기울고 싶은, 편을 나누고 싶은 이 버릇을 좀 고치고 싶다. 아니, 이런 나와 화해하는 쪽으로 멈추지 말고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커피 아니고, 와인도 환타도 아닌 맥주로 음료수 통일한 두 교황이 월드컵을 관람하는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다. 물론 같은 편을 응원하지는 않는다. 이겨야 맛이고 지면 기분은 나쁘겠지만 승리만이 옳고, 진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독일이 이겨도 아르헨티나가 이겨도 상관없다. 양쪽 모두를 기분 좋게 응원할 뿐이다. 두 교황이 다 좋고, 우리에겐 두 교황 모두 필요하다.

- 격월간지 <민들레> Vol. 128

  1. BlogIcon larinari 2020.04.10 11:08 신고

    격월간지 <민들레>에 영화 이야기 기고합니다. 첫 글 마감이 엄마 장례식 마친 주말이었습니다. 포기해도 됐을 텐데, 무슨 정신으로 탈고해서 보냈는지 싶어요. 미리 어느 정도 써놓긴 했었지만 행여 마감을 못 지켜 편집 마감에 차질을 빚을까 싶어 마무리도 안 된 글을 보내기도. 왜 그랬을까, 부끄러워서 손발이 말려 들어가네요. 결국 평생 잊지 못할 글이 되었습니다.

  2. BlogIcon pratigya 2020.04.11 20:12 신고

    영화를 안 봤는데도 좋은 영화한편을 잘 본거 같은데요...우리 언니 홧팅!!!

 

 

 

 

준비해둔 마지막 인사가 있었다.

"엄마, 고마워. 엄마 딸이라서 정말 좋았어."

식상하지만 사무치고 절절한 말이다.

 

마지막 말만 준비된 것이 아니다. 그 인사를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뒀었다. 엄마의 죽음을 오래 준비해왔다. 39년 동안 늘 준비하고 있었다. 어려서는 무의식적으로, 마음공부와 내적 여정을 한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준비했다. 내적 여정으로 치유의 눈을 떠가는 중 오래된 상복을 발견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떨결에 입었던 상복,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입었던 무섭도록 낯선 옷이다. 그것을 내다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의 서랍 깊숙이, 그러나 언제든 쉽게 찾아 꺼내 입을 수 있게 기억하며 간직하고 살았던 것이다. 쾌활함으로 위장한 우울, 당당함으로 감췄던 불안, 가족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이 거기서 기인한 것 같았다. 앎이 즉각적으로 치유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화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상실과 애도 과정에 함께 하면서 엄마만은 잘 보내드려야지, 늘 생각했다.

 

아버지 목회를 도우면서 교우들의 죽음을 돌보던 엄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의 임종을 의연하게 지키고 진두지휘 했던 엄마다. 엄마가 일부러 외워준 것은 아닌데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생각이 난다. '옆에서 울고 그러면 안 된다. 찬송 불러 드려야 한다. 마지막 숨을 넘기는 일은 매우 힘들다. 그때는 물을 한 숟가락 준비하고 있다 한 방울을 입에 넣어 넘기도록 해드리면 수월해진다.' 매뉴얼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축복 속에 고요히 마지막 호흡을 내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엄마의 사랑받은 이들이 모여 찬송 부르는 동안 잠자듯 눈을 감으시는 것을 상상했고 기도했다.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고마워, 엄마 딸이라 좋았어." 이 말 외에 없었다. 

 

"가, 엄마 이제 가, 나는 괜찮으니 이제 가 엄마......"

39년 준비가 무색하다.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엄마 귀에 대고 뱉은 말이. 그것도 절제하지 못한 통곡과 함께. 호흡기도 차고 있었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의식이 또렷하고 다 알아듣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며칠 전 밤에 이 생각이 났다. 엄마의 호흡이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한 번 한 번 호흡을 끌어올리는 일이 힘겨운 고통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혹시 엄마가 나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격리된 상태로 외롭게 보내는 엄마의 시간이 견딜 수 없었다. 엄마에게는 더 큰 고통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엄마의 빛나는 영혼이 무너지는 육체 안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엄마와 마지막 통화였다. 엄마와 연결되는 유일한 끈은 전화기에 대고 부르는 찬송이었다. 행여 엄마 귀에 들리지 않을까 큰 소리로 불러야 하는데, 목소리를 크게 낼수록 울음도 함께 커지니 드레스룸 구석에 머리를 파묻고 통곡하며 불렀다. "성령 감화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호흡기에 막힌 엄마 숨소리만 들리는데, 엄마가 너무 힘겨워 보여서 엄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안심시키고 싶었다. 이제 신실이가 다 컸고, 김서방도 있어서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편히 가라고. 하지만 마지막 말이 될 줄은 몰랐다. 

 

엊그제 늦은 밤. 책을 읽고 몇 줄 글을 남기려다 "숨을 거둔 후에도 청각은 한참 더 남아 있대" 하는 말이 생각났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엄중한 사랑의 태도로 임종을 지켜야 하겠느냐, 그런 의미를 담았었다. 우리 엄마는 존경과 사랑에 둘러싸여 평화로운 마지막 숨을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무엇. 마지막 말이 저거였다고? 엄마가 저걸 들었다고? 저 말을 듣고 끝이었다고?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 씻어낼 수 없는 죄다. 자책감이란 말도 과분한 감정으로 가슴이 다시 죄어드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어떻게 해버려야 할 것 같은, 나를 가만 둘 수 없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동생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동생도 그랬을 것이다. 피차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알기에 각자의 몫을 감당할 뿐, 서로 더 아프게 하면 안 되었다. 참지 못하고 전화했다. "엄마랑 내가 마지막 통화할 때 내가 엄마한테 했던 말 기억하니?" 못 들었길 바랬다. 울음이 전부였기 때문에 못 알아들었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복기해보니 내가 그 말을 할 때 얼른 동생이 말을 가로채고 전화를 끊었었다. 상황을 파악한 동생이 '그때 누나 편하라고 엄마가 찬송 다 듣고 따라 불렀다고 했는데 사실 그때 엄마 의식이 거의 없었어. 찬송도 못 알아듣고 누나 말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데 확인사살과 같았다. 그랬구나. 정말 내가 엄마 귀에 대고 한 마지막 말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되돌릴 방법이 없다. 차분히 찬송 부르고 "엄마 잘 자. 곧 보러 갈게"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입에 발린 말이라도 "사랑해. 또 전화할게" 할 일이지. 비록 몸으로 함께 하진 못했지만 엄마가 늘 말하듯 찬송을 불러드렸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는데. 새롭게 견디기 어려운 밤이었다. "어머님이 당신 마음을 듣지, 말을 들으셨겠냐" 몸부림 하는 나를 끌어안고 남편이 하는 말도 위로되진 않았다. 어떤 늪으로, 죄책감의 구덩이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늪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싶긴한 건가. 

 

하지만 아침이 되니 괜찮아졌다. 밤에 했던 남편의 말을 복기해보면 이해도 되고 수긍도 되었다.  무엇보다 그런 위로의 말이 필요치 않게 말짱하다. 말짱한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엄마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말짱해지는 것이냐. 밤이 와 슬픔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 파도를 부풀리고 부풀려서 그 안에 갇혀버리고 싶다. 그렇게 슬픔에 머무르는 것이 엄마와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엄마를 잊을까 봐, 나조차도 엄마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두려운 건지 모른다. 엄마가 죽었는데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이 잔인하다 했으면서 숲이 연둣빛으로 변하는 것에 다시 설레다니. 그 숲에 안기려 하다니. 일상의 감각을 되찾는 나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어떤 사실을 일부러 지우고, 나를 고통에 빠트릴 것만 붙들려고 한다.

 

사고 나던 날 응급실에서 보고, 바로 요양병원으로 간 엄마를 처음 면회한 날은 2월 24일 내 생일이었다. 생일이라 엄마가 더 보고 싶어 돌아서면 자꾸 눈물이 났다. "면회는 못하겠지만 병원 앞에라도 갔다 올까?" 말해준 남편 덕에 병원에 갔고, 눈물로 엄마 안부를 묻다 면회를 허락받게 되었다. 아직 엄마가 호흡기 달기 전이었다. "엄마, 오늘 내 생일이야. 엄마, 나 낳아줘서 고마워. 잘 키워주서 고마워.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랑 함께 울었다. 얼굴 보고 나눈 마지막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많은 마지막이 있다. 입관식에서 엄마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 말도 있다. 그것도 마지막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둘의 차이를 '자기 비하'로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국가, 자유, 이상 등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추상적인 것을 잃은 것에 대한 반응'이 애도라고 했다. 대상의 상실을 자기 비하의 감정 없이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우울증은 극단적인 자기 비하로 상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현상이라고. 정확히 그 밤의 내 태도이다. 하지만 일말의 자기 비하와 죄책감, 후회 없이 애도의 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까? 그때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저 "엄마, 전염병 끝나면 보러 갈게" 하고 말 걸, "우리 딸 보고 싶다" 하면 바로 달려가서 얼굴 보여줄 걸, 더 많이 엄마 얘기 들어줄 걸...... 후회 없이 이 시간을 지날 수 있을까. 떠나보내야 하지만 붙들고 싶기도 한 내 마음을 어쩔 것인가. 프로이트의 통찰이 주는 유익이 있다. 그에 힘입어 애도에 대해 강의도 상담도 했다. 하지만 그리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밤 "엄마, 가!" 이 말이 떠올라 다시 늪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 말이 마지막 말이라고, 그 말만이 마지막 말이라고 내게 우기겠지. 엄마와의 마지막 말은 끝나지 않았다고 믿기도 한다. 요즘 자기 전엔 밤마다 기도를 하거나, 엄마에게 같은 내용을 부탁한다. "엄마, 꿈에 나와줘. 꿈에 나와서 엄마가 지금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 이 말이 엄마와의 마지막 말일 수도 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며 아직 적응 안 된 엄마 없는 날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락가락해도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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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4.10 21:36

    비밀댓글입니다

 

 

"속이서 안 받는다" 비위가 약한 엄마가 앞에 놓인 음식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하는 말이 그립다. 잃었던 입맛을 찾은 후에는 "입맛이 잽혔다"라고 했다. "입맛이 잽혔다" 끝에 따라붙을 "고맙다, 복 받어라"하는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들어보면 좋겠다.

 

입맛을 잡아오는 음식이 있다. 도다리 쑥국이 입맛을 찾아주진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찾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일단은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도왔다. 통영으로 불러들였다. 한 번 먹어보지도 않은 도다리 쑥국이다. 도다리라는 생선에 여린 쑥을 넣어 맑게 끓인 국이려니. 유명하다는 집을 찾았다. 상상했던 그 맛을 그럭저럭 맛있게 먹었다. 맛집에서 나오면 왈가왈부 맛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가만 걷다 "국물이 따끈했으면 더 맛있었겠다. 국물 온도가 좀 아쉽네." 했더니 남편도 동의했다. "아, 그러네!" 

 

말로 내놓고 나니 몹시, 절실하게 아쉬워졌다. 국물은 온도지! 왜 그랬을까? 사장님의 말과 태도에선 도다리 쑥국에 대한 전문가적 자부심이 넘쳤는데. 따끈한 국물이 정말 필요했는데. 며칠 전 밥을 차려 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끓여준 따뜻한 국물 먹고 싶다." 국도 끓이고 단품 요리도 하면서 잘 먹고 먹이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왔다. 그 욕구와 휴대폰 창에서 본 도다리 쑥국이 마주쳐 손뼉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따끈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 엄마 영안실 안치하고 며칠 동안 먹은 것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따끈한 맑은 국물이었다. 

 

발인예배에 왔던 친척 언니 오빠들, 메시지를 보내주는 친구와 지인들이 한결 같이 "잘 챙겨 먹으라"였다. 살 의욕도, 먹을 의욕도 없지만 그 말들이 마음에 남아 있어 뭐든 먹으려고 했다. "여보, 뭐 먹을래? 뭘 사 올까?" 잔치국수, 콩나물 해장국 같은 걸 사서 국물만 먹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따뜻하고 맑은 국물이었다. 식도나 위 어느 부분에 체망이 걸려 있나? 며칠을 그렇게 국물만 들어갔다. 국물이 아니라 따뜻함을 원했던 거다. 내장을 타고 몸 구석구석에 따뜻함이 스며들었으면. 

 

장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조카 부부가 아이와 함께 집에 와 식사를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다 답을 못하기에 나름대로 식사 준비를 했다. 식사 후 이런저런 얘기, 결국 엄마 얘기를 하는데. "고모, 나 실은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김칫국이 너무 먹고 싶어요. 끓여 보려고 해도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고. 그 맛을 알고 끓일 수 있는 사람은 고모일 것 같은데... 말을 못 했어요." 해서 같이 울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급히 김칫국을 끓여서 담아 보냈다. 다음 날 '바로 이 맛이었다'며 눈물 흥건한 메시지가 왔다. 나도 엄마가 끓여준 따뜻한 국이 먹고 싶었던 거다. 몸과 마음을 데우던 엄마의 국물을 먹고 싶었던 거다.

 

오묘한 연상작용이다. 도다리 쑥국 - 미지근한 국물 - 따끈함을 원했었지 - 따끈한 맑은 국물 - 엄마가 끓인 국 - 엄마만이 줄 수 있은 온기. 온기가 사라진 낯선 엄마 몸이 다시 떠오른다. 식어버린 엄마 몸을 매만지다 마음의 온기를 잃어버렸다. 뱃속이 가슴이 세포 구석구석이 비어 바람이 든다. 국물로 버티던 며칠 동안 집에서도 목도리를 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 추위 때문이라 여겼다. 하루 종일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웬 목도리나고 놀렸다. 통영에서 자던 밤에는 집에 있던 채윤이가 내가 했던 목도리를 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오며 다시 놀렸다. 엄마 몸이 없어졌다는 것은 엄마만의 온기가 사라진 것이구나. 

 

결핍, 비어 있는 느낌, 텅 빈 결핍의 공간에서는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분다. 아버지가 남긴 결핍의 공간에서 불던 찬바람을 맞으며 살아왔다. 찬바람에 마음이 추울 때마다 일기를 썼다. 그 텅 빈 공간을 글로 채웠다. 그렇게 쓰다 쓰다 작가가 되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 그 결핍이 치명적인 부끄러움이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자 살아온 세월인데. 돌아보면 그 세월이 나를 만들었고, 존재하게 했고, 그 세월이 그냥 나다. 엄마가 남긴 또 다른 결핍과 냉기는 다시 내 인생 후반을 이끌어 갈 것이다. 여전히 "다른 사람이 끓여준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그 다른 사람, 그 타자, 그 국물을 끓여낼 유일한 타자, 절대 타자인 엄마가 없으니 허튼 바램으로 슬픈 나를 더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뜻한 국을 끓여 주는 그 사람이 되어어 할 시간이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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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진 2020.04.05 23:29

    몸이 기억하는
    잊혀지질 못할 엄마의 온기...🧡

  2. BlogIcon pratigya 2020.04.06 11:48 신고

    그래도...언니가 잘 드셔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남편이 어디든 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행이라니. 겨우 '삶'의 최소한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행이라니. 어디 가고 싶은 곳 없냐고 또 자꾸 묻는데 역시 가당치도 않은 질문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뭐지? 그런 게 있었나? 느낌이 없어졌는데.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경탄하는 것인데 지금 어떻게 여행이 가능하지? 앞산 진달래가 피어도, 목련이 봉우리를 터트려도, 여린 새순이 돋아나는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꽃이든 낙엽이든 계절 없는 흑백의 시간을 산다고 하는 게 좋겠다. 꽃 사진을 보내오는 벗들이 있어 '아, 그렇구나. 이런 시절이지. 생명이 움트는 때……' 그제야 목련, 개나리가 색을 입고 눈에 들어오는데, "무심도 하다. 엄마가 죽었는데 꽃이 피고 움이 트다니" 하다 이내 다시 흑백 이미지가 된다. 

 

'긴 여행 말고, 아침 일찍 출발해 돌아오는 것으로 통영 갈까? 도다리 쑥국 먹으러 가볼까?'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도다리 쑥국 기사를 보고 툭 나온 말이 1박2일 통영이 되었다. 기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통영도, 바다도, 도다리 쑥국도 그저 흐릿한 흑백사진이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면 자동반응으로 설레곤 한다. 강동 쪽에 오래 살아서 어딘가 떠날 때 지나는 첫 관문이 동서울 톨게이트였다. 딱 그 지점을 지나면 '떠나는구나!' 들뜨곤 했었지.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익숙한 휴게소들 지나는데 덤덤한 내 마음이 슬픔을 일깨우고, 잠시 스치는 슬픔도 싫어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좋고, 설레고, 행복한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의 걱정에 내가 먼저 하는 말인데.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만큼의 시간일까. 

 

도다리 쑥국 정도 상상하고 내려간 통영에서 동백꽃을 만났다. 무계획 여행이라 그야말로 발길 닿는대로 움직이다 어느 공원을 걷는데 동백숲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다. 아, 동백꽃! 걸을 기분이 되었다. "여기 좋다. 좀 걷자." 걸어야 하니까 걷는 것이 아니라 걷고 싶어졌다. 다리에 없던 힘이 들어갔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서 만났다. 흑백이 아니라 컬러다. 아니, 흑백 속 컬러라고 하는 게 더 나을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흑백 속 컬러,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처럼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봉오리들이 색을 입고 마음에 들어왔다. 예쁘다…… …… …… 슬프도록 아름답다. 살아있는 엄마와의 마지막 연결, 전화기로 함께 찬송 부르던 장면을 두고 남편이 '찬란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시간'이라고 표현했었다. 떨어져 뒹구는 동백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찬란한 슬픔이었고, 그 슬픔은 잊었던 심미감을 흔들어 깨우는 강렬한 자극이 되었다. 엄마와 연결되었던 전화기, 아니 카메라를 꺼내 이 각도 저 각도로 담았다. 아름다움이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음악치료는 음악을 선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질성의 원리'는 음악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다. 클라이언트의 정서와 음악 사이 동질성이 있어야 한다. 가라앉은 정서에 사용하는 음악과 흥분된 사람에게 쓰는 음악을 우선 동질성이라는 기준으로 골라야 한다. 우울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다짜고짜 밝고 경쾌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음악치료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모든 치료의 원리일 것이다. '공감'이라고도 한다.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이 내 마음에 공감으로 다가왔다. 동질(同質) 성의 작용이고, 바깥의 풍경과 마음의 풍경이 공명했다. 동네 흔하게 핀 꽃을 볼수록 덤덤해지고 냉담해진 것은 동질성의 원리에서 벗어난 탓이었구나. 나는 이렇게 슬픈데, 꽃천지라니. 이토록 처절한 상실의 시간에도 생명이 움트고 있다니. 자연의 섭리조차도 나를 외면하고 고립시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만 슬퍼하라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기분을 전환하라고 채근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품고 일한다. 내면과 외적 상황의 연결, 나와 너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치유를 일으킨다. 그 어떤 연결보다 슬픔의 연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연대가 가장 치유적이다. "결코 연결되지 않겠다"는 태도로 글쓰기, 꿈집단 첫 시간에 앉았는 이들이 있다. 상처로 피 흘리는 중이라고 나는 읽는다. 몇 회기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은 보통 첫 시간의 그 사람이다. 상처를 발설하고, 내 상처와 마주 앉은 이의 아픔이 공명할 때 존재가 우리를 일깨운다. “아, 연결되어 있었어!” 좋은 얘기, 다 나아져서 이제는 괜찮은 얘기, 은혜로 축복받은 간증만으로는 어렵다. 상처는 존재의 무늬라고 박정은 수녀는 말한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연결은 상처, 실패, 상실을 투명하게 드러낼 때진정한 것이 된다. 사람의 상처와 공명하며 연결된 경험이 많지만,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자연이 동질성을 드러내 주었다. 

 

어제는 4월3일. 동백꽃으로 가슴에 담긴 4.3의 날이다. 4월 3일 저녁엔 한 동네 이 집 저 집에서 동시에 곡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일상을 살던 엄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아들, 딸이 동시에 죽임 당한 날인 것이다. 그 죽음 하나하나 내가 엄마를 잃고 모든 감각을 다 잃은 그런 살아 있는 죽음의 경험일 텐데. 그 죽음에 이름도 제대로 붙여지지 않은 채, 끝나지 않은 애도로 피맺힌 슬픔이 툭툭 떨어지는 날이다. 동백꽃은 내게 4.3의 무고한 죽음들,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들의 죽음이다. 동백꽃은 내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꽃 같은 청춘이다. 작년 1월, 성폭력 상담가 교육을 받는 중 김복동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1926년 생이다. 우리 엄마는 1925년 생이다. 장례식 어간에 인터뷰와 영상들 찾아보며 먹먹한 시간을 보냈다. 그 할머님들의 삶을 마주할 때, 또 돌아가셨단 소식이 들릴 때마다 동백꽃 한 송이 떨어지는 느낌으로 가슴이 내려앉는 것은 우리 엄마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어느 죽음이 안타깝지 않고,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은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말처럼 성별, 얼굴색, 빈부와 학식의 차이, 그 모든 차이가 태양볕 아래 눈처럼 녹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라는 기쁨을 느낀다. 내가 다른 사람과 같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큰 고통과 슬픔은 우리 모두 예외없이 힘없는 존재로 태어나 힘없는 존재로 죽는다는 것을 일깨운다. 가진 것, 이룬 것,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예외 없이 힘없는 존재로 태어나 힘없는 존재로 죽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결속시킨다.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은 '죽음'이다. 통영 어느 공원에 떨어져 나뒹구는 동백꽃은 나와 연결된 수많은 죽음, 아버지와 아버님, 엄마와 김복동, 김학순 할머님, 4월 진도 앞바다의 아이들, 제주도의 이름은 모르지만 하나하나 특별하고 고유한 죽음에 연결시켰다. 슬프지만 슬픔 속에 깊은 연결이 어떤 말로도 만져지지 않았던 마음을 만져주었다. 

 

집으로 올라오기 직전 한산도를 바라보며 바닷가 벤치에 앉았다. 한결 기운이 났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가 아름답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고마웠다. 동백꽃이 공감해준 덕이다. 집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 "여보, 나는 우리집 거실과 안방 침대가 무서워. 거기서 견뎌야 할 시간이 두려워. 그럼에도 거기서 견뎌야 할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아. 피할 수 없다는 것,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렇게 말하니 다시 마음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이젠 자꾸 밖으로 나와. 이제 다른 시간도 필요해." 절대시간은 남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떤 감각이 되살아났다. 마침 앞산에 연둣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서서히 다가오는 생명의 기운이 위협적이지 않고, 고맙고, 아름답다. 6시, 클래식 FM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간, '데니 보이'가 흘러나왔고 오랜만에 음악에 귀가 열렸다. 넘어가는 해가 남긴 한 조각 아쉬움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생명의 기운을 수줍게 머금은 나무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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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장례식 이틀 후, 동생 가족과 만나 얘기 나누는 중. 회의주의자 동생이 "결국 천국에 대한 믿음이 또렷해지지 않을까"라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 말 끝에 "천국? 나는 천국이 믿어지지 않아."라고 내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가 통곡을 되었다. 예상치 못했지만 내 속에서 나온 말이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진실이다.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훨훨 타는 화장장 불에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된 엄마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 엄마 몸이 그렇게 내 눈 앞에서 사라졌는데 다시 살아난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천국? 그런 허튼 희망을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말고, 특히 위로의 말로 건네지도 마시라. 당신 엄마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 좋은 곳에 갔다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당신 엄마 죽음 앞에서 그 말 그대로 해보시라.

 

진공상태의 경험은 없다. 트라우마로 남은 아버지 죽음의 경험이 아버님과의 이별을 다르게 경험하게 했고, 그로 인해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아버지를 황망히 빼앗기고 보낸 세월과 달랐다. 두려움이나 슬픔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다시 만날 확실한 소망으로 엄마에게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고마웠어! 곧 만나!" 특히 '곧 다시 만날 것'에 대한 믿음이 견고 해지는 나날이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지진으로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의 한 면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평생 여진의 두려움에 붙들려 살던 내 인생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입에 올리지도 말고, 죽음이나 죽음을 상상하게 하는 아프고 어두운 생각은 떠올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한 생각만 하자, 고통의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자! 오래 붙들었던 무의식적인 신념을 마주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남편도 비슷한 길 위에 섰을 것이다. 아버지,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어찌 전과 같은 삶을 살며 예전 같이 신앙하고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즈음 남편의 설교 제목이기도 했던 "죽음을 짊어진 삶"은 이때로부터 나를 이끄는 한 문장이 되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책 제목처럼  죽음을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브레넌 매닝의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는 말도 조금 알아들어졌다. 오늘 여기를 산다는 것이 현존하는 부활을 믿는 믿음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죽음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present is preset'이 된다는 것도. 실제로 아버님의 죽음으로 남편은 새로운 길을 갈 용기를 얻었다. 떠나야 할 곳을 떠나기로 결단할 수 있게 되었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남편의 결정적인 진로를 열거나 닫는 것은 모두 가까이 일어나는 죽음이었다. 융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치유의 다른 이름은 성장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치유자가 되는 내적 성장을 멈추지 말아야 함 또한 깊이 새기고 있다. 멈추지 않아야 할 성장의 정점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인생 두 아버지가 인생의 오후 시간에 접어든 내게 따스하게 가르쳐주셨다.

 

이랬던 내 입에서 부활이나 천국 같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 함께 앉았던 가족들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말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어지는 삶이었다. 죽음 이후의 삶이란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고통, 몸이 사라진 엄마의 '현재'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캄캄한 구멍 속에 빠져 있는 느낌. "우리 엄마 지금 어딨지? 엄마, 엄마 엄마 어딨어?" 몸과 함께 엄마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 구멍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까만 창 앞에 하염없이 서 있는 순간도 있었다. 엄마와 행복했던 과거는 그리움으로 고통스럽고, 사라진 엄마가 그려지지 않아 고통스럽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과 웃고, 얘기하고, 남편과 걷는 오늘의 기쁨은 미래 어느 순간의 상실의 고통이 될까 하여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맞다. 쓰는 지금은, 아니 이 며칠은 그 어둔 구덩이 속 느낌은 아니다. (쓰다 보니 알게 된 것, 쓰다 보니 알게 되는 것!)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신념이나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신앙을 부정하는 것도, 믿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동도 아니었다. 감정의 표현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내 앞에서 천국 운운하며 허튼 위로할 생각 하지 마!"라는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하관예배의 설교가 상처가 되었다. 신뢰하는 목사님이고, 좋은 설교였다. 참석한 친구는 "설교가 참 좋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힘들었다. 엄마를 땅에 묻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말씀을 듣기가 힘들었다. 빈소 없는 이상한 장례식을 치른 이틀을 지나며 몸과 마음에 남은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자꾸 주저앉으려 했다. 다른 힘듦이었다는 것은 쓰다 보니 알겠다.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들을까 먼저 방어막 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찬송을 부르면 걷던 길. 어느 어른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혼자 울며 걷던 길, 아버지 친구가 했던 그 말을 누군가 다시 할까 봐. "울지 마라. 너희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냐?" 누군가 신앙의 이름으로 허튼 위로를 건네 올까 봐 금기어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정말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그 말로 인해 빼앗긴 나날, 감정은 죄 나쁜 것이라 여겨 내 감정을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며 살아온 나날,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닿는 유일한 길이라 여겨 종교적 행위 모든 것을 대체하며 살아온 나날을 보상할 자신이 있으면 한 번 지껄여 보라 하고 싶었다.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 친구 목사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아버지 친구 목사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차라리 가만히 안아주시지요. 따스한 눈길로 가만히 바라봐 주시는 게 좋았어요."

 

캐시 피터슨의 『애도 수업』에서 위로와 격려로 건넸지만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대놓고 정리했다. 그 첫 번째 말이 "그는 더 좋은 곳에 있어", 두 번째는 "그는 더 좋은 곳에서 더 잘 지낼 거야"이다. 이 좋은 말이 왜 상처가 되는지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모르겠는 분, 아직 엄마나 아버지를 잃어보지 않은 분이라면 내 이 마음을 읽어 보시라. 쓰면서 알게 된 내 마음에 귀 기울여줘 보시라.

 

믿음의 문제라면 그 부활을 믿는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두 아버지 죽음의 상실을 짊어지고 처절하게 배운 믿음이다. 부활보다 먼저 나는 죽음을 믿는다. 확신한다. 죽음을 믿는 만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그러니 저의 불신앙을 걱정하진 않으셔도 된다. 건강도 괜찮다. 잘 먹고 잘 웃는다. 잠도 곧 잘 자게 될 것이다. 

 

나는 믿는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들의 연결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드는 오만불손한 내 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우리 엄마, 한솔이, 박광혜 권사님, 구은회 장로님의

몸, 그 몸들이 다시 사는 것과,

나의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4 02:11 신고

    빼앗겼던 들에 찾아온 봄을 같이 기뻐합니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다. 편집된 과거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세월이 만드는 거리는 그때 그 사건을 달리 보게 한다. 엄마 죽음이 불러낸 아버님의 죽음은 다시 개정판이 되었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 격리된 몸이었다는 것이 떨쳐지지 않는 고통이다. 아버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다시 떠올리니 얼마나 축복된 시간이었던가 싶다. 1주기 즈음 쓴 글이 있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에 실었던 '아버님의 소주잔'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아버님과 함께 한 시간이 오늘도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구나 싶다. 아버님의 소주잔은 내 마음에 살아 내 종교적 독선에 찬물을 끼얹어 일깨우고 있다. 채윤이와 현승이가 이렇게 잘 큰 것은 착한 할아버지 덕분이다. 아이를 키우며, 내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의 헌신이었다. 오늘 내 일상에 아버님의 삶이, 그렇다 '삶'이다. '죽음'이 아니고. 종말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계신다. 어제 쓴 글과 겹치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나름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잘라내고 오려붙이고 확대하고 축소하며 반복되는 기억, 편집된 과거를 한 번 더 읽어주시길. 

 

 

아버님의 소주잔

설거지를 하려고보니 그릇 사이로 소주잔 하나가 뒹굴고 있다. 배시시 웃음이 샌다. 큰 녀석이 그릇장 안쪽에 있던 걸 꺼내서 물 컵으로 사용하고 휙 던져 놓은 것일 터이다.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의 집에 웬 소주잔? 이것은 정통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인 며느리가 단 한 분, 시아버님을 위해서 마련한 아버님 전용 소주잔이다.

나는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대학(그것도 걸걸한 여대)도 다니고 사회생활도 했기 때문에 술자리, 술 문화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에서의 음주행위는 상상도 못하고 자랐다. 신혼 초에 시댁에서 잔치가 있어서 처음으로 설거지 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설거지 그릇 중에 소주잔이 여러 개 있었는데 살짝 손이 떨리는 거였다. ‘아, 내가 술잔 설거지를 하다니. 우리 엄마 알면 뭐라 하실까?’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문화충격이었다.

겉으로는 ‘술도 같이 한 잔 안 마셔주는 아들 소용없다’며 호기로우셨지만 아버님도 늘 아들 며느리 눈치를 보셨다. 착하고 소심하신 아버님은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가서 한 잔 생각이 나셔도 냉큼 주문을 하지 못하셨다. 어느 날 부턴가 식당에 가면 쭈뼛거리시는 아버님에 앞서 내가 먼저 소주 한 병 주문을 했다. 착하고 소심한 아버님의 약주사랑이 참 곱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평소 말이 없으신 분이 약주 한 잔 하시면 유쾌해지시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뿐 아니라 아버님 생신을 우리 집에서 차려야 하는 날에 장을 보면서 과감하게 소주 몇 병을 카트에 담았다. 상을 받으시고 뭔가 허전하다 싶으셨던 그 순간에 냉장고에서 나온 초록색 병에 ‘아니, 이걸 샀어?’ 하면서 좋아하시던 아버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집에 소주잔이 없어서 머그컵에 소주를 따라 드셨고, 그 이후 언젠가 아버님만을 위한 소주잔을 갖춰 놓게 되었다.

그 힘들다는 ‘워킹 맘으로 두 아이 양육하기’가 아버님의 도움으로 참 수월하였다. 아이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여성보다 더 섬세하고 살뜰하게 보살피시는 아버님으로 인해 남보다 수월하게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느 정도 독립이 되었을 때도 필요할 땐 언제든 집으로 오셔서 유치원 마친 아이를 받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집에 오셔서 방과 후의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기간이 있었다. 막내아들이 늦깎이 목회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일을 하고 밤에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검정 비닐봉지로 꽁꽁 싸인 병이 하나 들어 있다. 낮 시간에 아이들과 떡볶이 간식 사다 드시며 한 잔 걸치시고 남은 막걸리였다. 행여 목회자 아들 집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가 누가 될까봐 어찌나 꽁꽁 싸매두셨는지…….

무엇을 드셔도 척척 소화시키신다고 자랑이시던 아버님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50여일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가신 지 1년이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시기에는, 남은 우리들이 떠나 보내드릴 준비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당황해하며 혼란스러워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니셨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살가운 표현 한 번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믿음 좋은 아내와 자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신다는 식으로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는 빠지지 않으셨다. 교회 일에 열심인 어머님을 향해 ‘내가 수염 영감탱이 예수한테 마누라를 뺏겼어. 아니 영감탱이가 아니지’ 하셨다. 늦게 신학교에 가서 열정을 다해 공부하는 아들이 좋은 성적에 장학금을 받아오자 못내 아쉽다는 듯 ‘이제라도 그 머리로 공무원 시험 봐라’시며 먹고 살 걱정을 하시기도 하였다.

그런 아버님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함께한 마지막 50일 동안 내가 한 짓이 무엇이었던가. 믿음 없는 아버님이 입술로 고백하시도록 해야 한다며 속으로 얼마나 안달복달 했던지. 맘먹고 사영리를 들고 아버님과 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서는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막내며느리가 제격이라며 서둘러라하는 사랑어린 재촉도 있었다. 새벽기도에 가면 내 불안에 겨워 ‘이 땅을 떠나시는 아버님이 당신의 품에 눈뜨게 해달라’며 빗물 같은 눈물을 쏟아내곤 하였다. 설상가상 아버님께서는 심방오신 분들과 예배드리는 걸 거부하셨다. 마지막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병문안을 오셨다. 간단히 예배드리려 하는데 고개를 돌리신다. 싫어하시는 것이 역력한데 그 자리에 계시도록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버님, 한 바퀴 돌까요?’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기도하시는 분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한편으론 불안의 솜방망질이던지. 믿음, 구원, 믿음, 입으로 시인, 구원.... 아, 혼란스럽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만큼 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버님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우연인지 (그 분이 계획하신 필연인지) 연거푸 세 번 씩이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미 의식을 많이 잃으신 아버님께서는 그저 모든 것을 보호자의 판단에 내어맡기고 누워계실 뿐이었다. 마지막 예배는 막내아들이 함께 한 자리였고 예배를 마치고 찬양 한 번 더 부르자는 목사님의 제안이 있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 오셨네’를 부르는 중 ‘예수 안에 생명 있네.’ 후렴을 부르는 순간 우리 착한 아버님 가만히 이 세상을 붙들었던 손을 가만히 손을 놓고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것처럼 이 땅에서의 마지막 50일 동안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큰 육체적 고통도 없이 그렇게 지내시다 하늘 그 곳으로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의 마지막 50일은 한 없이 고요하였는데, 내 마음은 양철지붕에 소나기 떨어지듯 요란했다. 그 요란한 양철지붕 아래에는 ‘나는 믿음이 있고, 아버님은 믿음이 없다’는 일말의 의문도 없는 전제가 숨어있다. 도대체 그 근거 없는 판단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아버님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일하는 엄마’ 였던 내게 든든한 기댈 언덕이셨던 아버님께서 떠나신 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돌봐주시던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돌볼 만큼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아버님께서 내게 무엇보다 큰 숙제와 더불어 엄청난 선물을 남기고 가신 탓이다.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한 마디를 마음 깊은 곳에 넣어주시고 가신 탓이다. 마지막 50일 ‘아버님 믿음의 고백, 입술의 고백....’ 이러면서 안달복달 하던 내 마음의 깊은 동기가 진정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는지, 믿음의 기도였는지를 처음부터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의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하는 영원의 원점 같은 곳으로 돌아와 섰다.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하던 기간과 신종플루 걸렸던 주간 외에는 주일에 빠져본 적이 없다?(이걸 가지고 주일 성수했다며....), 청년 때부터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교회봉사를 했다? 미운 사람이 생겨도 ‘하나님,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예수님 코스프레를 좀 하고 산다? 그런 것들에 근거한 ‘나는 믿음 있는 사람’ 라는 확신에 겨워 살아온 날들에 씌운 거품을 비로소 확인한다.

소주잔을 보면 한 잔 하신 아버님께서 흥에 겨워 부르시던 뽕짝 멜로디가 생각난다. 또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라 하시며 부르시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소심하게 흥얼거리시던 허밍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지막 50일을 걱정 대신 사랑으로 더 잘 떠나 보내드릴 걸’ 하는 후회 같은 건 넣어두려 한다. 터무니없는 ‘자기의’의 발로로 발을 동동 구르며 보냈을지언정 아버님과 하늘 아버지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 같은 사랑의 교제가 있었을 터이니. 또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 없음에 관한 걱정이랑 집어치우고, 과대 포장된 내 믿음의 자가 평가서나 돌아볼 일이다. 다만, ‘거기서 해처럼 밝게 빛나실’ 아버님이 오늘 더욱 그리운 것이다. 소주잔을 닦다 그 투명한 유리에 어른거리는 아버님의 모습이, 생색내지 않으셔서 더 따스했던 그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입으로는 ‘하늘소망’을 그럴 듯하게 노래하면서도 마음으론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천국이다. 이 땅에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손주의 작은 손을 놓자마자, 바로 그 순간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생각하니 천국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우리네 삶과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 곳인지. 아버님과 함께 한 13년 동안 내가 필요한 것을 그렇게 주시기만 하시더니 떠나시면서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두고 가셨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소주잔에 남겨두신 사랑과 선물이 어른거린다.

 

 

 

 

 

2011년 고난주간을 지나던 어느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가벼운 증상으로 입원하셨던 아버님이 위암 선고를 받으셨다. 60대, 아니 50대 같은 70대 아버님이었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을 처음 경험한 날이다.  처음 병원에선 6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했지만, 2개월이라고 하더니 50일이 되지 않아 6월 7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50일은 그렇게 건강하셨던 아버님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도 짧은 시간이었다. 죽음은 늘 그렇게 예고 없이 우리를 덮친다. 아버님의 병든 몸에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너무 짧은 봄이었다. 하지만 그 짧았던 봄은 내게 기나긴 여운을 남기며 소위 '부활 신앙'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비로소(그렇다, '비로소'다) '부활 신앙'을 실존적으로 믿게 되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이 구절을 전율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믿어졌다. 천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백지 한 장 너머에 아버님 계신 천국이 실재하는 것 같았다. 반짝, 하고 마는 믿음이 아니었다. 더는 신학적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었다. 이생의 짐이 버거워 그려보는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실체였다. 부활과 천국이 관념이 된 것은 일찍이 재난처럼 닥친  아버지 죽음의 경험이었다. 목사 아버지의 죽음이 천국의 관념을 심어주었고, 관념에 붙들려 분열의 일상을 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음 없는 시아버지의 죽음은 '몸'의 부활을 일깨웠다.   

 

아버님과 함께 한 마지막 50일, 아버님 몸과 함께 하였다. 학교 숙제, 피아노 연습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지만 거의 매일 저녁, 모든 것을 멈추고 아이들과 함께 아버님께 갔다. 고작 가서 멍하니 텔레비전보다 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무작정 갔다. 원래 말씀이 없으시지만 더욱 조용해지신 아버님, 가까스로 농담이라도 한 마디 하시면 가슴에 금이 가곤 했다. 주방 구석으로 가 숨죽이고 울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시기 전날에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두둑이 주셨다. '고맙습니다' 늘 하던 말 외에 할 수 없는 아이들, '그래' 하시는 아버님. 아무렇지 않아서 더 특별한 고통이었다. 설마 이것이 마지막일까? 마지막 용돈일까? 설마 그럴 수 있을까? 스치듯 생각했지만 마지막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셔서는 더 빠르게 멀어져 가셨다.

 

세월이 지나야 보이는 것이 있다. 돌아보면 그 50일,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의연했었다. 겨우 예배를 가 주는 정도로 신앙생활 하셨던 아버님의 '구원의 확신'에 안달복달했고, 내내 눈물로 보낸 50일이지만 꽤 어른스러웠다. 회피하지 않았다. 야위어 가는, 두려움에 더욱 긴장되어가는 아버님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고 마음에 담았다. 한 달 남았다는 진단 후에는 손발 오그라드는, 웬만해서는 누구한테도 할 수 없는 표현을 담아 메시지를 드렸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그 문자를 확인조차 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수줍음이 많은 아버님께서는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으셨다. 특히, 그 50여 일은 거의 입을 떼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님께 평생 '사랑한다'는 고백을 제일 많이 들은 사람은 채윤이와 현승이다. 그 다음은 나다. 비록 문자였지만 생애 마지막 시간에 남겨주신 말씀이다. '사랑한다 둘째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등극시켜주셨고, '둘째 딸아, 둘째 딸아' 하고 불러주셨다. 

 

아버님과 떠나시기 며칠 전, 오후 내내 아버님 곁을 지킬 시간이 있었다. 전날 채윤이가 "할아버지 손톱이 너무 길어요" 했던 말이 생각 나 손톱깎기를 챙겨갔다. 손톱 발톱을 깎아드리고, 손을 꼭 잡아 드리고, 쓰다듬어 드렸다. 죽음 같은 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 찢어지는 슬픔에도 피하지 않았다. 어려웠던 시아버님이었다. 수줍음이 많으셔서 더 조심스러웠다. 어쩐지 하나도 어려운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그날 집에 와 긴 글을 썼었다. "아버지다, 내 인생 두 번째 아버지다." 첫 아버지를 죽음에게 뺏길 때는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렇게 당한 재난으로 평생 구멍 난 마음으로 살았지만, 두 번째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후 강의하러 나가려는 순간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 울음에 묻힌 격앙된 목소리의 남편 전화를 받았다. "어서 와, 빨리 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대로 달려가 꼬옥 감은 아버님의 눈을, 아직 온기가 남은 아버님의 손을 매만지고 붙들었다.  

 

평생 그렇게 두려워 했던 죽음을 어떻게 그렇게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아닌 착한 아버님, 우리 아이들을 살뜰히 키워주신 것에 대한 사무치는 고마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암 선고받으시던 날, 병원 바닥을 뒹굴며 "아빠, 아빠" 하며 울던 시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채윤, 현승이의 '낮의 엄마'인 할아버지인데, 아이들이 느낄 상실감을 어떻게 만져줘야 할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평생 아버지와 살갑게 지내지 못한 남편이 진 죄책감의 짐이 가여워서 나라도 잘해야겠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즈음 나는 '신앙 사춘기' 어두운 숲에 있었다. 정점을 지나 일말의 빛을 감지하고 있었던 때다. 어릴 적 아버지 이미지와 혼재된 하나님, 그리운 아버지인 듯 무서운 심판자인 듯한 하나님 이미지를 버리고 새로운 관계에 돌입하는 중이었다. 아버지 죽음이 남긴 상실감의 공간을 채우던 종교 중독을 알아채고 멈추는 중이었다.

 

위로부터의 영성에서 벗어나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걸음마 하듯 배우는 여정에 있었다. 신앙의 이름으로 초월하고 회피했던 인생의 어두운 면들을 비로소 마주하는 힘이 조금 생겼을 때, 그때 아버님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암 선고는 아버지 죽음처럼 예고 없이 닥쳤지만, 시간이 주어졌다. 6개월 남았습니다, 아니 2개월 입니다, 한 달입니다. 6개월 예상이 결국 50일이 되었지만 아버지 죽음과 견주면 예행연습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50일, 허튼 부활 신앙 같은 것으로 도망치지 않고 오직 아버님의 몸을 마주했다. 교회에서 심방 오신 분들이 싫다 하시면 휠체어를 밀고 피하게 해 드렸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만만치 않았다. 마음의 전쟁은 끝이 없었지만 적어도 아버님의 몸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아버님을 보내드린 후 부활의 소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천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 소망으로 아버지 죽음 또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아버지를 뺏어간 하나님도 화해했다.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를 아버님 죽음으로 세심하게 치유해주시는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하늘 아버지와 두루 편안해졌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사라졌다고 존재가 사라질 수는 없다. 불가능이다. 아버님은 몸 그 이상이었다. 암 환자의 몸으로 사신 세월은 짧다. 아주 오랜 시간 힘세고, 건강하시며, 좋은 손재주로 뭐든 고쳐주시고, 닭백숙도 잘 끓이셨다. 그런 몸이었다. 몸이 쇠약해졌다고 아버님의 존재가 어찌 되지는 않았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님은 존재하셔야 마땅하다. 교리에 매여 아버님의 구원을 운운하던 50여 일이 부끄럽고, 부끄러울수록 아버님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 깊이 믿어진다. 아버님이 남기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2 00:14 신고

    그 선물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한 우리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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