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머님 이사한 집에 다녀왔습니다. 어머님은 언젠가부터 작은 화초를 키우고 계십니다. 널따란 베란다 한 귀퉁이에 몇 개, 탁자 위에 몇 개, 아예 보이지 않는 베란다 안 쪽 창고 근처에도 한 두 개 흩어놓으셨길래 한데 모아 정리를 해드렸습니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바라보시더니 '화분이 벙글벙글 웃는다.'하셨습니다.


2.
아버님 돌아가신 지 2년 반이 되어갑니다. 아버님이 암선고를 받으시고 40여일 투병하시는 동안 정성들여 키우시던 화분이 시들어갔습니다. 돌아가시고 난 후에 시든 잎들을 정리하고 버리고나니 엉성해진 품새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슬펐습니다. 한 개 두 개 없어지기도 하고 아침 저녁으로 칙칙이로 물을 뿌리며 돌보시던 그 화분은 아버님과 함께 다 거의 사라졌습니다.


3.
크나 큰 슬픔 속의 어머님은 작은 일에도 상처받으시며, 받은 상처를 어머니만의 방식으로 쏟아내시며 질곡의 시간들을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도 힘드셨고 그 곁을 지키는(아니, 사실 곁을 지켜드리진 못했습니다.) 이들이 다들 힘들었습니다. 막내 며느리에게 기대가 가장 많으셨고, 마음을 기댈 언덕으로 생각하시는데 그 누구보다 막내 며느리가 어머니께 가까이 가지 (못했)않았습니다.


4.
막내 아들 가정의 삶을 늘 자라스러워하시고 부러워하십니다. 작은 화분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하신 것도 오실 때마다 '화분이 참 잘 자란다.' 하시며 유난히 눈길을 주시던 우리집 작은 초록이들에 끌리신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채윤이 에미랑 얘기할 때 말이 제일 잘 통하는데 채윤이 에미가 전같이 않아서 많이 섭섭하셨을 것입니다. 채윤이 에미가 병원도, 피정도, 상담도 모시고 다니던 때가 그립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작은 화분을 모으며 그리움, 상실감 같은 것들을 달래셨겠지요.


5.
2주 연속 어머님이 혼자 지하철을 타시고 주일마다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다. 많이 칭찬해 드리고 점심도 사드리며 무한 격려를 했습니다.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낯선 곳을 가 보기'를 너무 귀찮아(두려워) 하셨고, 이 지점은 어머님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중요한 결단의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난공불락처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두 주 연속 스스로 하셨습니다.


6.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로 누구보다 강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신 어머니. 결심하신대로 누구보다 강한 사람, 완벽한 신앙인으로 살아오신 세월인데 그렇게 살기 위해 잃은 것이 많으십니다. 그렇게 잃으신 것들이 아버님 돌아가신 이후에 쓰나미 같은 고통으로 어머니를 덮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하고 어머니의 외로움과 아픔이 눈에 들어왔던 나는 어머니의 상담자, 치료자를 자처했습니다. 언감생심이었지요.


7.
내가 어머니의 치료자는 커녕 상담자? 아니 상담자는 커녕 말벗도 될 수 없다고 느낀 지짐이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나를 과신했는지, 내가 스스로를 얼마나 혹사시켰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아버님이 떠나시고 아버님의 화분이 하나 씩 사라져가면서 어머니와 쌓았던 진한 관계들이 다 끊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8.
좋은 징조들이 보입니다. 어머니가 혼자 지하철을 타고 움직이셨고, 채윤이 현승이의 어여쁜 마음이 할머니께 사랑으로 다가갑니다. 오늘 어머님 댁에서 화분을 정리하다보니 여기 저기 흩어져있는 화분이 꽤 되고, 모아 놓으니 그럴듯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것이 참 예뻤습니다. 줄을 지어 세워놓으니 몇 년 전 암사동 홈타운 살 때의 우리집 베란다와 싱크로율 90%였습니다. 어머니가 슬픔 속에서 키우신 생명들입니다. 탈상, 죽음의 옷을 벗는 순간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만 생각하면 막막한 절망감으로 기도조차 이어지지 않았는데, 어머니와 어머니의 하나님은 탈상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9.
요즘 어머니를 뵈면서 자꾸 입에서 '탈상, 탈상' 이 말이 맴돕니다. 오늘 매만져드린 어머니의 초록이들이 심증에 확증을 주었습니다. 햇볕을 쏟아 부어주시는 어머니의 베란다. 그와 달리 아침에 잠시 드는 볕으로 그럭저럭 잘 자라고 있는 우리집 초록이들. 이 녀석들도 멀리 있는 어머님 댁 초록이들에 공명하며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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