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현승이와 단둘이 차를 타고 오가는 길에는 늘 새로운 주제의 이야기 꽃이 피곤한다.

 

엄마, 나 장난감 좀 사 줘. 아무거나 내가 사달라고 하는 걸 그냥 딱 사 줘.

나 어린 아이로 엄마한테 장난감을 받고 싶어. 나 좀 이상하지? 히히.

아니, 안 이상해. 그런 마음 이해해. 엄마는 어른이어도 그럴 때 있는데.

엄마, 엄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뭘 어떻게 생각해?

아기로 생각해, 아니면  다 큰 아이로 생각해?

둘 다야. 어떤 때는 아기같고, 이렇게 얘기할 때 보면 어른하도 대화할 때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통하는 것 같애. 

에이, 나는 아이로 생각해주는 게 좋은데.

 

 

집에 돌아와서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방에서 혼자 놀던 현승이가 다가와 백허그를 하면서.

 

엄마, 난 엄마가 좋아다. 엄마 나는 엄마가 죽으면 살 수 없어. 

엄마가 죽으면 자살할 거야.

 

가슴이 콱 무너져서 고무장갑 벗고 안아주며 안심을 시켰다. 그리고 다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뒤통수가 뜨끈해져서 돌아보니 방으로 갔던 현승이가 뒤에 다시 서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그런 현승이 앞에서 갑자기 너무 당황이 된다. '무슨 소리야! 엄마가 왜 죽어? 엄마 안 죽어.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현승아, 엄마는 내일 죽을 수도 있어. 그러면 너는 그걸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할 뻔 했다. 왜냐하면 내 삶에서도 부모의 죽음은 예고없이 닥치는 공포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1 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내 인생에 남긴 흔적은 어떻게도 지울 수가 없다. 내 아버지가 그렇게 믿어지지 않게 죽었는데 '엄마 안 죽어'라고 뻥을 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막 가슴이 무너졌다. 현승일 안고 '엄마가 여기 있잖아. 엄마가 지금 여기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만 반복했다. 잠들기 전에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현승이가 그랬다. '엄마, 나는 너무 행복하면 두려워져. 아까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하니까 엄마가 죽을까봐 걱정이 됐어' 현승이의 또 다른 엄마였던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이해하기 힘든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너무 어린 나이게 경험한 것이다. 엄마와 아들의 트라우마가 교차한 것이다.

 

다음 날 모임에 가서 상담 선생님께 이 얘길 했다. 그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시며 말씀하시길 '선생님이 아이를 너무 진솔하게 어른 대하 듯하는 것은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아이는 아이니까 아이로 대하면서 안심을 시켜줄 필요가 있겠다.'라고 하셨다. 돌아와서 현승이에게 '현승아, 엄마는 안 죽을 거야. 현승이가 어른 될 때까지 현승이 옆에 늘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 봐라. 엄마가 이 나이 되도록 건강하게 살아계시잖아. 엄마도 그럴 거야' 했다. 그랬더니 '그건 엄마가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엄마. 사람이 언제든 죽을 수 있잖아. 사고가 날 수도 있고. 나는 그런 말을 한 거야' (안 통한다)

 

동생에게 현승이 얘기를 했다. 동생은 MBTI로 현승이랑 같은 NF. 이런 고민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4학년 이후로 내내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었다고. 깊이 고민하고 답을 찾지 못했는데 어른이 되어 철학책을 읽다보니 자신이 고민했던 그 고민이 모든 철학자들의 고민이었다고. 현승이는 조금 일찍 그런 고민에 직면하면서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구나. 같은 아버지의 죽음을 동생과 나는 전혀 다르게 경험해왔었구나. 동생은 죽음이라는 것에 침잠한 반면 나는 그것이 두려워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준비되지 않은 어린 두 아이가 나름대로 상실감 속에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식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 부재를 일상에서 몸으로 느끼며 결핍감에 허덕였고 동생은 그것을 형이상학적인 고민으로 가져가 존재론적인 결핍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래,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동생과 나를 돌아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현승이 걱정을 너무 많이 하지 않기로 했다. 

 

나와 현승이가 이러고 있는 사이 남편은 새벽기도에서 '죽음을 짊어진 삶'을 설교했다고. 신해철의 죽음으로 다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년 전 아버님과 한솔이를 한 달 차이로 떠나보내면서 남편과 나, 현승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깊이 드리워진 이 실존적인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상여를 따라가던 길에 아버지 친구 목사님에 내게 그러셨다. '울지 말아라. 아버지는 지금 천국에 가 계신다. 울자 마라' 그리고는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찬송을 따라 부르셨다. 그때는 정말 뭔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지만(그런데 왜 기억엔 남아 있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참 의미없는 말이다. '이번에 서울 가믄 신실이 피아노를 알아보고 오겠다'고 간 아버지가 사라졌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아는 게 위로가 될 일인가. 아직도 내게 신앙심이 부족해서 '천국에서 만날 것이다'라는 말이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그닥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입주민에게 모욕을 당하고 분신하신 경비원 아저씨가 결국 돌아가셨다고 한다. 생활고로 목숨을 버린 세 가족 중 열두 살 짜리 아이가 남긴 유서를 보고 눈물 대신 현기증이 났다. 아프고 억울한 죽음의 소식들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나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죽음과 맞닥뜨려 죽어내셨다는 것이 그나마 슬픈 희망이 된다. 그리고 부활하셨는데..... 아,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억울한 죽음으로 아이를 잃고,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이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린 현승이에게, 그리고 내게 뭐라 말씀하실까?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 라고 브레넌 매닝이 말했다. 현존하는 부활을 사는 일상을 다시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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