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을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진정한 자신과의
'연결이 필요한 영혼'으로 봅니다.
새로 시작한 [Ruachd루아영성심리연구소]에서 제작한 브로셔 앞면이다. 고쳐야 하는 인간이 아닌, 연결이 필요한 영혼. 이 말이 알아들어져 연구소를 시작했는데. 갈수록 얼마나 무모한 확신인지를 깨닫는다. 에덴동산을 나온 인간의 실존은 '손상된 자아'가 맞다. 손상되었으니 고쳐야 한다, (내가) 고치겠다는 태도를 갖지 않겠다는 뜻이다. 고치는 방법도 모른다. 다만, 손잡고 연결될 뿐이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6년 동안 많이 울었는데. 후원금이 없어서가 아니다. '연결된 영혼'과 '손상된 자아' 사이의 긴장과 불신을 겪어내야 하는 아픔이었다. 때로는 외로움이었다. 나 스스로 나를 믿어주지 못하고, 뜯어고쳐야 하는 인간으로 여기며 비하하기도 하였다.
가 본만큼만 안내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말은 저 100m 앞, 200m 앞에 던져놓을 수 있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까지가 진짜이다. 내가 나를 수용하는만큼, 내가 나와 화해한 만큼 사람과도 하나님과도 화해하는 것이라, 아침 기도 때마다 다시 새롭게 새겨야 하는 말이다.
6년 전 연구소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개소식에서 “치유의 실”이라는 공동 작업을 했다. 못이 박힌 하얀 캔버스를 준비했다. 그 못은 외롭게 고립된, 차가운 개인의 상징이었고, 붉은 치유의 실로 못과 못을 연결했다. 여러 번의 소그룹 개소식에 참여한 이들이 작업에 참여했다. 여전히 진행 중인 공동 작업 '치유의 실'이 연구소 한 벽을 꽉 채워 걸려 있다. 이번 [Ruachd루아영성심리연구소] 시작 예배에서 못 박힌 캔버스를 새로이 준비했다. 새로운 심볼에 담긴 세 가지 색의 실로 같은 작업을 했다. 상징, 상징의 언어는 참 아름답다.
손상된 자아와 연결이 필요한 자아 사이에서 겪어내야 할 것들이 있겠으나 이 상징물이 늘 내게 말한다. 상징으로 말씀하시는 내 안의 성령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둘은 둘이 아니라고. 작가인 나와 소장인 나, 소장인 나와 엄마인 나, 엄마인 나와 아내인 나, 아내인 나와 친구인 나, 친구인 나와 사모인 나, 사모인 나와 길에서 스쳐 지나는 아줌마인 나. 다 하나라고. 하나로 살고자 한다. 손상되고 부서져 갈라진 여럿의 내가 아니라 오직 연결이 필요한 영혼인, 하나인 나로 살고자 한다.
상징적 (symbolic)이라는 말은 함께 던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사악하다 (diabolic)는 말은 나누어 던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악은 언제나 이중적으로 분리시키려고 한다. 영혼과 육체를, 지성과 감성을, 신과 인간을, 여성과 남성을, 결별과 분리가 일어나는 곳에 사탄은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중략) '상징주의'는 언제나 흩어진 것들을 다시 연결시킨다. -리처드 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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