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짐을 꾸리면 책 두어 권을 꼭 들고 가는데... 돌아와 짐을 풀다 보면 두 권의 책이 세 권, 네 권이 되어 있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니까 현지 독립서점에 들러 꼭 또 사고야 마는 것이다. 눈으로 확인한 책을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10% 할인을 받는데다, 총알배송으로 여행에서 돌아가는 나보다 먼저 현관에 도착해 있겠지만. 꼭 그 자리에서 정가를 주고 사는 것이다.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책은 그때 그 여행의 기분을 그대로 담고 있다.
채윤이 미국 가기 전 네 식구가 한 마지막 여행은 부산이었다. 그렇게 더울 수 없었다. 날씨를 비롯해 뭔가 다 조금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숙소도, 음식도, 일정을 결정하는 네 사람의 마음도... 더위 탓이기도 했고. 뭐든 마음에 들어 기분 좋게 누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별 여행'이 아니던가. 여행 끝에 집에 돌아오면 긴 이별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 여름, 그 부산... 현승이 훈련소에 내려놓고 돌아오던 양평 드라이브길, 채윤이 떠나던 날의 공항 같은 고통의 여행이다.
부산 어느 독립서점에서 산 책이다. 《연결된 고통》 이기병,》이기병, 아몬드
그 여행 중에 다 읽어 버렸다. 가리봉동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하 외노의원)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며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와 성찰의 글이다.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고, 무엇보다 아픈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가 들어 있기에 술술 읽힌다. 간간이 친절하게 설명하는 의학 지식도 있고. 그 모든 술술 읽히는 아픈 이야기를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연결이다. 건강과 불건강, 몸과 마음, 삶과 죽음, 나와 너의 이분법의 근대적 관점에 관한 질문이다. 관념적 질문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체험적인 물음이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 표현으로 하자면 '이것 아니면 저것'의 관점에서 '제 3의길''제3의 길'로의 전환이다.
우리 삶과 질병을 재단해 온'이분법'이 고통을 줄이는지 아니면 되레 부추기는지는 끈질기게 응시해야 한다. 이 책에서 면면히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의 고통은 겹겹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 삶과 죽음,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의 고통이 모두 그러하다.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재단되어 목소리를 잃은 고통이 언젠가 나와 당신의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이 글의 목적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호 호환되는 이 세상에서 그것이 단 한 사람의 것일지라도, 누군가의 고통을 해석하고 줄여보고자 하는 작은 노력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그 단순한 사실을 환기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연결된 고통》252쪽
참 아름다운 책이다. 갈라지고 쪼개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고통'이라는 것을 삶을 살아 통찰했으니 말이다. '연결된 고통'은 결국 '연결하는 고통'이다. 고통을 마주하지 않으면, 드러내지 않으면, 연결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목 '연결된 고통'은 그런 의미에서 '연결하는 고통'으로도 읽힌다.
교회 독서 모임에서 3월의 책으로 읽고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고통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의 고통, 어느 이름 없는 약자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분리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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