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을 달리다보면 암사동을 지나서 강동대교로 가는 길에 고개가 있습니다. 결혼 전에 구리에 살 때 항상 그 오르막을 오르고 내려서 강동대교를 타고는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그 즈음은 대학원 다니면서 과외를 할 때였는데....늦은밤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그 고개를 지날 때쯤이면 '이제 집에 다 왔다. 하루 일이 다 끝났다' 하는 안도감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언젠가 오랫만에 그 길을 혼자 운전하고 지나는데 그대로 강동대교를 넘어 구리로 가면 엄마랑 동생이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내 자유로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남편은 학기 중이었고 아이들 때문에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운전을 하고 집에 가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미혼 때의 그 자유로움이 마구 그리워지고, 또 계속 생각을 발전시키다보면 남편과 아이들이 내 자유로움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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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오면 밥을 먹이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쾌적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공부를 봐주고, 사역을 도와야할 많은 책임감으로 주부로서의 저는 자유로움이나 여유가 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가끔 아이들이 먼저 나가고 혼자 집에 있다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때는 조금 낫지만 어찌됐든 집에 있으면 자유로움이나 여유는 잊어줘야 하지요. 대부분의 주부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요?  

오늘은 집에 있는데도 '여유, 자유' 가 내 것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나갔습니다. 예매를 하면서 '당신도 갈거야?'라고 묻는 것을 꼭 '안 가도 된다'는 것으로 들어버리고 셋을 묶어서 내보냈습니다. 그러고 나니 집에 있는데도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여유가 있어야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거실의 탁자 앞이죠. 읽는 책, 새로 읽을 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탁자 앞에서 구리로 넘어가는 88도로를 운전하는 느낌이 살짝 드네요. 오랫만에 이런 느낌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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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털보 2008.01.16 18:03

    그럼 원래 여자란 존재가 여유와 자유를 가진 존재의 준말인 건가요?
    여자가 그 여유와 자유가 없으면 아줌마나 주부가 되는 건가 봐요.

    • larinari 2008.01.17 11:09

      하~ 호모 로퀜스! 과연 언어의 달인이시옵니다.
      제가 일찌기 언어의 모양을 갖고 좀 노시는 분들은 봤지만, 언어의 모양에다 의미까지 이렇게 재밌게 주무르시는 분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제 글에서 '여자'는 '여유와 자유'였사옵니다.

    • BlogIcon mary-rose 2008.01.17 20:26 신고

      호모 로퀜스 지난주에 읽었는데 실망!
      이책을 읽으면 이분같은 언어의 달인은 어찌 될 수 있는건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거든.
      근데 그런 내용은 아니더구만 ㅜ.

      아주 가끔씩이라도 이런 '여자'가 될 수 있기를...

  2. h s 2008.01.16 20:43

    저도 남자지만 결혼을 하면 남자는 거의 좋은 것들이 많고,
    여자들은 거의 불편한 것들이 많은 편이죠?
    내가 결혼을 했을 때는 그런 것을 몰랐는데 딸을 결혼시키고 보니
    그런 것을 알게 됩디다. ^^
    위글을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치만 그 당시에는 그 여유가 좋은 것을 못 느끼며 살겠죠?ㅋ

    하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살면 그 이상의 행복을 느끼게도 되잖아요?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시는 모습에 저도 참 좋네요. ^^

    • larinari 2008.01.17 11:12

      자유를 좀 손해보는 것으로 따지면 결혼한 남자분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런데 확실히 여자들은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소소한 일상을 책임져야 하나보니께 더더욱 소소한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엄마들이 많이 하셨던 말씀.
      아침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점심 먹을 걱정, 점심 치우고 나면 저녁 걱정.
      결국 하루 종일 식구들 먹이고 입히는 반복되는 일이 엄마의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 일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느껴야 엄마로서 여자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야 가족도 행복하구요...^^

  3. BlogIcon ♧ forest 2008.01.17 10:42

    간만에 여유와 자유를 호흡하셨군요.

    이제 다시 바쁜 주부로 돌아와 계시겠지요.ㅎㅎㅎ

    • larinari 2008.01.17 11:14

      빙고!
      여유와 자유 한 서너 시간.
      바로 세 식구 들이닥치시고

      '빨리 저녁 차려내라 수요예배 늦는다'
      '내복 젖었다. 다른 내복 꺼내달라'
      '이거 내가 아끼는 건데 망가졌으니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달라. 빨리 고쳐달라'

      정신을 쏘~옥 빼놓으셨지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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