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은 정서적 영적 성장을 위한 보물창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에니어그램을 공부하고 강의하기 전에도 어렴풋이 모르지 않았었다.
엄마와의 복잡다단한 애증이 해결되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엄마와의 그것은 그대로 어린시절 부터 있어왔던 피해의식과 분노이기도 했었다.

과연 어린시절은 보물창고다.

그러나 이런 표현과 접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반감으로 더 거리를 두게 한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럽다. 에니어그램과 내적여정 강의를 할 때도 '어린시절'을 다룰 때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다.






'어린시절 작업'(이라고 부른다. 보통) 을 하면서 맨 처음 나는 '행복하고 사랑 많이 받은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과연 그랬다. 늙은 목사님에게서 태어난 딸이었다. '이삭'이라 불리며 엄마 아버지는 안아볼 새도 없이 여기서 저기 예쁘다고 데리고 다녔다고 했다. 개구장이 동생이랑 늙은 엄마 아버지를 놀리고 재롱을 떨면서 재밌고 소중한 추억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충격으로 분명 내상을 크게 입었다는 정도였다.


(갑자기 딴 얘기, 그러나 같은 얘기)


정말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수 년 전에 만난 사람이다. 우리 교회에 부임한 어느 부교역자의 사모님이었고, 나는 '사모님'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마음이 있기에 참 반갑게 따스하게 대하고 싶었다. 헌데 처음 대면부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느낌이더니 대체로 나를 받아주질 않았다. 딱히 자주 마주치는 관계도 아니었기에 '나같은 스타일 별론가보다' 했었다.(그 때 난 평신도였었다)
나중에 이 사모님이 청년시절 후배의 친구라는 걸 알았다. 그 후배는 그야말로 뭔가 나랑 잘 맞지 않는 아이였고 여차저차한 일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 아이다. 그 애 역시 그럴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친구로부터 나라는 사람에 대한 얘길 들었고 그 정보를 가지고 처음부터 나라는 사람을 제꼈다고 생각하니..... 난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용서할 수가 없다.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할 때마다, 그 분의 자서전을 읽으며 전율하는 부분이다. 한 두 사람이 아닌 국민 대다수로부터 그저 그냥 무조건 '김대중'이란 이름이 '빨갱이'라는 등식으로 가는 이 하늘 무너지는 억울한 오해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리고 돌아가시고 난 후 알았다. 이 분이 정말 예수님을 만난 참 신앙인이셨구나.
김대중 대통령께서 전두환을 용서했을 망정 나는그 사모님에 대한 마음을 해결할 길이 없다고 느낀다. 이 한 마디를 그 마음에 꽂아주고 싶다. '성경에 있습니다. 엄히 말하노니 편견을 버리라' 당신의 편견으로 제 영혼을 한 순간 말라비틀어졌었습니다.








3학년, 6학년 때 두 번 왕따를 당했다. 6학년 때는 정말 심했던 것 같다. 이 왕따 이야기가 가끔씩 가볍에 떠올리며 했던 작업이기에 그리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를 겪어보지도 않고 어디서 들은 편견을 가지고 나를 거절해버린 그 분에 대한 과.도.한 분노가 어디서 오는가? 분명 과.도.하다. 얼마나 과도하면 일생에 용서할 수 없는 일로 표현을 하겠는가? 내 안의 어딘가에서 오는 과도함인 걸 안다.
왕따를 시켰던 아이가 그랬다. '넌 나보다 이쁘지 않아. 내가 제일 예쁘고 그 다음이 너야' 그러면서 어떨 때 자신의 그룹에 넣어주고 잘해주다가 나를 왕따시키기 시작하면 무서웠다. 반에서 어떤 아이도 나하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나는 죽어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위 사진을 꺼내 보면서 왕따가 한창이었던 6학년 때의 내가 어땠나를 생각해봤다. 대체로 나는 까불고 밝은 아이였다. 사진들이 그렇다. 6학년 때 사진은 확실히 다르다. 함께 사진을 찍은 친구가 울면서 나에게 말했었다. '너랑 얘기하면 안 돼'  그 시절이 지나고 중학교 가서 잘 지내다가 2학년 때 전학을 왔는데 그 때 헤어지면서 저 친구가 많이 울고 미안하다고 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날 찍은 사진이다. 어쩌다 공부좀 한다는 여자애들이 통틀어 모여서 찍게 되었다. 이 날 나는 독감으로 무지 아팠다. 여기서 한복을 입은 아이들은 나를 왕따시킨 아이와 그 일에 앞장섰던 아이들이다. 세월이 지나고 다시 만나서 잘 지내고 있지만 이 사진의 나 역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마음에 상처받은 아이가 울고 있다고 한다. 사실 그런 표현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만 , 누구나 마음에 큰 결핍이 있고 상실감이 있다. 대체로 어린시절의 경험과 맞닿아 있고 그걸 다루는 것,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빛에 그 결핍과 상처를 비춰보는 것은 꼭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왕따로 인해서 나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왕따로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나를 위해 엄마가 학교에 찾아왔다. 담임선생님이 알게 되고 반의 남자 애들이 알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늘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었는데 어쩌면 그 왕따 사건으로 인기가 더 좋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한테 자꾸만 '넌 나보다 예쁘지 않다'고 말했던 그 친구가 내 인기가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왕따를 당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엄마가 심어준 치명적인 마음의 습관이 있다. '니가 모가 나서 그러는 거다. 교만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 이런 훈계였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은 둥근거예요.
나만이 잘났다 하지 않고요.
모지고 외톨이 되지 않아요.
언제나 웃으며 사이 좋지요.

이 노래는 딱 나의 노래가 되었다. 모지고 외톨이 되는 건 나다. 왜냐면 나만이 잘났다 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상을 받아와도, 누가 날 이쁘다 한다해도, 내가 어디서 뭘 잘했다고 해도 일단 이렇게 말했다. '교만허지마. 교만허믄 안 돼. 그게 다 니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녀'






몇 학년 때인지 모르겠다. 어린시절에 기억하는 나는 저 아이다. 밝은 아이다. 늙은 엄마가 브로치 꿈을 태몽으로 꾸고나서 브로치처럼 이쁘지만 약한 아이여서 애지중지 키웠을 것이다. 목사 사모이면서 생계를 위해서 비단장사를 했기 때문에 나름 패션 감각이 있어서 장에서 이쁘다는 옷은 다 사다 입히면서 이쁘게 키웠다고 했다.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하고 시골 애 같이 안 생기고 이뻤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면 교만한 아이기 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왕따 당하거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건 역시 내가 교만하고 잘난 척하는 것이 이유다.


 




얼마 전 왕따 당하는 채윤이를 보면서 주체할 수 없었던 감정,
그리고 어떤 계기로 올라온 감정과 그 감정을 따라 내려가면서 '왕따'를 다시 맞닥뜨린다.
내 속에 왕따 당한 어린 아이가 울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미 다뤘던 작업이라 생각했지만 아직도 울고 있는 것 같다. 울다가 분노하고, 울다가 수치심에 웅크리고, 울다가 지치기도 하면서 어른이 된 오늘의 관계를 좌지우지 하는 것 같다.
다시 직면하려고 한다.
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랑스러운 아이(사란)이라 생각하며 동시에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느낀다. 내 실체를 알며 모두 날 싫어할 거라 느낀다. 나는 뭣도 잘 하고 뭣도 잘 하고 사람들에게 호감형이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관계의 실패자라 여긴다. 언젠가는 관계가 틀어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나를 질투하여 왕따시키는 타인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동시에 내가 교만하고 모가 난 탓이라 여긴다. 그 사이에 늘 끼어있다.
답을 어디서 찾을 지, 그 아이를 어떻게 다시 만나 달래주고 보듬어 줄 지, 늘 그렇듯 공식같은 해법은 없지만 어떤 모양으로든 그 분의 사랑의 빛 앞으로 가져가려고 한다.


사진의 저 아이처럼 도도하고 교만해 보이는 아이와 왕따 당해 울고 있는 아이가 통합되고 아직도 과거를 살고 있는 내 마음에 그 덫에서 조금 자유로와지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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