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바쁘면 안되겠다 싶다.
특히 둘 다 정신적인 에너지를 많이 써는 건 더더욱.
어젯밤은 다음 날 새벽 설교를 앞 둔 남편,
긴장 속에 처음 TV 방송 녹화를 하고 온 엄마가 별 일 아닌 것으로 감정이 상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감정이 상한 건 엄마고, 아빠가 평소처럼 받아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긴장과 침묵이 거실로부터, 주방, 안방.... 온 집안을 휘감고 있었다.
현승이 조용히 자기 책상에 가서 일기를 썼나보다.




일기
다 썼다며 엄마에게 가져왔는데 아~나, 진짜!


제목 :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짜증이 안 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안 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한테는 화도 짜증도 안 났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가 지금 화나 짜증이 났으면 빨리 풀렸으면 좋겠고
화나 짜증이 안 났으면 화난 것처럼 안했으면 좋겠다.
나는 어떻게 엄마가 화난 것처럼 보이냐면 원래보다 말이 없다.
우리 엄마는 화가 나면 말을 별로 안한다.
우리 엄마가 이 일기를 읽고 화가 더 날 수도 있고 화가 풀릴 수도 있다.





엄마는 이 일기를 읽고 화가 더 난 것도 아닌데, 화는 풀렸는데....
할 말을 잃어서 말이 더 없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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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의피리 2012.08.31 10:34

    아빠보다 백배 천배 더 나은 아들이로구나.
    나는 점점 쇠하고 아들은 날로 흥해라!

  2. forest 2012.08.31 12:33

    현승이가 엄마가 일기를 보는걸 아는군요. ㅋ

    부부가 함께 바쁘면 안된다는 말에 절대 절대 몇백배 공감.
    그나저나 이제 라됴에서 티비로 진출? 감축하나이다.^^

    • BlogIcon larinari 2012.09.01 23:34 신고

      아직은 일기 쓰면 바로 가져와서 엄마한테 검사받는 초3입죠.^^
      티브이 담엔 더 진출할 곳이 없는 거죠? ㅋㅋ

  3. song Kim 2012.08.31 15:12

    아드님 글 솜씨도 장난이 아니군요 ㅎㅎ
    아이들이 눈치 볼 때 가장 미안하더라구요

    • BlogIcon larinari 2012.09.01 23:36 신고

      맞아요.
      애들이 엄마 아빠 눈치를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면
      '내가 지금 엄마가 돼가지고 뭔 짓을 하는 건가.' 싶어요. ㅠㅠ

  4. BlogIcon 해송 2012.09.01 16:43 신고

    ^^ 현승이의 일기는 언제나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 마음을 저렇게 자세하게 표현하는 사람도 흔치 않을꺼예요? 그쵸?

    와~! 근데 무슨 TV~?
    언제 방송되는지 반드시 알려 주세요. ^^

    • BlogIcon larinari 2012.09.01 23:43 신고

      현승이가 외삼촌에게 글쓰기를 배우거든요.
      원래 생각이 깊은 아이였긴 한 것 같은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일취월장이라 놀라요. ^^

      방송은......
      생각해보고 갈챠드릴께요. ㅎㅎㅎㅎ

  5. solideo012 2012.09.27 11:00

    뒤늦게 포스팅 한거 읽는데, 현승이의 분석이 예리하네요.
    정말 할 말을 잃게 하는 관찰력!!

    • BlogIcon larinari 2012.09.27 16:43 신고

      순수하게 달아주신 댓글에....
      저는 편집장님 아이디를 보자마자 '뙇! 원고...' 이랬습니다. ㅋㅋㅋ
      추석 전에 보내드리고 이번 주 안으로 올라가게 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는데...
      현실은 어제 마감인 원고를 아직 붙들고 있구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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