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끔 혈압이 떨어진다. 두통을 잘 모르고 사는데 이유 없이 두통이 오다 속이 메스껍고 어깨부터 목이 뭉치다 시야가 살짝 흐려지기도 한다. 저혈압 증상이다. 얼른 눕는 게 제일이다. 채윤이 데리고 외출하고 돌아와 이런 증상이 와 바로 소파에 누웠다. 무기력하다. 마흔다섯에 나를 낳은 엄마가 나를 설명하는데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몸이 약혀서'이다. 어렸을 적엔 그런 줄 알았는 데 살다 보니 사이즈가 작고 운동은 못 해서 그렇지 약하진 않다. 살면서 몸의 한계를 잘 느껴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요즘 저혈압 증상이 오면 몸의 한계와 바로 따라오는 두려움을 제대로 느낀다. 누워서 살짝 잠이 들었나보다. 골목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여자 목소리에 잠이 깼다. 아이를 혼내는 소리이다. 박박 거리고 악을 쓴다. 당연히 아이는 운다. 갑자기 온 신경이 일어선다. 잠이 확 깬다. 몹시 기분이 나쁘다. 가슴이 답답하다. 막막하다.


2008년쯤일 것이다. '우리 신실이 몸이 약혀서....' 주문에 딱 맞는 시절이었다. 그때도 일하고 돌아오면 바로 침대에 누워야 했다. 오늘처럼 무기력하게 누워야 했다. 당시 남편은 신대원 기숙사 생활 중이었고, 주말부부였다. 까막눈 채윤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지옥의 나날이었다. 몸은 그렇게 남편은 없고, 받아쓰기며 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채윤이를 닦달하다 분노폭발 하기 일쑤였다. 골목에 쩌렁쩌렁 울리던 어느 엄마의 목소리에 신경이 곤두선 것은 그때의 내가 살아와서이다. 내 소리도 저렇게 들렸겠다. 윗집에서 뭐라고 했을까? 거의 미친 여자구나. 아이들도 그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 시절을 치유하는 클릭←이런 대화를 한 적도 있다. 위의 사진은 그 즈음 어느 월요일. 천안에 내려간 남편과 통화하던 나를 채윤이가 찍어놓은 것이다. 디카 가지고 놀다 우연히 셔터를 눌렀을 텐데 우리 집 퓰리쳐상 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즈음 몸과 마음이 그렇듯 총체적으로 무너진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 즉, 신앙적, 영적인 문제였고. 알고 보면 정말 사소한 일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 몇 년 전 다니던 교회에서 영적인 목마름이 극에 달한 우리 부부는 교회를 옮길 생각이었다. 가정교회라는 것을 도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목말랐던 것은 공동체였으니까. 눌러앉아서 가정교회의 시작을 열렬히 환영하고 신나는 가정교회 생활을 누렸다. (그때 첫 목짠님이 이 블로그 무플방지 위원 중 수석이신 iami 님과 mary 님!) 세월이 흘러 우리도 목자가 되었다. 신혼부부들과 함께.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했었다. 평신도였던 남편이 신대원에 들어갔다. 목자를 그만해야할 시점이 되었다. 초등부를 맡아 사역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쩐 일인지 목자들의 목자이신 목사님이 차일피일 미루며 전도사와 목자를 겸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는 1부 성가대 지휘를 하고 있어서 남편이 천안에서 올라오는 금요일부터 주일 저녁까지 제대로 둘이 눈 한 번 맞춰보지 못한 날도 허다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면 짐을 싸서 천안으로 내려가는 남편. 월요일은 온종일 눈물바람이었다.


가정교회 사역과 관련된 많은 분들이 우리 부부가 목자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며 목사님께 제안하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전임이 될 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그때 그 목장 식구들은 내 인생,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아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걸 계속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교회는 '가정교회의 성공적인 케이스'로 주목받았고 내부에서는 부작용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파트타임  전도사 따위의 일상을 고려하여 목장을 줄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금요일 오후부터 장을 봐서 10 명 이상의 식구들과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밤 12가 넘어야 정리가 끝나곤 했다. 바로 그 즈음 몸도 최악이어서 결국 성대수술도 하고 그랬다. 바로 그때 목사님이 가장 힘없는 파트타임 사역자의 인권을 말없이 짓밟 듯, 나는 가장 연약한 우리 아이들에게 온갖 분노를 쏟아부었다.


돌이켜보면 상식이 아니라는 것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내게, 자발적으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내게 비상식의 굴레를 씌운다는 느낌이었다. 관련하여 다 발설하기도 어려운 무수한 비상식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거룩하고 은혜로운 허울 뒤에 비상식으로 피눈물 흘리는 부교역자 사례야 어디 한둘이겠는가. 전임사역 3년 후에 남편은 목회를 접기로 했다. 접기로 했으나 우연 같은 필연이 위로처럼 들이닥쳐 지금 여기서 또 목사로 살고 있다. 부임하고 첫 새교우 환영회에서 담임 목사님께서 교회 소개를 하시는데 눈물이 났다. 너무 상식적이어서 눈물이 났다. 첫 교역자 부부 모임에서는 '목회자 부인들 수요예배 나오려고 애쓰지 마라. 아이들 저녁 챙기고 잘 돌보는 것이 사역을 돕는 일이다. 목회자의 가정이 쇼윈도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모델링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이런 상식 말이다. 물론 아쉬운 것도 많다. 아쉬움이 커져 마음이 힘들 때면 '상식이 통하는 게 어디냐'며 상시적인 감사를 연습한다.


지난 3월 목회멘토링 컨퍼런스에서 강의한 이후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온 사모님들이 있다. 블로그나 책이 인연이 되어 만나는 사모님들도 있다. 모두 힘든 삶을 살고 있는데 알고 보면 다 상식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상식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더욱이 교회, 하나님, 공동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좋은 것들을 표방하고 거기에 도취되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을 하는 듯 사는 분들에게 치명적으로 결여된 상식이라니! 사모님들의 고통은 그 분열적인 환경에서 늘 이중적이다. 그 고상한 가치 앞에서 개인의 고통쯤이야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러다 결국 여전히 아픈 자신을 탓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몸이 아파 버리고, 마음이 고장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모님들에게 당장 벗어나라 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오늘 여기를 살아야 한다. 살면서, 오늘의 아픔을 다루는 것과 더불어 앞으로 더는 상처받지 않을 마음의 힘을 기르는 연습을 동시에 해야 한다. 


갑자기 찾아온 육신의 연약함에 어디선가 들리는 애기 엄마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몇 년 전 기억을 소환했다. 꺼내서 다시 바라보니 상식보다 못한 신앙의 허울들이 더욱 또렷이 보인다. 한쪽 눈 가리고 온갖 비상식을 저지르면서도 복음에 합당한 듯 착각하며 살기란 얼마나 쉬운지. 어쩌다 우리들의 교회는 고작 상식이라는 그릇에 복음을 담아 감동을 전하는 수준이 되었나. 어찌됐든 나의 내적여정은 거기로부터 제대로 시작되었다. 찾아도 찾아도 답도 길도 보이지 않아 인간의 내면, 마음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실은 그 풍랑인하여 더 빨리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든 사투였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아이들이 더 커서 어른 대 어른으로 얘기할 날이 오면 정식으로 사과할 생각이다. 그때 짐승같이 굴던 엄마를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너희들 앞에서 짐승인 줄 확인하고 늘 사람이 되길 꿈꾸고 노력하며 살게 되었다고. 이 고백을 할 때는 조금 더 사람에 가까워지고, 더욱 상식인이 되어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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