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일렁임 없이 잘 지내보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어머니 탓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럭저럭 괜찮은 남편이 최선을 다했지만 질곡의 설이 되고 말았다. 종갓집으로서 작은 어머니들, 며느리들까지 모여 송편 한 말, 10여 종이 넘는 전을 부치던 명절이었다. 지긋지긋했는데, 아버님 돌아가신 이후로 오히려 그 시절이 그리워질 정도로 한가하고 무료한 명절이 되었다. 음식 준비보다 더 나를 옥죄던 관계가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고, 최근 몇 년의 명절은 그야말로 '연휴'였다.

몇 년 그렇게 종가집 명절 포스는 온 데 간데없는 명절이었다. 방역 지침 등으로 꼼짝 못 하겠으나, 어머니 모시고 집에 와 하루 지내면 어떨까 하는 연락을 남편이 했다. "설 지내는 얘기를 왜 너랑 하냐? 그건 여자들끼리 할 얘기다. 에미랑 얘기해야겠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가부장제 드라마 대사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폭풍이 한 차례 지나고 결국 오셨다. 점심만 하고 가시겠다는 걸, 저녁까지 드시자고. 점심과 저녁 사이 아이들과 의논하여 윷놀이 계획도 짜고 했는데. 탄천을 걷고 트레이더스 가서 장보는 것으로 오후 시간 잘 보냈다. 집에 와 보이차로 몸과 마음을 데우고 소화시킨 후에 저녁 식사를 하고 가셨다.


점심은 월남쌈, 저녁은 연어회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 가족은 물론 어머니는 더더욱 식사량이 적다. 떡 벌어지게 차린 상에 부담부터 느끼게 된다. 맛있는 걸 한 종류만, 적당하게 먹는 것이 행복이다. 취향을 저격하여 심플하여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을망정 여러 모로 불편한 만남이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무엇보다 남편은 남편대로. 과정에서 내가 받은 상처가 많지만 남편에 비하면 가볍고, 단순하다. 아니, 남편에 비하면 무겁고 복잡하다. 무겁고 복잡한 사연을 가부장제 며느리의 삶으로 서사를 풀면 많은 것이 설명된다. 명절 증후군을 앓는 어머니는 명절만 되면 심장이 뛰고 없던 신체 증상이 발발한다. 칼부림하는 시동생도 없고, 형제간 따돌림은 옛날 얘기가 됐음에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그저 지나면 문제 될 것은 없는 명절이다. 위기의 가정 아이들이, 학대 속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평안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결국 문제를 일으키시고, 화를 내시고, 서러워하신 후에, 후회하시고, 후회를 자기 의로 승화하여 "나는 자비하다, 나는 좋은 시에미다, 나는 좋은 핼미다...."로 결론을 내신다. 처음부터 마지마까지 "나는 자비하다."로 가시면 참 좋을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명절 56년이다. 종갓집 며느리 56년이다.

어머니와의 관계에 공을 많이 들였다.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로 시작했지만 외롭고 슬픈 어머니의 인생을 알면서 깊은 연민을 품게 되었다. 적당히 연민했으면 좋았을 걸. 마음과 몸의 병을 내 사랑으로 고칠 수 있다는, 고쳐야겠다는 열정으로 지나치게 공을 들였다. 이젠 그러지 못한다. 그러느라 망가진 나의 일부분을 추스르기도 벅차다. 세상 누구보다 따뜻했던 막내 며느리를 추억하며 슬펐다, 분노했다 하시는 어머니가 새롭게 안타깝다. 그러면 다시 어머니를 고치고 싶은 쓸데없는 열정이 휘몰아치며, 결국은 좌절과 슬픔과 분노다. 거실에 장미 한 단이 꽂힌 화병이 놓여있다. 얼마 전 남편이 사 온 건데,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가는데 어쩐지 치우기가 싫다. 심지어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모습이 싫지 않다. 늙어가는 내 모습 같기도 하고. 화병이 놓인 탁자 옆 거실에 어머님이 누우셨다. 시들어가는 인생을, 거스를 수 없는 실존의 퇴락을 어찌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머니 모시고 오던 날 아침 식사하며 심장이 마구 뛰었다. 자꾸 팔목에 불끈불끈 힘이 들어가며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여보, 전장에 나가는 느낌이야."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여러 의미의 전쟁을 그럭저럭 잘 치뤘다. 나도 어머니도 시드는 장미꽃 같은 인생과 더 잘 화해하며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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