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싸매고 과제하기 동지. 종강 동지. 김채윤 동지가 내 산책에 따라붙어 산책 동지가 되었다. 어떻게든 따돌려 보려고 했는데, 결국 따라붙었다. 의기투합하여 걷는 길은 고속도로와 탄천 사이 농로, 에서 외롭게 매달린 '토마토마트'를 발견했다. 토마토마트는 어릴 적에 채윤이가 방울토마토를 부르던 이름이다. "와, 꼴찌로 태어난 토마토다!"라고 내가 말했다. 채윤이 어릴 적에 읽어주던 그림책 제목이다. "어, 나 그 책 생각나는데..." 채윤이도 말했다.

 

어릴 적에 읽어주던 그림책, 함께 불렀던 노래를 또렷이 기억하는 건 엄마 아빠이다. 아이들의 기억은 제목 어렴풋, 반복되던 문구나 운율 어렴풋이다. "달님 안녕" 하고 그때 그 그림책 얘기가 나오면 줄줄 외우며 신나는 건 엄마 아빠다. 꼴찌로 태어난 토마토, 안녕 또 만나, 뭐 하니, 색깔 나라 여행... 문자로 나열하면 도통 그 맛을 살릴 수 없는 운율과 딕션으로 남은 우리들의 그림책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종필과 신실... 그렇게 읽은 것 또 읽고, 또 읽고... 결국 읽는 사람 외울 지경이 되도록 강요했던 아이들은 모르는 일, 모르는 그림책이다.


그러니까 아이들과 함께 했던, 아이들이 이 땅을 살던 초기 기억이 부모와 아이에게 다르게 저장된다.
엄마 아빠에게는 의식으로 또렷하게, 아이들 자신에게는 무의식으로. 미지의 에너지로!

 

'미지'의 에너지. 미지.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은 어린 시절은 알 수 없는 에너지로 오늘과 함께 한다. 스무 살도, 서른 살도, 쉰이나 일흔 된 사람도, 죽음에 임박한 사람조차도. 이것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일인가. 내가 내 엄마를 넘어서기 위해 씨름했던 나날을 비추어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는 것은... 내가 '준 것'이 아니라 주느라고 애쓰며 드리운 그림자가 아이들의 오늘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내적 여정 안내자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부모가 지운 무의식적인 삶을 지고 끙끙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늘 새롭게 정신 차리고, 또 정신을 일깨울 수밖에 없다. 내담자들, 수강자들이 오늘의 고통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뒷덜미를 잡고 있는 것이 부모의 무의식적인 삶인 것을 확인할 때는. 아, 나는 평생 아버지 부재와 맞서 글을 썼고, 마음에서 엄마를 죽였다 살렸다 하면서 신앙 사춘기를 보냈고, 결국 기나긴 세월 지내면 부모와 화해하고 고요해진 나날을 살고 있다, 지만...... 부모가 내게 지운 짐을 마주하는 것은 그나마 길이 보이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지운 짐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가 견뎌내야 할 가장 큰 짐은 바로 부모의 무의식적인 삶이다.
_카를 융


그래서 그냥 늘 새롭게 만나려고 한다. 아침에 제 방에서 나오는 아이들과 인사하며 어제의 나로 얘네들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어제의 낡은 방식으로 아이들과 만나지 않으려고. 하룻밤 자고, 하룻밤만큼 더 무르익은 존재로 얘네들을 바라보고 겸손하게 대하려고. 물론 결심으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 결핍이나 욕망에 얽혀서 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았으면 싶다. 내 한 가지 소원이다.

 

 

혼자 걷고 싶은 시간이었지만, 따라붙는 채윤이와 함께 걸으며 마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고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채윤이에게 맡기고, 되는대로 즐겨본다. 돌아오는 길, 빠르게 해가 넘어간다. "엄마, 저기 좀 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이다. 텅 빈 나뭇가지 사이로 배경이 보이는 거... 아, 엄마는 저런 나무 싫어하지? 겨울나무 슬프지?" "아니, 엄마 이제 저런 풍경을 좋아하면서 볼 수 있어. 희한하게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 엄마도 너처럼 겨울 나무가 있는 그대로 보여. 아름다워, 저런 풍경..." 나목도, 나목 가지 사이로 멀리 보이는 석양도, 경부고속도로 위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도 아름답다. 꼴찌로 태어난 토마토를 뒤로 하고 우리도 집으로 돌아온다. '꼴찌로 태어난 토마토'는 딸과 엄마의 동상이몽일 터. 동상이몽이어서 자유다! 너는 네 꿈을 꾸고 나는 내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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