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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키우는 엄마

지브리와 함께

by larinari 2022. 2. 6.

경주여행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는 영덕까지 해안도로를 달렸다. 내게는 2박 3일 여행 동안 제일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그저 달리기만 해도 좋을 바닷가 길이지만. 바다 색깔이 투명하게 파랗고 말로 할 수 예뻤다. 뒷좌석 DJ 채윤이는 지브리 영화 OST를 다양한 버전으로 틀어주었고. 아, 현승 DJ는 일이 있어 먼저 고속버스로 올라가서 아쉬움 반, 편안함 반이었다는 것도 말해 두어야. 남매의 다른 음악 취향이 서로에게 퍽 도움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취향을 대화 주제 삼아 잘 놀기도 하던데. 자동차 안 뮤직박스만 되면 취향 충돌로 예민해지곤 한다. 네 사람, 특히 엄마 아빠의 취향 저격이 관건일 텐데. 그것도 경쟁인가 싶기도 하고. 단독 DJ 채윤이가 알아서 돌려주는 플레이 리스트는 그냥 좋았고. 오른 편의 소나무 숲, 그 사이사이 푸른 바다까지, 붙들고 싶은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엄마가 우리 어릴 적에 지브리 영화 보여줘서 참 잘했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거의 안 보여줬잖아.
지브리 아니면, 픽사. 그러길 잘 했어!

 

다 커서 이런 걸 다 인식하고 알아주네! 집에 티브이를 두지 않았고, 닌텐도나 PC 게임도 시키지 않았기에 비디오 가게에서 DVD 빌려 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접근 가능했던 지브리의 모든 영화를 보고 또 봤고, 개봉하면 달려가서 봤고, DVD 빌려 다시 봤고. 그러다 빌려서 볼 수 없었던 <미래소년 코난>은 아예 DVD로 구입을 해버렸다. 한때 우리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네... 실은 내가 좋아서였다. 

 

마침 경주 황리단길 소품 가게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 엽서를 만났다. 그 옆 작은 서점에서 채윤이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일기>라는 책을 샀다. 나의 최애 지브리는 <마녀 배달부 키키>. 채윤이는 <천공의 성 라퓨타>, 현승이는 <모노노케 히메>. 종필은? 없다. 주로 신대원에 있을 때라 주말 아빠 시절이다. 아니 주말에는 전도사여서 주말 아빠도 아니고. 월요일 오전 아빠 정도였지. 그 시절이구나! 그래서 지브리 세계관은 채윤, 현승, 나. 셋만 공유하고 있다. 대신 월요일 오전 아빠가 방학이던 어느 여름 <스타 워즈> 시리즈를 온 가족이 정주행 했고, 그 여파가 마블로 이어지면서 채윤, 현승, 종필 아빠 셋은 마블 세계관에서 만나고 있다. 

 

유치원 가서 듣고 어디서나 흔한 공주-왕자 서사를 집에서까지 들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걸 보여주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취향이다. 내가 좋아서 아이들에게도 적극 소개한 것이다. 채윤이에게 디즈니 아니고 지브리 영화를 보며 자라서 뭐가 좋았냐 물으니, 상상할 수 있는 '여백' 같은 거라고 했다. 그거다. 내가 지브리 영화를 보면서 좋은 것들이. 키키의 다락방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다락방과 함께 내 마음의 소중한 공간이다. 덜렁 침대 하나, 세상을 향한 창 하나, 짚으로 만든 침대는 한 번 살아 보지도 않은 마음의 고향이다. 채윤이 마음에는 천공을 떠다니는 라퓨타 성이, 현승이 마음에는 목이 잘려나가는 사슴 신이 여전히 살아서 이야기를 건넨다.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와 함께 내가 커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 취향의 자장 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또 다른 자기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신비롭다. 지브리와 함께 가족이 자랐다. 자동차 뒷 좌석 아이들 때문에 엄마 아빠의 그렇고 그런 음악 세계가 넓어지고 새로워진다. 잘 자란 아들 딸로 열 DJ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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