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는 영덕까지 해안도로를 달렸다. 내게는 2박 3일 여행 동안 제일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그저 달리기만 해도 좋을 바닷가 길이지만. 바다 색깔이 투명하게 파랗고 말로 할 수 예뻤다. 뒷좌석 DJ 채윤이는 지브리 영화 OST를 다양한 버전으로 틀어주었고. 아, 현승 DJ는 일이 있어 먼저 고속버스로 올라가서 아쉬움 반, 편안함 반이었다는 것도 말해 두어야. 남매의 다른 음악 취향이 서로에게 퍽 도움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취향을 대화 주제 삼아 잘 놀기도 하던데. 자동차 안 뮤직박스만 되면 취향 충돌로 예민해지곤 한다. 네 사람, 특히 엄마 아빠의 취향 저격이 관건일 텐데. 그것도 경쟁인가 싶기도 하고. 단독 DJ 채윤이가 알아서 돌려주는 플레이 리스트는 그냥 좋았고. 오른 편의 소나무 숲, 그 사이사이 푸른 바다까지, 붙들고 싶은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엄마가 우리 어릴 적에 지브리 영화 보여줘서 참 잘했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거의 안 보여줬잖아.
지브리 아니면, 픽사. 그러길 잘 했어!

 

다 커서 이런 걸 다 인식하고 알아주네! 집에 티브이를 두지 않았고, 닌텐도나 PC 게임도 시키지 않았기에 비디오 가게에서 DVD 빌려 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접근 가능했던 지브리의 모든 영화를 보고 또 봤고, 개봉하면 달려가서 봤고, DVD 빌려 다시 봤고. 그러다 빌려서 볼 수 없었던 <미래소년 코난>은 아예 DVD로 구입을 해버렸다. 한때 우리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네... 실은 내가 좋아서였다. 

 

마침 경주 황리단길 소품 가게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 엽서를 만났다. 그 옆 작은 서점에서 채윤이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일기>라는 책을 샀다. 나의 최애 지브리는 <마녀 배달부 키키>. 채윤이는 <천공의 성 라퓨타>, 현승이는 <모노노케 히메>. 종필은? 없다. 주로 신대원에 있을 때라 주말 아빠 시절이다. 아니 주말에는 전도사여서 주말 아빠도 아니고. 월요일 오전 아빠 정도였지. 그 시절이구나! 그래서 지브리 세계관은 채윤, 현승, 나. 셋만 공유하고 있다. 대신 월요일 오전 아빠가 방학이던 어느 여름 <스타 워즈> 시리즈를 온 가족이 정주행 했고, 그 여파가 마블로 이어지면서 채윤, 현승, 종필 아빠 셋은 마블 세계관에서 만나고 있다. 

 

유치원 가서 듣고 어디서나 흔한 공주-왕자 서사를 집에서까지 들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걸 보여주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취향이다. 내가 좋아서 아이들에게도 적극 소개한 것이다. 채윤이에게 디즈니 아니고 지브리 영화를 보며 자라서 뭐가 좋았냐 물으니, 상상할 수 있는 '여백' 같은 거라고 했다. 그거다. 내가 지브리 영화를 보면서 좋은 것들이. 키키의 다락방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다락방과 함께 내 마음의 소중한 공간이다. 덜렁 침대 하나, 세상을 향한 창 하나, 짚으로 만든 침대는 한 번 살아 보지도 않은 마음의 고향이다. 채윤이 마음에는 천공을 떠다니는 라퓨타 성이, 현승이 마음에는 목이 잘려나가는 사슴 신이 여전히 살아서 이야기를 건넨다.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와 함께 내가 커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 취향의 자장 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또 다른 자기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신비롭다. 지브리와 함께 가족이 자랐다. 자동차 뒷 좌석 아이들 때문에 엄마 아빠의 그렇고 그런 음악 세계가 넓어지고 새로워진다. 잘 자란 아들 딸로 열 DJ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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