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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이 이야기

없는 현실, 태산 같은 현실

by larinari 2025. 8. 17.
2023, 9, 13. 홍대 클럽 에반스, 황호규 퀄텟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될 거라는 걸....

 

채윤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학교의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하니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했다. 기쁨과 감동과 축하의 시간이 지나고 그랬다. "엄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채윤이 너는 될 줄 알았어,라는 말이 나는 속상해.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될 거라는 걸..." 나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렇지. 쉽게 된 것이 아니지. "되기까지" 혼자서 견뎌낸 시간을 엄마는 알지. 엄마니까 알지. 꿈꾸고, 좌절하고, 자신과 싸우며 연습하고, 미친 만족감을 느끼는 무대에서 행복하고, 그래서 다시 꿈꾸고, 쓰러지고, 포기하고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건반을 두드려야 했던 그 고통의 무게를 엄마는 알지.
 

나? 나한테는 현실이 아예 없지

 
미국 가기 전 대학 동창들을 만나고 온 날, 친구들은 어떻게들 살더냐고 물었었다. 음악을 하고 있느냐고. "다들 음악에 대한 마음은 있지만 현실이 큰 것 같아. 돈을 벌어야 하잖아..." 그 말 끝에 "김채윤에게는 현실보다 음악이 더 크지?" 했더니. "나? 나한테는 현실이 아예 없지!"란다. 음악 밖에는 없다고. 그렇지. 엄마는 알지. 너에게는 음악 밖에 없는 것. 음악 밖에 없어서 음악만 생각하다 보니, 음악만 생각하다 유학을 꿈꿔보니 "없는 현실"이 "태산 같은 현실"이 되었지. 그리고 태산을 넘어 험곡을 헤쳐 나왔지. 합격은 합격이 아니고, 반액 장학금 합격도  합격이 아니고, 오직 전액 장학생이 되어야 합격인 커다란 현실을 끌어안아서 음악 밖에 없는 삶을 결국 구현해 냈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엄마, 고마워. 내가 내 삶을 사랑하게 된 것은 엄마의 사랑 때문이야. 그리고 그 너머의 하나님 사랑...

 
없는 현실을 가장 큰 현실로 만들어 끌어 안아버린 딸의 열정이 놀랍다. 나도 남편도 그리 살아보지 못했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20대를 산다면 그리 살아보고 싶다. "여보, 우리가 어떤 딸을 낳은 거야?" 이구동성으로 남편과 한 말이다. 비행기에 태워 보내고 공항에서 돌아왔는데, 깨끗하게 정리된 채윤이 방 책상 위에 편지 세 통이 놓여 있었다. 엄마, 아빠, 현승에게. 떠나기 전날 설거지를 하다 가위에 손을 베었는데....(ㅜㅜ) 괴발개발 날아가는 글자들... 아픈 손가락을 하고 쓴 편지인 것이 벌써 가슴이 아팠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아이. 단지 음악이 아니라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제게 삶을 부여한 분, 그분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 사이에 엄마의 사랑이 있다니....! 보내고 나니 26년 동안 잘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난다. 정신실의 딸이라 느꼈을 좌절과 결핍감을 곱씹게 된다.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뭔가를 더 하고, 바뀌고, 달라져야 좋은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끝도 없이 보낸 것 같아서 말이다. 미안하여 안타까운데… 이 아이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엄마의 자존감을 북돋우고 치유한다. 

제 삶을 사랑하기에
고통을 마주하고
감내할 줄 아는 아이라서 고맙다.
그립고 보고싶어 슬픈 마음을 감싸 안는 큰 위로이다. 
   

2022년 7월. 휘턴 칼리지, 어느 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