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한 일이 틀어져 계획대로 되지 않아 보스턴에 와 있습니다. “가장 추운 때에 가장 추운 곳에 가시는군요!” 어느 지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이 유학 중 어느 여름, 피서로 오고 싶었던 보스턴이었는데, 터무니없는 택배사고 여파로 이 겨울에 오게 되었으니, 여행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와서 보니, 딸은 어느새 잘 극복하고 잘 지내고 있고, 덕분에 계획에 없던 좋은 여행이 되어 겨울 보스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픽은 “MFA Boston (Museum of Fine Arts, Boston)”! 기대하며 갔더니 휴관일이었고, 틀어진 덕분에 하버드 미술관에 갔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고흐의 자화상을 만났습니다.
다시 MFA에 가기 전에, 짧고 얕은 검색으로 고야(Francisco de Goya)의 그림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1808년 5월 3일》을 보게 되지 않을까 내 식대로 기대하며 신이 났던 것입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점령에 저항한 민중 봉기 이후, 프랑스군이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집단 처형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기록한 작품입니다. 가서 보니 그 그림은 어느 특별전에 전시되어 있었던 것이고, 고야 그림은 한 점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또 신기하게도,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연상시키는 마네(Édouard Manet)의 그림을 만났습니다. 프랑스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고야의 그림이라면, 마네의 《막시밀리언의 처형》은 프랑스의 정치적 개입으로 멕시코 황제로 옹립되었다가 버려진 막시밀리언의 사형을 그린 것입니다.
묘하게 겹치는 이 두 그림이 자꾸 말을 걸어왔습니다. 신기한 것은, 보스턴에 오기 전날 교회 책 모임에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누며 “제주 4.3”을 아프게 만났던 터라는 점입니다.
권력에 의한 무고한 죽음, ‘죽음들’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계획이 틀어지고, 예기치 않은 그림을 만났지만, 인상 깊게 남은 작품은 마네의 《수도승의 기도》입니다. 네 시간여 머무르며 현기증 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보았는데, 돌아와 내내 마음에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수도승 앞에 놓인 해골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속삭이는 바니타스(Vanitas)처럼 보였습니다. 기도하는 수도승의 두상과 비슷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죽음을 눈앞에 세워두는 삶.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피조물의 정체성을 가진 자만이 기도의 손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틀어진 계획으로 예기치 않은 그림을 만나고… 좋네요. 딸과 보내는 마지막 날이며 2026년 새해 첫날 아침, 우연히 만난 그림들로 돌아보고 위로받으면 희망도 품어 봅니다.
(* facebook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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