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부터 <시니어매일성경>에 "이 영원한 지금"이라는 이름으로 기도에 관한 글을 기고합니다.
* 기도의 일상, 일상의 기도에 관한 글을 시작합니다. 인생의 오후를 사는 독자들께, 갈수록 많아지는 여백의 시간을 기도로 채워보시자는 초대장입니다. 단순한 기도를 통해 일상 안에 스민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는 눈을 닦은 작은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이사를 했습니다. 아주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무슨 운명인지 평균 2년에 한 번씩 집을 옮기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피하고 싶은 일도 30여 년 가까이 꾸준히 겪다 보니 일종의 수련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전셋집을 새로 구하고 이삿짐을 싸는 노고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되려니 싶은 느긋함이 생깁니다. 2년에 한 번씩 불안정한 삶을 확인하면서 자기연민이나 허무감에 빠질 때도 있지만, 영원한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깊은 기도에 닿기도 합니다. 한도 안에서 욕심부리지 않고 집을 구하다 보면, 이번처럼 좋은 집을 얻게 되기도 하고요. 교통 등 몇 가지 편의를 확실하게 포기하고, 원하는 조건을 명확히 했더니 말입니다. 마음에 쏙 드는 좋은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시쳇말로 ‘풍경’이 다하는 집입니다. 깨끗한 아파트이고, 베란다 앞 한쪽으론 나지막한 산이 보입니다. 창문을 열면 코앞이 옆집 외벽이고, 이웃 부부 다투는 소리까지 무방비 상태로 들어야 했던 거실을 생각하면 이게 웬 은혜인가 싶습니다. 이른 아침 혼자 일어나 거실 창 풍경을 마주하고 가만히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노라면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노래한 시편 시인의 마음이 됩니다. 풍경에 등 떠밀려 절로 기도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산자락이 보이는 거실 책상 앞에 앉으면 자연스레 말씀의 펼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분량의 묵상 본문을 여러 번 읽고, 한 구절을 마음에 담습니다. 읊조리고 읊조리며 고요한 기도에 머뭅니다. 떠오른 은혜와 메시지를 짧은 묵상 글로 정리하며 하루 분량의 영의 양식, 일용할 양식으로 삼기로 합니다.
좋은 집에 더해 때마침 가족 구성원의 변화도 생겼습니다. 성인이 된 아이 둘이 각각의 이유로 집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거실을 작업실로 쓰고 있는 저는 오랜 시간 작가와 엄마, 실시간으로 투잡을 뛰며 살았습니다. 글 쓰다 말고 식사 준비, 주방일 하다 갑자기 메일 답신 쓰기. 성향상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심지어 즐기는 편이기도 하지만 스트레스가 없진 않습니다. 특히 고요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픈 열망이 클 때는 더욱 그렇고요. 각자 일정에 맞춰 일어나서는 “아침 뭐 먹어?” 하며 나오는 가족들에게 “제발 기도 좀 하자!” 화를 낼 때도 있는데, 기도하겠다며 화를 내는 것이 맞나 싶기도 하고요. 괜한 불화를 피하는 방식으로 기상 알람을 한 시간 당겨도 보기도 했습니다. 평생 주방의 허드렛일로 기도에 머물며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쓴 로렌스 수사도 자주 떠올렸지요. 시간차 공격으로 아침을 요구하는 가족들을 기쁘게 대접하는 자체가 이미 기도야,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지만 막상 닥치면 생각보다 몸과 감정이 먼저 나가니까요.
이런 시절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저만 원한다면 온전히 작가로서 거실 책상을 지키며 알바 수준의 주방일을 감당하면 됩니다. 식구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니 그 어떤 방해도 없다 할 수는 없지만, 남편 역시 비슷한 영적 여정을 걷고 있어 서로의 기도를 돕고 배려하게 되니까요. 물리적으로 좋은 거실이 고요해지기까지 했으니 비로소 그렇게 바라던 기도 일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적게 일하고 많이 기도하며 인생 후반에는 수도원 같은 일상을 살고픈 꿈이 있었거든요. 베란다 하늘이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 오는 날은 또 그 나름의 기쁨과 위안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드디어 저의 거실은 기도실이 되었습니다. 이러기까지 얼마나 기다렸던가요. 저의 아침은 고요하고 충만합니다. 이렇게만 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고, 바라는 대로 굴러가면 일상이 아니지요. 어느 날 아침 창밖에서 들리는 엄청난 소음에 뭔 일인가 싶어 내다보았습니다. 바로 앞 좁은 도로 건너에 건물 짓는 공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고요로 충만한 거실 수도원은 끝이 났습니다. 두드리는 소리, 긁는 소리, 기계음 소리로 집 안팎이 공사장이 되었고 마음 또한 말할 수 없이 시끄러워졌습니다. 늦봄을 지나며 막 시작되는 더위에도 창문을 꼭꼭 닫아야 했습니다. 아침 기도의 기대로 눈을 뜨던 고요한 행복은 사라지고 공사 소리와 함께 잠을 깨는 하루라니... 아파트 민원 게시판은 주민들의 분노로 들끓고, 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불평으로 시끄럽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 당신은 늘 이런 식이시죠. 좋다 말잖아요. 아예 처음부터 주시지 말던가요. 너무 하세요, 정말!’
본격 더위가 시작되자 차라리 나았습니다. 창문이란 창문 꼭꼭 닫고 에어컨을 틀었습니다. 귀는 틀어막고 원망과 분노도 꾹꾹 눌렀습니다. ‘이러고 몇 개월을 지나야 할까, 새로 조성되고 있는 동네이니 저 건물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저 건물 짓고 나면 다른 공사가 뒤따를 수도 있어. 동네가 조용해질 즈음이면 다시 이사하게 되는 것 아닐까? 내 인생이 그렇지 뭐...’ 수도원 일상 아닌 ‘그냥 일상’의 무력감에 어느덧 다시 익숙해졌습니다. 타는 듯한 더위로 이글거리는 여름 어느 날, 꼭 닫은 창문으로 더위도 공사 소리도 아득한 아침,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문득 마음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이렌 소리. 마음에서 울렸습니다. 언젠가 유대 랍비의 책에서 본(들었던) 사이렌 소리입니다.
구급차가 지나갈 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귀에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구급차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달라고, 거기 탄 이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기도하라고요. 소방차 소리가 평온을 깨트릴 때도 마찬가지로요. 그 소방차가 빨리 현장에 도착하게 해달라고, 또 소방대원들이 무사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읽은 후 사이렌 소리는 제게 기도 알람입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사이렌 소리와 함께 자연스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생사를 오가며 응급실로 실려 가는 어느 한 사람의 위급한 기도 부탁으로 들립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그렇게 듣기로 하고 즉각 기도합니다. 멀어지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금세 잊고 말지만, 짜증의 시공간이 기도실로 바뀝니다. 고통받는 사람과 연결되고 맙니다.
길 건너 공사 소리 역시 사이렌 소리와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타는 더위를 맨몸으로 견디며 일하는 공사장 인부 한 분 한 분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분들의 안전을 지켜주세요.’ 쌩하고 지나치는 사이렌 소리와 달리 멈추지 않는 공사장 소음이 계속 기도를 부르더군요. ‘주님, 지금 이 순간 어느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위험을 안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세요. 산업 재해로 생명을 잃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합니다. 일하다 사망하는 젊은이들의 생명이 안타깝습니다.’ 저의 거실은 다시 거룩한 기도실이 되었습니다. 소음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음은 즉각적으로 짜증을 부릅니다. 짜증을 신호탄 삼아 기도를 드립니다. 그 순간 마음의 창이 열리고 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사랑의 바람입니다.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는 아무나 하지 못하는 높은 경지의 기도인 듯 알려져 있습니다. 어원을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온전히, 함께’라는 의미를 담은 접두사 ‘con’과 ‘성전’이라는 뜻의 ‘templum’이 합해진 단어입니다. 즉 내면에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거기 임재하신 하나님을 깊이 응시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전시 조종사》에 나오는 이 말도 생각납니다. ‘완공된 예배당의 관리자로, 혹은 예배당 의자나 운반하는 사람으로 자기 소임을 다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이미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지어 나갈 예배당을 가슴속에 품은 이는 이미 승리자다.’
제게 선물처럼 주어진 전망 좋은 거실과 고요한 아침 시간을 기도로 채우는 것,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나이 들수록 더욱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기도를 위해 떼어낸 거룩한 시간과 공간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알았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짓는 성전을 짓는 것임을요. 기도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내면의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미 내 마음의 방 ‘안에 살고’(내주內住) 계시니까요. 공사 소리에 올라오는 짜증을 기도 알람으로 품고 보니, 순간 제 마음이 기도실이 됩니다. 마음으로 기도드리자니 세상이 온통 기도실입니다.
이 원고를 붙들고 있느라 중요한 약속에 늦을 뻔했습니다. 부랴부랴 나가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기다리는데, 웬일입니까.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거의 모든 층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속이 탑니다.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야? 비난의 눈빛을 장착하고 다리 떨며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문이 열렸는데, “죄송합니다, 올라갑니다.” 택배 상자를 잔뜩 실은 핸드 카트와 함께 배달원이 서 계십니다. 문이 닫히고 한층 한층 올라가며 불이 들어오는 층수의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예의 그 사이렌 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잔뜩 화가 난 마음이 부끄럽도록 민망해졌습니다. 그사이 다시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립니다. 택배 상자 냄새, 배달원 아저씨의 땀 냄새, 그리고 일상의 조바심 냄새로 가득한 공간에 몸을 들이밀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아저씨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나 같은 성마른 사람들의 비난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과중한 업무로 건강 잃지 않기를, 퇴근 후 돌아간 가정이 평온하기를... 그 짧은 순간, 제 마음은 잠시 성전(contemplation)이 됩니다. 어색한 공기까지 더해졌던 엘리베이터 작은 공간도요!
<시니어매일성경> 1,2월 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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