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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정

누구나 계획이 있다

by larinari 2026. 1. 31.

 

누구나 계획은 있다...

 

지난가을 어느 주말, 양평의 한 대안학교 부모교육 강의에 초대를 받았었다. 여러 모로 설렜다. 호감 공동체에, 호감 선생님들의 초대이니 그렇고. 가을이 깊어가는 주말 아침에 물안개 피는 남한강을 마주할 기회였으니 말이다. 주말 이른 아침에 집에서 양평까지 40분 안쪽이면 충분하다. 강의 시간으로 치면 아주 많은 여유를 두고 출발했다. 강의 장소인 아신대까지의 드라이브 길조차 좋을 것이고, 일찍 도착하여 산책할 수 있다면... 와하! 커피 한 잔 정성스럽게 내려 텀블러에 담고 출발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

 

부푼 마음으로 커피 즐기며 가고 있는데, 갑자기 말도 안되는시간에 말도 안 되는 지점에서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젊어서부터 마르고 닳도록 달려본 양평 길인데 퇴촌과 양평 사이, 그런데 사실 나는 길치이며, 양수리와 양평과 퇴촌의 위치가 도통  머릿속에 그려지질 않는다. 길이 막힌다면 일단 돌려야지, 양평 가는 길이 하나 둘이야? 더 빠른 길이 있겠지! 충동적 직관에 따라 차를 돌렸다.결론적으로 더 빠른 길은 없었다. 네비는 계속 절절하게 안내했다. 다시 돌려 가던 길로 가라, 다른 길은 없다... 길치인 데다 충동적 직관이 벌써 틀렸음을 감지했으니 의지할 것은 네비 밖에 없었다. 다시 차를 돌려 막히는 그 길에 들어섰고, 물안개 드라이브는커녕 강의 시간에도 맞추지 못할 상황이 되어 심장이 쿵쿵 뛰고 불특정 모든 상황을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선생님, 제가 강의 시간에 조금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런 부끄러운 전화를 끊고 나서 내 마음에 울린 말이다. "주말 양평 길 드라이브? 좋아하시네! 누구나 계획은 있지. 처맞기 전까지!"
 
곡절 끝에 강의 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했다. 늦가을 양평 길 드라이브와 산책 계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주말 양평 길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아 강의였다. 실은 서두에 인사와 함께 하고픈 말도 그것이었다. 좋은 부모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토요일 아침 좋은 부모를 꿈꾸며 에니어그램 강의를 도모하거나 듣고자 모여든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 역시 부모로서 남부럽지 않은 꿈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면 잘 될 것이라는 계획도 있었고. 대체로 그 계획은 고요하게 실패하게 된다. 관건은, 남모르는 그 실패를 인정하고 마주하는 진실에 있다. 진실을 마주한 그 자리에서 수치심과 아픔을 딛고 엄마인 내가 성장할 것인가,  내 자존심을 위해 '탓'과 '모른 척'으로 아이에게 짐을 떠넘길 것인가. 둘 중에 하나이다. 자신을 아는 부모, 자신과 화해한 부모가 좋은 부모이다. 그런 의미로,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가지는 꿈과 계획은 좋고, 그 계획이 무너지는 일은 더 좋다.
 
한 시간 정도 자동차 안에서 온탕 냉탕의 감정을 오가며 겨우 시간에 맞춰 서게 된 강의를 이 이야기로 시작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의 말이다. 1987년 타일러 빅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했다는 "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이 말을 감칠나게 옮긴 것이다. 육아뿐인가. 누구나 인생의 계획이 있다. 인생에게 처맞기 전까지는! 2주 연속 강의라 그다음 주 토요일 아침에도 같은 길을 나섰다. 막히는 길 예상하고 더 일찍 출발했지만, 가을 길이니 뭐니 하는 계획과 꿈은 사라졌다. 전주에 만난 부모들의 초롱초롱하거나 가끔 촉촉해지는 눈망울로 충분했다. 꿈도 계획도 없이 출발하여 달린 양평 길은... 와아, 끝내주는 풍광이었다. 상상보다 훨씬 더 멋진 물안개 핀 남한강이며, 단풍 길이며! 지난주에 아프게 맞은 탓이라, 더욱 귀한 선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다. 잘하고 싶은데 이전의 방식으로는 잘 되지 않아서 나름의 새로운 방식으로 엄청 힘을 줘봤다. 힘을 준 줄도 모르고 힘을 다 쏟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처맞았다. 계획한 모든 것은 디테일하게 틀어졌고. 수포로 돌아갔다는 느낌으로 너덜너덜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는데... 참 예쁜 달이 떠있었다. 하필 또 양평이었다. 지난 가을날의 첫 번째 토요일 아침 같기도 두 번째 토요일 같기도 한 하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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