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른 음악, 초대받은 음악
취향 껏 골라 듣는 음악이 있고, 때로 어떤 음악에 선택받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매해 사순 시기마다 BGM으로 깔고 듣는 Bach의 <마태 수난곡>은 골라 듣는 음악이다. '콜레기움 보칼리제 서울'의 정기 연주회에서 듣는 <마태 수난곡>은 음악 자체가 나를 선택하여 끌어당겨 앉힌 것이었다. 세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바흐의 모든 곡, 특히 칸타타 감상 때마다 아쉬운 것은 언어의 한계이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갖고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바흐의 칸타타 가사가 바로 들린다면... 그 생각을 하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언어는 독일어이다. 복음사가, 예수님, 베드로, 빌라도의 노래, 무엇보다 코랄의 가사를 자막으로 보면서 듣는 수난곡은 그대로 Lectio Divina였다. 수난의 현존체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선택한 음악이 아니라, 선택받고 초대받은 특별한 자리가 아니었나.
# 선택한 진로, 선물로 주어진 만남
몇 년 전, 엄마 기일이 가까와 오는 어느 날,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 된 음악회였다. 그 인연으로 매년 사순절은 '콜레기움 보칼리제 서울'의 정기 연주회와 함께 한다. 프로그램 북에 곡 해설을 쓰신 최대환 신부님이 초대권을 보내주신 것이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에라, 하고 싶은 거 하자!"하고 우발적으로 원서를 넣게 된 대학원에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중 한 분이 최 신부님이다.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할걸. 특수대학원 아닌 본대학원을 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꼭 필요한 공부를 하고, 꼭 필요한 논문을 썼고, 무엇보다 더 없이 좋은 선생님을 만났으니.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만날 당시에는 그저 '좋음' 그 이상이다. 긴 인생을 보자면 참 중요한 일이다. 그가 끌고 온 고민과 연구, 읽어온 책이 내게로 와 눈이 한 번 열리면 독서의 세계는 새 세상을 만난다. 그렇게 확장이 일어난다. 약간 꺾인 각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한 없이 커지는 것처럼 말이다. 대학원은 내가 골라서 간 것이고, 좋은 선생님들과의 만남은 주어진 선물이다.
# 던져진 인생, 죽음이라는 공평한 선물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마가복음 묵상 중이다. 예수님,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나 한결같이, 구체적으로, 성실하게 당신의 죽음을 알리셨었구나! 새롭게 읽게 된다. 제자들, 한결같이 못 알아듣고는 결국 당해봐야 정신 차리는 그 길을 가고야 말았고. 단순히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르고 싶다!"며 귀 막고 눈 감고 영혼은 잠들기로 한 것이었다. 생명을 주는 메시아는 모르겠고, 당장 배를 채워주거나, 식민지 로마로부터 해방해주거나, 아니면 그냥 예수님의 인기에 편승하여 몰려 다니는 것, 그 정도로모 만족하거나... 그 제자들의 제자들은 2000년 동안 '못 알아듣기로 작정한' 그 길을 따르는 것 같기도 하고. (죽음 안 돼요, 십자가 안 돼요, 죽음은 패스하고 바로 부활로 가요! 부활 신앙이라면서요!) 사람들이 죽음을 믿지 못해서, 정말로 죽었는데 죽음을 인정해주지 않아서,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께서 현재 진행형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은 아닐까.
2012년 사순 기간, 고난 주간에 아버님께서 암선고를 받으셨다. 2020년 사순 기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공교롭게도 1981년 대림 기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평생 죽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는데. 돌아보면 그 그늘은 그리움이 되어 내 인생을 이끌었다. 평생 아버지를,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대림의 인생이었다. 아버님과 엄마는 그냥 가슴이 미어지고, 밥맛을 잃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슬프디 슬픈 맨 얼굴을 죽음이었다. 수난의 계절에 맨 몸으로 겪는 죽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죽음들로 예수님의 '죽음'을 믿게 된다. (예수님, 진짜 죽으셨어! 우리 아버님처럼, 우리 엄마처럼!) 부활은 그다음 일이다.
세 시간 가까이 꼼짝도 않고 앉아서 예수님의 죽음에 눈을 맞추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는 수난곡의 마지막 합창 가사이다.
우리들은 눈물에 젖어 무릎을 꿇고
무덤 속에 계신 당신을 부릅니다.
편히 쉬소서, 편히 쉬소서.
지칠 대로 지치신 몸
당신의 무덤과 묘석은
번민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편안한 잠자리가 되고
영혼의 휴식처가 됩니다.
이리하여 이 눈은 더 없이 만족하여
우리도 눈을 감나이다.
<마태 수난곡>BWV 244) 제68곡, "Wir setzen uns mit Tränen nieder"
모두 죽는다는 사실, 그것 만큼 공평한 것이 있을까?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 같은, 우리 엄마 같은, 나 같은 몸을 입고 죽으셨으니... 이 공평한 죽음은 선물일 수 있겠다. 이날 음악회 시작 전에 최 신부님을 만나 막 나온 책을 선사받았다. 사실 출간 소식 듣자마자 주문하여 받아 벌써 읽고 있던 터였다.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 죽음이 공평한 선물이라면, 삶 역시 (다소 불공평한) 선물이 아닐까. 내 인생 가장 치명적인 죽음인 아버지의 죽음이 이젠 그리 무겁지 않다. 선물까진 아니더라도, 덕분에 보다 좋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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