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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사람

슬픈 헤아림도 없이

larinari 2015. 11. 9. 08:37

 

 

 

누군가 친구를 소개하며 '20년 지기'라는 말을 쓴다면 내가 읽어내는 것은 '나이 많으신 분들인가보다' 정도. 이 흔한 '~년 지기' 사람들이 어떤 의미일지 달리 생각해본 적이 없다. 20년 된 친구들'과의 사진이다. 들여다 보자니 그게 아니었구나. 나이가 많다는 뜻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암튼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다. 사람들이 20년 지기 친구를 소개할 때는 자기가 늙었단 얘길 하고 싶은 게 아닌 것임.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무지하게 잘 하는 딸내미를 가진 친구. 돈 잘 버는데 성실하기까지한 남편. 이건 뭐, 이런 친구들과 일박 여행을 다녀 왔다는 건 거의 한 달 견적의 우울과 바가지 긁기 감인데 다행히 그렇지가 않다. 부럽지 않은 건 아닌데 부러움보다 더 큰, 더 깊은, 더 아름다운 것이 우리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네 딸 내 딸이 없고, 네 남편 내 남편이 없.... 이건 좀 그러네. 암튼.  칼같이 긋는 선 따위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늘 그렇다. 잘 되는 일이 더 잘 되고, 힘든 일은 잘 해결되고 극복해가길 기도하는 마음이다. 이런 관계가 말처럼 쉬운 줄 아는가.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좋은 것, 그럴 듯한 것만 보여주는 사이엔 20년 아니라 200년이 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년 전, 한 청년부에서 만나 '저 언니들 시집도 못 가면서 지들끼리 뭉쳐 다니고...' 질시를 받으며 권사님 노릇하던 시절부터 그랬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랬다. '잘 되는 나'를 보여주기보다 '안 되는 나'를 드러내며 찔찔거리곤 했었다. 블루투스 스피커가 20년 지기 친구들의 여행에 따라와서 역할을 잘 해주었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들었던 안단테 칸타빌레를 잊을 수 없는데 오랜만에 함께 듣자니 마음이 마구 일렁였다. 마침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내게 무척 좋은 일(?)이 하나 생겼다. 그 연락을 받고 와! 잠깐 좋아하다 보니 이건 좋은 일이 좋은 일이 아닌 거다.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좋은 일이 가져온 골치 아픈 고민들을 하나 씩 다 펼쳐놓아 보았다. 펼쳐놓고 이바구 하다 보니 어느 새 마음이 가벼워졌다. '좋은 일'이 단순히 좋은 일을 넘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될 기세이다.

 

누구를 만나도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덕규의 노래 <좋은 나라> 가사처럼 '아무 눈물 없이 슬픈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 가면을 쓰고 말의 이면을 자꾸 헤아리게 되는 만남이라면 최대한 피하며 살고 싶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적당히 사회적인 얼굴을 하고 만나는 만남이 없을 수 없다. '오늘 내가 커피 살게. 어~ 우리 애가 또 1등 했잖아' 이렇듯 금세 드러나는 자랑 또는 과시욕망은 차라리 귀엽지 않은가. 고전적으로는 이런 게 있지. (갑자기 의기양양하게 편 손가락을 관자놀이 쪽으로 가져간다.'어우, 머리야. 오늘 왜 이리 머리가 아프지?' -> 짜잔, 가운데 손가락에 다이아 반지. 이런 정도는 귀엽다. 드물게 학교 엄마들을 만나면 겉으로는 다 뺀들뺀들 광이 나지만 알고보면  그 뒤에 숨은 욕망과 두려움이 느껴져 마음이 어지럽다. 이런 모임을 하고 돌아오면 차라리 깊은 연민이 느껴진다. 이미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고만. 뭘 더 보내고, 시키고, 닦달을 해야한다며 저렇듯 강박적으로 애쓰는 것일까. 아이를 닦달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볶고 있는 엄마들 말이다.

 

그나마 잘 나가지도 않지만 학교 엄마들 모임은 견딜만 하다. 은혜, 축복, 사랑, 감사....로 점철된 아니, 포장된 교회 엄마들의 모임보다는 훨씬 낫다.  여기서 '낫다'는 건 더 좋은 모임 덜 좋은 모임이란 뜻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내가 견딜 수 있음의 레벨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친한 것보다 더더더 친한 것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걱정을 나누는 것보다 더더더 따뜻하게 눈물을 그렁거리며 '기도할게요. 기도합시다'가 되어야 하는 모임을 갈수록 못하겠으니! (이것은 진정 신앙의 퇴보인가)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가 짙은 법이다. 형제님, 자매님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교회 안에 그렇게나 관계 문제가 복잡한 이유일터. 모든 관계 안에는 좋은 것이 있고 불편한 것이 있으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것이 인간 대 인간의 일이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감사하고 기도할게요. 오직 빛의 언어만을 가지고 소통을 하고 돌아서는 일이 반복될 때, 십중팔구 비합리적 뒷담화와 부정적인 상상력의 그림자에 압도당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경우 포장지 자체가 아름답고 거룩하여 딱 속기 좋은 것이다. 그 속임수의 치명적인 피해자는 자기 자신이다. 높은 점수나 승진을 위해 옆 사람을 밟는 대놓고 이기적인 사회보다,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이기심과 욕망과 두려움을 가장한 종교인의 모임이 더 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경험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영어는 어느 학원 다녀요?' 하고 묻는 루이비똥 든 학교 엄마보다 손 꽉 잡고 기도제목 묻는 자매님이 더 섬뜩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그리는 천국은 하덕규의 <좋은 나라>에 나오는 그런 곳에 가깝다.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은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 그 고운 무지개 속 물방울들처럼 행복한 거기로 들어가 아무 눈물 없이 슬픈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 슬픈 헤아림에 에너지를 쏟지 않겠다. 신앙의 이름으로 그런 것을 조장하는 것에는 '신앙 아냐 종교놀이야'라고 말해주겠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20년 지기 마음 맞는 친구들만 만나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게 이 친구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만난 지 2년 만에 20년. 200년 짜리 공감을 함께 나누는 친구도 있다.(이건 완전 2년 된 여친 삐질까 염려하여 힘주어 써놓은 말.ㅋ) 딱 한 번 만나도 존재로 만나는 만남도 있다. 처음 만나 커피 한 잔을 나누면서 서로 마음 속 깊은 두려움을 내보일 수 있다. 요즘 내게는 흔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연결된 느낌으로 나는 사람 안에 있는 선함을 믿게 된다. 사랑을 믿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런 좋은 만남만을 찾아 다닐 수는 없다. 내가 그들로 인해 생명의 기운을 얻는 이유는 그들이 나를 두고 슬픈 헤아림을 하지 않는 까닭이다. 나 역시 계산기 들이밀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결국 상호 무장해제란 말이다. 그런데 훨씬 많은 경우 나는 헤아림의 주판알 격렬하게 튕기며 살아간다. 상대의 슬픈 헤아림을 알아챌 수 있는 이유는 나도 같은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무엇이랴. 마음이 곤고하다.

  

'그래도 언니들과 이렇게 만나는 게 내게는 제2의 고향인 것 같아' 새벽까지 수다를 떨며 20년 지기 친구가 말했다. 이 말로 돌아가 지친 마음, 피폐해진 마음을 쉰다. 지금 내겐 고향이 되고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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