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러 서울 갈 계획은 오지도 않은 태풍과 굵은 빗방울로 접어 버렸다. 서울 가는 길은 멀다. 분당으로 처음 왔을 때 교회 집사님들이 "서울 갔다 왔어요. 서울 갔다 와서 피곤해요?" 하시면, 여기서 서울은 서울에서 서울보다 가까울 수도 있는데 저러시나 싶었었다. 살다 보니 알겠네. 서울 가는 먼 길을... 합정동 살 때 참 좋았는데. 씨네큐브, 아트하우스 모모, 상상마당, 필름포럼이 죄다 버스 한 번에 30분 거리였었다니! 여하튼 이러다 포기하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나중에 네이버에서 봐야지, 잠깐의 위안을 위한 결심을 해보지만 노트북 작은 화면으로 보게 되질 않는다.

밥 먹고 카페 가서 공부나 하자! 그래서 간 집 근처 유명 카페다. 유명 카페라서 낮에 가면 도떼기시장이라 테이크 아웃 한 잔으로 만족하고 빠져나오기 바빴었다. 소문만 무성한 태풍과 굵을 빗방울로 어째 여기가 다 한산하네. 논 한가운데 있는 카페라 창밖 뷰가 저렇다. 비 오는 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비멍' 하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뷰가 저러니 정말 감동이다. 막 모내기 마친 논, 초록 벼로 빽빽한 논, 황금물결 넘실거리는 논, 텅 빈 겨울 논... 다 좋아한다. 어릴 적 익숙한 풍경이라서인가. 이거 정말 경치가 유혹이네!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것.

 

남편도 영화 좋아하지만, 합정동이 아니어서 크게 아쉬울 것이 없다. 서현, 오리, 동백... 근처에 멀티 영화관이 쎄고 쎘으니까. 취향 존중의 미덕을 발휘하여 내 영화를 함께 봐주곤 한다. 취향과 취향이 충돌할 때 그는 이기는 법이 없다. 영화도, 점심 메뉴도, 카페도 그의 선택은 하나다. "존중입니다, 취향 해주세요!" (온전히 나, 오직 내) 취향 저격 카페에 앉아 각자 읽을 책을 펼쳤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펼치고 마주 앉았다. 이번 주 수업 주제이기도 하고, 책을 읽다 궁금하기도 하여 조직신학, 교의신학,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질문을 던졌다. 남편 입의 봉인이 풀렸다. 술술술술, 네버앤딩, 네버앤딩, 술술술술.... 우이씨, 아는 것도 많아! (나는 토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책에서 본 한 마디를 한 거였다고오....) 그냥 인신공격 전술로 판을 엎어 버릴까?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싸움 붙으면 이기고 지는 편이 뻔하다고오! 영화 <헌트>와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흥행으로 싸움이 되냐고. (라고 비유하면 블친 둥절인가요?) 보편적 개념들로 견고한 틀을 갖춘 '조직' 신학과 개인의 '체험'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신비(영성)' 신학이 싸움으로 붙으면 되겠느냐고!

남편이 연구소의 가을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 주었다.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 읽기 모임이다. 달라스 윌라드 덕후로서 전작을 읽었을 뿐 아니라 <마음의 혁신>은 여러 차례 읽었고, 책모임도 한 번 했었다. 저작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글 맵으로 달라스 윌라드가 나고 자란 곳, 살았던 곳 골목까지 따라다닌 '광' 덕후이다. 내가 <내적 여정 세미나>를 이끄는 방식은 다소 직관적이고 영성적이다. 그래서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다. 조직신학에 익숙한 목회자들에게는 '내적 여정'을 위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목사님, 전도사님, 선교사님이 많았던 작년 지도자 과정에선 여름방학 모임으로 <마음의 혁신>을 읽었었다. 달라스 윌라드는 철학자이며 신학자로 개신교 안에서 '영성 형성'을 꾸준히 연구하고 틀을 세운 분이다. 그러니까 영성을 풀어내는 그의 언어가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다. 김종필과 찰떡이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을 마주 펼쳐놓고 약간의 논쟁을 하다 김종필의 이 말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았다. (실은 꺼내지도 못했다.)심지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마음의 혁신>의 결론은 결국 사랑이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에 대한 해설이야.


많은 싸움이 취향과 취향의 대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누가 이길까? 취향을 존중하는 자? 존중받는 자? 나는 '조폭신실'이고 항상 승자이다. 현상적으론... 그런데 늘 어딘가 모르게 진 느낌이 있다는 건 그냥 없는 느낌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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