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 그만하라고 했잖아.
가르치듯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기분 좋아?
설명하고 가르치는 거 싫어하잖아.
토요일은 설교준비 하니까 말 못 하고.
주일은 설교하고 힘드니까 말 못 하고.
월요일은 긴장 풀고 느슨해져야 하니까 말 못 하고. 언제 말해?
그냥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말해도 되잖아.
좋은 뜻으로 말하는 거였어.
그럼 그렇게 말하는데 잘 들어져?
도와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었다고.
상투성이 악이야. 한나 아렌트가 말했어.
악이라니! 그런 말을 함부로 해?
베드로한테 사탄이라고 하는 거랑 똑같애.
(침묵.......)
아우, 기분 나뻐.
나도 기분 나뻐.


월요일, 기분 좋게 걸어서 보정동 카페거리로 점심 먹으러 갔다가, 맛있는 편백나무 찜을 앞에 두고 설전을 벌이고 말았다. 누가 쏜 총알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피차에 쏘았다. 기분 좋게 식당에 들어갔다가, 말 한마디 없이 먹고 나왔다. 한 몸처럼 가깝고 친밀했던 사이가 1km로 멀어지는 것은 순간이다.

커피 마실 거야? 됐어. 집에 갈 거야. 스콘 사 가지고 집에 갈 거야. 나란히 걷지만 마음은 그새 2km 멀어져서 퉁퉁퉁퉁 걷는 길이었다. 탄천 길 버리고 산길을 선택했는데, 어머 산 입구 공원에 단풍이 왜 이리 예쁜 거야? 감동인데, 뚱한 얼굴에 감동을 담기는 그렇고... 카메라 들고 사진 찍어댔다. 예쁜 풍경 담다 보니 표정이 자꾸 풀리려고 해서 민망하다. 어, 새다! 박새로 추정되는 작은 새 두 마리가 폴짝폴짝 놀고 있는데 표정관리는 다 틀렸다. 헤벌쭉.... 그렇게 단풍 아래서 머물고 다시 걷는 길에 쓰윽 손을 잡아 버렸다. 새는 내게 하늘의 메신저인데, 이 순간 사랑에 깨어나라고 하시는 그분의 메시지인데 거부할 수가 없다.

손 꼭 잡고 집에 와 마음 상한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은 스콘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서쉐숵 목짠님께서 이태리 여행에서 사다주신 에스프레소용 원두로 모처럼 모카포트에 커피를 만들었다. 다시 마주 앉으니 조금 민망하고, 아까 그 기분 나쁜 느낌이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스콘이 맛있고, 커피가 좋아서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었다.

위의 사진은 가을 초입의 어느 비 오는 월요일에 운치 있는 카페에서 달달했던 순간이다. 달달한 순간에 읽기 딱 좋은 책 제목이 <악>이었다. JP의 책이지만, '악'은 우리 둘 모두 관심 있는 주제이다. 악에 관한 많은 책 중 내겐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만큼 깊이 있고 실용적인 책이 없다. 성경만큼 가까이 두고 있는 책이다. 해마다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함께 읽는 책이기도 하고. 마침 이번 주 지도자 과정이 이 책 나눔이다. 많은 이들을 만나 상담했던 스캇 펙은 악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며 대부분은 그냥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악을 치유하려는 씨름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자기를 깨끗게 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최대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늘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말이다. 마틴 부버의 말을 인용하여 두 유형의 악인을 구분한다. 하나는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 또 하나는 본질적으로 악에 먹혀 추락한 자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늘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 앞에 선다고 생각한다. 미끄럽다. 그 길이. 여차하면 미끄러져 들어간다. 악에 대한 여러 정의 중 "악한 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생명과 성장을 거스르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는 말은 연구소 이름에 '성장'이라는 말을 넣은 이유이다.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두 사람이 성장하려면 투명한 소통이 있어야 하고, 갈등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한다. "화해한 상태"에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단풍나무에서 노닐던 두 마리 작은 새는 내 입으로 뱉은 말들을 순간 떠오르게 했다. 말이 아니라 태도를 생각나게 했다고 하는 게 맞다. 늘 '화해한 상태'를 유지하고, 언제든 화해하려 하는 사람은 JP이다. 나는 어떻게든 싸우려 하고, 더 싸우려 하는, 화해할 수 있는 상태에서 더 강퍅해지는 그런 부류이다. 내 약점이다. 약함이 여차하면 악함이 된다.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된다. 약함과 악함의 기로에서 어설픈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 덜 악한 자로 사는 노하우이다. 내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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