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원한 지금(the eternal now) 2
잃어버리고 못 찾아 아쉬운 것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끼던 샤프펜슬이 있었습니다. 흔한 원통 모양이 아닌 삼각기둥 모양의 샤프가 손에 착 붙었습니다. 애착 연필이었습니다. 어쩐지 이 샤프를 들고 있으면 수학 문제도 잘 풀리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는 “너무 좋은 이 샤프가 망가지거나 이걸 잃어버리면 어떡하지?”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했답니다. 쓸데없는 ‘슬픈 예감’은 또 틀리는 적이 없죠. 어느 날 그 샤프를 잃어버렸습니다. 몇 날 며칠 집, 학교, 독서실을 뒤졌습니다. 샤프에 발이 달렸나? 늘 쓰던 애가 어디로 간 거야? 괜히 옆자리 친구의 필통을 의심의 눈초리로 살피던 기억도 납니다.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수학 문제 풀다 안 풀리면 그 탓을 했습니다. 혹 샤프를 집에 두고 독서실에 갔다면 그날은 공부 안 될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정말 그런 마음이 되었었습니다. 하필 그즈음 망친 중간고사도 삼각 샤프의 부재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쓰다 보니, 이제라도 엄마에게 항변하고 싶네요. “엄마, 내가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된 것은 순전히 그 샤프 때문이라고요!” 값도 나가지 않는 한 자루 샤프펜슬은 제 인생에서 잃어버리고 못 찾아 가장 아쉬운 물건입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나의 그 애착 샤프는.
'당신의 수하물이 폐기 되었습니다'
최근에 겪은 ‘잃어버림’은 이런 낭만적 회한조차 불가능한 어이없는 상실이었습니다. 음악을 하는 딸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집 떠나는 데다가, 말도 안 되게 먼 나라이다 보니 짐 싸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당장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챙겼는데도 아이 몸만 한 짐이 두 개였습니다. 직접 이고 지고 가는 것도 아닌데, 아이 어깨에 얹힌 것처럼 안쓰러웠습니다. 그러고도 가져가지 못한 짐을 다시 싸서 부쳤습니다. 발송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정해진 상자 하나에 최대한 꽉꽉 채워 넣었습니다. 아이 방의 옷장과 책꽂이에 있던 소중한 것들이 그대로 택배 상자에 옮겨 담겼고. 필요한 것에 더하여 소소한 깜짝선물까지 깨알같이 담았습니다. 택배 상자를 여는 순간, 엄마 아빠의 사랑을 확인하며 잠시라도 기쁨의 순간이 되길 기대했습니다. 온갖 소중한 물건과 마음으로 포화상태가 된 이 ‘사랑의 상자’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발표된 직후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국제 우편 접수가 중단되었다가 제한적으로 열린 시기여서 배송기간이 길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이삼일 지나니 벌써 미국 땅 어느 허브에 도착했더군요. 눈뜨면 배송조회 창을 열어 상자 위치 확인하는 것이 아침 루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이 상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이 보름이 되고 한 달이 되었습니다. 조바심과 불안이 밀려왔습니다. 딸이 이렇게 저렇게 조회하고 문의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해 불가한 황당한 답변뿐이었습니다. 한국 우체국과 미국 관세 기관을 향해 할 수 있는 것들을 다했지만 시원한 답변은 듣지 못한 채 두어 달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새벽, 배송조회 창에서 믿기지 않는 상태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배송 불가, 폐기 처리’. 이게 무슨 일인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손발이 떨렸습니다.
답신 없는 이메일과 통화로 우리의 무력함만 확인하면서 그렇게 어이없이 잃어버렸습니다. 폐기...라니요! ‘묻지마 폭행’을 당한 느낌입니다. 2025년 선진국 미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관세 정책 변화로 인한 혼란으로 업무 종사자들이 태업 중이라는 진단, 소송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언들에 어쩐지 더욱 작아지고 무력해지기만 할 뿐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큰 나라에 가난한 아시안 유학생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의 내일이 더욱 걱정스럽고요. 롱패딩이며 힛트텍 내복 등 따뜻한 겨울옷들, 책들, 무엇보다 음악 하는 아이의 전 재산 같은 악보 모음이 든 ‘사랑의 상자’가 폐기라니. 잃어버렸다기보다는 빼앗겼다고 하는 게 맞았습니다. “보낸 사람 받는 사람 이메일과 연락처가 뻔히 있는데, 확인 한 번 없이 폐기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분노하며 우는 아이와 전화기를 붙들고 함께 울었습니다. 힘든 시간일 텐데 안아줄 수도 없고, 해결해 줄 수도 없는 무력함에 눈물이 났습니다.
고발과 토로, 저주를 기도 삼아
며칠 슬픔과 분노 사이를 오가며 지냈습니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대상이 막연하여 더 화가 치밉니다. 기도의 자리에 앉으면 더 투명해지는 것이 분노의 감정입니다. 미국, 미 관세청, 트럼프, 불성실한 실무자를 고발했습니다. 바위처럼 큰 힘 앞에서 계란, 아니 메추리알 같은 몸부림에 불과한 것을 압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했습니다. 아니, 이것만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시편의 기도를 묵상하던 중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다윗의 거침없는 고발과 토로에 힘입어 마음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강대국의 횡포에 휘둘려야 하나요? 어찌하여 저 불의한 권력에 짓눌려 슬픔에 잠겨 있어야만 합니까?”(시 43:2) 다윗의 기도는 고발과 토로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고한 이에게 고통을 가하는 세력을 향한 저주를 기도로 쏟아냅니다. “하나님, 그들의 이빨을 그 입안에서 부러뜨려 주십시오... 그들을 급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주십시오.”(시 58:6-7) 이렇게까지 당당하지도 못하고, 그럴 용기도 없지만 어쨌든 기도했습니다. 사실, 기도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하물 폐기’는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 일은 일어났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두고 그 어느 때보다 절절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하고 부른 후에 분노와 슬픔을 털어놓습니다.
그렇게 막막한 하루 이틀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묻지마 상실’의 피해자로서 내 한 몸 스스로 추스르는 일은 차라리 버텨낼 만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피해 당사자인 아이를 생각하면 어미의 마음으로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고르고 골라서 하는 말이 아이의 상한 마음에 닿질 못합니다. 기도한다는 말도, 기도하라는 말도 오히려 기도를 막는 말임을 압니다. 더 좋은 것으로 되돌려 주실 것이라는 말이 혀끝에 와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덕담이야말로 아니 함만 못한 공허한 말입니다. 지극한 고통 중에 있는 이를 돕는 것은 말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엄마 마음이다 보니 공감의 수위 조절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함께 울어준다며 더 울어버렸더니 위로가 아닌 부담을 안긴 격이 되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나보다 슬퍼하지 마.”하고 전화를 끊더니, 연락이 뜸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 하고 부르면 분노와 슬픔 대신 걱정이 쏟아져 나옵니다. ‘주님, 아이 곁에 함께 계시죠? 붙들고 계시죠? 이 아이, 제 딸이기 이전에 당신의 딸이잖아요. (당신의 손녀가 아니라 딸인 것 알고 있어요!) 아이를 향한 제 마음이 바로 당신의 마음이시죠?’ 이렇게 조금 달라진 기도로 또 하루를 보냅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지나갑니다. ‘폐기 중’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바로 상자 안의 물건 하나하나가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그 하나하나를 헤아리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심장과 손발이 떨립니다. 조금씩 그 증상이 희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도 다소 담담해진 것 같습니다. “당장 해야 할 과제가 많아. 그 생각에 매여 있으면 오늘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 그리고 며칠 후 어느 주말, 온기 담긴 차분한 목소리로 마음을 내놓았습니다. “엄마의 공감이 늘 큰 위로이지만, 그래서 고맙지만, 부담이 되었어. 더는 거기 머물러 있을 수 없었어. 그래서 우체국 쪽으로 민원을 넣는 아빠와만 연락하게 되었어. 아빠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허튼 시간과 에너지 낭비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다 포기하고 싶었어. 엄마, 나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고만 싶었어. 주중인데, 목사님이 갑자기 집에 오라고 하시는 거야. 평소답지 않게 따끔하게 말씀하시더라고. 정신 차리라고. 이 일로 한 학기 애쓴 것 다 망쳐버릴 셈이냐고. 섭섭하긴 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더라고. 엄마, 나 그만 생각하려고. 엄마 아빠한테 미안하고 고마워. 그런데 뭐든 다 그만 생각할래. 당장 연습도 해야 하고 과제도 많아. 그리고 여기서 따뜻한 패딩 하나 살게.”
상실의 치유 과정이 다 담긴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기실 끝없는 잃어버림의 연속입니다. 아끼던 샤프 연필을 잃고, 소중한 물건들을 잃고, 건강을 잃고, 사람을 잃고, 공동체를 잃고, 결국 생을 잃는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상실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삶의 현실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렸어! 그 일이 일어났어! 받아들이는 것이 상실을 치유하는 시작입니다. 받아들이는 순간 고통의 감정이 몰려옵니다. 분노, 슬픔, 죄책감과 회한. 이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흘려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흘리지 못한 눈물은 고통의 샘을 훨씬 더 깊게 채웁니다. 흘려보낸 감정은 더는 없는 것이 됩니다. 엄마에게 감정을 쏟아내던 아이가 문제를 해결하는 아빠에게로 옮겨간 것처럼요. 충분히 느껴주어 흘러 없어진 감정의 공간을 이성이 채웁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매진합니다.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되돌릴 수 있는 것과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무기력한 마음 안에 “정신 차려! 잃어버린 한 조각으로 전체를 함께 잃을 거야?” 하는 목사님의 소리가 들리겠지요. 상실과 애도, 치유의 과정입니다.
이 모든 과정의 기도 체험이 다름 아닌 다윗의 시편들입니다. 슬픔과 분노, 저주의 언어로 쏟아낸 감정이 더는 없는 것이 된 후에,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떠올립니다. 분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늘 자신의 영혼을 향한 명령과 선언입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시 43:5)
제 어린 시절 잃어버린 샤프 연필은 찾지 못한 채 남은 가벼운 회한입니다. 하지만 딸이 겪은 ‘사랑의 상자’ 상실은 다릅니다. 이 상실은 그저 잃어버린 물건이 아니라, 우리를 깊은 기도와 성찰로 이끈 ‘잃어버린 날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이 선언처럼, 잃어버린 날에 드리는 기도는 결국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됩니다. 아이는 오늘도 연습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패딩 때문에 얼어 죽지 않고, 사라진 악보로 인해 음악 인생 끝나지 않았습니다. 상실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하는 지금, 기도하는 지금, 영원에 잇댄 지금, the eternal now입니다.
<시니어매일성경> 3,4월 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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