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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SS 영혼의 친구

Sabbath diary49: 접힌 시간, 거룩한 여기

by larinari 2026. 3. 31.

주일 오후, 월요일 오후 이틀 연이어 나란히 걸었다.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꽃이 있는 길을 걸었다. 주일에는 퇴촌의 물안개 공원을, 월요일에는 분당 탄천길과 중앙공원을. 광주와 분당, 물안개 공원과 중앙공원은 참으로 비슷하면서 다르다. 물, 나무, 꽃이 있는 것은 비슷하고... 흠... 많이 다른데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좀 싫다. 

 

이틀 나란히 걸으며 둘이 함께 좋아하는 교집합의 총체를 누린 것 같다. 무엇보다 걷기 그 자체. 새순이 돋고 꽃이 피는 봄길은 당연히 좋고, 여름이라면 숲으로 들어가 그늘 속을 걷는 것이 좋다. 가을이야 우리 인생의 계절과 가장 닮아 있으니 잠시 단풍으로 찬란했다 스르르 떨어지는 낙엽길이 무조건 좋고. 겨울은... 뺨을 딱딱 때리는 찬바람을 맞으며 걷는 알싸한 기분이 좋고. 특히 집 옆의 경안천 걷기가 좋다. 메마른 강가에 날아드는 철새들이 새롭게 겨울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월요일에는 점심으로 너구리를 끓여 먹고 분당으로 넘어갔다. 최근 10여 년 가장 익숙하고도 가까우며 낯설고 먼 곳이 분당이다. 천당 아래 분당,  분당은 가깝고 천당은 멀고 멀어서 그 괴리일까. 잘 정비된 분당 탄천은 참 좋고, 늘 새롭게 낯설다. 탄천을 거쳐 중앙공원에 들어섰는데, 어마나! 여기는 새의 천당이다. 바로 저 아래 개천에 새로운 새 친구들이 지저귀는데, 구별이 안 된다. 사실 내게는 '구별'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좋아요. 오늘도 새소리로 저와 함께 하시는군요! 맞아요, 당신은 늘 여기 계세요." 이러면 끝인데. 겨울 경안천을 사랑하다 새 사랑에 빠진 남편의 사랑법이 구별하고 변별하고 이름을 찾아내는 것이라서 덩달아 새로운 몰입 중이다. 누구든 열정을 불태워 사랑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함께 뛰어드는 편이라서 그렇다. 요즘엔 산책길에 새소리를 들으면 '합창' 속 파트 소리 찾는데 귀가 자꾸 커진다. 이건 박새, 오... 못 듣던 새소리인데, 뭐지? 중앙공원 실개천 옆에서 '아직'은 구별되지 않고 이름을 모르겠는 새 친구들과 한참을 놀았다. 망원경이 없어 눈으로는 흐릿하게 쫓지만, 귀로는 그 정교한 성부를 하나하나 골라내어 듣게 되는 것 같다. 
 
저녁 약속 시간 전까지 여유가 있어서 율동공원으로 갔다. 역시나 천당 밑의 분당! 기대 누워 책 보기 딱 좋은 소파가 있어서 나란히 누워 독서도 했다. 그러니 좋아하는 교집합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된 것이지!  

 

 

온갖 좋은 것의 정점은 얼굴과 얼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번듯하게 내세울 것은 없지만, 자기 자신이 되어 사랑하며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만나서 나누는 밥과 차와 이야기가 '좋음'의 정점이다. 잔잔하게 재미있는 대화, '척' 하지 않고 편하게 나누는 뒷담화, 내세울 것이라곤 상처 입은 마음뿐인 가난한 마음 말이다. 이 와중에 가난한 이들이 나누는 고급진 망고 케이크가 얼마나 맛이 있는지... 천당의 맛이었다. 여기가 천당이고, 오늘이 천당이다.
 
엄마 돌아가시고 소파에 굴파고 들어 앉았던 때 남편이 지어준 노래가 있다. 그 노래 가사가 떠오르는 순간들이다.
 

오늘이 선물이다
어제도 오늘이다
주님 어제를 잊으니
내 아픔 잊혀진다

오늘이 선물이다
내일도 오늘이다
주님 내일을 여시니
내 근심 사라진다

 
함께 걸으며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 남편에게 말했다. "어제도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이야. 오늘,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어. 저 옅은 수양버들의 새순이 아름다운 이 순간이 최고의 선물이야." 남편이 답했다. "그걸  제임스 스미스는 '시간의 접힘'이라고 말해. 시간의 구부러짐..." 그렇다. 오늘이 선물인 것은, 어제와 오늘, 카이로스의 시간이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포개어지기 때문이다. 이 접힌 시간 안에서 어제의 아픔과 내일의 근심이 고요해진다. 현존의 선물이고, 현존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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