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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SS 영혼의 친구

가만한 환영

by larinari 2026. 4. 15.

 

나가사키 순례를 마치고 밤 12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왔다. 나 없는 사이 배송되어 온 책과 마우스가 내 자리에 놓여져 있다. 시든 보라색 후리지아가 닷새의 공백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 봐도 보인다. 택배 박스를 뜯어서 테잎을 꼼꼼히 뜯어내고 납작하게 눌러 종이 쓰레기 모으는 봉투에 담고. 또 무슨 책을 산 거야? 미간에 주름 잡고 제목을 들여다 보고는 내 자리에 가지런히 가져다 놓은 사람이 보인다. 됐다 안 됐다 하는 마우스로 글을 쓰고 일하는 걸 자꾸 신경 쓰더니 좋은 마우스를 사다 놓았다.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성능 좋은 놈을 써보니 그간 말 안 듣는 마우스로 고통 받으며 글을 쓰고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겠다. 집이다. 딱 봐도 알겠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마음으로 위로를 받는다.
 
첫날 공항 가는 차안에서부터 몸 컨디션이 좋지 않더니, 감기에, 불면에 뒤로 갈수록 몸이 안 좋아졌다. 뒤로 갈수록 더 아파져서 최악의 몸 상태로 여행이 끝났는데, 여행의 끝이 집이라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 참 좋은 일이다. 여행의 끝이 집이라는 것. 새로운 선생님 '이블린 언더힐'과의 만남과 새로운 마우스 덕에 좋아진 작업 환경, 시든 꽃을 비우고 다시 꽂을 예쁜 꽃을 고를 시간이 기다리고 있어서 좋다.
 
일을 하고, 새를 보고, 글을 쓰고, 설교 준비를 하고, 설교를 하고, 주말에 온 현승이 밥을 먹이고, 같이 영화를 보고, 마우스를 사러가고, 택배를 받아 두며 나를 기다리는 그가 있어서 감사하다. 요란하지 않게 반겨주는 그가 있는 일상이 선물이며 또한 보상이다.

 

여행 전날 늦은 밤엔 이렇듯 싱싱했던 보라색 후리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