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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일기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by larinari 2026. 5. 1.

 

다시없을 수도원 밥이 될 것 같다. 다시없을 상을 받았다. 넓은 수도원 피정집에 나 혼자였다. 밥상, 독상이다. 뷔페 아닌 일인 상이 차려져 있다. 문지기 실비아 수녀님이 "어떻게 차려야 할지 몰라서... 하여튼 준비해 봤어요. 밥 덜어 드시고..." 황공하고 죄송한 나보다 더 민망해하신다. "이건 쑥국이고, 봄이니까... 많으면 덜어 드세요." "아이구 수녀님, 쑥국 정말 좋아하는데..." "봄에 오시면 좋아요." 이러고 사라지셨다. 쑥국 국물 첫술이 내려가면서 울컥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올라왔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나만을 위한 밥상을 받았다. 내게 상을 차려주셨다. 꿈여정이나 내적 여정 모임에서 '나만을 위해 차려진 상을 평생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연을 많이 듣는다. 이 고백을 듣고 앉아 있기가 죄송하고 민망하다. '나만을 위한 정성스러운 밥상'을 허다하게 받아본 나는 감히 그 결핍을 헤아릴 수 없다. 비록 가난했지만, 엄마는 제철에 가장 싸게 보는 장으로 늘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주었다.
 
하지만 그걸 충분히 받은 나라도... 그 엄마가 지금은 없고, 어쩌면 받아봤기에 더 그립고 아쉬운 밥상이기도 하다. 나만을 위해, 누군가 차려준 밥상. 이튿날 아침, 아침 식사는 빵, 사과, 요거트, 삶은 계란, 치즈. 다시 나만을 위해 차려진 상을 받았다. 연타로 '독상 사랑' 폭격을 맞으니 참아지질 않는다. 눈물이 흐르는 대로, 소리가 나는 대로 그냥 울었다. 그분이 차려주셨다. 엄마도 없고, 엄마 같은 사람도 없는데... 밥상을 차려주는 역할 도맡아 하느라 애썼다고 하시는 것 같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다. 나 스스로 내 마음에 세워둔 수많은 원수들, 그 원수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스스로 마이크를 대주고는 다시 스스로 고통받는 그 싸움이 투명하게 보이는 3박 4일이었다. 원수 아니다, 네가 스스로 부여한 목소리일 뿐이다, 싸울 필요 없다... 늘 말씀해 주셨다. 투사의 드라마라고. 아무리 말씀을 주셔도 듣지 않으니  "그래, 싸울 때 싸우더라도 먹고 싸워라. 애썼다. 내 흉내 내느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을 흉내 내느라 애썼다. 밥 먹어라, 내 딸." 
 
이렇게 세끼, 나만을 위한 상을 차려주셨다. 금요일이 되어 다른 피정자들이 들어오고, 뷔페상을 보자니 다시없을 귀한 상을 받았구나 싶다. 잊지 말아야겠다. 이 세심한 사랑을. 이 신비를. 세끼 독상으로 든든히 먹고 3박 4일 나 스스로 세운 원수와 싸울 만큼 싸웠다. 싸움 끝에 알았다. 원수가 친구임을. 영적인 여정은 내 마음 세워둔 원수와 화해해 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이다.
 

 

너는 떨면서 네 음식을 먹고, 두려움과 근심에 싸여 물을 마셔라.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월요일, 말씀 묵상 본문은 에스겔 12장이었다. 연일 내내 예루살렘의 심판을 경고하거나, 이미 받은 심판을 해석하는 에스겔의 환상이다. 복이 아니라 심판을 말해야 하는 에스겔 선지자의 심경은 어떨까?
 
에스겔의 환상과 심판의 화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내게로 온다. 어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신 수도원의 밥상이 오늘 내 앞에서 심판의 밥상이 되었다. 수도원에서 누린 은총에 겨워 마산어시장에 들러 떠온 제철 도다리회가 쓰디쓴  벌과 심판이 되었다. 일상이란, 매일 마주하는 밥상이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다.
 
Yes, And! 밥상은 받고 볼 일이다. 위로의 밥상이든 심판의 밥상이든, 밥상은 사랑이니까. 예, 하고 받는다. 그리고... 돌아보며 기도한다.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월요일 아침, 심판의 밥상을 받아 들고 이렇게 기도했다.  

 

밥 먹고 물 마시는 일상이 두려움과 근심에 싸여 떠는 일이 될 때, 떨며 음식을 먹고 두려움 속에 물을 마셔야 할 때, 에스겔의 행위로 보여준 예언을 기억하겠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때임을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바로 오늘 일상의 자리에 임하실 수 있음을 깨닫고, 깨어나 정신 차리겠습니다. "말씀은 나중에나 이루어진다. 엄청 큰 죄를 저지르면 그때나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지... 그런데 내 생애에 오지는 않을 거야." 하며 더 큰 죄를 범하지 않게 해 주세요. 주님, 지금 돌이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에스겔 12:17-28 묵상, 교회 밴드에 단 묵상 댓글을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