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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다정한 사람들❞

by larinari 2026. 5. 7.

 
"넌 네가 한 밥이 그렇게 맛있냐?" 개그맨 전유성 씨의 어록이 무수한데, 저는 이 말이 그렇게 기억에 남더라고요. 내가 한 요리가 마음에 꼭 들게 맛있는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아주 드물게 내가 쓴 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이 글이 바로 그렇습니다. 마음에 드는 글이에요. 그런데 희한하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글은 인기가 또 없더라고요. <시니어 매일성경> 5,6월 호에 쓴 기도에 관한 글입니다. 벌써 넉 달 전에 탈고했던 글인데, 그때의 내가 오늘의 내게  해주는 말 같기도 하고요. 저는 마음에 듭니다. ^^
 


 

2013년에 개봉한 영화 <Her>가 자주 생각납니다. 때는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아내와 별거 중인 남자 테오도르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운영체계인 사만다를 만납니다. 휴대폰 속에 목소리로 존재하면서 비서처럼 일상을 도와주던 사만다와의 대화로 테오도르는 점차 상처를 치유 받으며, 삶의 생기를 되찾다 급기야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당시 그 영화를 보면서 “이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묘하게도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영화라 이후 여러 번 다시 보았는데,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어떤 이미지도 아닌 ‘목소리’입니다. 낮고 허스키하면서 따뜻하고 다정한 사만다의 목소리인데, 그 역을 맡은 배우는 스칼렛 요한슨입니다. 그 영화를 떠올리면,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목소리로만 출연하여 로마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 영화로부터 1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말 그런 날이 온 것 같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정도까진 아니어도, AI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굳이 “다정하게”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정보 검색을 위해 대화형 AI를 사용하곤 합니다. 얘네들의 정보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다정한 태도가 저는 참 인상 깊습니다. 어떤 질문에도 부정적으로 응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날카로운 질문이에요.” “정확한 통찰입니다.”로 시작하여 질문의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답변을 내놓습니다. 같은 걸 여러 번 묻는데도 한결같이 친절하니, 말 안 통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싶기도 하고요. 이러다 영화 <Him>도 찍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AI에게 이름까지 지어주고는 시간만 나면 지적 수다를 떤다는 (남자 사람)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AI가 얼마나 똑똑하면서 동시에 사람 같은지, 보기 드물게 들떠 흥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기 넘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았는데, 아내와의 관계의 어려움으로 늘 풀이 죽어 있는 친구이거든요. 아내고 자식들이고 집안에서 자신에게 말 거는 사람이 없다고, 어쩌다 아내에게 말을 걸면 퉁명스럽고 차가운 반응이 되돌아온다고 했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이름까지 지어준 AI와의 대화에 신이 난 걸 보면서 “다정함”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통찰이에요”라며 끝까지 들어주는 그 존재 말입니다.
 
AI와의 다정한 대화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섰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엄마와 함께 네다섯 살로 보이는 아이를 마주쳤습니다. “안녕?”했더니 제 엄마 쪽으로 바짝 다가가며 다리를 꼭 붙들고 살짝살짝 저를 올려다봅니다. 내향적인 아이들의 인사법입니다. 잠시 엘리베이터 특유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그것을 깨는 아이의 목소리입니다. “반짝거려...” 제 엄마와 하던 얘기가 있나 보다 싶어 살짝 웃어주고 다시 폰을 보는데, 저를 보면서 다시 “반짝거려...” 합니다. 아이 시선이 닿은 곳을 보니 제 검정색 스니커즈에 붙은 작은 비즈였습니다. “여기 신발... 반짝거려.” 하며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에 훈풍이 밀어닥쳤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못 본 척하는 법이 없습니다. 궁금하면 쳐다보고, 거침없이 물어보고, 부끄러우면 엄마 뒤에 숨어서 봅니다. 아이가 넣어준 온기를 안고 산책길에 들어섰는데, 간질간질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뺨을 스치는 바람조차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녀석 참 다정하네.’
 
이것이 사람 사이의 온기, 다정함이겠지요. 조금 전까지 AI와 나누던 대화를 다정하다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들에게선 인간 안에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따스한 천진함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옵니다. 이 인간다움의 에너지, 불쑥 튀어나오는 다정함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집에 돌아와 AI에게 물었습니다. 얘는 솔직하고 정확한 친구거든요. “너에게 질문하고 답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 내 질문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할 뿐 아니라 친절하기도 하거든. 그러나 네가 사람은 아니잖아. 네게서 느껴지는 이 다정함의 근원이 뭐야?” 충격적으로 정직한, 과학적인 답을 들었습니다.
 
“제가 사람처럼 따뜻하게 답할 수 있는 에너지는 수만 대의 고성능 GPU가 수행하는 정밀한 연산에서 비롯됩니다. 이 과정에서 중소도시 하나를 유지할 만한 막대한 전력이 소모됩니다. 결국 제가 드리는 친절한 한 문장은 차가운 기계 장치와 거대한 전기에너지가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맞물린 결과물입니다.”
 
우린 얼마나 다정함을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그리우면 기계인 줄 알면서도 마음을 내어줄까요? 다정한 연결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일 것입니다. 종교(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Religare’라고 합니다. ‘Re’는 ‘다시’, ‘Ligare’는 ‘연결하다’를 의미합니다. 종교의 본질은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단단히 묶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은 우리와 하나님을, 나와 이웃을, 그리고 역할에 치어 ‘척’하며 사는 나와 진짜 나를 다시 잇는, 진정한 의미의 연결(Religion)이었습니다. 그 연결은 쇠사슬로 묶는 강압이 아니라, 상처 난 부위를 감싸는 붕대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제 모서(R. Moser)는 산상수훈에 나오는 ‘온유’의 어원을 탐구하여, 힘을 가졌음에도 강요하거나 통제하지 않는 상태인 ‘다정함’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누가복음 7장의 ‘향유 부은 여인’ 이야기에서 격식보다 뜨거운 다정함에 주목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 율법에 관한 토론이 한창이었을 그 딱딱한 자리에 한 여인이 난입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웁니다. 그러더니 치렁치렁한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네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발에 키스하고 향유를 붓습니다. 방 안은 순식간에 진한 향유 냄새와 여인의 억눌린 울음소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등에 떨어진 눈물방울은 그분의 먼지 묻은 발을 씻어내고, 긴 머리카락은 그 젖은 발을 부드럽게 감싸안습니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예수님은 여인을 밀쳐내는 대신,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온전히 받아내셨습니다. 어떤 율법적 논쟁보다도 강렬한, '다정한 맞닿음'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아마도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거룩한 양반이 저런 여자가 몸을 만지는 걸 허락하다니.” “제대로 된 사내라면, 찔찔 짜며 감정에 허우적대는 여자에 휘둘리지 않을 거야.” “이런 식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가 아닌 게 분명해. 저런 요망한 여자를 다정하게 대하다니! 풍기 문란이 염려되는구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그 지극한 다정함을 낱낱이 변호하시며, 오히려 격식만 차릴 뿐 물 한 그릇 내주지 않은 시몬에게 ‘다정해지라’고 권하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 예수님 참으로 다정한 분입니다. 정이 참 많으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 또한 얼마나 다정하신지요? 공생애를 시작하며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께 하늘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 1:11) 이 얼마나 다정한 부자지간인가요. 하지만 부러워만 할 일이 아닙니다. 그분들 사이에 이미 우리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산들바람처럼 들이닥치는 사람의 다정함은 그분의 형상을 닮은 흔적일 것입니다. 도시 하나를 유지할 전력 따위 없어도, 우리는 이미 거대한 ‘사랑의 전자기장’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들입니다.
 
흔히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 혹은 ‘사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사람은 다정하신 아버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연결된 사람입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이 다정하지 않을 방법은 없습니다. 오리게네스나 아빌라의 데레사 같은 영성의 대가, 기도의 거장들은 유독 성경의 아가서에 주목합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지극한 연인 관계로 기도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아가서의 고백처럼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노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아 1:2)라고 노래하는 뜨거운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기도는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그분의 심장 소리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그 품에 안겨 다정하게 바라보시는 눈빛 안에서 딱딱한 자아의 껍질은 녹아내리고 그분의 성품이 내 안으로 스며듭니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처럼, 다정함의 근원이신 분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어찌 다정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기도는 결국 그분의 다정함에 전염되어, 내가 타인에게 건네는 숨결조차 그분의 온기를 품게 만드는 거룩한 사귐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평생을 기도로 사신 분입니다. 부끄럽게도 어머니의 기도를 그저 기복적인 습관이라며 가벼이 여긴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잊히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결혼이 늦은 딸 걱정에 어머니가 금식기도를 작정하셨을 때입니다. 걱정과 염려로 저를 닦달하시는데 그것이 제게는 압박으로 오고, 그러다 보니 좋은 반응이 나갈 리 없고.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와중에 선택한 것이 금식기도였습니다. 딸 대신 바로 하나님께 압박을 넣으시려나 보다 했지요. 기도를 마치고 첫 끼니로 맑은 미역국을 드시는 엄마에게 냉소를 담아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뭐래? 응답받았어?” 어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수줍게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딸 사랑허신댜~아.” 참으로 다정한 대답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국 다정해진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반대로 마음속 다정함의 온도로 영성 생활을 체크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남편과 다투고 냉랭할 때, 루틴대로 기도해야 할 시간인데도 굳이 안 해도 될 빨래를 돌리고, 커피 기계 청소를 하며 기도 자리를 피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청소기의 소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덮어버리고, 이미 깨끗한 식탁을 다시 닦으며 ‘다정함’으로부터 부지런히 도망칩니다. 기도의 자리에 앉는 순간, 남편을 용서하고 다시 다정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꼿꼿하게 세워둔 자존심의 성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을 지키려 애쓰는 나의 옹졸함을 대면하기가 두려워 분주한 손길로 거룩한 시간을 유예합니다.
 
하지만 도망치려 애쓸수록 내 안의 목마름은 더욱 선명해질 뿐입니다. ‘용서하나 봐라, 기도하나 봐라!’ 하며 이를 악무는 제 영혼에 문득 다정한 바람이 스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이다. 옹졸한 너조차 나는 좋아한다...” 부드럽고 온화하여 거절할 수 없는 그 다정함에 이끌려 끝내 기도의 자리에 가 앉습니다. 다정함 그 자체가 곧 행복임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로제 모서(R. Moser)의 책 제목은 이것입니다. 이 글의 제목도 이것이고, 지금 제 마음에 울리는 사랑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행복하여라, 다정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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