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 잡지 청탁으로 급하게 쓴 글인데 편집 과정에 불편한 일이 있어서 '싣지 않겠다' 강짜를 부렸습니다.

(보기보다 성질 있어요) 여기,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싣는 걸로!



아흔을 넘긴 친정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신다. 돋보기 끼고도 글을 읽지 못하고,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하며, 간간이 용변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신다. 그나마 느리게 쇠락해가는 것이 이 아닌가 싶어 엄마의 말을 붙들고 싶다. 물론 말수는 많이 줄었고 말투는 많이 어눌하다. 흔히 노인들을 묘사할 때 총기는 여전하시다, 라고 할 때의 그 총기, 반짝임이 묻어나는 엄마의 말이 있다. ‘고맙다, 복 받어라.’ 언제부턴가 엄마와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전화 할 때는 끊어대신 고맙다, 복 받아라인사 하신다. 마주 앉아 하는 대화가 끊어질 때마다 그 침묵의 여백을 채우는 엄마의 말은 역시 고맙다, 복 받아라이다. 이제 이것은 아들 딸 손주들에게 엄마(할머니)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려, 고마워, 복 받어라.’ 외할머니의 사투리를 흉내 내며 자주 못 뵙는 할머니를 기억하곤 한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기는 엄마소리 하나로 모든 감정, 모든 요구를 다 표현한다. 배고플 때 부르는 엄마다르고, 두려울 때 다르고, 기쁨을 표현할 때 다르다. 마찬가지로 노모에게 남은 몇 마디 또한 상황에 따라 뉘앙스가 다르다. ‘고마워, 복 받어역시 자세히 들어보면 단 하나의 뜻이 아니다. 식사 잘 하시고 기운이 좋을 때, 당신 좋아하는 간식을 사들고 가면 주름 가득에 생기까지 가득한 얼굴로 고맙다, 복 받아라하신다. 구루모(영양크림) 떨어진 것 사오라는 심부름을 해드리고 바빠 죽겠는데.....’라며 생색이라도 낼라치면 살짝 삐쳐서 영혼 없이 던지는 고맙다, 복 받아라.’ 어떤 뉘앙스가 됐든 기본설정은 무력함인 것을 안다. 조금씩 무너지는 육신으로 자녀들에게 짐이 될 뿐 해줄 것은 말로 복을 빌어주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은 때로 미안하다로 들린다. 아주 가끔은 너무 오래 살어서 자식들 고생이다. 미안하다.’ 하시기도 하는데 고맙다, 복 받어라와 다르게 들리질 않는다.

 

한 계절을 보내고 오는 계절을 맞는, 계절의 고개를 넘는 것이 노구의 엄마에겐 힘겨운 일인가보다. 여름 끝 가을을 부르는 찬바람과 함께 엄마의 몸도 서늘해져 푹 꺾어졌다. 장에 탈이 나서 배변 조절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늘어진 살과 긴장감 없이 흔들리는 근육은 볼 때마다 안쓰럽다. 긴장이 풀린 살과 근육은 엄마를 괴롭히고, 모시는 자녀들에게 짐을 안긴다. 수 년 전 고관절 수술 후 처음 간병하던 밤을 잊을 수 없다. ‘미안하다, 내가 얼른 회복혀야지, 미안혀서 어쩌냐하시며 당신의 무력한 몸을 그렇게나 부끄러워 하셨었다. 그 후로 적어도 기본적인 신변처리만큼은 스스로 하시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자녀들에게 짐이 되는 미안한 몸이 되지 않게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온다. 생명력 빠져나간 근육에 의식의 온기를 쏟아 부어도 더는 조절이 불가능하여 아기처럼 기저귀(,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단어란 말인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지는 마음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엄마를 찾았다. 드실 수 있는 간식도, 필요한 것도 없으시니 엄마를 위해 들고 갈 것이 없다. 엄마의 미안한 몸을 지고 망가진 일상을 사는 동생 부부를 위해 장을 본 것으로 허전한 손을 채운다. 오랜만에 보는 딸과 사위를 맞는 엄마의 시선이 텅 비어있다. 반가운 웃음도, 사위를 볼 때마다 짓는 수줍은 미소도 없다. 엄마의 텅 빈 시선이 따라잡을 수가 없다. 마치 몸만 여기 두고 의식과 함께 어딘가로 유랑을 떠나 있는 듯. 용변을 처리를 해야 하는 순간, ‘어머니, 이쪽이요. , 됐어요. 이제 똑바로요. , 다리 드세요며느리 손에 내어맡긴 몸이 기계처럼 착착 반응한다. 수 년 전, 처음으로 당신 몸의 통제력을 잃으셨던 그때 끊임없이 미안하다, 고맙다, 아이구 미안하다.’ 어쩔 줄 모르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체념, 그렇다 체념이다. 미안한 몸조차 체념하고 비워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텅 빈 시선은 비워서 텅 빈 마음인가보다.

 

엄마를 뵙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고맙다, 복 받어라주문 같은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떤 뉘앙스를 풍기든 엄마의 이 말이 참 좋았다. 여기 담긴 무력한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때 직장 다니는 딸을 대신하여 손주를 키우고, 수십 포기 김장을 척척하여 나누고, 오징어 껍질 새하얗게 벗겨 맛있는 초무침을 만들어 나를 감동시킨 엄마. 내게 흘러들던 엄마의 사랑. 복을 빌어주는 기도 뿐 아니라 이렇듯 실제로 도움이 되었기에 더욱 고마웠던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다. 더는 엄마의 김치를 먹을 수 없고, 더는 엄마가 만든 환상적인 맛의 오징어 초무침을 맛볼 수 없지만,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시리지만 서서히 힘을 내려놓는 엄마의 노년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제 더욱 무너진 육체로 인해서, 더불어 내려앉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인해 고맙다, 복 받어라는 말조차 내놓지 못하시지만 내겐 아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다. 더는 줄 것이 없고, 짐만 될 뿐이며, 받기만 하는 당신의 삶이 곤혹스럽겠으나 엄마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CF의 대사가 있지만 사랑은, 적어도 사랑의 모양은 한없이 변한다. 씻기고 먹이고 입히며 돌보는 것이 사랑인 시절이 있는가 하면(내가 세상에 처음 왔을 때 엄마는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었다.) 씻김을 당하고 입힘을 당하고 돌봄을 당하는 사랑이 있다. 처음 기저귀를 하신 엄마는 아들 며느리를 돕겠다는 뜻으로 혼자 해보겠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하셨나보다. 그러다 일이 더 커져 며느리의 수고가 더해지곤 했다. ‘어머니, 가만히만 계시면 힘들지 않아요.’ 이 말을 수차례 들으신 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뭐라도 해보겠다는 힘을 내려놓으셨다. 그리고는 착착 움직이는 기계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 다리 드세요. 똑바로 누우세요.’ 사소한 말에도 전적으로 따라주는 것이 노년의 엄마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다. 인생의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몸으로서 무너지는 자존심이야 끝이 없을지라도 받아들이는 것. 텅 빈 시선으로 조금 도망치더라도 이 무력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어맡기는 것이 자녀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일지 모른다.

 

엄마의 오늘은 나의 내일이기에 나 역시 새로운 사랑을 예습해야지 싶다. 책의 작은 글씨들이 뭉개져 보이기에 눈에 뭐가 끼었나, 자꾸 비볐는데 다름 아닌 노안이다. 중년에 접어들어 전에 없는 몸의 변화를 겪는 친구들은 운동 열심히 해서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늙어서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해선 이런 전런 준비를 해둬야 한다며 주먹을 불끈 쥔다. 운동도 해야 하고 좋은 것도 먹어야 하지만 불끈 쥔 주먹을 풀고 타인에게 기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는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힘을 줘도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을 근육으로 어쩔 수 없는 몸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엄마의 미안하고 무력한 육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이런 노년의 어느 날? 더 상상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지만 인간의 길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육체는 포기하되 사랑만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엄마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인간에게 사랑이 끝나는 날은 자궁이라는 무덤, 무덤이라는 자궁으로 가는 그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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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오셔서 이틀 밤을 주무시고 가셨다. 며칠 정신없이 보내고 문득 엄마 생각이 나 전화를 했다.


"얼라, 우리 딸이네. 잘 갔어? 나 태(워다)주고 늦게 가서 걱정을 혔지. 그게 벌써 며칠 지났어? 그렇지. 내가 가만히 누워서 우리 딸 생각혔어. 크~은 새우 까서 내 밥이다 놔주고. 게장 살 발러서 밥이 얹어주고.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여. 우리 딸이 보배여. 우리 딸 복 받어라. 복 받어. 울 애기들 잘 있지? 우리 착헌 김 서방은 교회 갔남? 내가 복이 많은 사람여. 우리 채윤이가 얼매나 착헌지, 우리 현성이가 얼매나 착헌지. 전화 혀줘서 고맙다. 나는 인자 전화도 잘 못혀. 지금 커피 사탕 먹느라고 그려. 밥 먹은 게 또 넘어올라고 혀서 커피 사탕 먹는 거여. 니가 사줬잖여. 그려, 느이 집도 인자 마지막으로 갔다 왔지. 너머 멀어서 다시는 못 가겄어. 내가 인자 시(세) 살 먹은 어른내(어린애)여. 그려 그려. 우리 딸, 복 받어라. 끊어."


꽂게찜을 해드려도, 좋아하는 새우를 구워드려도 사실 거의 드시지 못한다. 일단 씹지 못하시고, 씹지 못하는 걸 넘기다 보니 속으로 구역질을 하신다. 식사하다 말고 커피를 타오라 하신다. 엄마 방식으로 구역질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오직 드시는 건 사골국물에 밥 말아서 상치를 찢어 쌈장 찍어 드시는 것. 엄마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것 같다. '엄마, 죽 사다 드릴까? 죽 어때? 무슨 죽 좋아?' '나 죽은 다 좋아하지. 아무 죽도 다 좋아하지.' 그러나 알고 보면 아무 죽도 다 제대로 드시지 못한다. 현승이가 이유식 할 즈음 뱉거나 토하는 것을 보면 아이의 속에서부터 밀어내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요즘 엄마가 그렇다. 그래서 몇 끼 지나고는 애써 뭘 해드리지도 않고 그저 사골국에 밥 말아 상치에 드렸다.


그놈의 '이번이 마지막이여~ 고문'. 집에 모셔다드릴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애써 외면하던 감정이 불쑥 올라온다.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그 오래된 고문이다. 게장은 살을 짜서 간장에 섞고, 첫날 했던 꽃게찜의 국물만 내놓고, 왕새우를 굽고, 푹 익힌 당근 나물에 상치.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총집합이다. 일단은 아이처럼 좋아서 입이 벌어지지만 역시나 거의 드시지 못한다. 옆에 앉은 현승이가 땡 잡았다. 몇 개월에 한 번 집에 오실 때마다 식사량이 꾸준히 줄고 있다. 귀는 더 어두워지시고, 단기 기억력의 현저한 감퇴. 같은 설명을 여러 번 해야 해서 개그콘서트 찍는 것 같다. 온 식구가 엄마의 움직임에 신경이 곤두선다. 불면 날아갈까, 가만두면 넘어질까! 엄마 가시고 채윤 현승 입을 모아서 하는 얘기가 '밤에 자다 할머니 화장실 가시는 소리가 들리는데. 탁탁탁 지팡이 소리로 알 수 있잖아. 그런데 지팡이 소리가 갑자기 한참 안 들리면 걱정이 되는 거야.' 실은 나도 그랬다. 채윤이는 지팡이 소리가 너무 오래 멈춰 있어서 화장실로 뛰어갔는데 손을 씻고 계셨다고.


할머니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채윤이가 "엄마, 할머니가 정말 많이 달라지셨어. 슬퍼. 그런데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그렇게 달라지는 게 어때? 엄마 마음이 어떨까 궁금해." 그 말에 현승이는 "누...... 누나는 어떻게 그런 걸 물어봐? 어떻게 그걸 말로 물어볼 수가 있어? "라고 한다. 채윤이 마음 현승이 마음을 다 알겠고. 실은 내게 그 두 마음이 다 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야말로 점점 그림의 떡이 되는 것이 슬프고 속상하다. 그 이면엔 말로 꺼내지도 못할 것 같은 두려운 무엇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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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결혼식에 가면 그렇게 눈물이 나더니. 관계의 친밀도와 상관없이 입장하는 신부의 뒷모습에 그렇게 눈물이 났었다. 뜻밖에 장례식에 가서는 잘 울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젊은 엄마 아빠가 어린 아이를 두고 떠났거나 사연 있는 장례식이라면 몰라도. 헌데 요즘은 흔히 '호상'이라 불리는 연세 드신 분들의 장례식에 가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난다. 상주도 울지 않는데 문상객이 우는 건 오버 아닌가. 강풀 원작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호상이 어딨어!' 이 대사 때문일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우리 엄마 때문일까. 아니, 그 정도의 단순한 감정이입은 아니다. 


80, 90이 넘어 돌아가실 때보다 10년은 젊은 영정 사진을 뵈면, 살아계실 때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임에도 눈물이 난다. 고인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그려보게 된다. 아니, 영정 사진의 어르신의 눈을 오래 바라보면 눈을 맞추고 있으면 생의 파노라마가 절로 펼쳐진다. 아기로 태어났고, 한때 아이였고, 소녀(소년)이었고, 힘 좋은 젊은이로 펄펄 뛰던 때를 지내셨을 것, 아기를 돌보는 엄마였다가 어느새 중년. 그리고 어느 날 손주 손녀를 본 할머니, 손주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며 안아주고 며칠이고 봐주시며 김장도 해주시던 쨍쨍한 할머니, 갑자기 찾아온 질병, 자타의 당황, 요양병원.......


지난 주 급성 장꼬임 증세로 고생하다 링거까지 맞은 사단의 시작은 친구 아버님의 소천 소식이었다. 처음 뵈었던 20여 년 전부터 이미 은퇴한 목사님이셨고, 친구 가족과의 만남으로 일 년에 한두 번은 꾸준히 뵐 수 있었다. 친구에게 어릴 적 어떤 아버지였는지, 친구가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 그 아버지를 어떻게 극복해야 했으며,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는지 안다.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던 친구 자신은 물론 친구의 어머님께서 깊은 기도로 일궈낸 치유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긴 말씀을 나눈 적은 없지만 직장생활 하시다 늦게 소명을 확인하여 목사가 되시고, 길지 않은 목회생활 후에 긴 은퇴생활을 하신 아버님의 삶이 너무도 무겁게 다가왔다. 하늘 아버지 품에서 지나온 생에 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 상상할 수 없는 위로, 사랑을 경험하고 계실까? 어젯밤에는 교회 집사님 어머님의 장례예배로 대구에 다녀왔다. 목사의 아내로 살아오신 사모님이셨단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며느리이신 집사님께서 남편에게 전해주신 짧은 이야기 정도를 들었다. 어머님의 영정사진을 마주하는 순간, 삶의 무게가 가슴 깊은 곳으로 '쿵'하고 다가온다.


목사로 살았든, 사모로 살았든, 회사원이나 농부, 또는 오래도로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살았든, 오직 엄마로만 살았든, 가족 없이 홀로 살았든 정신과 육체 쇠락의 끝에서 스러져간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고귀함이다. 그 고귀함은 진저리가 쳐지도록 비루함이다. 한때의 날카롭던 지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배려심이, 쌀 한 가마니를 척척 들던 근육의 힘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비루함 말이다.


엄마에게 다녀왔다. 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고 누워 계시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번쩍! '얼라, 우리 딸 왔네. 보고 싶은 우리 딸이 왔어' 그리고는 당장 눈길이 쏠리는 곳은 내 손에 든 쇼핑백이다. 안에 든 품목을 확인하고 '게장은 또 안 혀 왔어?' 하시는데 훅 뭐가 치밀어 오른다. 게장, 게장, 게장...... 그놈의 게장. (엄마가 처음 고관절 수술한 이후로 만들어 나른 꽃게찜과 간장게장은 몇 마리가 되려냐? 100마리? 500마리?) 엄마를 옆에 두고 분노의 간장게장 주문을 했다. 주문하는 소리를 듣고 '얼라, 그르케 바싸댜?' 뷁에엑! '그럼 간장게장이 돈 만 원 하는 줄 알았어? 간장게장은 최고급 반찬이야. 비싸서 내가 담가도 애들도 못 주고 엄마한테 가져와. 간장게장 할 때마다 현승이가 엄마, 나도 이 다음에 간장게장 마음껏 먹게 해줘. 그게 소원이라고!' 며느리도 아들도 못하는, 딸만이 특권. 못된 소리 막 퍼붓기를 했다.


그러곤 눈물이 쏟아져 화장실로 가 수습. 다시 엄마 옆에 앉으니 아니나 다를까 기가 팍 죽은 엄마다. '어제 느이 막내 이모가 전화가 왔는디 언니 나이가 인자(이제) 93이여, 하더라. 내가 너머 오래 살었지. 이렇게 오래 살어서 자식들 가슴 피고(속 썩이고).... 아이고, 언제 불러 가실라나..... 인자 멀지 않었어. 내가 너머 오래 살어서 미안허다.' 이런 엄마 다루는 건 쉬운 일이다. 애들 얘기 하나만 재밌게 해드려도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의기소침은 십 리 밖으로 달아남. '이모가 이번이는 쌀이 즉어서 너한티는 못 보냈다고 운형이한티 보낸 걸로 나눠 먹으랴. 괜찮다고 혔어. 인자 김서방이 부자 동네 담임으로 갔응게. 야야, 뭐가 어뗘. 그게 뭐 자랑이여. 외숙모는 전화만 허믄 이 목사 자랑이라 듣기 싫어 죽겄는디 나는 자랑 벼랑(별로) 안 혀.'


결혼하고 한때 어버이날에 양가에 용돈을 드리면 '나는 괜찮여. 시댁이만 잘혀' 봉투를 돌려주던 엄마. 현승이 낳고 산후조리원 경유 친정에서 2주간 지내다 오던 날. 내가 설거지 몇 번 하고 우유병 닦았다는 이유로 '엄마가 늙어서 찬물에 손대게 하고, 몸조리 제대로 못해줬다고 울던 엄마.  우리 신실이는 몸이 약혀서..... 어디 조금만 아프다 하면 몇 시간에 한 번씩 전화하고 집에서 기도를 멈추지 못하고 걱정하던 엄마. 그런 엄마가 우리 신실이 몸 걱정, 신실이 주머니 걱정은 잊은지 오래다. 그저 엄마 먹고픈 것들이 잘 조달되면 된다는 식. 그 연세에 누구보다 총기 넘치는 엄마이지만 갈수록 관심사는 '나 먹을 것!' 뿐. 본능의 욕구에만 충실하고 진실코자할 뿐.


'엄마, 기도해줘'로 시작해서 일상의 깨알 같은 걱정과 근심, 말할 수 없는 것이 없었다. 이젠 엄마에게 설명가능한 삶의 정황이 별로 없다. 그 좋아하는 간장게장만해도 그렇다. 끊이지 않고 드실 수는 없다는 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여. 아, 이건 옳지 않은 언표. 본능적 욕구를 숨길 수 없을 뿐이고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부끄러워 엄마의 존재 무게는 한없이 무거운 것이다. '오래 살어서 미안허다.' 90년이 넘는 생의 무게를 나는 사실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막막함에 때로 엄마 얼굴 보는 걸 피하고 싶고, 때로 도망치고 싶다. '내가 너머 오래 살어서 자식들 고생이다. 미안허다.' 이 못된 딸년은 엄마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이 죄를 어찌 받을 것인가. 나중에 얼마나 또 후회의 눈물을 흘리려고.


엄마에게 푸악(푸악하다 : '성질부리다'는 뜻의 사투리. 엄마가 쓰는 사투린데 출처는 확인할 수 없음) 할 수 있는 오늘이라서 다행이고 감사함을 안다. 아니 감사하고 있다. 혼자 화장실 갈 수 있는 엄마, 요양병원이 아니라 당신 방에 누울 수 있는 엄마로 인해 늘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감사기도 드리곤 한다. 동생 부부를 향한 고마움과 미안함 또한 사무친다. 이만한 엄마로 인해 감사 감사 감사하다. 하루가 다르게 인격의 포장지를 벗는 엄마, 착한 사람, 배려 많은 사람의 포장지를 벗고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엄마의 오늘을 이나마 견딜 수 있어 감사하다. 엄마의 욕구가 내가 견딜만큼의 투명함이라 감사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말이다. 


'여덟 시만 되믄 내가 느이 교회 위해서 기도혀. 성경책이 써놓고 이름 불러가며 기도혀. 이.웃.교회.(우리 교회 이름은 '이우교회') 이름도 참말로 잘 지었잖여. 우리 김서방이 지었지? 이.웃.교회! 내가 천 명 만 명, 구름떼같이 사람들 몰려들라고 기도혀' 매일 빠지지 않는다는 기도 내용에 제대로 된 정보와 기도 지향이라곤 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여 오류를 수정 할 수 있을까. 방법은 없다. 처음 입력이 그렇게 되었다면 쭉 가는 거다. 93년 된 뇌라 수정기능은 안 됨. '이웃교회'는 이우교회가 될 수 없다. 엄마의 사랑스런 외손주 현승이를 '현성이'라고 부르는데 한 번 입력된 현성이는 영원한 현성이! 무엇을 기대하랴. 그저 웃지요. '햐, 이웃교회는 어디 있는 교횐지 모르겠지만 땡 잡았네. 엄마 기도로 천 명 만 명 구름떼 같이 사람들 모여 들게 생겼으니. 깔깔깔' 기도해줘서 좋다는 얘긴줄 알고 귀요미 엄마도 나를 따라 웃지요. '허허허허. 그럼, 내가 하루도 안 빠지고 기도 허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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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은 아버지 추도식입니다. 1981년 12월 16일에 돌아가셨으니 35주기 추도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들과 사위가 함께 시간 내어 만날 수 있는 날이 추도식 날이 되고, 추도예배 시간이 됩니다. 주일 저녁, 다시 돌아온 아버지의 추도식입니다. 두 집 아이들이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무슨 추도예배가 이렇게 재밌어?! 예배도, 예배 후에 맛있는 것 먹고 노는 시간도 즐겁기만 합니다. 어느 핸가 추도예배 마치고 들뜬 아이들 분위기에 부응하여 동생 입에서 툭 나온 말이 '얘들아, 오늘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기쁜날이야!'해서 정말 대놓고 기쁜 날이 되었습니다. 35년 전 이즈음, 슬픔보단 두려움에 휩싸였던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 남매는 어디 가고요?


저 유명한 책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나우웬 신부님은 이 시대를 진단하는 키워드로 '아버지 상실 세대'를 말합니다. 더 큰 인격과 능력을 믿지 않는 시대, 아버지 대신 또래가 기준이 되는 시대, 그리하여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소망을 잃은 시대이지요. 오랜 내적여정, 영적인 방황 끝에 결국 저는 아버지를 잃은 그 사건 자체는 물론, 아버지 상실의 두려움과 공허감을 만났습니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으로 시작한 어린 시절 작업은 결국 <탕자의 귀향>처럼 '아버지 집'으로 가는 이정표 앞에 서게 했습니다. 지난한 시간이었습니다. 12월이 되면 유난하게 공허하고 유난히 슬픈 나머지 피정을 떠났었습니다. 채윤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해의 12월이 가장 혹독했습니다. 그리고 떠난 기도피정에서 긴 여정의 작은 마침표 하나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얻은 치유의 힘으로 다음 해 여름 코스타에서 간증이라는 이름의 자기 고백도 할 수 있었습니다.


딸로서 아버지를 잃는 것과 아들이 경험하는 아버지의 부재는 전혀 다른 고통이더군요. 남동생과의 친밀함이 유난한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와 힘을 합쳐 동생을 키운 느낌입니다. 아버지를 닮아 힘이 넘치던 동생은 중고들 시절 풀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힘을 과시하며 살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비행청소년이었단 말씀. 늦게 만나서 기적처럼 딸을 얻었으면 만족할 것이지, 아들 하나 더 주시면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 서원했답니다. 우리 엄마가요. 그래서 생긴 동생이니, 어릴 적부터 꿈을 담보 잡힌 동생이 가엾어 보였습니다. 나를 바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싶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엄마의 기도와 달리 동생은 바쳐진 아들답지 않게, 그런 동생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스스로 제물 되어 오직 교회의 딸로만 자랐습니다. 동생의 비행 스토리를 곁에서 지켜보며 대리만족이 컸던 것 같기도 하고요. 동생 역시 제 멋대로의 삶을 살고자 발버둥 쳤지만 신학교에 잡혀 들어가고 목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엄마와 함께 동생을 키웠지만 어느 때부턴지 강해진 동생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동생 내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담해주며 함께 성장해갑니다. 같은 아버지를 잃은 동질감, 그러나 다르게 경험되는 아버지 부재는 내 문제를 보는 또 다른 눈을 열어줍니다. 세 아들을 키우면서 '부성'의 결핍이 어떤 두려움과 방어로 드러나는지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그 문제에 맞닥뜨리며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참다운 힘을 얻어가는 것이 대견하고요. 이렇듯 나우웬 신부님의 진단과 처방처럼 '아버지 상실'의 어두운 기억을 통과하여 아버지 품에 대한 그리움을 회복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재즈처럼 하나님은>을 쓴 도널드 밀러 역시 아버지의 부재라는 화두를 붙들고 정직한 자기 이야기를 풀어간 작가이지요. 이 글의 제목 <아버지의 빈자리>는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아이처럼 천진해진 엄마와 다섯 아이와 함께 깔깔 웃으며 추도식을 보내고 와 생각합니다. '왜, 왜, 이렇게 아버지를 데려가셨나요. 하나님. 왜, 왜, 왜, 왜.....' 어릴 적 일기장 한 바닥을 '왜'로 채운 적이 있었지요. '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일이 내 인생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했는지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 자신입니까, 부모입니까?' 묻는 제자들에게 '저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저 사람에게서 드러내려고 그리된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답변처럼요. 원인이 아니라 삶의 목적을 묻는, 질문의 전환이라 할까요. 35년 걸렸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앨범이 한 권 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사진관에 가야했던 시절. 일상을 찍은 스냅사진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었지요. 헌데 교회 집사님 중에 사진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 기념사진 찍는 일을 주로 하셨던 것 같아요. 그 집사님께서 장례식의 과정을 내내 카메라에 담으셨고 한 권의 앨범으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오랜만에 들춰보았습니다. 여러 번 봤던 이미지라 덤덤할 뿐이었는데 나란히 앉은 동생, 잘 생겼는데 사진에서는 뭉개져 있습니다. 낯선 느낌의 눈물이 흐릅니다. 울고 있는 저 아이들이 자기만 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되고, 입에 올리기도 두려웠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복기해야 했던 추도식은 또 얼마나 무겁고 막막했는지요. 최근 몇 년 아버지 추도식 때마다 단체사진을 찍곤 하는데 사진에 담긴 마음이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할머니 몰아주기! 할머니 얼굴 제일 예쁘게 나오도록 모두 온 힘 다해 얼굴을 망가뜨립니다. (점잖으신 김 서방까지. 점잖아도 시키는 건 다 해요!ㅋㅋ​) 아이들이 웃다가 쓰러져 뒹굽니다. 35년 된 아버지의 빈자리가 식구들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집니다. 울음이 변하여 웃음이 되었고, 두려움이 변하여 어른으로 서는 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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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엄마가 먼저 시들어간다.


동생네 가족여행으로 엄마는 딸네 여행을 와 있다.

주일 예배 마치고 착헌 김서방이 모시고 왔는데 나는 강의가 있어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엄마의 일주일 중 가장 피곤한 주일 저녁,

채윤이 침대에서 쌕쌕 씩씩 숨을 몰아쉬며 주무시다 내 얼굴을 확인하자 큰 눈을 더 크게 뜬다.

"얼라, 우리 딸, 사랑허는 우리 딸이 왔네. 내가 우리 딸이 너머 보고 싶었어.

얘기 허까? 밖이 식탁이 나가 앉으까? 여기 좀 앉을래?" 격하게 나를 맞아주셨다.


엄마가 오신 첫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부시럭부시럭 엄마 화장실 가는 소리가 나면 정신보다 몸이 먼저 깨서 튀어 나가게 된다.

화장실서 넘어질까, 스위치를 못 찾아 불을 못 켤까..... 걱정이 한둘이 아니다.

양쪽 고관절이 모두 인공이라서인지 밤마다 다리가 아파서 그냥은 못 주무신다고.

한 번씩 따뜻한 물로 다리를 맛사지 해야 한단다.

샤워기로 맛사지를 해드리고, 허브 오일을 발라 드리는데 또 늘 하는 그 소리다.

"내가 이르케 오래 사는 게 죄여. 큰 죄여. 자식들한티 이게 무슨 죄랴......"  


새벽에 오는 메시지나 간혹 잘못 걸려오는 전화에 잠이 깰 때가 있다.

남편은 취침 모드로 해놓고 자라고, 무음으로 해놓고 자라고 하지만 늙은 엄마 둔 심정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밤에 자다 엄마가 어떻게 됐다는 전화가 올까봐 벨소리를 줄이지도 못한다.

엄마가 곁에 와서 주무시면 안심해야 할텐데 더 신경이 곤두 서있다.

이틀을 계획하고 오셔서 모셔다 드리려 했더니 "하루 더 자고 가믄 안 되남?" 하셨다.

내가 잘못 들었나?

"김서방 미안혀서.... 내가 아들 집 두고 왜 딸 집이 가서 살어." 입에 달고 있는 말이다.

동생 네가 어디 가고 어쩔 수 없어야 우리 집에 한 번 와주시는 격인데, 하루 더 주무시겠다니.


"내가 이번이 오믄서 이게 마지막이지 생각혔서. 내가 온제 또 오겄어. 곧 죽을 사람인디."

늙은 엄마 둔 딸은 밤에 휴대폰 무음 전환만 못 하는 게 아니다.

엄마 생신 때도, 명절 때도, 함께 외식을 하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스스로 고문한다.

고문이다. 하루 이틀 된 고문이 아니다. '늙은 엄마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고문'

엄마 없는 세상을 상상하며 하릴없이 흘린 눈물이 얼마던가.


국물은 사골, 반찬은 게장, 후식은 포도를 질리지도 않고 좋아하시기 때문에 식사수발이 쉽다.

이제는 거의 씹지도 못하시기 때문에 게장은 간장만 떠서 드신다.

간장게장의 살을 바르고 짜내서 간장에 섞어서 아기 이유식 만들 듯 했다.

어릴 적부터 우리 식구 모두 좋아하던 박대로 조림을 했는데 가시 하나 없이 살을 발랐다.

그렇게 엄마 반찬은 따로 준비해야 한다. 

할머니까지 다섯 식구 앉아 식사를 하는데 채윤이가 파김치를 맛있게 먹으며 '이 김치 정말 맛있어.' 한다.

나를 닮아 파김치를 좋아한다. 나도 어릴 적부터 파김치를 좋아했다.

대가리 하얀 부분은 먹지 못했다. 엄마가 늘 그 부분을 잘라서 먹고 초록색 부분을 내게 주곤했다.

그 얘길 하다보니 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복받쳤다. 한 달, 두 달이 다르게 시들어가는 엄마.

한때 엄마는 내가 못 먹는 걸 대신 먹어주고, 내가 못 드는 짐을 들어주고, 아픈 내 다리를 밤새 주물러주곤 했는데.


예전의 엄마를 그리며 감상에 젖는 것은 사치이다.

느리게 느리게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고, 꾸물꾸물 일을 보고 나오시는 엄마를 보면 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 

귀가 어두워져 '나 니가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겄어' 해도, 이 정도도 다행이지 싶다.

이 정도만으로도 감사하지, 싶다가도 사치스럽게 감정이 복받쳐 속울음을 운다.

속울음을 울다, 이 정도면 감사하지.

시들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의 호들갑을 숨기려니 자꾸만 무뚝뚝해진다.

딸이 고파서 자꾸만 따라다니는 엄마가 식탁 앞에 앉아 말 걸 틈만 노리다 스르르 방에 들어가곤 한다.


꽃보다 엄마가 먼저 시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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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애기를 키우느라 꼼짝 못 하는 동생네가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갔다.

엄마 애기를 돌보러 동생 집에 와서 하룻밤을 지낸다.

이런 일로 동생이 부탁해오면,

'싫어. 얼마 줄겨?' '뭐 해줄겨?' 이런 식으로 대답하지만 피차에 오케이로 통한다.

할 일이 태산이고, 현승이 중학교 가서 보는 첫 시험의 첫날 전야지만.

No라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놈만 골라 패는 엄마는 과일은 포도에 집착하는데 망원시장에 갔더니

씨도 없는 거봉이 겁나 달고 맛있는 게 있다.

한 박스 사서 엄마 집으로 가 1층 엄마 집 바로 앞에 주차했다.

밖에서 보이는 주방 쪽이 캄캄하다.

어렸을 적부터 1000번은 들었을 엄마 나이 다섯 살(세상에나!) 적 무용담이 떠오른다.

거의 90여 년 전, 다섯 살 엄마가 결혼식에 간 식구들을 기다리며 캄캄한 집에서 들창문에 머리를 내밀고 울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얘기이다.


나를 보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엄마가 걸음마 차를 밀고 졸졸졸 따라다닌다.

내 방이는(에는) 냄새나지? 밖이 쇼파 가서 앉을래? 앉어서 나랑 얘기 좀 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엄마, 내가 밖에서 보니까 집이 캄캄하대. 엄마 다섯 살 때 혼자 집 본 얘기 생각나네'

라고 안전핀을 뽑았더니.

이옥금 권사님 구십 일대기 읊기 시작되었다.

'그려서 내가 안 되겄다. 서울로 가야겄다. 딱 마음을 먹은 거여..... 시상이(세상에), 그때 니 나이가 열시 살(열세 살), 운형이가 열한 살이었어. 애기지, 애기 (울먹)'


엄마, 나중에 천국 가서 아부지 만나면 제일 먼저 뭐라고 할 거야?

나 헐 말 다 생각이 있지. 당신 씨가 착헌 씨여유. 신실이 운형이가 당신 씨라 얼매나 착허게 나한티 잘 허는지 몰라유.'

착한 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네버 앤딩 엄마의 일대기)

$#ㅏㅏㅏㅐㅐㅓㅠㅏㅣㅠㅠㅒㅒㅖㅓ#*&%^$@@ㅓㅓㅜㅗ........

다~아 하나님 은혜여.

(끝날 분위기)

참말로 지금 생각허믄 오뜨케 그르케 혔나 싶어.

(분위기 전환하여 2절 시작)

그릉게 성전 건축허고 반대허던 자들 다 입이 딱 붙어 버린 거여. 이옥금 집사, 이옥금 집사.... 칭찬이 떴지. (자뻑, 먼산)

3절, 4절, 5절......10절........ 

(현승이가 적절한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줌. 그리하여 쉬는 시간)

(엄마는 아직 눈빛이 아련. 여전히 이옥금 집사 칭찬 비행기 탑승 중)


엄마, 현승이 내일 시험이야. 중학교 첫 시험이야. 기도해.

얼라, 그려? 그르믄 너 빨리 지금 집이 가라~ 가서 봐줘야 할 거 아녀

.(마음에 없는 소리)

현승이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미국 가서 할 강의 준비해야 한다니까. 이따 엄마 자면 나는 강의 준비 해야 돼.

그려? 야, 나 잠온다. 나는 들어가서 잘팅게 빨리 강의 준비혀.

(빛의 속도로 사라지심)





강의 준비는 무슨! 사진도 많이 건졌는데 블로그질이나 해야지.

몇 줄 쓰고 있는데 스윽스윽, 엄마의 네발 걸음마 차 등장하는 소리.

'미국 가는디 그려도.... 좀 줘야지.....'

만 원짜리 다섯 장 들고 나오셔서 노트북 위에 놓는다.

'얼라, 자꾸 미끄러진댜. 왜 안 받고 핸다폰만 들고 있댜. 얼른 지갑이다(에다) 느(넣어)'





이렇게 글을 마치려는데 다시 스윽스윽 자가 걸음마 차 오는 소리.

왜, 또오?

(네발 걸음마 차 앞에 이불 하나 척 걸치고 등장)

이불 갖다 줄라고. 이 이불이 빨고 한 번도 안 덮은 거여. 냄새 안 날 거여.

이불 꺼내 왔어. 얇은 거 덮을 거야.

그려? 춥잖여. 알었어.





쉽게 포기하고 유유히 엄마는 사라졌지만.

금세 또 뭘 들고 나올지 몰라서 글을 마무리할 수가 없다.

.

.

.

.

.

많이 기다렸다.

이제 잠이 드셨나보다.

나도 맘 편히 완료 버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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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엄마는 주일을 기다리며 산다.

눈이 흐려 성경을 못읽어, 외우고 있는 몇 구절을 의지해 주중을 버틴다.

같은 구절을 외우고 또 외우며 주일을 기다린다.

걸음걸이가 불안하여 나댕기는 것도 버거운 엄마는 단 한 번의 외출, 주일을 기다리며 산다.

두 번의 고관절 골절과 수술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줄 알았던 자리여서 더 애틋한 자리.

 

주일예배, 주일성수에 목숨 거는 엄마 덕에 사춘기 이후로 엄청난 갈등에 휩싸여 살았었다.

그래서 엄마 입에서 주일성수, 주일예배가 나오는 순간 내 속에선 신경질이 자동으로 나온다.

 

엄마의 유일한 낙이 주일예배, 권사기도회라는 걸 아는 착한 동생이 잘 모시고 있다.

주일마다 김포에서 흑석동까지 모셔가고, 마치는 시간에 모시러 가고.

동생네가 주말에 집을 비워야 해서 아기를 맡기듯 엄마를 내게 맡겼다.

주말에 엄마를 맡으며 교회 모시고 가는 거룩한 소임까지 함께 맡았다.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4층을 오르고 내리는 것은 91세 엄마에겐 가장 어려운 미션이다.

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 계단을 오르는데 저 치렁치렁한 치마.

"아이고, 아이고, 헤에, 휴우........"

한 걸음 한 걸음도 벅찬데 치맛자락이 보통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다.

치마를 잡아 매보기도, 속바지 안에 집어 넣어보기도 하나 단출해지질 않는다.

"권사님들이 바지 입고 댕기라고들 혔샀는디.... 노인네가 근천스럽게(거추장스럽게) 치마 입는 것이..... 주책이라고 헐깨미(할까봐) 부끄럽기는 혀도..... 나는 평생이 주일날 바지 입고 예배 드린 적이 읎어서.... 하나님 앞이 가는디.... 오뜨케 그르케 헐 수가 옶어서..... 히유우...... 히유우...... 미안허다. 내가 오래 살어서 이르케 자식들 고생시키고....."

 

1층 현관을 들어서 세월아 네월아 계단 오를 생각에 한숨이 나왔는데 

정장 쫙 뺀 엄마의 복장을 보니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20 년은 됐을 정장, 20여 년 동안 주일에만 입었던 엄마의 정장.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네가 이런 옷을 입냐'고 한 마디 하려다 참았다.

4층까지 오르는 기나긴 시간동안 엄마의 '히유~우, 히유~우, 중얼중얼'에 마음이 풀렸다.

그리고 여자 엄마의 뒷모습이 예뻐 보였다.

 

 

# 교회에 취미가 있는 여자들은 의상에 신경을 많이 쓴다.

# 16세 중딩 여자도 주일 아침엔 옷 고르느라 한 시간 보낸다.

# 16세나 91세나 여자들의 주일 아침은 두근두근 옷과 화장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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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랑 아침 저녁으로 손머리 하트로 인사한 지가 한참 됐다는 엄마.

동생이 충격적인 제보를 해왔다.

며칠 전 동생 따라서 손머리 하트를 보내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디 이게 뭐 허는 거라니?" 

뜻도 모르고 천진한 미소와 함께 몇 년 동안 하트를 날리신 거다. 

 

헐

 

 

오늘 점심에 엄마한테 갔다가 손머리 하트를 자꾸 시켰다.

"또 허라구? 나 놀리남? 안 혀"   

한 번 튕기고 낼름 또 귀엽게 따라 하셨다.

"엄마,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어?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여. 내 전부를 드린다는 뜻이여?"

이런 탁월한 바디랭귀지 번역가라니!

 

 

ㅋㅋㅋ

 

 

요즘 채윤이가 애용하는 엄지 검지로 만드는 귀요미 하트를 보여드렸다.

"엄마, 그럼 이건 무슨 뜻이야?"

"둘이 마음을 합헌다는 뜻이구만"

엄마 짱!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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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
엄마는 세 발로 걷는 저녁을 산다.
이사한 지 3년이 되어가는데 처음으로 딸 집에 오셨다 가셨다.
마지막으로 오셨던 전에 살던 명일동에 오셨었던 때를 생각하니 그냥 아득해진다.
그때 오셨을 때는 혼자 새벽기도도 다녀오셨고,
산책도 하셨었다.
심지어 일주일 지내고 모셔다 드렸는데 뭔가 중요한 걸 놓고 가셨다고
연락도 하지 않고 혼자 지하철로 집까지 찾아오셔서 깜놀했었다.
불과 3년 전인데 그랬었다. 



이쪽 합정동으로 이사 온 후 얼마 안 되어 고관절 수술을 하셨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4층 우리 집은 엄마에게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올해 반대쪽 고관절이 골절되어 다시 수술. 곡절 끝에 지팡이 의지하여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지만 세 발로 걷는 저녁을 사는 엄마는 훨씬 더 의존적이 되었다.
지난주에 동생네 휴가였다.
혼자 식사를 해결할 수 없는 엄마 때문에 어디 나가는 계획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요즘 교회에도 가시곤 하니 우리집으로 오시라고 했다. 
계단은 쉬엄쉬엄 천천히 올라오시면 될 듯하여.
"나는 집이 제일 좋아. 어디 안 가"
천진난폭, 순진무궁하게 배째라 하는 엄마를 설득하다가 뷁! 하고 말았다.
사춘기 딸 모드로 고래고래, 뷁! 다다다다, 대못이 될 말임을 뻔히 알지만 돌직구로 던지며 고집 피우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말귀 잘 알아듣는 엄마가 자포자기 하는 마음으로 알겠다고 했다.
며칠 죄책감의 파도에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면서 정박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집에 오셔서 "엄마, 지랄거려서 미안해. 섭섭하지?" 했더니,
'딸이 있응게 그려도 그런 말을 혀주지' 했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죄책감 느끼고 싶지 않아서,
기회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 망원시장과 주방을 오가며 식사를 해드렸다.
정말 나를 위해서 엄마 밥을 열심히 했다.
 


한 해 한 해 엄마의 몸과 정신이 쇠약해져 가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작년 다르고 올 다르다.
그래도 변함없는 것은 매일 정한 시간에 예배드리는 엄마의 모습이다.
매일 저렇게 '엄마의 사랑하는 책'을 읽으신다. 전처럼 오래 붙들고 계시진 못한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해서 '장모님 성경 읽으시는 사진 많이 찍어놔. 평생 말씀 읽으며 사시는 분의 대명사!' 메시지를 보내왔다.
옆에 가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대도 고개 한 번 들지 않으신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우리 엄마의 찬송이다.



거실에서 노트북 붙들고 있는 나에게 말 좀 걸어보려고
'차박, 탁, 차박, 탁' 천천히 걸어 나와 소파에 누우신다.
몇 마디 말 걸다 대꾸가 없으면 이내 졸고 계신다.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면
'이쁜내미, 어이구 이쁜내미. 착허기두 허지. 오쩌만 저러케 애들이 착헐까. 이쁜내미'
주문을 외우는 것 같다.
저항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아침 점심 저녁을 마치고 깊은 밤을 향해 가는 삶의 여정.
가슴으로 느껴져 숨 쉴 때마다 아픈 통증이 된다.

아들 집, 당신 방으로 가신 엄마는 넓고 편하고 시원해서 좋으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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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다니는 기적이라 불리는 우리 엄마, 달팽이 라바보다 너 느릿한 걸음이지만 다시 걸어 엄마 방으로 복귀하셨다. 순도 100%의 감사기도를 드릴 수는 없지만 저렇게 환해진 엄마 얼굴을 보게 되다니 웬 은혠가! 시어머니가 엄마 해드리라고 해주신 쑥개떡 반죽이 있는데 것두 해다 드릴 겸, 퇴원 축하도 해드릴 겸 네 식구가 갔다. 머리 맡에 만원 짜리, 오만 원 짜리를 딱 준비하고 있다가 들어가자 마자 "울 애기들" 하시며 아이들에게 한 장 씩. 그리고 "김서방, 생일 축하여. 신실이 니가 이거 갖구 가서 와이샤쓰 이~뿐거, 뽀~오얀헌 거 사다 줘. 설교허는 사람은 와이샤쓰 깨~끗헌 걸 입어야 혀" 하며 고양이에게 생선을 넘겼다.


**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게 아니라 내 속에 '비난'이 너무도 많아, 나를 괴롭히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곤 한다. 나는 세상을 향해서 왜 이리 너그럽지 못한가? 오랜 의문이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비난의 왜곡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비난의 목소리는 엄마 목소리였다. 뭘 해도 '어이그, 내가 그럴 줄 알었어. 너는 어찌 그렇게....#$$$/8.....' 엄마 목소리가 어른거린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오랜 시간 커피를 마시면서도 괜한 죄책감이 시달렸다. 커피를 마시면서 엄마한테 좋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걸 사거나 가질 때도 엄마한테 한 소리 들을 거라는 각오는 늘 되어 있었으니 그 모든 것이 비난의 아우성이었다.


***
알고보면 엄마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인데. 그리고 걱정이 무지 많은 사람이다. 어렸을 적부터 내가 비난으로 여겼던 엄마 목소리는 '걱정의 잔소리'였다. 걱정인지 사랑인지 비난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는 그 모든 걸 '너는 잘못됐어. 너의 모든 것은 잘못됐어'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존재론적 죄책감과 의기투합하여 '나는 뭘해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아상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음악치료사가 되고, 엄마가 되고, 특히 채윤이가 아기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유아가 되던 시기에 비로소 이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세상을 향해 너그럽지 못한 나와 엄마 목소리, 그리고 왜곡된 기억의 유착을. 그리하여, 모든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경험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이 나를 이렇게 저렇게 끌고 다니기 때문이다.


****
인식하고 많이 치유되었지만 여전히 엄마한테 가까이 가기 힘든 이유는 엄마의 잔소리와 그 잔소리가 비난으로 들리는 매커니즘이 끊어지지 않아서이다. 엄마가 병원에 계실 때 갈 때마다 반찬 또는 간식을 챙겨간다. 방울토마토도 주종목 중 하나였는데 보통은 씻어서 가져가곤 했다. 병원 근처에서 토마토를 샀는데 동생집에 가서 씻어 나오기가 귀찮아서 그냥 들고 간 적이 있다.  엄마가 퇴원을 한 후에 전화 통화를 하는데...... 엄마 옆 침대의 까칠한 할머니 얘기가 나왔다. 모든 것을 불평하고 욕하고 집요하게 괴롭히는 싸움쟁이 할머니였다. 내가 씻지 않고 가져간 방울토마토를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씻어달라 하기 전에 엄마가 꼭지를 따고 있었다고 한다. 그걸 보던 싸움닭 할머니가 내 욕을 하시면서 그걸 씻지도 않고 가져오는 게 어딨냐고 했단다. 거기까지 듣고 다음 대사를 짐작했다. "그렇게 까다로운 할머니가 옆에서 잔소리하는 거 알면서, 왜 씻어오지 않았니" 이렇게 짐작하고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던 듯. 그러나 의외로 엄마가 그랬다. "그려서 내가 이번이는 안 참었어. 소리를 꽥 질렀지. 할머니! 할머니 딸만 바쁜 거 아녀유. 우리 딸은 진짜 바쁜 사람여유! 우리 딸이 씻쳐오든 안 씻쳐오든 할머니가 무슨 상관여유. 그만 혀유"


*****
치유.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속에서부터 '좋음'이 올라왔다. 엄마의 말을 듣고. 엄마가 내 편이다! 엄마가 내 편을 들었어!! 엄마의 잔소리가 왜 사랑이 아니었겠나. 늙어서 낳은 딸 잘 키워보자고 애쓰고 염려하던 마음이 엄마 방식대로 표현된 것이 잔소리였을테니. 급 엄마를 이해해버리겠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 나이에도 엄마가 나를 위해 싸움닭 할머니에게 대들어준 것이 그렇게 좋았다. 치유를 유발하는 경험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 내내 마음에 울리면서 참 좋다. "할머니 딸만 바쁜 거 아녀유. 우리 딸도 바쁜 사람이유!" 엄마가 당신 몸도 나아 퇴원했을 뿐 아니라 내 마음 한 부분도 치유를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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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환경에 맞춰 욕구가 바뀌는 사람이었다. 가장 흔한 엄마들의 그것처럼 '엄마는 생선살 안 좋아한다. 대가리만 좋아한다' 이런 것 말이다. 어릴 적에 동생과 내가 결코 먹지 않았던 과자가 젤리였는데 엄마는 젤리를 좋아했다. 그러니 나랑 좋아하는 게 겹칠 리 없고, 돈이 들어가는 음식은 아예 엄마가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생선 중에 제일 싼 동태, 깍두기 국물 같은 것들이 엄마가 좋아하는 거의 유일한 음식이었다. 당연히 고기는 입에 대지도 못하셨다. 그러던 엄마가 최근 몇 년 고기사랑에 빠졌다. 소고기 샤브샤브는 물론이거니와 생전 입에 대지도 않았던 후라이드치킨 등등. 처음엔 당황도 했지만 평생 억누르던 욕구를 이제라도 맘껏 느끼고 채우시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도 했다.



아마도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꽃게나 대하인 것 같다. 병원에 입원만 하면 은근 또는 대놓고 찾으시는 게 꽃게찜이다. 이번에도 입원 당일에 뭐 드시고 싶은 거 없냐는 내 말에 '꽃게찜...' 하는데 슬쩍 짜증이 올라왔다. 일단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꽤 의미있고 상당히 긴장이 되는 강의를 앞두고 있는 탓이었다. 강의 전날, (아직도 엄마가 좋아한다고 믿고 싶은) 애호박 새우젓국을 만들고 꽃게찜 대신 그나마 손질이 쉬운 대하를 사서 찜을 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하루였다. 왠지 마음이 불안했고 불안한 이상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강의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자꾸 스쳐갔지만 망쳐도 할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를 달랬다.
 



강의는 무사히 마쳤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엄마에게 가야하는데 도저히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내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뭔지 모른 우울감 또는 분노 같은 것이 먹구름처럼 영혼을 덮는 것 같았다. 괜한 우회전, 괜한 직진을 거듭하며 헤매다 집 앞까지 왔다가 다시 괜한 직진을 해서 동네를 돌다가 주차 가능한 카페에 들어갔다. 몸이 힘든 탓일까? 긴장했던 강의를 마친 허탈감일까? 내 마음 나도 몰라! 였다.



어제 월요일. 엄마랑 통화를 하다보니 입맛이 없어서 새우찜 국물에만 식사를 하셨단다. 국물이 다 떨어졌단다. 국물을 많이 잡아서 해오란다. 그러겠다고 끊었지만 속에서 자꾸 분노가 올라왔다. 엄마의 욕구를 분명하게 밝히고 요구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나는 내 욕구가 부끄럽다. 무엇을 먹고 싶어하거나 갖고 싶어할 때마다 수치심이 올라온다.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욕구를 철저하게 통제하며 사는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것, 가지고 싶은 걸 늘 쓸 데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엄마의 돈은 오로지 동생과 나를 대학까지 보내는 것에만 쓸 작정인 것처럼 그 외의 모든 소비는 '악'처럼 여겼던 것 같다.



그로 인해서 느끼는 결핍으로 나는 정말 엄한 곳에서 과소비를 하고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다시 수치심을 느끼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아직도 일정 정도 그러고 살고 있는 중이다) 나를 이렇게 만든 엄마가 이제 와서 당신의 욕구에 저렇게 당당해지고,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럽고 버겁다. 게다가 엄마의 그 원초적이고 간절한 욕구를 알아주는 것을 물론이고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 물론 몸이 힘들어서 힘든 것 역시 당연하다. 지난 금요일 강의를 앞두고 음식을 할 때 올라왔던 그 복잡한 마음의 실체는 그런 것들이었다.



어제 오랜만에 남편과 점심, 커피 데이트를 했다. 오후가 되어 장을 보고 들어와 새우찜과 당근 나물과 양배추 나물을 했다. 전날에도 나 대신 병원에 다녀왔기도 했거니와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컸을텐데 남편이 기꺼이 동행해주었다. 힘든 내 마음을 토닥여주는 배려임을 알기에 힘이 났다. 엄마가 반찬을 보고 반색을 하면서 좋아했다. 고맙다고 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 딸 안 낳았으면 큰일 날 뻔 했지? 누가 엄마 이런 거 해다 줘' 했더니 '암, 그렇고 말고' 란다. 골절된 다리를 주물러 주며 엄마 얼굴 가까이 보며 얘기하고 농담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제 엄마 음식을 다 한 후에 식구들에게는 저녁으로 콩불을 해주었다. 냉동실에 양념된 돼지고기가 있었는데 엄마 새우찜 하고 남은 콩나물을 얹어서 팬에 구웠다. 세 식구가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니 조금 과장해서 행복하기까지 했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아한다는 것, 그것을 맛있게 먹어줄 때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맞다. 내가 내 나름의 창작행위를 참 좋아한다. 창작행위는 내가 나를 믿어줘야 가능한 것이다. 내가 나를 믿어주는 힘, 이것은 원래 내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준 그 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사랑과 믿음의 원천은 끊임없는 잔소리와 비난으로 내 영혼에 수치심을 채워넣은 엄마 목소리의 이면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엄마를 온전히 사랑할 수도, 온전히 미워할 수도 없다. 다만 내 마음 조금 알게 되었으니 그만큼 가볍운 마음으로 새우찜, 꽃게찜을 해다 나를 수 있게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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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절 골절 후 수술, 재활을 기적처럼 극복하신 엄마.
행여 또 넘어질세라 고이고이 다니시며 1년 넘게 잘 지내셨는데 오늘 1년 반 전 그날의 데자뷰입니다.
아침에 집에서 넘어지셔서 나머지 한 쪽 고관절이 골절되어 입원하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처럼 당황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이진 않았지만 엄마의 침상을 지키는 밤. 밀려드는 슬픔과 복잡한 심경은 다시 새롭습니다. 그때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해피앤딩으로 끝났다고 느꼈던 엄마의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 것 같군요. 우리 모두의 이 기적없는 일상의 고통, 언제까지 일까요?



<엄마의 미안한 육체>

            * 2012년 9월 17일 <크로스로>에 썼던 글.



아흔을 바라보시는 친정엄마가 고관절 골절로 병상에 누우셨다. 이미 수년 전부터 골다공증이 심해 걸음걸이며 앉고 일어서는 일이 늘 위태위태했었다. 엄마의 조심스런 걸음걸이를 바라보면서 유리로 된 등뼈를 생각했다. 칼슘이 빠져나간 엄마의 뼈는 유리처럼 투명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깨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45세의 늦은 나이에 늦둥이로 나를 낳으시고 연이어 동생을 낳으셨다. 늦은 출산으로 인해서 이미 몸속의 칼슘은 충분히 고갈되었을 것이다. 목사였던 남편이 일찍 부르심을 받으면서 어린 남매와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지셨다. 남매를 기르는데 노년을 바친 엄마는 칼슘은 물론이고 몸과 마음의 마지막 남은 양분이란 양분은 다 쏟아 부으셨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나마 삶을 구축하고 채우며 살고 있는 것은 텅 비어가는 엄마의 생명의 이면이 아니겠나.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시는 엄마 곁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먹고 화장실 가는 기본적인 욕구의 해결은 물론 옆에 있는 손수건 하나도 남의 도움 없이 손에 쥘 수 없는 엄마를 지켜보아야 했다.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그 정도는 ‘사치스런’ 고통이다. 그 모든 것 혼자 할 수 없는 엄마를 간호하는 것은 처절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이동할라 치면 엄마의 작은 몸이 그렇게나 육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몇 시간 만에 손목이 시큰거리고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그 와중에 들리는 “아이구, 어쩐댜. 미안혀서 어쩐댜. 너도 약헌 몸인디……. 미안허다. 미안허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귀로 들어와 가슴을 후벼 판다. 엄마가 내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자발적 행동이 ‘말’이라는 듯, 엄마가 고통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근육이 성대인 것처럼 끊임없이 “미안허다. 미안허다” 했다. 늘 나보다 힘이 셌고, 더 강했던 엄마가 어쩌다 이렇게 미안한 존재가 되었을까? 이제 다시 돌이킬 수도 없는 ‘미안한 육체’가 된 엄마 몰래 소리 없는 눈물이 자꾸 흘렀다.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엄마의 몸은 막상 만져보면 전혀 다르다. 오랫만에 만져보는 엄마의 살들은 긴장이라곤 없는 근육들로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다.

병원을 나와 주일 마지막 예배인 청년 예배에 참석했다. 청년 성가대의 맑은 소리가 유난히 생소하게 귀에 꽂혔다. 바이브레이션 없는 투명한 목소리를 듣자니 젊고 탱탱한 피부와 긴장감 넘치는 근육으로 덮인 저들의 육체가 느껴진다. 아, 늘어질 대로 늘어진 엄마의 살들이 오버랩 되었다. 저런 탱탱한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마의 ‘미안한 육체’에 사로잡힌 탓이었나 보다. 젊음과 생명력이 생소하고 낯설어짐이었다. 우리 엄마도 젊어서 노래를 잘했다고 했다. 성가대에서 찬송을 부르면 “목청 좋다고 칭찬이 늘어섰었어” 라고 말하곤 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찬송은 항상 바이브레이션 그 자체다. 엄마도 저 청년들처럼 흔들림 없는 직선 같은 소리로 노래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어정쩡하게 맑거나 투박한 소리로 찬송하던 시기를 지나 어느 덧 지금의 노인네가 되었을 것이다.

청년 성가대의 찬양 소리는 좋다. 음악적 완성도는 상관없이 듣기에 좋은 구석이 있다.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 따먹기를 할 때는 평소보다 시계가 빨리 돌아가는 느낌이다. 늘씬한 종아리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무리가 지나가면 그들로부터 눈길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젊음과 생명력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반면 쇠잔해가는 엄마의 몸, ‘미안한 육체’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생명력이 빠져 나가 흔들거리고 너덜너덜해진 노인의 피부는 죽음, 곧 바로 죽음을 연상시킨다. ‘이러다 엄마가 돌아가시는 것 아닐까?’ 병원에서의 하룻밤이 그리도 힘겨운 이유가 여기 있다. 어찌 됐든 엄마의 육체는 말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어디 엄마의 육체뿐인가? 나는 그렇지 않은가? 투명하고 싱그러운 소리로 노래하던 청년들은 또 어떤가? 우리 모두 하루 씩 삶을 지우고 죽음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안의 근본적인 두려움, 죽음 그 자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나 자신’ 을 맞닥뜨리는 일은 두렵고 거북하고 회피하고 싶은 일이다. 쇠잔해가는 엄마의 몸은 ‘죽음’으로 인한 온갖 두려움에 대한 나의 감각을 일깨운다. 환자보다 보호자가 먼저 쓰러진다는 말은 두려움에 눌려 지레 지쳐버리는 나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 아닐까.

인간의 처음과 끝은 어찌 이렇게도 닮았단 말인가? 엄마의 아기로 처음 이 땅에 왔던 나는 철저하게 의존적인 존재였다. 엄마가 젖을 물려줘야 배를 채울 수 있었고, 엄마의 손길이 있어야만 내가 내놓은 배설물로부터 청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전적으로 나를 돌볼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성대를 울려 ‘응애응애’ 우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물론 엄마도 외할머니에게 처음 왔을 때 그러했을 것이다. 이제 엄마는 다시 철저하게 의존적인 존재로 앉고 일어섬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약하디 약한 내 몸에 기대어 있다. 생각해보면 언젠들 우리가 독립적인 존재였던가? 젊음의 열정으로 생명력이 충만한 순간에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었던가? 활력이 넘치는 몸, 틀림없는 기억력, 탱탱한 피부와 떨림 없는 목소리로 인해서 ‘내 삶은 내가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삶이 아니었나? 그렇다. 처음과 끝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는 의존하는 존재, 내어맡기는 존재 그 곳이다.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인 것이다.

두려움으로 눈을 가리고 ‘안볼란다. 안볼라다’ 하며 회피하지 말아야지 싶다. 엄마의 미안한 육체가 누운 자리는 머잖아 나의 자리가 될 것이다. 사춘기 딸의 신경질을 받아내던 엄마가 저리 노쇠해지고, 엄마에게 대들고 신경질 부리던 딸이 어느 새 사춘기 딸의 엄마가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듯. 아직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은 육체라 하여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깨어날 때다. 나와 가족들과 주변의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하나님 놀이가 하고 싶어 질 때마다 엄마의 미안한 육체를 떠올리려 한다. 한 때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로 인생의 역정을 돌파해내던 엄마가 배변까지도 간병인에게 내어맡기곤 묵묵히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슬픔과 두려움 때문에 회피하고만 싶은 병약한 엄마에게 더욱 내 삶을 밀착시켜야겠다. 엄마의 딸인 나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엄마에게 받은 상처, 믿음이란 이름으로 물려받은 바리새적인 신앙과 싸우느라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엄마의 미안한 육체와 화해하며, 나의 과거와도 더 깊이 화해할 시간이다.

내가 이 땅에 무력한 아기로 오던 그 순간부터 내게 생명줄이었던 엄마 대신 진정한 생명줄인 그 분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인생을 사는 것이 오늘 엄마가 몸으로 전해주는 마지막 지혜이고 훈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를 뵐 때마다 지혜의 신비 가득한 ‘미안한 육체’를 만지고 쓰다듬으리라. 아름답지 않아 아름다운 엄마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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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추도예배를 드렸습니다. 내가 중1, 동생이 초등4학년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디서든 이런 얘길 하면 '그렇게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냐' 놀라시며 아버지 없는 불쌍한 아이로 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것이지 원래부터 아버지가 없지 않았답니다. 그 얘기가 그 얘기 같지만 그게 같은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답니다. (제게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


동생과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1학년 때였으니 꼭 우리 채윤이 현승이 나이입니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마흔 다섯에 나를 낳았는데 올해 제 나이 마흔 다섯이구요. 그래서인지 아버지 올해 추도식은 감회가 유난합니다. 그리고 실은 아버지 추도식이니 엄마 생신이니 하는 가족 행사가 있을 때마다 늘 '마지막'을 연습합니다. 연로하신 엄마는 천국행 표를 사놓고 대기중인 것만 같아서요. 아니, 아버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로는 늘 마음 한 켠 두렵고 불안했지요. 엄마도 언제 우리 곁을 떠날지 몰라.  


풀타임 직장생활 시절, 친정엄마가 아이를 키워주셨습니다. 퇴근해서 들어가면 "껍데기 왔네. 울 애기 인자 니 껍데기한티루 가라." 하시며 아이를 넘겨주셨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내 껍데기는 엄마이고, 이렇게 많은 알맹이들이 울 엄마로부터 왔습니다. 엄만 정말 속을 다 빼준 껍데기 같습니다. 오래 전 어느 추운 날에 어린 남매와 덩그러니 남겨진 엄마, 그 황망함 말로 다할 수 없었겠지요. 알맹이 빼주며 키워 이 만큼 사람 만들어놓았으니 천국 가 아버지 만나면 어깨 힘줘도 되겠어요.


예배를 인도했던 남편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으로 설교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중년이 되어 비로소 어린 아이의 일을 조금씩 버리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제 발로 든든히 서는 어른이 되려고 합니다. 남편의 설교처럼 죽음이라는 문을 열고 나가서 만날 새로운 곳, 거기서는 이 희미한 것들이 벗겨지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 주님을 알게 되겠지요. 우리 인생의 수많은 의문과 신비들이 벗겨지겠지요. 그리운 아버지도, 시아버님도 만나고 용서하기 싫은 고모도 만나 손잡고 웃을테지요. 올해 음악치료에서 만난 H,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 아이인데 가정불화로 엄마가 집을 떠나신 이후로 목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노래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으나 쉽지 않습니다. 치료 종결이 얼마 남지 않아서 더 안타깝습니다. 지난 주에는 결코 소리내지 않는 아이를 마주하고 혼자 노래하다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천국에서 이 아이를 만나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함께 노래할 날이 있겠지요. 우리의 모든 일그러진 것들이 펴지고 회복되는 그곳에서 이 아이와 만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모두 천국에서 만날 거예요. 


아버지를 잃고 살아온 세월이 참 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그때 내 나이의 딸을 둔 엄마가 되었으니 현승이 말대로 세월이 빨리 갑니다. 김창옥 교수의 강의에서 들은 말을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여기까지 잘 왔다!' 내 껍데기 우리 엄마, 나, 동생. 여기까지 참 잘 왔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그 나라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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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의 88세 생신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도 아깝고 고맙운 착한 어린 올케와 합작으로 엄마 생신상을 차렸습니다.
식탁 앞의 엄마를 보면서, 아들 손주 며느리에게 둘러싸인 엄마를 보면서
'우리 엄마, 참 행복한 사람이다. 나도 나중에 엄마 같았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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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여기 저기 글에서 많이 징징거렸다시피 엄마는 기적의 시간을 살아냈습니다.
이렇게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시겠구나 싶었는데 기적처럼 다시 걷게 된 엄마.

내가 철이 들었을 때 우리 엄마는 이미 할머니였고,
이미 할아버지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의 죽음은 늘 내 상상 속에 현실처럼 존재했습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나와 동생을 돌봐야 해.'
철이 들면서 늘 의식 한 켠에 자리하고 있던 이 강박같은 가정으로
누구보다 피터팬증후군이 심한 철부지 같은 나였지만 어설픈 책임감도 있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최근 몇 년 동안은 엄마 생신을 지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라고 생각합니다.
멀리 충청도에 계신 막내 이모는 엄마 생신 때마다 굽은 허리를 하고 올라오십니다.
'언니 언니' 하면 '동상 동상' 하며 대화를 하시면 목소리가 너무 똑같아서 모노 드라마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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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곁에 둘러 앉은 오빠, 동생, 남편을 바라보니 든든합니다.
막내 이모는 어제 전화를 하셔서 '얼라, 우리 언니는 참 축복 받은 사람여. 늦게 느히들 낳아서 키웠는디 오짜만(어쩌면) 그르케 착헌 신랑 착헌 각시 만나서.... 사위 며느리 효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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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헌 사람, 김서방이 김목사 되어서 예배 인도하니 온 가족 둘러 앉아 찬송합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그 사랑은 성경에도 쓰여있고 엄마의 88년 인생에도 새겨져 있지요.
마지막 그 날 까지 그 사랑을 사세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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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만나러 갔다.
기분도 몸도 한결 좋아지신 것 같다.
엄마가 좋아졌다는 건 삐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한참 힘드실 때는 감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병실에서 나와 휠체를 밀고 병원 입고 유리창 앞에 앉게해 드리면 좋아하신다.
밖이 훤히 내다보여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비가 그친 저녁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갔다.
노을에 때문인지, 엄마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처럼 보여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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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계시면서 드시고 싶은 음식은 오직 하나.
꽃게찜 뿐이다.
이미 여러 번 꽃게찜을 해다 날랐기에 질릴 때도 됐다 싶었다.
오늘 병원 가기 전에 뭐 다른 거 드시고 싶은 게 없냐고 했더니 말씀을 못하시고 우물쭈물.
거시기.....  비싼 거만 먹고 싶응게 미안혀서..... 꽃게만 자꾸 먹고싶지.
요즘 게 철이라 그리 비싸지도 않다. 게다가 일 주일에 한 번 씩 만들다 보니 라면 끓이 듯 뚝딱 꽃게찜을 만들게 됐다.(진짜임)
돈 아끼느라고 스스로 싼 입맛을 만들어버린 엄마가 평생 제일 좋아하는 새우젓 애호박국.
이것도 해봤다. 엄마의 손 맛! 고향의 맛! 다시다 팍팍 넣어서.(엄마 입맛엔 최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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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금 마음이 뭉클하고 짠하다.
입덧이 심할 때 엄마가 만든 가지나물이 땡기면 세상 어떤 좋은 음식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엄마만이 채워줄 수 있는 내 욕구였다.
이제 내가 엄마의 입맛과 식욕을 채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손맛이 된 내 손을 인식하니 그렇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 도리도리 짝짜꿍..... 우리 엄마가 웃는다. 우리 아빠가 웃는다.'
짝짜꿍 노래처럼 짝짜꿍하며 엄마를 기쁘게 했을 손이 엄마의 입맛을 돋우는 손맛으로 자랐으니.... 이 느낌을 한 두 마디로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어쨌든 엄마가 웃는다. 그러니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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