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음과 상황>에 기고한 JP&SS의 사랑과 책_1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는 것이 혹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관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을 간직한 채 결혼에 대해 이야기 하다보면 단지 '사회적 통념'이라 할만한 정보만을 갖고 있는 경우를 허다하게 만나게 된다. 그들은 그 통념 하나만으로 무식하게, 별 노력 없이 자기 가정에 들이대고 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결혼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사실 우리 부부도 이 부류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예비부부학교라도 있어 그곳에서 배우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지만 이 사회적 통념을 걷어내고 좀 더 좋은 원칙을 찾아내는 일, 좀 더 우리 부부의 현실에 적합한 원리를 발견하는 일, 무엇보다도 결혼의 무수한 주제들에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내는 일에 우리 부부는 적지 않은 노력을 해왔다. 무엇보다도 '대화'를 통해, 때로는 부둥켜안고 '기도'하는 일로, 그리고 여타 문제들을 만나서는 함께 책을 통해 '공부'하는 일로 말이다.

부부가 함께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책을 사이에 두고 사귐을 가졌고 책을 함께 보며 생활의 지혜들을 길러 내려 줄곧 노력해 왔다. 첫 만남에서부터 헤어짐을 거쳐 결혼하기까지 우리는 책과 함께 나란히 걸었고, 결혼 이후에도 갖가지 당면한 부부문제를 책을 통해 함께 풀어갔으니 책은 좋은 상담가이자 교사임에 분명하다.

독서와 함께 자란 우리의 사랑과 이해, 남편 되고 아내 되고 부모 되는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가볼까 한다.


1. 만남에 즈음하여

(신실) 30이 되어도 시집을 못 가고 있는 딸 걱정에 밤잠을 설치시는 우리 엄마에게 '책'은 괜한 미움의 대상이었다.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나날이 책꽂이의 책만 늘어가니…. 딸보다는 책을 구박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시집 못 가는 이유를 책에다 덮어씌우신다. '여자가 책을 많이 읽어서 똑똑해지면 못 쓴다' 하시며….

하긴 나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박사과정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혼수에 수백 권의 책을 동반할 여자 좋아할 남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있겠나?

무엇보다 함께 책을 읽으며 삶을 나눌 동등한 상대로 여자를 대할 그런 남자를 만날 수나 있는 것일까?

(종필) 부모님은 내게 초중고 시절 책 한 권을 사주신 적이 없다. 물론 부모님 역시 책을 읽지 않으셨다. 찌든 가난과 힘겨운 돈벌이만으로도 하루는 버거웠기에, 게다가 글공부를 제대로 해 보신 적이 없었기에 그럴 여유도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책을 좋아하는 건 천성이란 말인가! 가족 중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고, 읽기와 쓰기에 그다지 흥미도 없던 내 십대 말에 느닷없이 1920년대의 작가 김동인의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나는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재미'는 급기야 대학을 휴학하고 일년간 책만 읽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들었다. 어려운 시기에 다들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니 고시공부니 하여 학교를 떠나던 시기였는데, 엉뚱하게도 나는 책 100권을 읽겠노라고 휴학을 한 것이다. 나로서는 최소한의 지적 기본, 즉 교양을 갖추는 일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고, 다른 한편 어린 시절 책을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한 집요한 보상심리이기도 했다. 뒤 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휴학은 평생의 반려자를 사로잡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 된 셈이다. 왜냐하면 아내는 책 읽지 않는 남자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고 하니….


2. 만남 : 손봉호와 이현주

(신실) 어느 날 청년회 주보에 기고된 글을 읽으며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손봉호를 욕하면 내 오봉산이 참지를 못하고…책을 통해서 그 분을 만나고 존경하게 되었다' 아니 손봉호 교수를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사람이 있단 말야? 우리 청년회에? 그것도 직접 만남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사실 손봉호 교수님의 책들은 내게 크리스천으로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장 강하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 책들이고 때문에 손 교수님은 내 마음의 스승이었다. 대체 누가 이 글을 썼담? '아~ 지난번에 새로 등록했다던 그 얼굴 칙칙하던 애! 보기하고 다른걸...'

알고 보니 손봉호 교수님의 책만이 충격이 아니었다. 책을 통해서 만나 나의 또 한 분의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 그 얼굴 칙칙한 새신자 JP가 이현주 목사님 또한 알고 존경한다는 것이다. 두 분은 영 다르다. 고신 교단 장로인 손 교수와 감리교 목사 그것도 쫒겨 난 목사 이현주….

아! 예전에 혼잣말했던 것이 머릿속을 스친다. '예? 제 이상형이요? 손봉호와 이현주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는 사람요'

이러고 있는데 여기에다 확실하게 확인사살을 했으니. 그룹 성경공부 하고 있는 자리에서 최근에 읽은 최악의 책을 말하고 있었다. 그 때 우리의 JP "전모 목사의 입니다. 으악! 나 얼마 전에 그 책 서점에서 잠깐 읽고 '하나님! 이 땅의 성도들이 이런 책 그만 좋아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었는데….

(종필) 내 안에 꿈틀거리는 뭔가를 아무도 해소해 주지 않는 작은 교회를 떠났다. 그곳은 내 어머니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 교회를 나오기 직전 나는 본 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외로웠지만 나는 본 회퍼에 흠뻑 빠져있었으므로 꿈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 청년회에서의 첫날, 친숙한 공동체의 한 가운데를 박차고 나와 낯선 공동체의 구석에 앉아 어색함에 떨고 있던 나의 정신을 일순간에 뒤흔든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모든 게 어색하고 낯선 시간이 무르익어 갈 즈음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한 묘령의 자매가 옆구리에 책을 한 묶음 꿰차고 들어와 사람들을 들썩들썩 요동시키더니, 새로 그룹스터디 할 교재를 소개한다고 하면서 입을 떼는데…'본 회퍼가 말하길…' 운운하는 것이 아닌가! 아! 본 회퍼라니!! 코드가 맞는 사람이구나! 그러나 3살이나 많은 연상이니 그 당시 꿈이라도 꿨을까? 그렇지만 꿈을 꾸게 만든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청년회 주보에 이현주 목사의 우화 하나가 실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고신 교단 주보에 이현주 목사의 글이라? 이것은 도무지 (교단차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건만 나로서는 엄청난 매력 포인트가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누가 이런 글을? '아하~ 그 본 회퍼 누나로구나! 주저할 수 없다!!!'


3. 짧은 교제와 헤어짐 ; 존 스토트

(신실) 우린 연애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커플이었다. 세 살 연하가 무엇이 중요하랴? 온갖 책들이 이렇게 열심히 중매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지금 연애 중. 떨리는 가슴을 안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 내 손에는 그이에게 줄 손수 싼 도시락이 아니라 수 백 페이지짜리 존 스토트 목사님의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들려져 있다. 나를 만나러 오는 그의 손 역시 내게 줄 꽃다발이 아니라 같은 책이 들려져 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연애초기에 데이트 하러 가면서 웬 사전 두께만한 책? 그렇다. 우리는 데이트 하면서 낭.만.적.으.로. 북스터디 했다. 함께 존 스토트를 읽으며 열띤 토론으로 사랑을 나눴다. 함께 같은 책을 읽으며 더욱 하나 되고 싶었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존 스토트 목사님을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다른 지를 가르쳐 주었고 그걸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확인해 주었다. 존 스토트를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스토트의 오른 쪽, 다른 사람은 왼쪽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이현주적이었고 난 내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손봉호적이었다. 우리를 중매했던 책은 이번에 우릴 갈라놓았다.

(종필) 그녀와의 사귐이 불안하긴 했지만 꽤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처음엔 같은 점을 찾는 일로 인해 흥미 있었고 차차 차이점이 드러나면서 불안해했다. 이 차이를 묵인하고 넘어설까? 아님, 짚고 넘어가야 할까? 차이는 이랬다. 교회가 수 천 년 간 축적하여 전수해 온 전통의 수용에 대한 유연성은 생각보다 크게 벌어져 보였기에 생긴 문제였다. 합동교회의 딸인 아내의 보수성은 통합교회의 아들인 내게 갈수록 갑갑해 보였고, 반대로 나의 자유분방한 해석은 아내에겐 갈수록 불안한 이유가 된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 것으로 짐작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함께 '책'을 보기로 했다. 신학적 다양함 속에서 그래도 일치를 위해 노력한 존 스토트는 우리의 균열을 잇기 위해 중재자로 모셔지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펼쳐 들고 매주 한 장씩 읽고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분의 중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우리 둘은 미묘한 차이를 보였고, 그 차이는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보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 차이는 삶의 태도와 라이프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에 합의했으므로 우리는 서서히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아도 그 때 우리가 함께 책을 본 일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설령 우리 두 사람이 나중에 다시 못 만났다고 할지라도,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간의 별 노력 없이 - 예컨대, 한쪽에서 기도해 보니 아니라는 둥, 차이의 원인을 추적해 보지도 않은 채, 원래 두 사람은 안 어울린다고 단정해 버리는 둥 - 헤어짐의 통보와 수용을 용납하지 못한 채 뒤돌아서야 하는 수많은 커플들을 생각해 보면 그나마 헤어짐에 앞서 최소한의 성숙한 절차를 거친 것은 잘 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4. 홀로 성경으로 돌아가

(신실) 헤어진 이후의 시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서 마약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 즈음 출간된 임철우의 <봄날> 다섯 권을 내리 읽으며 80년의 광주라는 과거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 나를 잊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속에서 울고 분노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그러나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은 또 다시 칼날 같은 바로 현재 나의 고통.

성경을 붙들어야 했다. 성경을 통해서 나를 정직히 보지 않으면 결코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사무엘 상하를 통해서 다윗을 묵상하면서 나는 다시 내 자리를 찾아간다. 내 인생에서 이렇듯 절절하게 말씀을 붙들고 묵상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남자 역시 배우자의 최상의 조건은 될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삭처럼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순적히 만나게 해 주세요'
순적히 만난 배우자는 몇 개월 전 헤어졌던 JP 그였다.

(종필) 과거에 잠시 했던 짝사랑을 잊기 위해 1년을 허비했던 기억이 채 기억 저편에 묻히지 않았는데, 이 만남을 어찌 잊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왜 '말'은 이중성 아니 다면성이 있을까? 그간 쏟아 냈던 그녀에게 향한 말들은 밤낮 귓가에 부딪히고 내 음성은 나조차 생소할 정도로 나는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나는 김영민의 <신 앞의 철학, 신 없는 구원>을 비롯한 그의 언어의 세계에 시름시름 앓아가며 빠져들었다. 현학적이 된다는 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참 좋은 방편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포맷하고 두 글자짜리 기독교 용어에 충실하게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거울을 통해 반사되던 자유주의자의 가면을 벗고 성경으로 예수에게로 돌아가 거기서 진짜 '사랑'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보자, 그녀와 나의 신학적 차이는 더 이상 '차이'의 축에도 끼지 못한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보다 더 내게 적합한 여자를 만날 수 없으리라!


5. 혼수 준비하며 스터디하기 : 빌 하이블스

(신실) 결혼을 준비한다. 우린 또 북스터디 한다. 주례를 맡으신 목사님이 숙제를 내 주셨다. 빌 하이블스의 <크리스천의 연애와 결혼>을 매 주 한 장씩 읽고 함께 토론한 것을 정리해서 가져와라. 그래서 우린 다시 스터디한다. 장롱 고르러 갔다가 저녁에 스터디하고 드레스 맞추고 나서 또 스터디하고…함께 읽고 토론하면서 서로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가정을 얘기하고 장점을 얘기하고 단점을 고백하고 그리고 함께 만들어갈 가정의 설계도를 그려간다.

우리를 중매했던 '책'은 우리의 결혼을 끝까지 책임져 줄 것만 같다. 왠지 이 놈의 책들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만 같다.


2003/10

뭐 아직 아기인데 그런 생각을 해보냐 할 지 몰라도...

나는 생후 36개월 까지의 모습이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은, 진정으로 타고난 기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채윤이만 해도 '부끄러워' 라는 말을 하면서 주변을 인식하는 사회성이 많이 발달했기 때문에 벌써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암튼, 더 자라면서 관찰할 일이지만 환경의 양육방식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생애 초기에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두 아이가 자라서 자기를 찾아갈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일 거라는 생각이다.


일단 지금 보이는 두 아이의 행동은 외향형에 가깝다. 사람 많은 것 좋아하고 비록 낯가림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낯선 환경에 가서 적응하는 시간이 짧다. 목소리 크고 자기표현이 정확하다. 이런 걸 떠나서 엄마빠가 느끼는 느낌이 그렇다. '둘 다 정신실 아들 딸이야. 내 딸, 내 아들 아니야' 라고 아빠가 자주 말하는데 아이들에게서 '외향형'의 냄새가 강하게 날 때 그렇게 말한다.


채윤이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보통 구체적인 사실을 암기하기인 것 같다. 그래서 언어발달이 빨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른들이 쓰는 단어도 일단 한 번 들으면 절대 까먹지 않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이름 (자기 친구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의 이름까지도) 기억을 잘 했고 한 마디로 말해서 '별걸 다 기억하는 여자'다.


요즘 한참 인지가 발달하는 김현승을 보면서 '이해하는 수준이 채윤이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말하자면 표현언어의 발달은 채윤이보다 훨씬 느린데 말을 이해하는 게 때로는 놀랍다. 할아버지가 늘 하지는 말씀이 '다 알아 들어. 참 내! 다 알아들어' 이러신다. 오늘 남편과 함께 얘기하다가 채윤이는 S(감각형)고 현승이는 N(직관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두 녀석이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이 그렇게 확연하게 다르게 느껴지니 말이다.^^


인형놀이나 스킨쉽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현승이는 F(감정형) 채윤이는 T(사고형)에 가깝게 느껴진다.


아직 많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네 번째 생활양식인 듯한데....채윤이는 일단 P(인식형)에 가깝고 현승이는 J(판단형)에 가깝게 보인다. 이건 좀더 두고 볼 일이다.

채윤이 현재 45개월, 현승이 15개월. 일단 추정되는 성격유형.

김채윤은 ESTP 또는 ESTJ.

김현승은 ENFJ 또는 ENFP.


아빠는 INTJ 엄마는 ESFP.

그래서 세 E를 감당하기에 아빠의 에너지가 역부족인듯 보일 때가 있다.^^



김인아 : 우리 남편은 자신의 에너지에 스스로가 지쳐..ㅋㅋㅋ (04.08.02 15:41)


정신실 : 푸하하하...그렇지! (04.08.02 15:52)


김종필 : 우아하하 현웅 형! 대단하십니다요! (04.08.02 23:13)


이지희 : 어.. 나 ESTP였는데.. 채윤.. 역시..언니랑 닮았어..ㅋㅋ (04.08.02 23:20)


 정신실 : 그러니? 지희?^^ (04.08.03 08:53)

더 지나면서 지켜봐야겠지만,

채윤이는 S, 즉 감각형으로 추정이 되고, 현승이는 N, 직관형으로 추정이 된다.

두 아이의 노래 지어 부르는 걸 보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음악치료사 딸 아들이라서 노래 지어 부르는 건 거의 음악치료사 수준인데....


감각형 채윤이는 이렇다.

자신의 귀(감각)로 들은 것에 충실하게 노래를 지어부른다.

즉, 새노래를 배웠는데 노래를 모르겠으면 노래 가사 전체의 맥락보다는 자신의 귀에 들린 대로,

그 발음에 가장 충실하게 일단 불러 재낀다.

감각으로 얻은 정보에 충실하고 숲보다는 나무를 보는 감각형 채윤이의 song writing!


'천국은 마치 마태같은 인보와(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

'숟가락 무릎에 강물처럼 말쎄(숲처럼 푸르게 강물처럼 맑게)'

'호까인형을 가르치는 호까인형을 가르치는(   )' 이런 식이다.


반면 현승이는 이렇다.

일단 모르는 가사가 있으면 나름대로 채워서 부르되 앞 뒤 뜻을 연결 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직관형들이 흔히 하듯 숲을 본다는 것이다.

'사과같은 내 얼굴'의 '사과'가 생각이 안 날 경우,

'바보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라고 불러서,

자신이 모르는 가사 다음에 나오는 '~같은'에 적절하게 어울리는 가사를 집어 넣는다는 얘기다.


아니면,

'도는 도는 도깨비..............'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파는' 하고 시작하길래 귀를 쫑끗하고 들었다.

'파는.....

.

.

.

.

파깨비'란다.

이렇게 큰 틀에서 창작을 해낸다.


참, 이렇게도 다르다.^^

나 책 한 권에서 너무 뽕을 빼는 것 같다. ^^;;

<사람 vs 사람>에서 심은하와 김민기를 주제로 쓴 글에서는 융이 말하는 내향과 외향에 대한 정신분석적 설명이 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이라서 정리해 두려고 한다.


우린 보통 수줍거나 말이 없으면 내향적이고, 사교적이거나 적극적이고 활달하면 외향적이라고 얘기하지만 본래의 정신분석적 의미는 좀더 정교하다. 내향성/외향성의 분류는 정신분석가 융의 이론에 의한 것이다. 융은 심리학적 유형의 하나로 인간을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구별하였는데, 그들은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어떤 사람의 행동과 판단을 결정하는 기준이 주로 객체에 의한 것일 때 그의 태도는 외향적이며, 반대로 객체보다도 주체에 의해 결정되면 내향적이라고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미술전람회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신문의 호평이나 화가의 지명도에 근거해 특정한 그림을 좋다고 평가를 내린다면 그의 태도는 외향적이다. 객관적 규준에 따라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평이 좋고 그 화가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해도 자신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의 태도는 내향적이다. 그의 판단기준은 주관적 측면이 객관적인 사실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다.

두 유형이 가지는 차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연히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외향형과 내향형이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외향형의 사람은 모차르트의 내력과 세계적인 명성, 음악평론가들의 평가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반해 내향형의 사람은 주로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자기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같은 음악가를 좋아한다는 기쁨도 잠시, 외향형인 사람은 내향형인 상대방이 의외로 모차르트에 대한 지식이 너무 빈곤하다고 실망하고, 내향형은 외향형인 상대방이 공연히 지식만 늘어놓고 아는 체하지만 실상은 모차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똑같은 내향령이라고 그 안에서 다시 수십 가지의 심리유형을 보일 수 있지만, 정신의학적으로 내향형의 가장 큰 특질은 '내면에의 깊은' 통찰이다.

요즘은 주일 아침예배 때 짧은 기도시간에 생각지 못했던 통찰들이 주어집니다.
그게 바로 은혜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일주일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와 내게 주신 사람들 공동체를 떠올리다 보면 이런 저런 좋은(?) 생각들이 마음에 차 오릅니다. 그 때 그 때 글로 잘 남기지 못해서 흘려버리는 것들도 많이 있지만요...

한동안 MBTI로 볼 때 완전히 반대유형인 남편을 보면서 혼자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난리 부르스였습니다. 글래서 박사의 <결혼의 기술>이라는 책을 공부할 일이 생겨서 읽고 있었는데 그 영향인듯 싶기도 하구요. 글래서 박사 역시 사람들이 가지 고유한 '욕구 프로파일'이라는 심리적인 특성들을 말하는데 대체적으로 이것이 맞는사람끼리 살아야 한다는 주의였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의 욕구 프로파일을 잘 살펴보고 맞춰보라는 것이었죠.
그걸 공부하다보니 정서표현이 자주 안 하는 NT 김종필씨에게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하더니만 혼자 생각에 빠져가지고 가만히 있는 김종필씨 쪼아대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MBTI 끝에서 삶을 비추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ESFP 조차도 마음이 마구 마구 메말라 있을 때 기쁨이고 뭐고 없습니다. MBTI 끝에서 만난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사랑, 기쁨, 오래 참아주는 것, 화평케 하는 것, 자비로움, 착함, 규모 있는 삶, 충성스러움.....로 마음을가득 채워주시는 분. 지난 주일 성가대 찬양이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을 편곡한 곡이었는데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가 메마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MBTI로 아무리 내 마음을 알았다해고 결국 얻을 수 없는 천국의 마음. 그것은 성령님께로부터만 오는 선물이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MBTI로 드러난 나의 장점과 약점 위에 단비를 촉촉히 내려 풍성하게 해 주시는 분.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넘치는 삶을 기도합니다.
 
보물 Level 1 자유로움을 경험하다

MBTI와의 첫 만남 이후, 짧지 않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통해서 흔히 말하는 나의 유형(true type)을 찾았다. 자타가 함께 인정하는 나의 유형을 찾은 이후에, 말하고 행동하는데 전에 알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알았을 때, 내 마음에 충실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이 나를 한 없이 자유롭게 한다. 부모님이나 주일학교 교육의 요구에 의해 ‘나’인줄만 알고 살았던 버거움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MBTI와의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보물 Level 2 장점을 은혜로 알게 되다

나는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잘한다. 고로 나처럼 공동체에 필요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사소한 것들을 잘 기억하고 챙긴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남달리 충만한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잘 해주고 칭찬을 잘 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나는 융통성이 있어서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수용을 잘 해준다. 고로 나는 인격이 훌륭하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둘 깨지기 시작했다. F인 나로서는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다는 것. SF인 나로서는 도대체 정보라는 것은 사람들에 관한 사소한 것들 외에는 잘 입력되지도 오래 기억되지도 않는다는 것. P인 나로서는 상황상황에 융통성을 발휘하지 말라고 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공동체에서 분위기를 좀 띄울 줄 아는 것은 ‘재미’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ESFP인 내 자신에 충실하며 나 자신이 재미있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것.
점차로 이런 것들이 깨달아져 갔다. 예전에 나 스스로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유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게는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지옥 같은 삶이었을 것이니, 내 장점 안에서 ‘나의 공로’는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것은 내 본성 안에 숨기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었다. 이것을 발견하고는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제껏 내 것이라고 생각한 내 인격의 부분들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었음을 MBTI가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보물 Level 3 나도 모르던 속마음을 알게 되다

칭찬하지 않는 사람들은(T) 무조건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I) 대부분 내숭떠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고 늘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N)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사람과는 얘기할 맛이 안 난다. 시간 좀 안 지켰다고 열 받고 화내는 사람들은(J) 인격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사람들이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 깊숙한 곳에 있었던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들이었다. 겉으로는 문제없는 듯,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 대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렇듯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밀어내고 있었다. MBTI는 내가 형제 자매들을 어떤 잣대로 바라보고 정죄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였다.

보물 Level 4 죄를 깨닫게 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주님과의 깊이 있는 교제의 시간으로 만들지 않고 끊임없이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서 관계를 찾아 가기.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이라는 피드백이 없으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누군가의 칭찬에 의해서만 일을 하고 움직이기. 진지하고 지루한 얘기들은 무조건 듣지 않고 귀를 막아버리기. 충동적으로 시간을 쓰고 충동적으로 구매하며 규모 없는 삶을 살기.

결국 MBTI는 ‘나’라는 독특한 존재가 독특하게 범하는 죄를 깨닫게 하였다. 내 영성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시 바로 내 성격유형 안에 숨겨져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는 깊이 회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영성의 길을 걷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아군과 적군을 모두 알았으니 그 싸움이 손에 잡힌 것이 아니겠는가?

보물 Level 5 믿음은 기질을 뛰어 넘는다

이렇게 MBTI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장점이 있는 그 지점에 바로 내 약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때론 좌절스럽다. 저 사람과 내가 이렇게도 다르게 생겨 먹었는데 어쩔 것인가? 나와 정반대의 유형을 가진 저 사람과 대체 어느 지점에서 만나서 대화와 삶의 일치점을 찾을 것인가?

그 때 들어야 하는 한 마디가 있었다. ‘믿음은 기질을 뛰어 넘는다!’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은 언젠가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형제자매를 위해서 기질을 한 번 두 번 뛰어넘던 우리들은 주님과 더불어 MBTI 검사결과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분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는 그 날에 우리 모두의 MBTI유형은 EI-SN-TF-JP!! 이것이 되지 않을까?

<MBTI와 공동체 세우기> 마지막 글
QTzine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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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천국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 -NF기질

청년부 회장 L씨는 청년부의 모임과 뒤풀이가 어때도 상관없다. 때론 모임이 좀 학술적이어도 좋고, 때론 놀자판이 되어도 좋다. 출석률이 저조한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고 임원들이 좀 열심을 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으니…, '모임이 쓰잘 데 없이 되는 것, 즉 모임이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 그것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다. L 회장은 때로 진지하게 말씀에 대해서 나눌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속이 없는 사람처럼 푼수 짓을 해서 사람들을 웃길 수도 있지만 푼수가 되는 그 순간에도 L회장의 목적은 하나다.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

이제껏 소개한 세 가지 유형(NT, SP, SJ)에 비해서 NF 유형에 대한 설명은 좀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NF들은 이상적인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NF들의 목적은 너무 이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조차도 그 목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세 유형들이 NF와의 대화에서 보다 더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한 SP가 NF와의 오랜 대화를 마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한 마디가 '천국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반면 좀 통하는 NF들끼리의 대화는 '쩍하면 짝이고' '어하면 아'하고 알아듣는다니 NF들은 천국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NF들의 기본적인 욕구는 자아실현 내지는 자아통합이다. 이것은 독특한 자신만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검증은 아마도 따뜻한 관계들 속에서 오는 피드백을 통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NF들에게는 남달리 정서적 유대 내지는 정서적 관계, NF들 자신의 표현방식으로 말한다면 '의미 있는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NF들은 공동체 안의 따뜻한 햇살이다. 정서적인 교류에 대한 남다른 욕구와 감각이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보살피는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불사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NF일 것이다. SJ들이 끝없는 책임감으로 공동체를 지켜나간다면 NF들은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무한히 공동체를 향하여 자신을 통째로 쏟아 부을 것이다. 흔히 좀 다루기(?) 어려워서 대부분의 조장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폭탄 조원이 있다하자. 이 폭탄을 어느 NF 조장이 맘먹고 찍었다 하자. 아마도 그러면 다른 어떤 조장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깊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그 폭탄을 무장해제 시키고 공동체 안으로 정착시켜 놓고야 말 것이다.

NF들에게는 '의미'가 중요한데 그 '의미'는 NT들의 것처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의미'를 추론하는 과정과 결론이 다른 사람에게는 숨겨진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게다가 NF들이 유형의 특성상 조목조목 따져서 잘 설명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다. NF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여 결정하는 것들이 다른 유형에게는 '그 때 그 때 다르다'고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리더가 NF라면 자신의 의미법칙에 충실한 결정에 아랫사람들은 '일관성이 없는 결정'이라는 불평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혹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쳐지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진실한 자아의 통합, 진실한 관계'를 삶의 목적으로 하는 NF가 '진실하지 않다'는 평은 최악의 평이 아니겠는가? NT들에게 '무능하다'라는 평은 가급적 삼가 해야 하는 것처럼 NF에게 '진실하지 않다'라는 평도 극도로 피해야 할 말이다.

NF들이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용어들을 좀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 없이 살아갈 때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사는 힘겨움이 남다를 것이다. NF들에게 교회를 포함한 이 세상은 너무도 가볍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이상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될 때 더욱 빛을 발하고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다.
QTzine 4월호 <MBTI와 공동체 세우기
 

갑자기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져 사람들이 집을 향해 걷는 걸음이 빨라지는 수요일 저녁. 이런 날 잡혀있는 기도회 모임이 그나마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SJ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한 번 맡은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SJ들이다.
SJ들이 있어서 연말이면 개근상 받을 사람들이 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우리의 모임은 늘 최소한의 인원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SP들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성경공부 시간은 빼 먹지 않고 시간을 채우게 될 것이며, 공작에 실패한 SP들은
결국 혼자 '땡땡이'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

SJ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를 찾으라 하면 '의무'이다. 이들의 남다른 욕구는 어딘가에 '소속' 되는 것, 그리고 그 소속된 곳에서 '의무'를 가지며 그 '의무'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충동적이기를 원하는 SP들과는 상반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SP들이 일을 해도 노는 것처럼 보인다면 SJ들은 놀아도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SJ들의 관심은 자신이 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해야만 하는 것을 하기 원하기 때문에 전통이 지켜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련회나 특별행사를 계획하는 임원 모인에서 SJ들은 '작년에도 이렇게 했으니까, 늘 이렇게 해 왔으니까' 하면서 이제껏의 방식을 유지해 나가기를 원할 것이다. SJ들이 그렇게도 예전의 방식, 전통을 따르고 싶은 이유는 이것이다. NT들이 자신의 유능감을 확인하는데서 안전함을 느끼는 것처럼 SJ들은 자신이 어딘가에 속해 있고 그것이 흔들림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 안전함을 느낀다. 잦은 변화는 흔들림 없는 소속감을 그야말로 흔들어 놓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보배라 불린다. 결석이나 지각이 별로 없이 늘 자리를 지켜주는 SJ 구성원들이 많은 소그룹의 리더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는가!게다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SJ들은 상사나 웃사람의 권위를 인정하고 잘 복종하는 사람들이다. 또 보호자적 기질인 SJ들은 한결같이 충성스럽게 공동체를 섬기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소그룹의 리더들이 역시 또 욕심 부릴 일이 아니다. 소그룹의 다수를 SJ로만 구성한다면 그 그룹은 때로 조금은 지루한 모임이 될 지도 모르며, 늘 일을 하듯 모임을 하고 일을 하듯 모임의 뒷풀이를 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SJ 리더라면 자신이 소그룹을 이끌어 가는 방식이 다분히 일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조원들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SJ의 수준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통제의 수위는 대부분의 SP들과 어떤 NT 또는 NF들에게는 보다 심한 압박(?)으로 느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SJ들에게 좋은 격려는 '일을 잘했다', 즉 이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수련회를 준비하고 마치고 뒤처리까지 확실하게 해내는 SJ총무를 그냥 돌려보내지 말 것이다. 그가 꼼꼼히 준비하고 진행한 수련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잘 치러졌는지에 대해서 한 마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SJ자신들은 열심히 근면하게 노력하는 삶 속에 하나님이 일하실 틈을 남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 혹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 조차 스스로 밀어내는 것은 아닌지 자주 돌아보면 어떨까? 하나님께서는 SJ들이 맡겨진 많은 일들을 완벽하완벽하게 끝까지 책임지기 전에 이.미. SJ들을 보배롭고 가치있게 여기신다는 사실!
<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3월호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만난 두 사람 이야기. 레크레이션이면 레크레이션, 천로역정이면 천로역정 도대체 P선생이 맡는 프로그램은 대박이 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은근히 P선생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H선생. 슬쩍 P선생의 교사수첩을 들여다보았다. 프로그램 준비를 어떻게 했길래 애들이 그렇게 재밌어서 난리를 친단 말인가?
'에게게!'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P선생이 들고 있던 다이어리에는
고작 게임 제목 몇 개만 달랑 적혀있다. 그렇다고 따로 자료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레크레이션을 맡을 때마다 온갖 책이란 책은 다 뒤지고 인터넷을 구석구석 뒤져서 깨알 같이 적는 준비를 하고도 별로 성공해
본 적이 없는 H선생은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자신보다 늘 불성실해 보이는 저 P선생의 성공을 곱게 바라볼 수가 없는 H선생…

연습 없이 실전에 강한 사람들,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처럼 연습 없이 순간의 작곡으로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SP이다. 이들에게는 순간의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다. NT들이 '능력'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었다면 SP들은 '행동' 즉, '순간의 행동'에 모든 걸 거는 사람들이다. 행동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때문에 SP들은 본질적으로 충동적이다. 한 번씩 놀아줘야 삶의 에너지가 나온다는 이들은 휴가를 미리 내서 계획을 세우고 노는 것은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한 어느 날 갑자기 오후 휴가를 내고는 마음에 떠오르는 일을 하는 것, 이런 류의 놀기가 최고의 휴식이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양념이다. 모임이 지루해질 즈음에 재치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워주는 사람들이다. 소그룹 공동체에 SP, 특히 외향형의 SP가 한두 명 있다면 모임이 진행되는 내내 간간이 폭소가 터지고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그룹의 리더들이 욕심을 부리다 보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소그룹의 다수를 SP로 구성한다면 매주 성경공부가 제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재미없는 지루한 시간을 오래 버티기'에 약한 SP들이 무슨 이유를 끌어다 붙이든 결국 성경공부를 대충하고 놀러가는 분위기로 만들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SP 초신자를 수련회에 데려갔다면 너무 빡세게 굴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유롭게 두는 것, 지나친 통제를 삼가는 것이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혹 당신이 SP 리더라면 '내 성경공부 인도가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조원들이 지루해하면 어떡하지?'에 대해서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신의 조원들 중에 당신만큼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NT들에게 그들의 '능력'에 대해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격려가 된다면, SP들에게는 이들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 그것을 인정해주는 것이 좋은 격려가 될 수 있다.

어느 유형이든 기질이든 장점이 있는 곳에 약점이 있듯이 '기쁨과 재미'를 추구하는 SP들 역시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양념으로서의 역할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양념이 지나치면 음식 맛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행동, 일상, 재미, 충동'에 매료되어 영성의 길에 균형을 잃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오늘 간만에 MBTI 교육에 갔다 왔다.
교육장이 발산역에 있어서 지하철 5호선을 타면 꼬박 한 시간을 가야한다.
교육 때마다 지하철 안에서 한 시간 버티기가 젤 죽을 맛.
버스에서는 잠도 잘 오는데 한 시간 동안 잠도 안오고, 하루 종일 공부한 관계로 책도 안 들어오고...

암튼, 오늘 교육 중에 건진 것 하나.

P들은 왜 일을 그 때 그 때 처리하지 않고 항상 미루는가?
왜 뺀뺀이 놀다가 코 앞에 닥쳐야 일을 시작하는가?

뺀뺀이 놀지만 우린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한다. 그러면서 기를 모으는 것이란다. 기를 모으면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막판 데드라인이 임박해서 충동이 절정에 달하면 바로 그 순간 엄청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순발력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리 미리 하자. 마음 먹어도 그 순간이 되지 않으면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 순간까지 우리는 기를 모으는 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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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는 차 안에서 김종필씨 왈,
'여보! 우리 분가하면 책상을 어떻게 놓을지 생각했어. 당신 책상과 내 책상을 분리시켜봐야 겠어. 당신 책상은 거실에 놓고 내 책상은 방에 놓을거야.....'
'왜? 나란히 있으니까 아무것도 못하겠어? 내가 자꾸 말 시켜서?'
'아무튼....그럴려구'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여보! 나 결심한 게 있는데 이제부터 마음에 있는 생각을 말하기로 했어.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냥 묻어두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말하려구 노력해야지'
'진짜? 정신실처럼 그렇게 할꺼야? ㅋㅋㅋ 좋은 생각이네. 내향형인 당신에게 정말 좋은 훈련이 되겠네'
'그래서 아까 책상 얘기도 한거야. 일부러 그런 노력으로 한 거야.'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이가 먹을수록 내게 없는 반대유형을 계발하려는 노력은 참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성숙이란,
나를 알고 나의 기질에 충실할 뿐 아니라 나의 열등기능을 차근차근 계발해 나가는 것일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대화 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남편은 '응..응...그랬어?' 만을 반복하고
저 혼자 떠들었습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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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2월호

NT ; 세상은 넓은데 칭찬할 것은 너무도 없다!

이제껏 설명한 ‘쌍을 이루는 네 가지 지표’는 서로서로 조합해서 16가지의 성격유형을 만들 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MBTI 검사를 받게 되면 이 16가지 유형 중 하나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사실 어느 누가 열여섯 개의 네모 칸의 틀에 꿰맞춰져 그 속에 들어 앉아 있고 싶겠는가?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과 함께 좀 더 객관화된 나를 알고 싶어질 때, 내가 들어가 있는 그 네모 칸의 사람들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좋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나와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데 내가 가진 코드로는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 그가 들어있는 네모 칸을 들여다보면 역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MBTI 검사를 통해 16가지 유형을 살펴보면 같은 유형에서는 공통점을, 다른 유형에서는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16가지는 다시 크게 4가지 패턴으로 묶을 수 있는데, 흔히 이 네 가지 패턴을 ‘기질’이라 부른다. 기질은 ‘행동 이전의 마음의 패턴’이다. 다시 말해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고유하게 유지되는 선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기질을 이해하면 16가지 유형 안에서의 자신을 좀 더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네 가지 기질이란 SP, SJ, NT, NF를 말하는데, 이 네 기질은 각각 기본적인 욕구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때문에 각각의 유형이 외향이나 내향인 것에 상관없이 다양한 행동에 있어서 일관성을 갖게 된다.

이것은 실화다. 예전 청년부 시절에 한 점잖은 K라는 남자 후배가 있었다. 늘 진지하고 좀처럼 실없는 농담이라곤 하지 않는 후배였다. 어느 주일, 청년부 모임을 마치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정리를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K 후배가 어느 자매 옆에 서서는 ‘어디서 오이 냄새가 나지?’ ‘누나 어디서 오이 냄새가 나요’ 하는 것이다. 이 ‘오이냄새’ 운운하는 소리를 한두 더 하자 옆에 있던 한 자매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하더니만 쌩하니 퇴장해 버렸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문제의 오이 냄새는 그 자매가 뿌리고 온 향수냄새였다. 우리의 K군은 나름대로 그 향수의 향기가 좋다는 표현을 해주고 싶어서 불쑥 꺼낸 말이 ‘오이 냄새’였고, 그 말이 자신을 놀린다고 여겼던 자매는 퇴장을 한 것이다.

또 다른 실화다.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나는(필자는) 시어머님의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해 때로 이것이 칭찬인지 아부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것들을 한다. 문제는 남편! 어머님이 신경 써서 음식을 해 놓으시고 진정 칭찬을 받고 싶은 대상은 당신의 아들이다. 워낙 별로 표현이 없거니와 칭찬 같은 건 더더욱 없는 아들이니…. 어머님의 섭섭함이 지나치게 쌓여간다 싶을 무렵 남편에게 협박을 했다. ‘살아남고 싶으면 어머니 음식에 칭찬을 해 드리라’고.
남편과 둘이 어머님이 끓이신 된장찌개를 놓고 식사하는 중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된장찌개는 정말 입맛 난다니까요' 하면서 후후거리면 먹었다. 남편도 맛있게 먹기에 '맛있어? 어머니한테 표현 좀 해드려' 하고 살짝 속삭였습니다. 남편, 비장하게 알았다는 싸인. 그리고 어머니가 식탁 가까이 오시자 남편이 하는 칭.찬. 오늘은 된장찌개 맛이 이상해' 이러는 것이다. 어머니도 널름하신 표정을 ‘된장 두 가지를 섞어 넣어서 그래’ 하신다. 남편은 칭찬을 했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밥을 먹는다. 어쩔 수 없이 내가(필자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맛이 없어?' 부드럽게 말하면서 눈으로는 '똑바로 다시 말해. 죽어!' 하는 메시지를 보냈더니만 그제야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약간 오버 하면서 '아니~ 맛있지. 우리 어머니 된장찌게야 최고지!' 한다.

NT들은 좀처럼 칭찬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칭찬이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하는 칭찬도 경우에 따라서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는 것 같다. 왜 일까? NT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힘(Power)’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자연을 대상으로 발휘되는 힘이다. 다시 말해서, 현상을 이해하고, 조정 통제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뜻한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해서 NT들이 말하는 힘은 권력이 아니라 능력과 자질과 재능과 재주와 기술 같은 것들이다. NT들은 능력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만큼 유능해지려 하기 때문에 늘 기준이 높은 사람들이다. 어떤 면에서든 이렇게 기준이 높다보니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칭찬할 꺼리가 없는 것이다. ‘칭찬 좀 하시오’ 하면 ‘칭찬할 것이 있어야 칭찬을 하죠’ 하는 것이 십중팔구 NT들의 답일 것이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지식을 축적해 가는 ‘지성’에 대한 사랑이 NT들에게는 각별할 텐데, ‘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재밌고 짜릿한 수련회를 원한다면(특히 SP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할 때 NT 회장을 잘 마크해야 할 것이다. NT 회장은 아마도 독서 토론이나 주제 토의를 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청년부에 흥미를 못 느끼는 NT를 붙들고 싶다면 거한 에프터보다는 이들의 지적인 욕구를 터치해 주는 모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분명 이들은 ‘공동체 안의 지성’이다.

NT기질의 사람들에게 ‘사기꾼’ ‘거짓말쟁이’ 등의 비난을 한다면 ‘그 말에 일리가 있을지도 몰라’ 하면서 그 비평에 수긍할지 모르겠다. NT기질은 모든 유형 중에서 가장 자기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의심과 회의를 자주 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에게 ‘무능하다’라는 비평을 가한다면 이는 쉽게 수긍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아킬레스건을 치는 일격이라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이들의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NT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고민과 의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잘 통찰하고 때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이들에게 남겨진 하나의 숙제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QTzine 200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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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와 P ; 일정표는 지켜져야 한다 VS 일정이 변경되면 즐거워진다

수련회를 준비하는 왕J(흔히 선호경향이 뚜렷한 유형들에 우리는 '왕'을 붙인다) 회장의 다이어리는 준비일정, 준비물, 역할분담을 위해서 임원들에게 지시할 것들의 메모로 넘쳐날지 모르겠다. 왕J 회장이 게다가 왕SJ라면 수련회가 다가올수록 체크해야 할 것들이 누구보다 눈에 쫘악 보일 것이다. 그런데 발 빠르게 움직여줘야 할 이놈의 왕P 총무는 회의 때마다 늦기 일쑤요, 지난 회의 때 분명히 지시한 내용에 대해서도 대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식이다. 도대체 수련회 준비를 하자는 것이냐? 말자는 것이냐 우리의 왕J 회장은 총무를 믿다가는 이번 수련회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른다.
한편, 유유자적 왕P 총무. 계속 수련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늘 그랬다. 계속 생각하고 있다가 전날이나 전전날 쯤 이런 저런 확인을 하면 된다. 급히 준비하다가 빠뜨려서 후발대로 오는 사람들에게 열나게 전화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게 또 수련회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회의 때마다 A4 몇 장씩 돌리면서 계획 세우고 체크하고 또 체크하는 왕J회장이 참으로 답답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늘 할 말은 없다. 자신은 회의에 지각했고, 생각해보니 지난 시간 회의 때 준비해오마 했던 것을 까먹은 상태였으니까.
수련회나 단기선교를 같이 한 번 계획하고 준비하고 치러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또는 그녀가 J(판단형Judging)인지, P(인식형Perceivin)인지. J와 P는 생활양식이기 때문에 가까이서 살아보고, 함께 일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생활양식 즉, 일상을 사는 방식이기 때문에 부부 사이, 연인 사이, 함께 여러 일을 해야 하는 가까운 관계에서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은 선호경향이다.
왕P가 왕J를 만나서 함께 수련회 한 번 할라치면 시집살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J들은 늘 계획해야 하고. 계획한 것을 추진해야 하고, 시간 안에 계획된 모든 것을 마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P들은 계획 자체가 부담스럽다. 일이란 모름지기 융통성을 가지고 과정을 즐기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계획이야 언제든 변경될 수 있는 것이고, 갑자기 일어나는 그런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인생의 맛이라고 생각하는 P들. 이런 왕P와 함께 일해야 하는 왕J는 빠뜨린 준비물 챙기기부터 시작해서 뒤치다꺼리와 더불어 계획대로 하지 않는 P들의 유유자적함에 스트레스 받아서 쓰러질런지도 모른다.
이러다보면 극단적으로 J의 눈에 P들은 '불성실하고 덤벙거려서 같이 일하지 못할 사람'으로 P들에게 J는 '꼼꼼하다 못해 쪼잔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 서로에게 낙인이 찍히게 되지는 않을까?

앞의 세 가지 선호유형에서 그렇듯이 문제는 '다르게 생겨 먹은 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J와 P 사이 갈등해결의 출발인 것 같다. 분명한 것은 J와 P의 이 생활양식이 그 사람의 인격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함께 일하고 함께 지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의 스타일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것! 그렇게 쪼잔한(그러나 꼼꼼한), 그렇게 덤벙대는(그러나 융통성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다면 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J라면… 헉! 계획표와 일정표대로만 돌아가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어찌 숨을 쉬고 살겠는가? 반대로 모두 P라면? 으∼ 그 정리되지 않은 책상들과 미뤄진 일들, 빠뜨려 잃어버린 물건들… J들이 있어서 수련회 준비는 계획되고 추진되고 방향성을 가지고 치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P들이 있어서 펑크 난 수련회 프로그램이 신속하게 대체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일정이 조정되기도 할 것이다.


P와 J를 위한 의사소통 방식
1. P는 J에게 : J와 대화하기 전에는 의사결정을 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J와
함께 일하면서 어떤 일을 계획했는데 만약 일정을 변경할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미.리.알려 주라. J들은 다가올 상황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준비하기를 원한다.
2. J는 P에게 : P와 어떤 일정을 정할 때는 J 자신의 시간표보다 여유있는
시간배정을 하라. P들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연성 있게 대처하는 것을
자연스러워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P와 함께 일할 때는 마지막 순간에 변경
사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

<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12월호


T와 F ; 인정머리 없지만 공정한, 주변머리 없지만 따뜻한

모임의 한 자매가 머리를 새로 하고 왔다. 누가 봐도 이번 파머는 좀 아니다.
뭔가 사람들의 반응을 기대하는 그녀에게 한 마디 해줘야 할 텐데….
나름대로 신경 써서 반응하는 두 사람을 보자.
F형 : (조금은 당혹스러운 듯, 그러나 애써 그렇지 않은 척, 쭈뼛거리며)
'어?…머리했네! 어…언제 했어? 음…괜찮다. 성숙한 느낌이 드네~'
T형 :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어? 머리했어? 야! 나이 들어 보인다야~.
지난 번 머리가 훨 낫다. 담부터는 이 파마 절대 하지 마라!'

F형 T형 모두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언제든 사람을 돕겠다는 의지가 충천하며 지체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 한다. 그렇게 볼 때 위의 두 반응 모두 '새로 머리를 한 자매를 위.해.서. 마음을 쓴 반응들'이라 볼 수 있다. 마음은 같은데 반응이 어찌 이렇게 천지 차이일까? 두 사람의 변을 들어보아야겠다.

F형 : 물론 제가 봤을 때도 머리가 확실히 아니었죠. 그런데 그건 자기가 더 잘 알겠죠. 설령 모르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해요? '너 안 예쁘다' 하는 소리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딨어요? 예쁘게 보면 또 예쁜 거죠. 뭐∼

T형 : 아∼ 그건 제가 사람들을 아끼는 방식입니다. 진실을 가르쳐 줘야죠. 안 어울린다는 것을 알아야 다음번에 또 그렇게 하지 않죠. 진실이 중요한 겁니다.

감정형(Feeling)의 사람들의 관심은 '사람, 내지는 관계'이다. 객관적인 사실 자체보다는 어떤 사실이 사람이나 관계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서 빨리 느끼는 사람들이다. 반면 사고형(Thinking)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판단하는 방식이나 근거는 '사실 또는 진실'이다. 상황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편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필요, 특히 정서적 필요를 빨리 알아차리고 공감을 잘 해주는 감정형(F)의 사람들은 모임을 따뜻하게 하고 기름지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지, 공평하지 않은지를 빨리 알아차리는 사고형(T)의 사람들은 모임의 방향성과 틀을 잡아가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정도를 지나칠 때인 것 같다.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이 많고 그 필요를 채우겠다는 의지 충천한 감정형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주변 사람들을 간섭할는지 모르겠다. (특히 S이자 F인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반면, 자신의 유형에 너무나도 충실하기만 할 뿐인 사고형은 바른 말 하기 좋아해서, 자신의 바른 말에 상처 받는 영혼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F들이 더 상처받기 쉽다!)

가끔 예수님은 MBTI로 어떤 유형이실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말이다. 유대 지도자들과 서슴없이 논쟁에 임하기도 하고, 또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분명하게 진실을 인식시키시는 예수님을 보면 영락없는 사고형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반면, 길 잃은 양 같은 가난한 무리를 보며,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한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모습을 통해 감정형의 또 다른 전형을 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감정형들에게도 본이 되고, 사고형들에게도 본이 되신다.∧∧

공동체 안에 사고형과 감정형을 함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섞어 놓아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발생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데 말이다. 각각이 자기 기질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공동체를 섬길 때 예수님이 섬겨주신 그 섬김을 조금은 흉내 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고형들끼리, 감정형들끼리, 끼리끼리 모여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 인격의 반쪽 밖에는 닮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다. 서로의 스타일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때로는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를 온전하게 할 뿐 아니라 나를 온전하게 하는 길일 것이다.

<MBTI와 공동체 세우기> QTzine 11월호

S 와 N ; 코드가 안 맞는데어떻게 같이 가냐고요?

그룹성경공부 시간에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속 시원하게
이렇게 한 번 해대고 싶다. “주제가 있으면 주제에 맞게 얘기해야지 도대체 뭔 뜬금없는 소리야? 늘 저렇게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니, 도대체 앞 뒤 말의 맥락이 있어야지 말야,
참내! 그리고 갑자기 웬 비약? 정확한 근거라고는 하나도 대지 않구 말이야.
맨날 말끝마다 우리 청년회의 비전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플랜'이라곤 없어요.
머리를 구름에 쳐 박고 사냔 말이야! 아으~ 저렇게 현학적인 인간들, 딱 질색이야!”

당신이 그러고 있는 사이 그 현학적인 인간은 속으로 이렇게 해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저렇게 맨날 영양가(의미)도 없는 정보쪼가리만 나열하고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아귀를 맞춰보겠다는 거냐? 세상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어떻게 늘 현실성, 실용성만 따지냔 말이다. 말끝마다 매뉴얼 매뉴얼 하는데 도대체 인간이 '철학'이라곤 없어요, 참내! 그리고 어떤 주제가 나와도 다 끼는구먼.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 가지구. 크게 멀리 좀 보고 살으셔, 좀∼”

MBTI의 두 번째 지표인 감각(S: Sensing)과 직관(N: iNtuition)은 환경을 지각하는데 사용하는 렌즈라 할 수 있다. 즉 '환경이 어떻다면 우리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하는 문제로서, 감각 혹은 직관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의 차이를 말한다. 융(Jung)은 이러한 감각/직관에 의한 지각의 기능을 '비합리적'이라고 설명했는데, 그것들이 우리의 의식적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감각을 활용해 지각하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직관을 활용해 지각을 한다는 것이다.
오감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S(감각형)들은 자연스레 사실적 정보들을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또 자신이 가진 실제적 정보들을 삶에 활용하려고 할 것이고, 그러는 만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이 탁월할 것이다.
반면, 직관 내지는 육감으로 정보를 모으는 N(직관형)들은 여러 사실들로부터 '통찰'을 얻어내기를 좋아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사실적 표현보다는 암시적,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붉은색 장미를 보고 감각형들이 장미의 색깔, 향기, 부드러운 꽃잎을 먼저 지각한다면, 직관형들은 그 붉은 장미로부터 연상되는 그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다보면 (나머지 세 지표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도대체 감각형과 직관형 사이에 교집합이라곤 없다. 일의 '실용성'만을 따지는 감각형 회장과 어떤 것의 '의미'에만 몰두하는 직관형 총무가 마주 앉아서 청년부 수련회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고 치자. 수련회의 주제나 목적을 토의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픈 직관형과 개개 프로그램을 쌈박하게 짜 보고 싶은 감각형 사이에 언뜻 보아 교집합이 있느냐 말이다. (흔히 감각형은 '땅의 언어'를 말하고 직관형은 '하늘의 언어'를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적당히 타협하는 방식을 체득했기 때문에 내 보기에 옳아 보여도 끝까지 주장하지는 않는(못한)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서두에 있는 독백을 삼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으∼ 정말 이 인간하고는 코드가 안 맞아!!'
잘 대화하겠다는 선한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과의 대화가 자꾸 미끄덩거리면서 교차점이 찾아지지 않는다면 의심해 보라. 혹 '지각하는 방법이 다른가?' 즉, 감각으로 지각하는 코드와 직관으로 지각하는 코드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코드가 안 맞는 감각형을(직관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서두의 독백을 다시 한 번 힘차게 내뱉으며 돌아설 것인가? 열쇠는 이것이라 생각된다. 무.의.식.적.지.각! 상대방이 지각하는 방식은 내가 지각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답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감각형 독자들이 들고 일어서려나?∧∧) 해서 '코드가 맞지 않음이 당연한, 창조의 원리'를 인정하고 들어갈 때, 두 유형 간에도 상생의 가능성은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조금만 배려해 준다면 우리는 '숲도 보고 나무도 보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감각형은 직관형과 의사소통할 때 '일의 의미, 가능성'에 대해서 설명해 줄 것!
직관형은 감각형에게 더 많이 '구체적인 예'를 들어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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